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통일신라 불교의 출발과 감은사/고선사지 삼층석탑의 진정한 의의
5)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5)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과 품격에 대해...
(5)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과 품격에 대해...
이제 진짜로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차이를 비교해볼까? 사실 이 탑들은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이 갖춰야할 모든 미감을 다 갖춘 가장 완벽한 탑들이다. 안정된 구조에 긴장감이 살아있는 체감, 그리고 각부재가 이루는 조화와 정연함은 어느 탑에도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웅혼하고 장중한 기운까지 담은 이 탑들은 생동감과 위압감까지 갖춘 우리나라 최고, 최상의 탑들이다.
<감은사지... 고르고 골라도 결국 같은 사진을 사용하게 된다...ㅠㅠ 좋으니까...^^>
또한 전편에서 내가 말했던 일층몸돌에 비해 가장 낮고 넓은 기단부를 갖췄고, 일층몸돌의 폭이 기단부에 비해 넓으며, 또한 일층몸돌 높이는 넓이에 비해 작다는 초기 석탑의 특징과 앞으로 변할 양식의 비밀을 갖추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간의 차이를 공감하고 있었는데, 감은사탑에서는 날렵한 기운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에서 위압감을 느끼고, 그에 반해 고선사탑에서는 훨씬 부드럽고 넉넉한 포근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이 미감의 차이가 곧 부재들의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바로 지붕돌의 두께다.
<고선사/감은사탑 지붕돌 높이와 길이의 비례/위 박보경 논문에서... 사실 비례로 보면 대략 2%P 차이에 불과하지만 실제 4~10cm 차이로, 높이만 생각하면 7%P 전후 차이로 작지않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하게 똑같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낙수면의 마감과 함께 감은사탑의 지붕돌은 고선사탑과 똑같은 두께를 가졌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훨씬 날카롭고 예리하다. 이에 반해 고선사탑은 실제 두꺼우면서도 S자 곡선을 사용하여 훨씬 두툼하고 부드럽게 보인다. 즉 고선사탑이 감은사탑에 비해 넉넉하고 부드럽게 보이는 이유는 지붕돌의 두께와 낙수면의 곡선, 그리고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의 두께 때문이라는 생각한다. 물론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에서 고선사탑이 실제 더 두꺼운지 확인은 못했지만, 전각부분의 반전이 깨지면서 길이가 짧게 보이는 것만큼 상대적으로 더 두툼하게 느껴지는데, 이 점 때문에 고선사탑은 감은사탑에서 느끼는 날렵함이 많이 떨어지고 둔중하거나 역으로 훨씬 안정적인 느낌을 들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본다.
<고선사/감은사탑 층급받침 비례표/위 박보경 논문... 그리고 이 차이의 대부분은 낙수면이 아니라 층급받침에서의 차이다... 즉 지붕돌 중 우리 눈에 제대로 보이는 층급받침을 높여 작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기획자의 의도가 살아있다-혹은 숨어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감은사탑 부분... 왜냐하면 우리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은 낙수면이 아니라 층급받침이다... 그렇게보면 무척 실증적인 신라인들임에도 그들의 생각은, 관념적 완결성을 더 우선시 했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보다 더 정돈되게 보이려면 낙수면이 아니라 층급받침을 정중앙에서 나누는 게 맞을테니까...>
그러면 이 차이는 석재를 다듬은 석공들이 선호하는 미감의 차이였을까? 나는 그 보다 이 탑들을 바라보는 거리를 감안, 올려다보는 각도에 대한 착시를 고려하여 지붕돌의 두께를 현장에 맞게 수정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 입장이다. 앞서도 살펴봤지만 평지에 조성된 고선사는 금당보다 높은 정사각형 회랑으로 둘러쌓인 탑원 중앙에 한기의 탑만 배치된 경우고, 산지형 가람배치 양식(불국사 안양문이나 부석사 안양루 같은 문이나 누각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을 갖춘 감은사탑은 직사각형 회랑에 둘러쌓인 금당 좌우에 배치된 경우다. 즉 상상해보면 감은사는 지금의 불국사 대웅전 영역보다 좁은 곳에서 석가탑, 다보탑보다 훨씬 높고 거대한 석탑을 바라보게 조성돼 있었다는 말이 되고, 고선사는 넉넉한 공간에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석탑을 볼 수 있게 조성되었다는 말이다. 그 차이가 아니었을까?
