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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20> 국보39호 나원리 오층석탑 - 정형화된 양식으로 만든 장중한 미감...1307

 

 

 

 

 

 

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2)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들...

 

 

 

 

나는 앞선 글에서 고유섭 선생에 대해 언급했다. 사실 우리나라 탑파(선생의 용어대로)역사를 다루면서 우현선생까지 건너뛰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다행히(?) 최대한 늦은 최근에서야 선생의 글을 봤으며, 특히 정림사탑을 비롯한 왕궁리탑, 그리고 탑리리탑, 나원리탑과 충주 탑평리탑에 대한 선생의 고민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를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1940년 전후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석탑의 발전과정과 법칙을 감지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에서 겉모습만으로도 선생은 전반적 흐름을 간파해낸 것은 탁월한 업적임이 분명하지만, 양식적인 측면으로만 탑의 선후를 결정하는 것은 비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도 밝히고 싶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양식에 매달리다보면 삼층석탑에 대한 흐름은 비교적 쉽게 판가름날 수 있지만, 조성시기의 상하한선이 넓어져 선후를 판단하기 어렵고, 삼층석탑 이외 부분에서는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첨언하고자 한다.

 

우현선생의 이런 혼란은 결국 미륵사탑과 분황사탑이 만들어진 이후 곧바로 탑리리탑(우현선생은 634~660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설명)이 만들어지면서 정림사탑과 왕궁리탑이 만들어지고, 고선사탑, 감은사탑, 탑평리탑, 나원리탑에서 통일된 양식을 갖춘 完體(완체)가 만들어진다는 가설로 발전한다. 물론 선생의 고민대로 탑리리탑과 탑평리탑의 조성시기에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는 통일신라의 불탑조성에서 왜 오층석탑 양식이 일정기간 지속되다가 삼층석탑으로 전형화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았고, 더불어 의성에 탑리리탑이 만들어진 이유나 구미 죽장리 오층탑 등에 대해 접근할 방도가 없다는 점들이 그것이다. 사실 나 역시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시대상황에서 찾기 위해, 일부러 600년대 전반기와 660년을 전후한 문무왕대 시대상황을 나누어 살펴보면서 고구려/당/백제의 영향력과 불교의 흐름까지 길게 풀어 석탑양식에 접근해왔다. 즉 교통로와 거석신앙, 그리고 당대 불교의 흐름과 석공들의 인적네트워크까지 함께 첨언이 되어야 우리나라 석탑조성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때문에 우현선생의 문제의식에 대해 내 스스로 매듭을 짓고 싶어, 지금까지 기존의 연구성과를 비교분석하면서 논쟁을 통해 나의 가설을 입증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지만, 나원리 오층석탑을 비롯해 통일신라시대의 다층석탑에 대해서는 몇가지 근거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나원리탑을 비롯해 장항리탑과 죽장리탑, 그리고 탑평리탑이 포함될 것이고 아울러 낙산리탑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삼층석탑에 대한 문제는 대부분 정리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들 다층석탑을 포함하여 순서에 따라 살펴보려 한다. 이미 충분히 돌아가고 있어 재미는 없겠지만 조금 더 돌아간다고 특별히 달라질 거 없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1)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682~706년) - 백제석공들이 만든 통일신라 오층석탑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39호...>

 

 

먼저 나원리탑부터 살펴보면, 이 석탑의 조성시기 상한선은 고선사/감은사탑이 만들어진 682년으로 보이고, 그 하한선은 황복사탑이 만들어진 692년 또는 황복사탑에 2차로 사리구가 봉안된 706년으로 보인다. 고선사/감은사탑보다 늦게 조성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①석탑의 부재수가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먼저 3층 지붕돌까지 노반을 제외한 고선사/감은사탑 부재수가 81개인데 반해 나원리탑은 31개다. 이건 엄청난 차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부재가 정돈되었다는 의미를 떠나 보다 큰 의미를 간직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필요한 이음새가 없어지면서 석탑의 괴체성과 간결한 질감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원리 오층석탑...>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부재수 비교표/ 위 박보경 논문에서... 박보경씨는 고선사탑이 감은사탑보다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전제하에서

