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2)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들(690~720년대)...
(3) 경주 장항리 오층석탑 - 성덕왕대, 세련되고 우아한 미감의 시작
<경주 장항리 오층석탑/국보236호... 내 마음을 꽉 채우는 아름다운...>
사실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나 통일신라 석탑의 흐름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제일 곤혹스러워 하는 석탑이 바로 구미 죽장리 오층석탑과 낙산리 삼층석탑, 그리고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탑리리 오층석탑과 같은 양식의 지붕돌과 구조로 만들어진 죽장리탑과 낙산리탑은 정형화된 통일신라 석탑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 뚜렷한 기록이나 사리장엄구 등이 출토되지 않아, 조성시기와 조성위치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할 방도가 딱히 없고, 또한 탑건립과 무관한 사리장엄구(청동거울 등)이 발견된 탑평리탑은 조성양식과 기법에서 다양한 시대의 변천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구미와 충주는 이미 신라의 교통로편에서 다뤘듯이, 의성 탑리리탑처럼 국가의 기념비적 석탑이 꼭 있어야 할 곳임에 분명하지만,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는가는 다양한 설이 있다. 그나마 낙산리탑은 8세기 후반 조탑설이 대세지만, 탑평리탑은 신문왕대(일본 사학자들, 고유섭 선생), 원성왕대, 9세기초, 후삼국설로 나눠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죽장리탑에 대해서는 8세기로만 접근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낙산리탑을 제외한 두탑이 장항리탑 이전시대 혹은 동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양식과 기풍에서 아무리 빨라도 선덕왕(780~785년) 이전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순서를 뒤로 미뤘다. 황복사탑 다음에 만들어진 석탑은 천군리탑을 지나 감은사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장항리탑이 맞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장항리사지 전경...>
나는 이 탑이 성덕왕 집권 전반기인 대략 710~720년 전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성덕왕은 660년 백제멸망 이후 가장 오랜 집정기간인 35년 동안 문무왕-신문왕에서 이어진 통일신라의 기틀을 반석에 올리고 전성기를 구가한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발해의 등장과 함께 당나라와 세력균형을 맞추면서 북방영토에 대해 타협을 이루고, 일본의 대규모 전단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내부의 반란도 완전히 거세하는 등 그의 탁월한 영도로 통일신라는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문무왕의 업적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고선사에서 감은사에 이르는 길에 사찰을 건립하니 그것이 장항리 사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유신과 원효의 업적도 복권되는데, 김유신일가와 원효와 사이에 설총을 낳았던 요석공주의 그룹은 사실상 정권의 핵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었지만 성덕왕에게 그들은 여전히 주요한 정치적 상징적 외피가 되었을 것이다.
<경주 장항리 오층석탑... 1000년을 굳건히 제자리를 지킨 장항리탑이 수난을 겪은 건 1923년 사리장엄구를 노린 도굴꾼들에 의한 폭파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만행이었지... 그나마 1929년부터 부재들이 수습되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장항리사지 석불/경주박물관에서... 그때 파괴된 석불은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몇번의 보수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엔 시멘트로 보수됐던 부분을 재보수하여 이질감을 없앴는데, 수인이 특이하다...>
<장항리사지 석불좌대... 그나마 반파에 그친 석불좌대는 아직 제자리에 남아있는데, 조각 하나하나에 스며든 정성과 세련됨은 이 좌대의 품격을 유감없이 살려주고 있다...>
<좁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곳에 가람을 조성한 것은 답답함을 덜어내기 위한 고심의 결과가 아니었을지...>
사실 장항리탑이 국보로 지정되면서까지 주목받는 이유는 장대한 크기와 미려하고 세련된 미감과 더불어, 통일신라 오층석탑의 완결태이면서 삼층석탑의 양식적 특징을 완벽히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항리탑이후 삼층이상 다층석탑으로 죽장리 오층석탑과 탑평리 칠층석탑이 있기는 하지만,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이전에 만들어진 석탑들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이후 전형화 되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미감에까지 영향을 준 장항리탑은 죽장리/탑평리탑의 영향력에 비할 바 아니라 생각된다. 황복사탑에서 정형화된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은 장항리탑에서 더욱 진일보하게 되는데, 먼저 몸돌에 비해 지붕돌의 비례를 키워 미감을 바꿨고, 두 번째는 노반의 마감형태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세 번째는 일층몸돌의 비례를 높였고, 네 번째는 지붕돌 낙수면의 양식을 정형화하게 된다. 한마디로 미감을 변화시키면서 세부 디테일을 보완했다.