<감은사탑 쪽이 약간 멀긴 하지만 비슷한 거리에서 두 탑을 비교해보면 지붕돌 두께 차이가 느껴지려나?>
만약 감은사지에 고선사탑이 서 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리고 그 반대였다면? 현재의 감은사지에 금당이 서 있고, 회랑이 서 있고, 문이나 누하진입을 강요한 형식의 중문까지 서 있었다면 그 공간은 지금보다 훨씬 작고 좁았을텐데, 여기에 고선사탑이 서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는 훨씬 답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 장중하고 더 묵직한 석탑은 안정감과 근엄함으로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 더 둔중하고 무겁게 느껴져 그 장대한 위압감에 오히려 짓눌렸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공간에 어울리는 높이와 미감... 그건 탑을 먼저 기획하고 가람배치에 적용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입체적이고 완벽한 계획을 마친 이후에 조성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고선사/감은사탑의 낙수면과 탑신석 비례 비교표/위 박보경 논문에서... 낙수면의 두께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비례는 똑같다... 또한 각층 몸돌도 거의 비슷한 비례를 갖추고 있어, 애초 고선사와 감은사 탑을 기획한 이는 차이를 두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아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1층 몸돌이 감은사탑에 비해 고선사탑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동탑을 비교한 경우이고, 서탑은 고선사와 똑같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후대로 내려갈수록 각층 몸돌, 특히 일층 몸돌의 비례는 높아지는데 - 몸돌이 자꾸 높아진다는 말 - 이걸 기준으로 비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굳이 올린다...^^>
즉 좁은 공간을 꽉 채운 답답함을 상쇄할 수 있는 날렵함과 경쾌함을 강조하기 위해 감은사탑의 지붕돌은 가급적 얇고 가벼움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공했고, 넓은 공간을 허전하지 않게 만들 든든함과 안정감을 더욱 살리기 위해 고선사탑의 지붕돌들은 애초부터 두껍게 무겁게 느껴지도록 기획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고선사탑에서는 그런 감흥을 느끼기 힘든 게 분명하다. 주변의 석재들이라도 치워졌다면 상상속 그림이라도 가능하겠지만 쉽지 않고... 그러나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은 딱 그만한 공간에 딱 그만한 크기로, 그리고 공간의 여운을 길게 살리기 위해 처음부터 가람배치와 일체감을 가질 수 있는 미감과 체감을 염두에 두고 지붕돌의 두께 차이를 강조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고선사 가람배치도/ 위 박보경 논문에서... 만약 탑원으로 들어가는 중문이 별도로 없었다면 불국사처럼 금당에서 탑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을 터... 탑돌이가 아니라 회랑에서 탑을 바라보게 됐다면, 감은사나 불국사에서 느끼는 것과는 전혀 훨씬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보였을 것이다...>
<감은사 가람배치도/을유문화사에서... 이에 반해 감은사탑은 회랑에서 바라볼 경우 고선사와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봐야했을테니 장중한 기운은 더 컸을 것이다... 이 탑은 서탑 앞에서 동탑을, 동탑 앞에서 서탑을 바라볼 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갖추도록 기획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만약 회랑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없겠지만, 잠깐 불국사의 가람배치를 통해 통일신라인들이 이렇게 단으로 구획된 산지형을 고집했던 이유를 찾아보면 ; 아마도 풍륜-수륜-금륜 위에 있는 수미산이란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 금륜을 형상화하기 위해 주요 공간은 단을 두어 상하 구분을 유도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불국사는 금륜을 상징하는 축대가 있고, 금륜에 들어서는 안양문과 자하문 계단 밑에는 수륜을 상징하는 연지가 있었을 것이고... 그럼 풍륜은? 산으로 올라가면 항상 구름과 안개가 바람처럼 있을 수밖에 없으니, 산지형이 되면 자연스럽게 풍륜은 해결되는 거 아닐까? ㅋㅋ>
그리고 이런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감은사/고선사탑을 통해 통일신라인들은 그 시대에 갖춰야할 석탑의 미감을 결정하고 표준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앞서 그렇게 길고 긴 설명을 통해 반복했던 시대정신이 녹아든 석탑의 품격이라 생각한다. 즉 이 탑들에는 신라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최고의 가치들을 포괄해야 했다. 더욱이 원효와 의상을 통해 이제부터 정립되어갈 통일신라의 화엄신앙은 기존의 대중적이고 친밀한 자애로운 부처보다, 근엄하고 완벽한 자비의 미소를 지닌 부처상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여기에 동이족의 전통까지 확대복원하면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되어야했고, 이는 불탑의 신성을 제고하면서 양식적인 변화를 촉진하게 된다.
