8. 통일신라 불교의 출발과 감은사/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진정한 의의
1)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의의
2) 통일신라 불교와 원효대사
3) 감은사/고선사 삼층석탑의 진정한 의미 - 거석신앙에서부터 출발한 석조예술의 일관성 획득
4) 통일신라인들이 삼층석탑을 만든 이유
5)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이 갖춰야 할 품격
5)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경주 동쪽 진출로 / 동해로 이어지는 길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고선사탑과 감은사탑
(2) 석탑의 선후를 판단하는 근거들
(3) 고선사탑과 감은사 동서탑의 차이점
(4) 3탑의 선후를 가르는 주요한 논점들 - 어느 탑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까?
(5)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들이 갖춰야할 품격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 내가 좋아하는 700년대 탑을 보고, 그 연원을 찾고,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고자했던 욕심이 아무래도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이끈 문무왕은 한무제나 당태종 혹은 청의 강희제보다, 진시황이나 청태조 누르하치에 가까운 인물이다. 즉 이민족에 대한 정벌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정복군주로 군림하는 목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문화, 같은 혈통의 난립을 봉합해야할 목적이 더 우선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 이전의 한반도는 통일된 제국에서 분단되었다가 재결합한 게 아니라 최초의 통합이었다. 당연히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정체성의 일통이 국가적 과업이었고, 문무왕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불교를 통해 그 토대를 형성, 이후 경덕왕까지 통치체제 정비와 만파식적의 설화, 그리고 석탑과 불탑 조성 등을 통해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런 시대정신을 석탑양식의 정립과 변화에 녹여 살펴본다는 게 그리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이 생각이 다시 보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이 깊게 보게 되면 또 다른 수정과 변화를 거치게 될텐데, 그리고 어떤 결론에 이를지 모르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고 아름답다고 보는 기준을 가지고 참이라 강요하면서, 게다가 석탑 하나를 매개로 이 모든 시대정신을 포괄하려 하고 있으니 한편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고, 또 한편 겁도 나고...^^ 물론 그렇다고 시작했던 이야기를 놓고 싶은 마음은 없다. 게다가 지금 아니면 언제? 라는 생각이 자꾸 조급증만 생기니 어거지로 짜내야 하고, 그러다보니 글은 투박하고, 중복되고, 또 두서가 없음에도 멈출 수는 없고... 아무튼 시대정신과 석탑의 양식적 변화 추적을 오락가락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읽는 분들이 제대로 맥을 짚고 쫓아 와야만 하는 고충이 심하겠지만, 부족한 걸 어찌 보완할 방도가 없다. 이해하시길 부탁드리며 계속 이어가 본다...
(1) 경주 동쪽 진출로 / 동해로 이어지는 길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고선사탑과 감은사탑
아무튼 이제 다시 삼층석탑의 괘도로 올라섰다. 먼저 이 탑들의 비중과 해당 지역에 대해 잠깐이라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은사지 삼층쌍탑과 고선사탑은 귀족이나 왕실의 원찰정도의 비중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주도한 기념비적 성격을 가진 탑이라 생각한다. 요즘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발인하는 장례나 표창이 아닌, 국민장이나 대한민국 최고훈장의 격을 갖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문무왕 사후 1년이 지난 682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감은사탑은 문무왕의 유지를 신라전역에 선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원효가 주석했던 고선사의 탑은 미타신앙의 본산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들 탑의 규모는 나원리와 죽장리, 그리고 충주 탑평리에서 오층/칠층으로 시도가 되기도 했고, 삼층으로는 석남사에서 유일한 도전이 있었지만, 그만한 크기의 삼층석탑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후대의 탑들은 유래가 전승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흔적만 남겼을 뿐이다.
<감은사지 전경... 무얼 보러왔을까? 말하고, 말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차이만 있을 뿐... 애초 삼층석탑이 말하려는 건 없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 비중에 걸맞는 상징으로 탄생한 게 바로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인데, 후대의 탑들이 두곳의 탑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이유에는, 더 깊은 뜻이 추가되어 새로운 위상으로 승화됐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①하나는 300여년 가까이 적대적이었던 나라(특히 백제)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권위와 포용의 상징이 그것이니, 이는 같은 동이족이면서 한자문화권을 공유했던 이들과의 문화적 전통을 확대해 복원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선택한 것이 거석신앙을 불탑으로 승화시킨 석탑이었다는 점이다. ②두번째는 확대된 불탑의 정체성을 양식적으로 완결시켜야 했으니, 그것이 석재로 만든 삼층석탑이었고, 이때부터 우리민족은 무언가를 염원하고 기념할 때 늘 탑을 쌓게 되는 효시가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어딘가에 자물쇠를 채우고, 일본인들이 종이를 접어 줄에 묶고, 유럽인들이 연못에 동전을 던지듯 우리는 작은 돌들을 쌓았다. 마음속에 자연속에, 그리고 그곳에... 나는 그 출발이 감은사/고선사탑이었다고 생각한다.
