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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23> 전성기(720~780년)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1307

 

 

 

 

 

 

 

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3) 전성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들(720~780년대)...

 

   (1) 성덕왕에서 경덕왕까지 시대 배경

 

 

 

장항리 오층석탑을 만들고 나서부터 통일신라의 석탑은 달라진다. 즉 지금까지의 안정감과 정연함을 기본으로 이상적 비례와 효율적인 석탑을 장중하게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경쾌하면서도 우아한 미감을 찾게 된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732년대 발해만을 도하한 발해군은 산둥반도까지 위협하는데, 이때 당 현종은 성덕왕에게 발해의 공격을 요청하지만 무산되고, 결국 등주에서 당나라군은 대패를 당한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나 755년부터 10여년 지속된 안사의 난(우리는 당나라 현종때 양귀비와 안록산의 난을 기억하고 있다)을 겪으면서 당나라는 더 이상 통일된 대국으로서 주변국에 군림하지 못한체 쇠퇴를 거듭하다 황소의 난 이후 907년 멸망한다.

아무튼 안사의 난 때 등장하는 여러 제후들 중 하나가, 발해와 별도로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며 산둥반도 등 치주와 청주를 장악한 절도사 이정기의 치청왕국이었고, 760년대 이후 변방지역과 특히 (통일신라와 관련해) 북경주변부터 발해의 국경까지 영역은 지방절도사들의 자치영역으로 바뀌게 된다. 어부지리로 얻은 세력균형... 이제 북방 대륙세력은 신라의 위협이 아니었다.

 

 

<수/당대 호구변동/고등학교 역사부도에서... 자주 인용하는 도표지만 호구변동에 유익하고, 당대를 추정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라 생각된다... 

수나라 말기 호구의 급격한 변동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도 있지만, 호구변동을 조사할만한 중앙권력의 집권체제가 이완된 탓으로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750년대 안사의 난이 당나라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느지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당나라의 국호가 계속되는 걸 보면, 당나라가 제국이기는 제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망하는데만 150년 걸렸으니...>  

 

 

 

 

 

역시 성덕왕 중반인 730년대 일본 침략도 물리친데다, 드디어 760년경 일본이 백제의 본토수복을 완전히 포기한다. 백제의 부흥을 위해 4만7천의 병력을 파견했다가 663년 백강(일본서기에는 ‘백촌강’, 중국에서는 ‘백강구’라고 부른다)전투에서 패배한 것에 비하면 3배에 달하는 대규모 전단의 준비였다. 그런데 일본 내부사정으로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710년 헤이죠쿄(平城京, 나라)로 천도한 이후 720년 일본서기를 편찬하고 752년 동대사(백제인 행기스님이 주도하고, 건축총책임자는 고(구)려인 복신, 대불전은 신라인 저명부백세가 주도)와 대불(비로자나불, 백제왕 경복 태수가 황금 900량 시주) 낙성식까지 치뤘지만, 일본의 정체성 확립과 함께 불교정치의 폐단을 비판하는 내부의 반발 때문이었다(결국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교토)로 천도(1333년 가마쿠라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고, 1867년 도쿄로 천도할 때까지 천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다)한다).

이로써 남쪽 해양세력으로부터의 위협과 백제에 대한 공포(이건 우리들 생각보다 엄중했다고 보여진다)도 사라졌다.

 

 

<동대사 모형/동대사에서... 이미 일본 동대사편에서 충분히 다뤘지만 사진들을 재인용한다...

중앙에 금당원이 있고, 좌우에는 별개의 탑원이 나눠져 있어 백제의 미륵사지와 750년대 불국사의 2탑 1금당 구조가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앞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동대사와 불국사는 양국의 화엄종 총본산으로 지금도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데, 동대사 정창원에서 당시 불국사의 가람배치도가 발견되기도 했으니 두 절의 인연은 처음 조성될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신라와 일본의 동향은 양국 왕실에 매우 민감했었다고 생각된다...>

<동대사 대불... 이렇게 사진으로보면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동대사 대불/동대사 안내책자에서... 이렇게 보면 그 규모와 스케일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참여했던 인원이 51만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대사 창건에는 전 국민들이 동원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자발적으로...>

<동대사 대불전 부분... 이런 처마형태를 당파풍이라 부르는데,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했던 양식으로 지금은 일본건축의 상징처럼 정착됐다...