<감은사탑을 만들고 가람을 배치한 기획자/감독자는 처음부터 이런 느낌으로 감은사탑을 보도록 유도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2층 낙수면이 보일랑 말랑 하는 그 곳... 감독자는 그곳에 앉아서 최상의 기운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이에반해 고선사탑은 이렇게 조금 거리를 두고 봐야 제 맛이 나도록 설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3층 지붕돌 낙수면이 보일듯 말듯한 그곳... 그곳에서 만족을 느꼈을지도...>
나는 이때부터, 공동체를 겨냥하고 정체성을 제고하기 위한 건축과 조각, 그림, 공예 등에는 시대정신이 녹아든 각각의 완결태로 정립되어야했고, 석탑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①맨 먼저 통일신라 석탑은 안정적이어야했다. 외세의 간섭과 위협에서 스스로 안정적임을 증명해야했다.
<안정성... 700년대 이후로 내려갈수록 이 미감은 더욱 강조된다... 특히 기단부를 중심으로...>
②두번째는 정연해야 했다. 흐트러짐없이 꽉 차야만 봉합된 내부는 균열을 일으키지 않으니까...
<정연함... 규모나 비례에 무관하게 통일신라의 석탑은 정연해야 했다...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③세번째는 개념적 혹은 실증적으로 완결적인 모습을 갖춰야했다. 석탑뿐 아니라 불상이든 가람배치든 교리에서도 완벽하고 체계도 해석 가능하며, 양식은 이상적이어야했다. 그래서 모든 구현은 조화와 비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만 했다.
<실증적 혹은 개념적 완결성... 자신들이 믿는 가치를 구현해야만 했고, 누가 보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이상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랬으니 이렇게 용이 쉬어갈 공간도 만들었을테지...>
④또한 이 시기는 장중함을 원했다. 그래서 군림을 증명하며, 포용을 발현해야했다. 위축됨은 없어야했고, 불확실함은 더더욱 배제되어야했다. 권위와 카리스마에는 넉넉한 관용과 너그러운 포용이 함께 통일되어야했다.
<장중함... 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은 무엇보다 장중해야만 했다... 군림과 영광은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어야 했고, 완성된 것이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외부의 긴장이 풀리면서 안정된 시대가 될수록 이 장중함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⑤그리고 마지막, 해양제국 백제를 무너뜨리고 대륙의 강자 고구려를 쓰러뜨리기 위해 신라인들은 초기 로마인들처럼 실용적이어야했다. 그것도 철저하게... 그들이 강소국으로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발판은 경제성과 합리성, 그리고 효율성이다. 감은사와 고선사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 갖춰야 할 안정성, 정연함, 완결성, 장중함, 그리고 실용성까지 갖춘 가장 완벽한 탑이 되었다.
<실용성... 만약 통일신라인들이 이 명제를 가지지 않았다면, 백제의 미륵사탑처럼 목탑형식을 거대한 돌로 만든 불탑을 모방하는데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돌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 규모의 이상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전성기 통일신라를 버텨줄 동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석탑도 딱 그만큼만 컸으면 됐다. 그들의 가치는 100m에 있지도 않았고, 외형적 과시에 있지도 않았다. 33천을 떠 받드는 수미산을 상징할 수 있는 33척 높이(고려척(35cm/척)으로 33척이면 11.55m이지만, 당척(30.3cm/척)으로 33척은 10m다)의 석탑으로 신라가 정토임을 상징할 수 있었으면 충분했다. 그 상징을 삼층석탑으로 구현한 효시이면서, 최고 수준의 품격을 갖춰 완성한 것이 바로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이다.
<고선사탑(국보38호)과 감은사탑(국보112호)은 이 모든 가치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품격을 갖췄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한 석탑으로서 지금까지 사랑받은 게 아닐까? 문무왕대부터 시작하는 통일신라의 전성기...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품위와 격조를 표현 할 줄 알았다... 마음이 곧 형상이 되는 내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탑들이 있어 감사하다...>
<감은사 동삼층석탑...>
'탑여행-趣,美,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라시대 삼층석탑 20> 국보39호 나원리 오층석탑 - 정형화된 양식으로 만든 장중한 미감...1307 (0) | 2013.07.13 |
---|---|
신라시대 삼층석탑 19> 통일신라 석탑 조성순서를 판단하는 기준...1307 (0) | 2013.07.12 |
신라시대 삼층석탑 17> 2) 감은사탑/고선사탑, 어느 탑이 먼저일까?...1307 (0) | 2013.07.04 |
신라시대 삼층석탑 16> 1)감은사탑, 고선사탑의 공통점과 차이점...1307 (0) | 2013.07.03 |
신라시대 삼층석탑 15> 삼층석탑이 만들어질 조건 - 6)삼층석탑이 선택된 이유...1306 (0) | 2013.06.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