<홍콩에서...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황대선 도교 사원이었던 거 같은데... 불교사원이든 도교사원이든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는 정성을 다해 기원한다. 그곳의 주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어떤 상징을 통해 염원하면, 훨씬 자신의 기원과 정성이 오래간다고 생각한다...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는 재일지라도...>
<황산에서 열심히 사진찍고 있는... 나를 보지 마시고, 아래쪽 자물쇠통들을 보시라는...^^ 중국인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줄만 쳐 있으면 자물쇠를 채우며 빈다... 경쟁하듯이...>
<일본 헤이안 신궁에서 햇살이... 그리고 언제부턴지 일본인들은 이렇게 종이에 자신의 염력을 담아 묶었다...>
<로마 트레비 분수에서... 그리고 여기서는 동전을 던진다... 물론 나도 던졌고, 또 한번 던질 수 있었고...^^>
<청평사에서... 그리고 우리들은 작은 돌탑들을 쌓는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햇살이도 쌓았지...>
③세번째로 677년 일단락된 전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는 당나라의 위협과 발해의 성장, 그리고 일본의 구축은 통일신라의 대외적인 긴장을 대변했다. 즉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정립은 아직 계속된 것이다. 이에 모든 것들은 한차원 높은 단계로의 통합을 요구했고, 통일신라는 원효/의상 등을 통해 사상적으로 보다 궁극적인 완결성을 추구하면서,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상징을 해당공간에 조성하니 그 출발이 감은사/고선사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 통일신라에 가장 큰 위협은 당나라나 발해보다 일본이었고, 문무왕부터 수십년간 이에 대한 의지의 표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선림원지 동종 재현품/진천 종박물관에서... 신라종 - 한국종의 특징 중 하나는 용뉴다... 그리고 혹자는 저 용뉴가 김유신과 김춘추가 선물한 만파식적의 상징이라 말한다... 피리를 불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악기니까...>
이 부분을 조금 더 부연해보면, 사실 이 두 탑이 있던 곳을 이으면 동해바다에서 경주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가 된다. 때문에 경주에서 토함산을 넘는 길은 왜적의 침투로가 되지만, 신라의 해양진출로이기도 하다. 물론 백제 같은 해양제국이 아니었던 신라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일본의 침투로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되며, 이를 방어하기 위해 경주시내에서 동해로 나가는 길목에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산성유구가 남아있다(보문삼거리 일대는 북천 상하로 소금강산과 토함산 끝줄기 야산이 맞물려 호리병 같은 지형을 만들고, 이런 지형적 여건을 활용하여 만든 게 지금의 산성지구라 생각한다). 이런 비중 때문인지 경주 동쪽 토함산에서, 문무왕이 묻히고 김유신과 태종무열왕의 염원이 만파식적으로 부활한 대왕암까지 이르는 길목에는 7~800년대, 경주시내를 제외한(북,서,남쪽과 비교하면) 가장 많은 사찰(27곳)이 들어서게 된다.
<경주 동쪽... 지도에 표기한 2번 고선사지와 4번 천군리 삼층쌍탑 사이를 지나 경주에 들어가려면 보문삼거리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천혜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시설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아래쪽의 산성지구다... 울산과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 확장되지 않았을 600년대 후반, 그길은 동해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내가 가본 곳들만 표기했다 ; 1-감은사지, 2-고선사지, 3-장항리사지, 4-천군리사지, 5-마동사지, 6-불국사, 7-원원사지, 8-무장사지, 9-석굴암, 10-영지석불, 11-숭복사지, 12-감산사지, 13-골굴암, 14-기림사, 0-보문사지...>
감은사를 거쳐 고갯길이 시작되는 북쪽에는 기림사, 골굴암 등이 있고, 다시 장항리 오층석탑을 지나 고갯길 정상쯤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불국사, 석굴암이 있고, 북천 상류에 해당하는 지금의 보문호를 향해 경주로 들어오면 천군리 삼층쌍탑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침투로를 기준으로 조금 더 살펴보면 700년대 전반, 경주 남산과 토함산 사이에서 외동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개발됐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일본군들이 울산과 부산에서 경주로 들어가는 경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길목에는 원원사탑을 비롯 울산(울주)의 간월사지 삼층쌍탑과 청송사지, 석남사 삼층석탑 등을 세웠으니, 이 역시 나라의 안녕기원과 승전의 기쁨, 그리고 전몰장병들에 대한 추모의 의미를 석탑으로 남긴 게 아닌가 생각된다.
