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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25> 전성기 통일신라 석불과 석등...1307

 

 

 

 

 

 

 

 

 

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3) 700년대 조성된 석탑과 석불/석등/동종 등 다른 불교미술과의 상관관계

       가) 700년대 통일신라 석불

 

 

그러면 당시에 조성된 석탑 이외의 유물들의 흐름을 시기와 종류별로 살펴보면서 조금 더 폭넓게 700년대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어떤 유형으로 어떤 곳에 만들어졌었는지 간략하게나마 메모해 보자. 먼저 앞선 글에서 이미 밝혀 중복의 의미가 있지만 석조불상부터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①661년(문무왕)부터 719년(성덕왕대) 이전까지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선도산 서악리 마애삼존불, 봉화 북지리 미륵반가사유석상(이상 660년 전후)과 동 마애아미타불좌상,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 군위 아미타삼존석굴(이상 670년 전후)을 조성했고,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보물201호/660~677년... 잠깐 짬을 내 통일신라의 불상부터 사진으로나마 흐름을 추적해 본다... 도리천으로 생각하는 경주 낭산과 달리, (반)월성의 주봉인 남산은 또 다른 의미에서 신라의 성지가 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단석산, 선도산 등에 마애불을 조성했던 신라는 통일전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남산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생각된다...> 

<탑곡 마애불상군 도해도/스크랩... 이미 여러 자료에서 도면이 공개되어 있어 참고로 올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많은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남쪽면 불상을 주존으로 하고 있으며, 북면에는 구층탑과 칠층탑이 양각되어 있는데, 황룡사 구층탑 복원의 모본이 되고 있다...>

<탑곡 마애불상군 남면... 삼존불 옆에 보리수가 있고, 입상과 삼층탑이 함께 있다... 삼층탑은 후대에 조성 추가된 것이다...>

 

<탑곡 마애불상군 서면과 동면 도해도... 도면을 보면서 하나하나 찾아보는 것도 답사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을 듯 싶다...>

<높이 9m, 둘레 26m의 이 마애불에는 대략 34가지의 다양한 도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내가 이 마애불을 660년으로 보는 이유는 자애롭고 은은한 미소(성당양식이 유입되고 화엄종이 주도하면서부터 부처는 근엄하면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바뀐다)와 고식에 속하는 연화대좌들, 그리고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광배 등 때문이다...>   

<이 공양상의 광배는 백제와 중원 등에서 사용했던 빛살문양으로 새겨져 있는데, 후대로 내려가면 단순화 된다...>

 

 

 

 

②719년 전후부터 770년대까지 경주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감산사 석조여래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상 719년), 왕정골 석불입상, 남산 칠불암 사방불과 마애삼존불(740년대), 굴불사 사방불(750년대), 석굴암 본존불(770년대), 영지 석불좌상, 산청 내원사 석남암사지 비로자나불좌상(766년) 등이 만들어지며, ③700년대 후반 800년대 초반부터 경주 남산일대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데, 미륵곡 석가여래좌상(780년대)과 마애여래좌상, 중생사터 십일면관음보살입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석조약사여래좌상,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여래좌상, 열암골 석불좌상과 (새갓골) 마애여래입상, 용장골 약사여래좌상, 입곡과 철와곡 석불두 등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감산사 석조불, 보살 입상/719년/국립중앙박물관...>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 입상/국보82호/위와 같다... 감산사에는 두구의 입상 외에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비로자나불좌상과 삼층석탑 등이 더 있다... 719년까지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이 공존했음을 보여주며, 700년대 초반 통일신라 석불을 대표하는 입상들이다...>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국보81호/위와 같다... 사실적인 비례와 이상적인 모습을 함께 담고자 했던 성당양식의 정착과정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통일신라화해 나가는지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기도 하다... 광배의 꽃문양 외에는 가장 단순한 양식의 법의와 앙련, 복련으로 구성된 아미타불과 달리, 미륵보살은 여성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선지 화려한 장식기물들로 치장하고 앙련과 복련에도 세련되고 정교한 문양들로 채워져 있다...>

<경주 남산 왕정골 출토 석조불입상/국립경주박물관/700년대 후반... 석굴암이 만들어짐과 동시 혹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입상은 격식만 남고 기상과 치밀함 등이 모두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발원자와 제작자의 복합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퇴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게 아닐지...>

<경주 남산 철와곡 출토 불두/국립경주박물관/800년 전후... 이 석불두 역시 입상의 한부분이다... 경주 남산이 갖는 개방성이라 해야할지 혹은 대중성이라 해야할지... 800년 년간이 되면 경주남산은 일정한 패턴과 체계를 벗어나 자유로운 경연장 같은 석불, 석탑, 유물들이 조형된다... 그리고 이렇게 머리잘린 부처상들이 많았던 것은 조선시대-특히 임진왜란 이후로, 자연적이거나 개인적인 파괴도 있었지만, 일부러 불두를 잘라 관청에 신고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상도 했을지 모르는 일인데, 그렇다면 이건 국가에서 파손을 장려했다는 말도 되나?...>