이렇게 바뀐 것은 소실로 인해 1100년대, 원래 크기의 2/3 정도로 축소 재건되면서 고착된 것으로 현존 대불전은 1709년 모습이다...>

<동대사 대불전... 멀리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그 스케일이 가늠되지? 내 생각이지만 교토로의 천도는 이 동대사의 영향이 컷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미륵사를 준공한 20여년 후 멸망하고, 신라는 황룡사를 준공한 20여년 후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일본은 동대사를 준공한 40여년 후 천도하고... 국가적 역량이 결집된 대역사의 후유증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해당 프로젝트의 성공은 전국민을 결집시키지만, 실패의 후유증은 원심력이 강한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역시 불국사와 석굴암 준공과 함께 급격한 혼란과 침체에 빠진다...>

 

 

 

 

게다가 성덕왕에 이은 경덕왕 초기까지 진골귀족의 반란도 완전히 진압하거나 타협 되고 통일신라는 드디어 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문무왕대에 부여의 궁남지를 본따 임해전지를 조성하면서 건축과 조경 등 백제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원효와 의상의 등장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당나라로부터의 독자성과 선도성까지 갖추니 사상적 측면에서도 선진적 지위를 인정받게 되고,

다시 경덕왕대 백제의 후손들이 주도한 일본의 화엄종 본산 동대사 건립에 자극받아 신라 화엄종 총본산 불국사와 석굴암을 완성하니, 태종무열왕부터 시작해 5세대 90년만에 신라의 왕은 드디어 전륜성왕을 자처해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고, 정체성확립에 급급했던 통일신라는 이때부터 자신감에 넘쳤을 것이다.

시대가 바뀐만큼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욕구도 변하게 되고, 즐기는 미감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터...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국가적 기념비들은 보다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을 찾게 됐다. 격식에는 활력이, 전통에는 품격이, 실증에는 이상이, 기술공예에는 문화예술이 함께 살아나야했고, 석탑도 한차원 높게 승화되니 장항리탑에서 시작된 전성기 삼층석탑들의 조형이었던 것이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장항리탑은 이렇게 삼층석탑에서 양식적으로 완결된다...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미탄사지 삼층석탑... 미지정 유물이지만 나는 석가탑 이전, 아무리 늦춰 잡아도 750년 전후에 조형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가장 걸리는 것이 3단의 층급받침이지만, 나원리탑 출토 금동탑의 층급받침도 3단이다... 전형화된 양식은 아니지만 예외적 사용은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에 준수함과 당당함을 함께 갖춘 멋진 탑이다...> 

 

 

 

 

이때부터 조성된 탑들이 바로 이글의 서두에서 살펴봤던 경주 남산 동쪽(대부분 도시의 확장이 동쪽에서부터 시작하듯이, 경주 남산도 동쪽부터 개발되기 시작해 서쪽이 채워진다)의 염불사지 삼층(쌍)석탑, 경주 남쪽의 원원사지 삼층(쌍)석탑, 경주 동쪽의 마동사지 삼층석탑, 경주 서쪽의 용명리 삼층석탑, 그리고 경주시내 한복판의 미탄사지 삼층석탑 등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주 서남쪽으로 뚝 떨어진 청도의 봉기동 삼층석탑을 비롯해, 더 멀리 옛 가야지역이었던 창녕 술정리에 (동)삼층석탑과 서쪽의 합천 월광사지 삼층석탑, 그리고 대구 팔공산에 선본사 삼층석탑을 만들고, 다시 더 서쪽 성주 보월동에 삼층석탑과 더 멀리 서북쪽 방향으로 올라가 김천 갈항사지에 삼층(쌍)석탑까지 조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과 전통이 집대성 되어 화엄종의 교리를 완벽히 구현한 불국사와 동북아시아 대승불교의 최후 경지의 꽃을 피워낸 석굴암이 만들어질 수 있었고, 이때 탄생한 것이 석가탑 등이었다.