<700년대 전후 감포와 울산방향에 조성된 석탑 분포도... 장항리탑이 만들어진 비슷한 시기에 이 길목의 감산사에서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조성됐을 뿐, 위 탑을 제외하면 700년대 이 지역에는 석탑조성이 거의 중단되고, 800년대 들어와서야 숭복사지 삼층쌍탑과 감산사 삼층석탑 등이 만들어진다. 760년 일본의 침략포기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1-감은사 삼층쌍탑, 2-고선사 삼층석탑, 3-장항리 오층석탑, 4-간월사지 삼층쌍탑, 5-석남사 삼층석탑(대), 6-청송사지 삼층석탑...>
<망해사지에서... 간월사지에서 조금 위쪽으로 가면 망해사지가 있고, 800년대 중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주변의 탑들처럼 당당하고 단호한 느낌의 수작들이다...>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후대도 그랬겠지만 신라 문무왕을 위해 백제 석공들이 감포 앞바다에 감은사 삼층석탑을 세운 이유가, 본토 수복과 백제의 부흥을 꾀하려는 일본=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상징적 의지의 표상이었고, 토함산을 넘어 그 길이 끝나는 고선사에 원효가 주도했거나, 원효를 기린 삼층석탑을 세운 이유가, 백제의 미륵정토가 아닌 신라의 극락정토를 장엄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감은사/고선사탑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탑이면서 불교의 상징을 뛰어넘는, 정치적 의도 때문에 조성되었지만 그보다 한차원 높은 의미를 지녔기에 여전히 생명력과 신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그 오랜 세월, 만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버텨올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자꾸 감은사/고선사탑의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 이유는 여기 있다.
<감은사 동탑... 저 기운을 다 담을 수 있을까?>
(2) 석탑의 선후를 판단하는 근거들
이제 이야기를 돌리면 남는 문제는 고선사탑과 감은사탑 중 어느 것이 더 먼저냐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점이 관심 없는 분들에게는 호사스럽고 진부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오랜 관심 중 하나였다. 똑 같은 크기에 똑 같은 양식과 결구, 게다가 부재의 수도 똑같다. 그럼에도 다른 점들이 있고, 그것은 가람배치나 부재의 결구방식에 그치지 않고 미감의 차이까지 가져온다. 왜 그런지 알고 싶고, 여기에 최초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싶다는 호승심도 있는데다, 서로가 먼저라고 주장만 팽배할 뿐 본격적인 논의는 적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의 우리들은 최초와 모방을 구분하여 모방품은 저작권 침해같은 범죄로 딱지를 붙이며 경계하는데, 그런 오해 정도를 풀어야 어느 탑이든 가치가 훼손되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러 자료들은 모아 모아서 간단하게 메모한다는 생각으로 정리해 본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최초와 모방을 이야기할 때 늘 연상되는 게 이 탑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 이 탑을 봤을 때 머리로 이해하려 했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다시 눈을 뜨고 봤을 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정연하고 장대하고, 그러면서 의연한... 그런 느낌의 오층탑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건데...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을 말할 때 누가 누구의 모방이라는 말이 싫었다... 고민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탑의 선후를 판단할 때 흔히 접근하는 방식은 세가지다. 하나는 탑 자체의 양식을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탑이 조성된 사찰의 가람배치를 통해 시대를 추정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기록에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탑의 미감과 체감을 좌우하는 시대적 요구라는 배경이 깔려 있고... (1)기록에서부터 시작하면 감은사탑은 분명한 기록이 있다. 문무왕 사후 1년, 즉 682년이다. 문제는 고선사탑... 사실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감은사쌍탑과 똑같이 생겼음에도 고선사탑의 기록은 없고, 원효가 말년에 주석했던 곳이 고선사라는 점과 686년 혈사라는 곳에서 입적했다는 기록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후대사가들의 시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고선사탑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무튼 기록만으로보면 고선사탑이 감은사탑보다 이르다는 주장은 없고, 다만 조성 하한선은 멀리 잡아도 686년에 1년 정도를 더한 687년이 될 것이라는 말만 있다.