주석 '124)'를 첨언했는데, 내 생각과 다르다는 점은 앞서 설명했다...>

 

 

 

일례로 고선사/감은사탑의 각층 지붕돌은 각각 8개로 결구되지만, 나원리탑은 1층과 2층에서는 낙수면과 층급받침을 별석으로 가공하여 2매씩으로 정리하고, 3층부터는 한 개의 석재로 낙수면과 층급받침을 가공했다. 그런데 감은사탑 1층 지붕돌 넓이는 4.16m로, 2.08m짜리 석재 2매를 이어붙였지만, 나원리탑은 3.62m나 되는 하나의 바위로 가공했다는 것은, 제작 가공의 편의성과 효율성만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감은사탑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싶었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생각해보라. 마감된 상태가 3.6m가 넘는다면 원소재는 4.3m가 넘는 바위였을 터. 그것도 높이 50cm 전후의 얇게 가공하여 돌리고 뒤집으면서도 이 방식을 고집했던 이유가 가공의 편리함 때문이었을까?

 

 

<나원리탑의 정면과 입면 비교...>

 

<나원리탑 입면도 / Daum 블로그 토함산 솔이파리 / 솔뫼님 자료에서... 이렇게 도면을 파일화해 스크랩할 수 있게 해주신 솔뫼님께 감사드린다...^^ 단, 수치에 오차가 있는데, 도면의 탑신 높이는 7,381mm로 되어 있고, 각층의 높이 합은 7,264mm로 117mm가 적다... 실측과정에서 오차가 있었거나, 인용한 도면을 옮기면서 발생한 걸로 보이는데, 내 생각이지만 일층몸돌의 괴임 높이 때문에 발생하는 착오로 보인다... 즉 도면을 제작하는 기관이나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일층몸돌 괴임은 상층기단부 갑석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실측과정에서 하나로 측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일층몸돌 괴임을 일층높이에 포함시켜 바라보는 경우가 많고... 이를 도면에 옮기면서 발생한 착오로 보이는데, 오차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있어 사족을 달았다...>

 

 

  

 

결국 나원리탑은 맨 위 5층 지붕돌까지 감은사탑보다 큰 석재(폭 2.13m)를 하나로 가공했을뿐 아니라 2층 몸돌부터는 통돌을 깎아 얹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보다 정돈된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미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하나씩 버렸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은 것들이 새롭게 부각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볼륨과 양식, 체감이 완성되면 그곳에 집중했던 시선들이 디테일을 찾게 되고, 그제서야 진정한 미적 성숙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나원리탑에서 부재수, 특히 지붕돌의 부재수가 들어든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원리탑 탑신... 맨 아래 지붕돌의 넓이가 3.6m가 넘는다...^^ 그런데 1층과 2층 지붕돌은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각각 따로 가공돼 포개져 있는데, 1층 지붕돌의 높이가 91cm면 낙수면쪽 높이는 대략 50cm가량이 된다... 생각해보라 3.6m넓이의 석재를 가공하려면 대략 20%가량 넓은 4.3m 넓이의 원석을 운반해서 50cm라는 얇은 두께로 가공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 넓이면 우리집 거실만한(안방보다 넓고!) 바위가 된다... 한쪽면을 가공하고 이걸 다시 뒤집고, 또 끌어 올려서 4.5m 높이에 올린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이었을까?... 