<장항리탑 일층몸돌... 분황사탑에서 시작해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으로 계승되는 감실 좌우의 인왕상은 장항리탑에서 석탑에 맞게 양식화되고, 이후 울주 간월사탑, 화엄사 사사자삼층탑을 비롯해 원원사탑, 창림사탑 등 사천왕상과 여래좌상 등으로 변하게 된다... 최초의 형태다...>
<그리고 일층몸돌의 문비는 고선사탑을 계승한 것으로 문비 하부는 목조건축의 구조적 기법을 그대로 살린 초기 양식이다...>
<가끔 실제 크기를 잊게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그 규모를 쉽게 가늠하지 못하는 이유는 완벽한 비례와 조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광배 부분... 화불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정성이 깃들었다...>
<석불입상 좌대 부분... 우리나라 석불좌대의 사자상 중 가장 익살스러우면서도 생기발랄한 것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이를 조금 더 살펴보면, ①나원리탑에서 황복사탑, 천군리탑까지 이어지는 둔중하고 기름진 미감을, 장항리탑부터 우아하고 경쾌한 미감으로 바꿨다고 생각된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조응한 결과도 작용했겠지만, 사실 둔중하다고 안정감이 배가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둔중할수록 심리적인 거리감이 생기고, 멀어질수록 장중함은 어색함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700년 전후에 석탑을 통해 발현하고자했던 중후장대한 미감을 오히려 해치는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장항리탑은 지붕돌의 두께를 나원리탑에 비해 보강하면서 함께 폭을 넓혔는데, 이로인해 통일신라의 석탑들은 안정감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쾌함과 우아함을 갖추며 보다 미려한 느낌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물론 장항리사지가 위치한 사찰의 터전이 좁고 옹색한 면이 없지 않지만, 2탑구조로 사찰을 꽉 채우면서 주변에 묻히지 않는 장대한 규모를 갖추기 위해 오층으로 기획하면서 보강된 미감이겠지만 말이다.
<토함산 석굴암에서 감은사지로 넘어가는 언덕길 위의 장항리사지 전경... 1929년에 탑재 수습을 위해 조사가 시작됐을 때 완파된 동탑 기단부가 벼랑끝에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장항리사지 가람배치도/Daum 블로그/ 토함산 솔이파리 솔뫼님 자료에서... 현재 자리를 잡고 있는 형태가 원형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되고 있다... 아무튼 옹색하지?>
<당시 통일신라는 나원리탑을 막 조성한 다음이었을 것이다... 초기부터 오층석탑을 기획했다면 당연히 나원리탑의 미감을 그대로 계승했어야 하지만, 좁은 사찰의 영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을 터... 여기에 금당이 만들어지고 쌍탑까지 고민했으니 부지의 효율성을 위해 당시의 건축가들은 고심했을 것이다... 여기에 계곡을 지난 높은 언덕에 묻혔다는 것까지 고려했다면, 자연스럽게 날렵한 미감과 상승감을 위조로 석탑양식은 변경될 수밖에 없었을 것... 주변 자연환경에 조응하는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게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두 기의 쌍탑이 온전했다면, 우리는 지금과 또 다른 규모와 장중한 스케일에 압도 당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②고선사탑과 감은사탑에서 통일되지 못했던 노반을 상부에 2단 층급형식으로 정형화되는데, 그 출발이 장항리탑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자연환경에 비해 깊은 처마를 가진 건축을 선호한다. 무량사 극락전편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석조건축이 발달했던 서양건축은 처마가 극히 형식적이거나 없는 형태고, 황하중류지방 건축문화가 주도권을 잡은 중국건축은 목조건축이라 할지라도 전탑에서 보이듯 처마가 생각보다 짧다. 이에비해 우리와 일본은 처마가 깊은 편이고. 이런 영향은 현대에도 이어져 우리나라의 아파트 최상층에는 항상 벽보다 넓게 돌출돼 보이는 처마 같은 조형물이 있어야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갖고 그런 미감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노반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즉 고선사탑처럼 위쪽이 좁아지면 왠지 완결되지 못한 느낌으로, 감은사탑처럼 두겁석 형식으로 조금 더 넓게 마감되면 뭔가 정리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장항리탑에 이르러 노반은 2단의 층급형식으로 정형화 된다.