<고선사탑...>
그런데 고선사탑이 문무왕을 기리기 위한 감은사탑처럼, 꼭 원효가 입적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한 탑이었겠는가가 문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①만약 고선사와 혈사가 다르다면 원효의 입적을 추모하기 위한 탑이 고선사에 만들어져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 ②고승들의 승탑이 시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원효를 기린 탑이 입적 후에 만들어져야할 사상적 흐름도 없기 때문이다. ③게다가 고선사는 당시 통일신라 불교계를 주도하던 미타신앙의 본산 같은 역할을 했다면, 고선사탑은 원효의 입적과 무관하게 이미 만들어져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2)고선사지의 가람배치는 ‘학해불교(공간10/한국불교역사5/2011년5월 참조-2년전 글이니까 지금과 다른 점들은 적당히 이해하시길...^^)’가 주도하던 2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아닌 1탑 1금당으로 오히려 고식(古式)에 가까우면서, 다만 병렬적으로 배치된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법륭사 서원 가람배치도... 그러면 이제 고선사지의 가람배치를 조금 더 생각해 볼까? 그 비대칭의 조화에 대해서 말이다... 일단 법륭사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듯... 시대도 큰 차이가 없고 해서...>
<일본 국분사 가람배치도... 일본에도 탑원과 금당원이 회랑으로 구획된 가람이 있다... 고선사와는 반대방향...>
<고선사 가람배치도/박보경 논문에서... 고선사의 가람배치는 이 전 글에서 살펴봤고... 단, 저 넓은 탑원에 고선사탑 한기가 불쑥, 혹은 진중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상상을 해봤으면 하는 생각에서...>
<불국사 가람배치도... 학해불교의 총화라 생각할 수 있는 불국사의 가람배치는 통일신라불교의 복합적이면서도 통섭적인 성격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위쪽의 관음전, 비로전 영역을 빼고,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만 보면 고선사지와 흡사하다... 다만 극락전은 고선사와 달리 더 낮게 배치했다... 비대칭이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을 수많은 장치를 불국사는 담고 있다...>
<법륭사 서원 가람 입면도... 법륭사도 전체적인 평면은 좌우가 완전한 대칭이지만, 입면은 이렇게 비대칭이다..>
<불국사 가람 입면도... 이 도면은 6~70년대 불국사를 복원할 때 사용하던 도면인데, 전면만 그려져 있어 아쉽지만 불국사 입면의 비대칭성을 잘 보여준다... 자하문과 안양문 사이의 누각은 현재 다양한 설이 있는데, 나는 자하문 우측이 좌경루이고, 안양문 좌측에도 또 하나의 경루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중앙에는 단층이 아니라 목탑형식의 종루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입면도 아래쪽의 평면을 자세히보면 양쪽에 누각건축이 들어설 수 있는 튀어난 공간이 있는데, 불국사 복원에서는 이 비대칭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안양문 좌측 경루는 결국 복원하지 않았다...