게다가 평활도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요즘 아파트 지으면서 수평 평활도의 법정 오차가 2%임을 감안하면 7.2cm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오차(요즘처럼 시멘트 몰탈로 타설해도 1~3cm의 오차가 발생한다)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그 위로 올라가는 부재는 수직성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석탑의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걸 감수하면서 1,300년이 넘게 석탑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정성과 숙련도의 문제를 넘어선 정밀성과 자신감이 필요했을 터... 당시 통일신라인들은 그걸 해냈다... 또 그랬으니 다음에는 더 작게 만들었겠지만...>   

 

 

 

 

아무튼 석탑조형의 경험이 쌓이면서 훨씬 넓고 무거운 바위를 인양할 수 있는 기술과 방법도 발전했겠지만, 이로써 감은사탑에서 보이는 불규칙한 지붕돌의 이음선이 사라지고, 상부의 자중 때문에 내려앉는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었고, 결국 통일신라 불탑은 나원리탑에 이르러 목탑과 전탑의 결구방식과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롯이 석탑을 위한 석탑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게 된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물론 이 점이 석탑의 한계가 되고 앞으로 변화해야할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즉 구조적 안정성과 함께 미감을 확보하려면 하나의 부재로 가공할 수 있는 최대치가 석탑의 규모를 결정하게 되고, 결국 일층몸돌은 물론 기단부까지 하나의 부재로 만들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 유일한 길은 석탑의 규모를 줄이고, 기단부를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원립탑... 그렇게 세워졌다... 저렇게 거대하게... 만약 상륜부가 살아있었다면, 사진 위쪽 하늘까지 닿았을 터...>

<나원리탑 구조도... 2층과 1층 지붕돌이 2매로 나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만큼 석탑조성 방식은 단순해졌다... 구조적으로 효율적이 됐다는 말이다... 다만 1층 몸돌을 통돌로 가공했다면 화강석의 비중 2.75를 감안하여 31톤 가량의 무게(현재 위치를 감안해 요즘 장비로 31톤 바위를 들어올리려면 50톤짜리는 어렵고, 최소 100톤 용량의 크레인이 설치되어야 했을 것이다)가 되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손대지 못했던 거 같다... 아무튼 고선사/감은사탑보다 훨씬 구조적으로 안정될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된 것이라 봐야할 듯...>

<나원리탑 부분... 지붕돌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저 위가 우리집 안방보다 넓다고...ㅋㅋ>

<나원리탑 기단부와 일층... 그 자중만큼 정중앙 방향으로 눌리게 된다... 하층기단부에 3개의 탱주와 상층기단부에 2개의 탱주가 있고,

일층몸돌보다 낮은 기단부가 초기 형태임을 확인케 해준다...>

 

 

 

 

또한 나원리탑에서는 ②찰주공과 사리공의 위치를 변경하여 고선사/감은사탑에서의 문제점을 보완했다. 이미 고선사/감은사탑 편에서 석공들의 고민을 읽었겠지만, 왕궁리탑처럼 심초석도 사라지고, 고선사탑처럼 2층 지붕돌은 물론 몸돌까지 여러개의 부재가 조합된 구조라면, 사리구를 안치할 수 있는 곳은 3층 몸돌이나 지붕돌 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찰주공까지 함께 만들어야한다는 말...

 

 

<나원리탑 찰주공과 사리공의 위치/토함산 솔이파리, 솔뫼님 자료에서... 앞 자료에서 밝혔듯이 4층 몸돌 두께가 39cm, 3층 지붕돌 두께가 76cm이니, 만약 4층 몸돌에 15cm 이상 높이의 사리공을 뚫었다면 구조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터... 이를 감안해 3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뚫은 것으로 생각된다...>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공 위치도 /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연구 / 한민주 / 동국대학교 석사논문에서... 삼층석탑인 황복사에서는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을 이용해 사리공을 만들었다... 60년후 만들어지는 석가탑에서도 사리공은 2층 몸돌에 뚫리게 되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일층몸돌은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보여진다... 사리신앙과 탑을 법신으로 생각하는 당시 흐름에서 일층몸돌을 가장 신성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석가탑 이후 석탑에 조각장식이 유행할 때도 기단부에는 수미산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새겨지고, 일층몸돌에는 부처가 새겨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참고로, 이 논문은 비교적 최근 논문이고, 황복사탑이 국보인데도 불구하고 사리공 도면은 일본인의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국보를 누가 더 연구하고 많은 자료를 축적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혹시 자료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쪽이 그 대상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닐까?...☞☜>