< 장항리탑 탑신... 장항리탑에서부터 노반은 2단 층급형식으로 바뀐다... 다만 5층 - 최상층 지붕돌 위의 괴임이 3단으로 돼 있는데, 세부도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감은사탑 노반처럼 괴임의 1단을 노반에 추가했거나, 5층이란 층고를 고려하여 노반의 높이를 낮추고 층급형식을 추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이런 이유 때문인지 장항리탑은 노반이 가장 낮은 석탑 중 하나다)>
<그러나 가까이서 올려보면 5층 지붕돌 괴임은 보이지 않고 노반만 보인다... 아마도 노반의 높이는 이런 시선의 각도와 적정한 거리를 감안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장항리탑을 바라보는 가장 적정한 거리는 어디쯤일까? 쌍탑의 경우 서로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일 수 있으나, 이곳 장항리는 그만한 공간도 확보되지 않았다...>
<이제 정연한 조화와 비례에 함께 살아있는 세련되고 경쾌한 맵시도 살펴볼까?...>
③세번째, 고선사탑과 감은사탑 이후 만들어진 나원리/황복사/천군리탑을 평가하면서 석공들에게 가장 큰 고심은 둔중함을 보완할 방법을 찾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이런 평가와 반성이 없었다면,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의 최고봉인 석가탑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테니까. 석공들이 찾아낸 해법은 일층몸돌의 비례를 높이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기단부가 높아지는데, 탑신의 비례가 조정되지 않으면 극단적으로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같은 모습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각층 몸돌이나 지붕돌을 같은 비례로 높이는 것보다 석공들이 선택했던 것은, 일층몸돌을 과장되게 높이는 게 보다 효율적이라 판단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이로인해 고선사/감은사탑 같은 장중하면서 웅혼한 느낌은 포기하게 되지만, 훨씬 세련되고 날렵한 느낌의 경쾌한 미감과 상승감은 한결 돋보이게 됐다. 부재 하나의 변화로 전체의 미감이 바뀌는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데, 역시 그 출발이 장항리탑이었다고 생각되고, 특히 오층양식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괴임돌과 함께 인왕상의 광배를 먼저 살펴본다... 가만히보면 두광이 굴곡된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 몸돌 좌우에 새긴 우주의 양감을 살리기 위한 노력의 결실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이지만 얇은 종이를 오려 굴곡에 따라 붙여 놓은 거 같아 보이는데, 나만의 착시일까? 정성 때문일까? 아무튼 깜짝 놀랐다...>
<일층몸돌 문비, 인왕상과 괴임... 내 키가 작든지, 기단부가 높은지 몰라도 괴임의 전체모습은 가까이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탑들에 비해 높은데, 700년대 후반부터 일층몸돌 괴임은 점점 낮아지고, 생략되는 경우도 생기는데 대표적인 탑이 속초 향성사지 삼층석탑이다... 오래 전에 올렸던 스크래치가 있던 사진인데, 필름을 찾아 재 스캔했다... 훨 깨끗하고 기분도 좋타...ㅋ 필름의 기쁨이다...ㅎㅎ>