또한 예전에 썼던 '공간'이라는 글에서 신라의 가람배치까지 다뤘다면 생략했을텐데, 대웅전 앞의 2탑은 탑중심 신앙의 변천도 있었겠지만, 여전히 탑이 강조된 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석탑이 되면서 높이와 규모를 상실한 대신, 2기의 탑으로 대체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불교가 완전히 금당 중심으로 재편된 때는 2탑이 1탑으로 변경된 이후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록은 명확하지 않지만, 가람배치의 양식을 따져보면 고선사탑이 감은사탑 보다 앞설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나? 물론 670년대 전후 사천왕사나 망덕사 등에서 이미 4탑이나 쌍탑이 조성됐다는 기록까지 떠올리면 이야기는 더 복잡해진다. 그런데 만약 이런 식으로 두탑의 선후를 찾는다면, 나는 내가 말했던 주요한 전제를 부정하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정림사탑이 미륵사탑보다 앞섰다고 주장하는 이유나, 탑리리탑에서 어떻게 갑자기(!) 감은사나 고선사탑이 만들어질 수 있겠냐는 의문에 대해, 모든 변화와 발전은 결정론적으로 흐르지 않고 복잡다단하게 흘렀다는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실임에도, 우리들은 겉으로 보이는 형식과 양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스스로 부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돈오(頓悟)를 강조하면서, 나 역시도 연기(緣起)에 집착(執着)하는 미망(迷妄)이 빠져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 말이다...^^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679년 문무왕대 만들어진 사천왕사에는 4기의 탑이 있었다...>
<녹유 사천왕상 전/경주국립박물관에서... 녹색 혹은 흑갈색 유약을 바른 소조 사천왕상은 목탑 기단부, 계단 옆에 붙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를 만든 이가 양지스님이다... 양지의 정교함과 세련된 솜씨 때문에, 감은사탑의 사리함 역시 그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기록 역시 많은 상상의 단초들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것은 (3)현재 남아있는 탑 자체의 구조와 결구, 즉 양식을 통해 판단하는 것뿐인데, 여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감은사 쌍탑과 비교하여 고선사탑이 복발과 앙화를 빼고도 44cm 높을뿐(지대석 높이를 제외하고 10m16cm로 감은사 동탑 9m72cm보다 높고, 지대석 높이를 대략 30cm씩 잡으면 모두 10m가 넘는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지대석 폭은 고선사탑, 감은사 동탑, 감은사 서탑 세기의 편차가 최대 7cm(3탑의 평균길이가 6m73cm임을 감안하면 오차는 ∓ 4cm다)에 불과하고, 탑의 각 부위를 23곳으로 세분하여 비교하면 약간씩의 편차가 있지만, 하층기단 중대석과 갑석 괴임, 상층기단 부연과 갑석, 괴임 등의 높이를 비롯해 노반의 폭까지 똑 같은 치수로 가공된 부분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3탑(이제부터는 고선사탑, 감은사 동탑, 감은사 서탑을 구분하여 부르기로 한다)의 구조와 결구를 확인할 수 있는 부재의 수가 고선사탑의 복발과 앙화를 제외하면 82개로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실측치 비교표/박보경 논문... 부재수와 세부 실측 치수가 있다... 여기에 빠진 치수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 자료(1994,2001,2003,2004년) 등이 있어 확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나의 추론이 형성될 수 있는데, 이들 3탑은 한사람의 주도하에 만들었거나, 동원된 석공은 다르지만 똑 같은 설계도면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3탑의 구조적인 조화와 비례, 그리고 안정성 및 균질한 미감 등 이들 탑의 구조와 완성도는, 탑 조성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이 눈썰미만으로 모방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기존 석탑들의 장단점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림사탑은 확인할 수 없고) 미륵사탑-왕궁리탑의 내부 구조에서 목탑의 심초석 방식(미륵사탑/왕궁리탑에서 사용했던 방식이다. 그리고 이들 답의 사리구는 심초석에 있었지만, 고선사/감은사탑 사리구는 3층 몸돌로 위치를 바꾼다)을 완전히 석탑식으로 변형한 적석식으로 구조를 변경했다(이때부터 기단부의 부재는 탑신의 하중을 구조적으로 떠받는는 구조가 된다. 탑리리탑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구조다). 이런 경험들이 일관되게 관리되었기 때문에 황복사탑 같은 정형화된 삼층석탑 양식이 곧바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왕실 주도하에서 경험 많은 백제)석공들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하여, 경주에 정착시켰다는 추정의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앞선 글 ‘문무왕’편 참조).
<왕궁리탑 기단부/재 인용... 석탑 기단부는 구조와 관련하여 오랜 숙제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백제는 목탑조성 기법을 그대로 차용하여, 지표식 심초석에 사리구함을 만들고 사리구를 봉안했다...>
<나원리 오층석탑 단면도/NAVER에서... 그리고 통일신라 들어와 기단부 구조는 완전히 달라지고, 아울러 사리구함도 석탑의 몸돌로 올라가게 된다. 목탑의 심대공이 지하에서 지표면으로, 다시 일층이상으로 올라오듯이 말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나원리탑은 한번도 도괴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 감은사탑의 사진을 보면, 왕궁리탑처럼 기단부가 벌어진 사진이 있다... 이것도 완전하지는 않았던 모양... 석가탑에서는 내부 돌 쌓는 방식이 조금 달라지는데, 아무튼 감은사/고선사탑부터 기단부의 판석들은 구조적 기능을 하게 된다... 미륵사탑, 왕궁리탑, 탑리리탑은 외부 마감재 역할 뿐이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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