 

   

 

결국 나원리탑에서는 찰주공을 5층 몸돌에 뚫고 사리공을 한 단계 아래 - 4층 지붕돌에 만들었다. 감은사탑만한 거대한 찰주를 꽂기에 5층 몸돌은 너무 얇았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차선책이었을 것이다. 이 경험은 황복사탑과 동일한 방식(3층 몸돌아래부터 2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뚫었다)으로 이어져, 이후 석가탑 사리공은 2층 몸돌에 안착하게 된다. 고선사/감은사탑에서 발생한 문제를 극복한 또 하나의 대안이 나원리탑(황복사탑과 마찬가지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나원리탑 사리장엄구/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리함과 소탑, 불상과 사리 등이 있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사리장엄구, 사리구, 사리기 등 여러 용어를 묶어 '사리갖춤'이라고 표현한다... 금동탑 옆에 있는 불상을 눈여겨 볼것...>

<황복사 삼층석탑의 사리장엄구/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나원리탑과 비교를 위해 황복사 사리기들을 같이 올린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두 사리갖춤은 양식적으로 만은 차이를 드러낸다... 황복사탑에는 3중의 사리함과 사리외함에는 99기의 소탑이 점선으로 새겨져 있어 다라니신앙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며, 2구의 불상 외에도 다양한 사리갖춤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그 외 기단부가 고선사/감은사탑에 비해 1.3m 정도 좁아지면서 상층기단부가 높아지고, 일층몸돌의 높이/넓이의 비례도 훨씬 높아졌지만 이는 5층탑을 만들기 위한 구조적 비례라 생각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두가지는 나원리탑이 오층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고선사/감은사 삼층석탑보다 먼저 만들어질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왜 나원리탑이 황복사탑 보다는 먼저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5층이기 때문에? 그 보다 ③황복사탑은 1층 지붕돌과 몸돌까지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에, 즉 부재수에서 나원리탑이 5개 많다(나원리탑 31개 : 황복사탑 26개)는 점과 함께 나원리탑 사리장엄구 중 하나인 불상의 양식 때문이다.

 

<나원리탑 사리함/적멸의 궁전 사리장엄/신대현/한길아트/2003년 간... 사리장엄구에서는 이 텍스트의 사진을 많이 올리게 됐는데,

박물관 등에서 찍은 내 사진도 있지만 세부 디테일이 살지 않아서 참고로 올리는 것이니 이해하시기 바란다...>

<황복사탑 사리함/위 신대현 책자에서... 사리외함의 소탑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나원리탑 사리외함 뚜껑의 문양/위 솔뫼님 자료에서...>

<나원리탑 사리외함 장식 사천왕상/위 솔뫼님 자료에서... 있는 자료를 다 올리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주요한 것들은 소개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올린다... 역시 감사를...^^>

 

 

 

익히 알다시피 황복사탑에는 입상과 좌상, 2구의 불상이 안치되었고 이는 692년과 706년에 각각 안치된 미륵여래입상과 아미타여래좌상이다(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의 공존)

. 이에 반해 나원리탑에는 1구의 금동불입상이 있는데 광배를 비롯해 균형과 세련미에서 격이 떨어지는 면도 있지만,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복련의 양식이다. 즉 황복사탑에서 출토된 692년과 706년 각각 만들어진 불상의 복련은 세부양식이 2중 복엽이지만, 나원리탑은 단엽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황복사탑 출토 불상은 불과 14년 시차임에도 양식적 차이를 보이는데, 단엽과 복엽은 양식적으로 큰 편차가 있고 중첩된 연잎이 없이 낮고 부드러운 곡선에 끝이 뾰족한 단엽으로 처리된 나원리탑의 불상이 더 고식(古式)이라 보이지만, 이미 682년 만든 감은사탑의 사리내함 기단부 복련이 복엽이니 편년설정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의 더 문제가 있으니 사리장엄구 중 하나인 ‘무주정광다라니경’이다. 