<일층몸돌이 이전 석탑들에 비해 정사각형에 가깝게 높아지고, 괴임까지 고려하면 훨씬 강조됐음에도 전혀 어색하거나 약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원리탑이나 황복사탑 등과 같은 비례였다면 더 이상하게 보였을 듯...>
<일층몸돌 금강역사상 도면/ 위 솔뫼님 자료에서... 저렇게 아기자기하고 살가운 인왕상과 일층몸돌은 우리들 생각보다 훨씬 넓고 크다... 내가 기단부에 누워도 일층몸돌을 못 넘고, 또 일층몸돌의 괴임이 21cm 가량 되니까 기단부 위에 서도 많이 남는다... 기초와 기단이 단단하다는 것,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④네번째는 낙수면의 마감과 경사인데, 이전까지 낙수면은 고선사탑 양식과 감은사탑 양식으로 나뉘어 있었고, 나원리/황복사/천군리탑 등에서는 감은사탑 양식이 주류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감은사탑 지붕돌은 날렵하면서 경쾌한 느낌은 주지만, 날카롭고 예리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이에비해 장항리탑 낙수면은 석가탑과 같은 완전한 직선은 아니지만, 직선으로 내려오다가 전각부분에서만 미세한 반전을 두게 된다. 우리 생각에 지붕돌이 직선이 되면 훨씬 경직되고 두툼해질 거 같지만, 의외의 결과가 도출됐다. 즉 낙수면이 직선이 되면서 반듯한 직선에 담백한 괴체감을 함께 살려야할 석탑은 곡선이라는 군더더기를 덜어낼 수 있었고, 더욱 정연하고 간결한 모습으로 정돈된다. 또한 보다 깊어지고 넓어진 지붕돌로 인해 감은사탑, 고선사탑, 황복사탑에서 만들 수 없었던 우아한 미감이 살아나면서, 경쾌함과 상승감을 오히려 배가시켰다. 곧은 직선들의 조합이 안정감과 정연함을 살리면서 보다 복잡미묘한 우아함까지 살리게 되었으니, 장항리탑의 낙수면은 이후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으로 정착하게 된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몸돌의 파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장항리탑의 지붕돌은 이전 석탑은 물론 앞으로 만들어질 석탑에 비해서도 넓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한편 백제의 미감이 따르붙기도 하지만... 아무튼 가까운 거리에서 낙수면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장항리탑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 낙수면은 석가탑만큼 직선은 아니고, 지붕돌은 생각보다 두툼해 처마의 깊이는 감은사탑만큼 넓게 보이지 않음에도 시원시원함과 날협함을 함께 살릴 수 있었다는 건 탁월한 솜씨와 미감이라는 말이외에 다른 부연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파손된 동탑... 그러나 위 사진처럼 넓은 지붕돌은 이처럼 포개진 상태에서 보면 매우 두툼하고 둔중하게 보인다... 3.5m가 넘는 거대한 바위가 기단부 위에 일층몸돌 위로 올라가면서 전혀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보인다면 대단한 일이 아닐까? 우리집 안방만큼 넓은 바위가 더이상 무거운 돌이 아닌 깃털처럼 가벼운 날개로 느끼게 만드는 조화가 석탑의 미감에 생기를 불어넣고 아름다운 상상을 만들게 된다니...>
<근래들어 말끔히 청소를 한 모습이 더 부드럽다... 석탑의 보존과 관리는 그냥 방치하는 게 최선만은 아닌듯...>
<장항리탑 입면도/위 솔뫼님 자료에서... 이렇게 도면을 보면 저 지붕돌들이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다... 또 일층 지붕돌의 넓이가 나원리탑과 크게 차이나지 않음(62mm)에도 층급받침과 낙수면을 하나의 바위로 가공했다는 것은 양식적으로 한단계 진일보 했다는 말이 되고, 이 석탑 조성에 깃든 공력과 정성을 짐작케 한다...