 

 

<불국사 석가탑... 앞으로는 올리지 않았던 사진들을 중심으로...>

<석가탑... 통일신라 시대 삼층석탑의 최후의 완결태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석가탑과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꼽는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완벽한 탑이니까...>

 

 

 

하나 같이 자신만만하고 위축됨 없는 당당한 탑들이다. 조화로운 비례에 미려하게 마감된 이 탑들은 세련된 기품까지 갖췄다. 전통적 양식을 거스리지 않으면서 신선함을 잃지 않았고, 준수한 느낌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농염한 부드러움도 숨지기 않았으며, 가감이 필요 없는 군더더기 없는 연출에 거부감 없이 느껴지는 친근함은 그럴 수 없이 편안하다.

안정적이다 싶으면서도 상승감이 살아있고, 경쾌한 느낌이지만 긴장감도 잃지 않고, 시원시원한 상큼한 느낌에 우아함과 장중함을 함께 갖췄다. 상반된 미감의 조화로운 통일, 흐트러짐 없는 절제와 응축된 힘이 느껴져, 첫눈에도 참신하면서 오래오래 두고 볼수록 더욱 은은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탑들이 바로 이때의 삼층석탑들이다.

건축가 김봉렬씨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분들이 말했던 ; 우아하고 섬세한 백제의 예술과 공예적 전통, 호방하고 스케일이 큰 고구려의 역동성이 규범적이고 에너지가 충만한 신라의 정신으로 승화된 절정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경주 용명리 삼층석탑... 이때 만들어진 어떤 탑도 부족하거나 느슨한 것은 없다... 충만한 신라의 정신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경주 원원사지 삼층석탑... 석탑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이 부가되고, 일층몸돌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도 전체적인 이미지와 미감을 흐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식과 디테일이 전체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탑 자체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700년대 초중반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의 삼층석탑 조성 분포도... 그러나 이 탑들은 경주와 대구를 중심으로만 분포한다... 다음편 분포도 참조...> 

 

 

 

바야흐로 사리신앙이 정점에 다다르고, 석탑이 불교미술의 중심에 섰던 시기였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완성이 있고, 완성이 있으면 해체와 퇴화가 시작되는 법이다. 물론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궁극의 경지를 이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진행이었는데, 석가탑을 정점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은 변하게 되고, 불국사를 기점으로 가람배치의 중심은 당전경장(불상과 금당, 그리고 경전)으로 바뀌게 된다. 그 속도는 어땠고, 위 석탑들은 석가탑 前일까 後일까?

나는 지금까지 위에서 소개했던 탑들이 석가탑보다 작거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 조성시기를 석가탑 다음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탑들은 석가탑 이전, 또는 동시대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석가탑과 갈항리탑의 편년이 17년에 불과하고, 석굴암이 완공되기도 전인 경덕왕 집권 중반 이후부터 통일신라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지면서,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의 석탑을 더 이상 만들 처지에 있을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탑들의 조성시기를 석가탑 이후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다만 이때 완성된 양식적 전통과 여운이 혜공왕(765~780년)과 선덕왕(780~785년)까지 이어져 이 중 몇 기가 석가탑보다 늦을 수는 있지만, 아무튼 이 이후 원성왕(785~799년)부터 석탑을 비롯해 통일신라의 석조 불교미술의 중심과 경향은 급격히 변하게 된다.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 규모가 크건 작건(물론 이 탑도 5m가 넘지만) 조화로운 비례와 아름다운 미감은 변하지 않앗다...> 

<울주 간월사지 삼층석탑... 2탑1금당 구조의 간월사지에는 쌍탑이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에 만들어진 유일한 남성적인 미감의 석탑이다... 현재 미지정 상태에서 2탑은 복원됐는데, 아쉬운 점은 기단부 갑석과 일층괴임이 당대 양식과 같지 않다고 생각된다... 조금 더 충실히 복원하려면, 상층기단부 갑석은 덜 돌출됐어야 했고, 일층괴임은 장항리탑처럼 훨씬 좁고 높았어야 맞는다 생각된다... 많이 아쉽다...>