 

<나원리탑 사리갖춤/국립중앙박물관에서/갈 때마다 전시틀을 바꾸면서 변화를 주니 한 편 좋기도 하고...^^ 상륜부가 완벽하게 살아있고, 3층 지붕돌에는 풍령이 달려있다... 기단부가 단층으로 만들어졌지만, 당시 통일신라인들이 생각했던 삼층석탑의 비례와 상륜부를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높이가 12.4cm고 기단부 넓이가 5cm, 상륜부 높이가 4.6cm로, 앞서 이야기했던 '기단부 넓이 x 2 + 상륜부 높이 = 탑의 높이' 공식을 확인할 수 있다...>

<나원리탑 사리갖춤 중 금동탑과 금동불/위 신대현 같은 책에서...>

<나원리탑 사리갖춤 중 금동불 정면 및 좌우측면도/위 솔뫼님 자료에서... 복련 양식을 황복사탑 출토 불상과 비교하기 위해 올린다...

실제 불상은 사진으로 찍기엔 너무 작다(위쪽에 ↑)...>

<황복사탑 출토 금동여래입상/692년/국보80호/국립중앙박물관에서...

나는 이 이유 때문에 나원리탑이 황복사탑보다 먼저 만들어진 걸로 생각하려 했다...^^>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없이 나원리탑 조성시기를 682~692년 사이라고 단정지어야 하는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으니 사리장엄구 중 하나인 ‘무주정광다라니경’이 검토대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다라니경이 유입된 시기를 당나라 낙양에서 무주정경이 번역된 704년 이후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측천무후가 재위했던 기간이 690~705년 동안이었고, 때문에 다라니 신앙이 704년 이전부터 유행했을 수 있으며, 이미 불탑 사리장엄구로 77, 99 소탑 봉안 등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경주 석장사지 탑상문전에서 소탑 10기가 출토되었고, 나원리탑 사리장엄구에도 목탑과 금동탑 등 5기가 봉안되었으며, 황복사탑 사리함에도 99기의 소탑이 새겨져 있다), 다라니경의 필사본(소탑 봉안을 대신하여 다라니경 필사본 77벌이나 99벌이 그 효용을 대신한다는 이유로 인쇄의 필요성이 촉발 되고, 그 결과 741년 석가탑에 봉안된 무주정광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으로 남게 된다)까지 발견된 상황이니 석탑조형과 사리갖춤 시기를 별개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경 혹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필사본 혹은 인쇄본이 출토된 석탑 목록표/위 한민주 논문에서...

나원리탑과 선림원지탑의 연대 추정은 나와 다르지만, 다라니신앙은 통일신라말기까지 계속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 중 무구정경에 근거한 소탑 발견 목록/위 한민주 논문에서... 탑속에 탑을 봉안하는 이유와 유행하는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내 글짜들... 나중엔 나도 못 알아 먹는다...ㅎㅎㅎ 사리장엄구에 대해 같이 설명하려 했는데 너무 길어질 거 같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한가지만 지적한다면 ; 사리장엄구 혹은 사리갖춤을 만드는 과정에서 금속공예(순금, 금동, 은, 청동 등), 도자기, 나전칠기, 유리공예, 그리고 인쇄술 등이 발전하게 됐다는 점이다... 믿음이 의지를 만들고, 의지가 필요를 만들고, (필)수요가 공급을 늘리며, 공급이 기술발전을 촉진시키게 된다는... 이것도 하나의 역사다...^^>

 

 

 

 

 

물론 황복사탑처럼 처음 조성할 때 불상이 봉안되고 얼마 후 다라니경과 소탑이 새겨진 사리함으로 바뀔 수 있지만(단합으로 만들어진 나원리탑 사리함은 기본 3중(석함→은함→사리병)에서 5중(나전함→유리함→백은함→순금함→침향함), 7중의 통일신라 석탑 사리장엄구의 일반적인 변화흐름에서 벗어났을뿐 아니라 유리병을 비롯해 각종 장신기물이 없다), 이건 논외로 치더라도 이를 무시하고 황복사탑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된다.