참고로, 나원리탑에서도 지적했지만 현재 솔뫼님 도면의 각층 높이의 합과 탑신의 높이는 21.4cm 차이 난다... 아마 일층괴임을 중복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나무가지에 살짝 살짝 가려졌지만, 위 도면과 달리 낙수면의 경사는 훨씬 직선에 가깝다... 그나마 일층괴임과 기단부 괴임, 그리고 지붕돌의 낙수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마지막 ⑤과연 이런 이유 때문에 용명리나 술정리 및 석가탑 등 다른 삼층석탑들에 비해 장항리탑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근거가 있느냐는 의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거들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추측들만 난무한다면, 장항리탑이 변화의 시발점이었다는 말은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계도 분명히 있다. 나는 아직까지 장항리탑에 대한 세부 도면을 찾아보질 못했다. 게다가 부재의 결구에 대한 식견도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감안하고 살펴본다면 기단부의 폭과 높이의 비례, 일층몸돌의 비례, 그리고 상하층기단부의 괴임과 노반의 마감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단부 넓이와 높이의 비례,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 그리고 상층기단부 상하 호각형과 각형 괴임 등은 내가 석탑의 편년을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하층기단부와 상층기단의 탱주 숫자 역시 석탑편년을 결정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장항리탑이 감은사탑이나 황복사탑, 나원리탑 보다 늦게 조성됐다고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상층기단부 면석이 1매로 가공됐다는 점... 실제 석탑편년을 결정하는데, 상하층 기단부의 결구와 가공기법은 석재의 크기와 양, 석공의 숙련도에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참고로 파손된 동탑의 몸돌에 사리공이 만들어져 있다...>
<석불 광배의 화불... 풍만한 자태와 원만한 볼살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규암리나 선산 출토 금동불(600년대)의 자애로운 미소와 다르고, 석굴암 본존불(770년경)의 근엄한 표정과도 다르다... 황복사탑 출토 불상(692~706년) 상호와 비슷한 느낌...>
<불상 좌대의 조각...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넓게 벌린 이 조각상이 사천왕일지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탄탄한 자세와 단호한 표정에서 복련과 석불을 떠 받듬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작은 고추가 ... ?^^>
사실 기단부가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는 게 통일신라 석탑의 일정한 흐름이지만, 장항리탑은 석가탑에 비해 상당한 차이를 두고 낮다. 하층기단부 폭과 높이의 비례(감은사: 장항리: 석가탑이 0.14: 0.17: 0.23) 뿐만 아니라, 상층기단부의 비례(0.33: 0.43: 0.45), 상층기단부 폭과 기단부전체 높이 비례(1.90: 1.53: 1.31)를 살펴봐도 석가탑에 비해 기단부가 낮고 넓은 특징이 살아있고, 기단부 전체와 일층몸돌의 비례(0.84: 0.98: 1.11)도 석가탑에 가까워질수록 기단부에 비해 일층몸돌이 점점 높아지는 패턴의 중간에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석가탑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 일층몸돌의 높이와 폭은 0.62: 0.85: 0.87로 석가탑과 비슷한 비례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장항리탑이 다른 석탑들보다 일층몸돌 괴임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아마 앞서 말했던 일층몸돌을 높이는 과정에서 몸돌 자체를 높이는 것보다, 괴임을 통해 효과를 강조하기 위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점 역시 석가탑에 비해 훨씬 고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상층기단부 갑석 각형 괴임으로 일층몸돌은 더 높아 보여, 이 탑이 상승감을 확보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심이 있었는지 짐작케 한다...>
<장항리탑 앙시도/위 솔뫼님 자료에서... 왼쪽 하단에 기단부 면석을 긴결하는 은장이 보이실 것... 앞선 고선사/감은사탑 비교 글에서도 밝혔지만, 여기에 쓰인 은장은 끝이 둥근형태로 고선사탑과 같은 형태다... 고선사탑과 장항리탑은 또 그렇게 이어진다... 하나씩 하나씩 석탑은 양식적으로 정형화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 정도 거리에서 장항리탑은 날씬함과 함께 안정된 미감, 그리고 장중함을 함께 드러낸다... 어딘지 이질적인 요소들이 묶여 모호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장항리탑...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석탑의 목차를 결정하면서 가장 노숙한 경지의 허허로움과 기품있는 세련됨을 잃지 않은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으로 표현한 적 있다...>
<터는 좁을지 몰라도 장항리탑이 담고자 하는 것은, 토함산과 동해바다 모두를 포용하고도 남을 허허로운 바람이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일층몸돌 밑의 각형+각형의 괴임뿐 아니라 상층기단부 밑의 호형+각형의 괴임도 약간씩 차이가 있고, 특히 노반 하부의 괴임을 변형한 1단의 층급 역시 완전하게 정형화된 수준으로 정리되지 못한 양식 중 하나라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마감양식과 형태뿐 아니라, 위에서 비교한 기단부와 일층몸돌과 관련한 비례들은 삼층과 오층 양식을 막론하고 통일신라 석탑의 변화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같은 오층석탑인 나원리탑과 비교해도 일관된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장항리탑은 고선사/감은사탑과 석가탑의 중간보다 조금 이르고 나원리탑 다음 시점인 710~715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볕이 좋은 날, 장항리탑을 담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현재의 모습(↑)과 예전의 모습(↓)을 함께 비교하면서 보기 위해 사진을 혼용했다...>
<장항리탑은 이렇게 새로운 700년대를 열어가는 규준이자 출발점이 되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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