<간월사지 삼층석탑의 일층몸돌... 기단부 갑석의 두께와 일층몸돌 괴임이 가까이 볼수록 눈에 거슬린다... 아무튼, 장항리탑과 자주 비교되는 인왕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문비를 자세히보면 고선사탑이나 장항리탑에서 많이 간화되어, 목조건축적 특징이 사라지고 완전히 개념적으로 정립됐음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동시대 다른 탑들에 비해 지붕돌의 두께가 많이 얇아졌음을 볼수 있는데, 이게 두텁고 기단부가 더 넓었다면 천군리탑에 버금갔으리라 생각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츰 알아보기로 하고 이 시기를 정리하면, 750년을 전후해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드디어 경주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건 폐쇄적인 경주와 통일신라에서는 엄청난 변화였다. 또한 불국사 다보탑을 비롯해 화엄사 사사자석탑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 돌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석탑들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다양성의 확보... 이것 역시 보수성에 기반해 성장한 경주와 통일신라의 커다란 전환기가 됐고, 아울러 신라 고유의 양식이던 전탑도 활성화 되어 신라인들의 미감에 어울리는 양식을 정형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유일하게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미감을 갖춘 석탑은 울주 간월사지 삼층(쌍)석탑에 불과했지만, 혼란이 시작되는 770년대부터 다시 나원리탑/황복사탑/천군리탑을 만들던 효소왕 시절의 미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변곡점에 있는 게 구미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과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이 아닐까 생각된다.

 

 

<구미 선산 낙산리 삼층석탑... 죽장리탑과 함께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7.3m 크기의 장대한 규격과 낮은 기단부는 초기 석탑의 특징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 그러나 700년대 중후반으로 조성시기를 내려잡은 가장 큰 이유는 일층몸돌과 상층기단부 괴임 때문이었다...>

<충주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 통일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층수와 규모를 가지고 있다... 중성적인 미감에 정연함과 세련됨을 놓치지 않았고, 특히 상승감이 강조됐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돌고 도는 게 유행이고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내용은 달라지고 그 결과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물론 통일신라의 석탑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지 않는데, 절충과 타협을 통한 양식의 변화와 규모의 축소라는 지혜로운 대응 결과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과도기가 785년대부터 장보고가 청해진을 구축한 828년 전후까지라 생각되는데, 석탑의 규모는 6m 이하로 점차 작아지고, 기단부의 탱주는 눈에 띠게 줄어들고, 절제된 힘과 세련되고 우아한 미감은 포기된다.  낙수면에 층단을 두어 지붕돌을 변화시킨 울주 청송사지와 석남사,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을 비롯해, 경주 무장사지와 칠곡 기성동 삼층석탑처럼 기단부에 안상이나 조각상이 들어가는 경우, 그리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나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처럼 다시 층수를 변형시키는 방법들인데,

하나같이 남성적이거나 장중한 미감을 갖추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한 탑들이다. 다만 내가 이 시기까지를 전성기로 함께 묶은 이유는, 아직까지 석탑은 공예적 조형물로서 모형화 되기보다(800년대 중반부터 조형된 석탑들에 비해), 건축적 구성과 의지를 잃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보물382호... 기단부 탱주도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은 다시 좁아지며, 낙수면의 경사도 급해지고, 괴임의 양식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높이와 규모가 조정됐지만, 여전히 5.5m가 넘는 큰 탑이다... 그러나 탑리리탑처럼 일층몸돌의 안쏠림을 다시 살리고, 노반은 고선사탑과 같은 양식으로 다듬었다... 회귀일까? 반성일까?...  아직까지 석탑을 조성할 때 건축적 조형의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흔적이 아닐까?> 

 

 

 

 

 

 

 

 

 

* 사진을 시원하게 보기 위해 게시글 폭을 넓혔는데 일장일단이 있는 듯 싶다...

  글이 너무 길어졌고, 핀이 맞지 않은 사진은 올리지 못하고, 무엇보다 예전 글들의 틀이 무너졌다는 점...

  혹시 불편하시거나, 예전 양식이 더 좋다고 생각하시면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