 

 

<상자형 사리외함의 시대별 변천/위 한민주 논문에서... 사리갖춤에 대해 언제 글을 올리지 몰라, 참고로 미리 올린다...^^>

<사리갖춤 중 장신기물 분포도/위 한민주 논문에서... 나원리탑은 별도의 장신구들이 봉안되지 않았다... 참고로 이번 기회를 통해 사리장엄과 관련한 동국대 논문과 신대현의 책자 등 여러자료를 봤는데, 송림사전탑의 사리장엄구를 감은사탑이나 황복사탑 보다 앞선 것으로 명시하는 자료가 대부분임을 알았다... 그러나 송림사 오층전탑은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성덕왕 말기에서 경덕왕 사이, 즉 750년 전후에 만들어진 걸로 생각하는 나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나는 수긍하지 않는데, 이유는 다음에...>

 

    

 

 

정리한다면, 나원리 오층석탑은 고선사/감은사 삼층석탑보다 늦은 682년 이후 황복사 삼층석탑보다 먼저 만들어졌거나, 늦어도 황복사탑이 보수 된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는 조성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황복사지와 마찬가지로 고선사지와 동일한 방식의 가람배치였고, 현재 남아있는 노반을 보더라도 감은사탑 방식과 달리 고선사탑 방식의 노반이 조성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때문에 나원리탑은 고선사탑이 조성된 시기와 멀지 않고, 황복사탑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고 보는 게 전후 상황이 맞지 않을까 싶다. 또한 감은사탑이 경주 동쪽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했듯이, 600년대 군마의 출병이 가장 빈번했던 경산-대구로 나가는 길... 경주 동북쪽으로 나가는 길목의 호신장 역할과 함께 기념비 역할을 나원리탑은 담당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원리탑... 가람배치에 대해서는 고선사탑 관련 글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했으므로 왜 탑이 이곳에 위치하는지는 부연하지 않겠다...

아무튼 황복사탑과 나원리탑은 금당보다 높은 부지에 세웠졌다...> 

<나원리탑 부분... 감은사탑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원리탑은 통일신라탑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으며,

아울러 통일신라 초기에 필요했던 장대함과 강직함을 살리기 위한 체감과 미감을 가지고 있다...>

<칼로 잘라낸 듯... ...>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대석이 많이 묻혔다는 점... 야산 바로 옆에 있음에도 생각보다 퇴적량이 적지만,

지대석을 살릴 수 있을만큼 주변 토량을 10cm 이상 걷어내야 훨씬 장중하고 안정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감은사탑과 비슷한 크기와 높이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그 형식이 오층석탑인 것은 백제 석공들의 관성과 거석신앙의 절충이었을 공산이 크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거석신앙의 핵심은 立(입)이지 廣(광)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크고 넓은 돌을 추앙했던 것이 아니라 높고 굵게 솟은 돌을 신성시했던 것이 거석신앙이고 입석신앙이다. 때문에 안정감을 경쾌하게 풀어낸 삼층석탑보다 거석신앙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게 보이는 오층양식을 선택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넓게 펼쳐지지 못해 발생하는 둔중함... 오층이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황복사탑이나 천군리탑이 삼층석탑임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미감을 가지고 있고, 같은 오층석탑 양식이지만 장항리탑은 전혀 다른 미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육중한 느낌의 중후장대한 입석(선돌)같은 미감을 우선 고려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나원리탑... 저 위로 상륜부가 꽉 차 있었다면 또 어떻게 달라질까?... 황복사탑 편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현재의 노반이 뒤집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애초 고선사탑의 노반처럼 안쪽으로 턱이 진 노반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지만, 현재 모습은 상부에 두겁석 같은 게 있을 거라는 전제에서 놓인 거 같은데, 본 미감을 살리려면 노반을 뒤집어 놔야 맞겠다고 생각된다... 물론 찰주공의 넓이까지 확인되면 더 확실할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