 

 

 

 

 

이를 정리해보면 ; ①통일신라 전성기 석불은 600년대 후반부터 경주남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며, 그 양식적 흐름은 마애불(600년대)→입상(700년대 초반)→좌상(770년대 이후)→마애불과 좌상 등 동시다발적이며 다양한 양식(800년대 전후부터)순서로 확산돼 나가는데, ②700년대 중반까지 가람, 불탑, 불상의 발원자가 국가와 왕실에서→ 차츰 승려(700년대 후반)와→ 일반인(800년대)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흐름과, ③직접 제작을 담당했던 석공들도 관소속 장인(700년대 중후반까지)에서→ 일반 수공업 장인과→ 승려출신 장인(800년대 중반부터)으로 변모해가는 과정과 중첩되며, ④그 수량과 질적 수준도 700년대 초반 소량의 실험적 제작→ 700년대 중후반 엄선된 수준의 최고품질 생산→ 800년대 이후 다양한 수준의 석불들이 대량생산 체제로 변화(→800년대 후반부터 구산선문의 정착과 함께 높은 수준의 석불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양상을 추정할 수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312호/740년대... 연화대좌의 문양도 장식적으로 바뀌지만, 아직 광배에는 백제식 촛불형이 남아있다... 이 사진은 10여년 전 것으로 지금은 석조유물에 대한 보존관리 방향이 바뀌면서 말끔히 때를 벗었다...>  

<삼존불과 사방불이 공존하는 특이한 형태로, 불상을 조성하는 통일신라의 자신감과 권위스러운 느낌을 함께 읽을 수 있다...>

<경주 굴불사지 사면불입상/보물121호/750년대... 아미타삼존불을 주불로 사면석불로 조성됐다... 주존불인 아미타불 장엄을 살리기 위해 좌우 협시불을 세웠고, 후면-동측에는 약사불을 조성했다... 백제 사방불과 동일하게 북쪽에는 미륵불을,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조성했고...>

<백률사 바로 아래에 있는 이 굴불사 사면석불은 경덕왕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돌을 갈면서 소원을 비는 풍습이 남아있다... 오른쪽에 가려져 있지만, 돌을 돌리다가 지대석에 딱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그런...>

<석굴암 본존불/770년대... 이런 실험과 변화의 최후 정점에 석굴암이 위치한다... 통일신라의 이상주의적 사실주의, 혹은 사실주의적 이상주의의 최고 최후의 명품이다...>

 

 

 

 

 

⑤그리고 700년대까지 통일신라 석불조성의 주요 흐름을 보면, 마애불 중심으로 시작해 차츰 백제의 사방불 형식을 흡수(문경 대승사→영주 신암리→경주 남산 칠불암→굴불사)하면서 입체적 구조를 갖추면서, 결국 석굴사원 양식(경주 남산 감실부처→삼화령→영주 북지리→군위 석굴→경주 토함산 석굴암)을 완성하는데 이르고, ⑥다시 사상적 흐름을 살펴보면 전쟁 막바지부터는 미륵신앙(미륵불, 미륵보살상)을 정토신앙(아미타불)이 대체하고, 700년대 중반부터 논리적 체계를 완성한 통일신라 불교교단은 교종(5교-계율종(자장/통도사/선덕여왕), 열반종(보덕/경복사/무열왕), 법성종(원효/분황사/문무왕), 화엄종(의상/부석사/문무왕), 법상종(진표/금산사/경덕왕))중심으로 체계화를 이뤄가면서 교리에 따른 불상조성이 정립되어 가고, ⑦이 과정에서 가람배치가 석탑 중심에서 점차 불상을 안장한 금당 중심으로 변해 가는 과정에 따라, 700년대 전반까지 독립적으로 조성됐던 마애불을 사찰건축 내부로 흡수하면서 700년대 후반부터는 입상보다 좌상 양식이 주류를 이루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136호/770년대... 석굴암 본존불이 가장 근엄하고 이상적인 모습을 갖췄다면, 이 불상은 가장 준수한 인간적인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하는데...>

<석굴암 본존불 이후 이 보리사 석불좌상부터, 통일신라의 불상은 석불좌상이 주류(마애불이나 입상, 금동불과 대비하여)를 이뤄 나간다고 생각한다...>

<위, 아래 사진이 대략 10년 시차가 있다... 오똑한 콧날, 자애로운 미소, 부드럽고 자비로운 눈매에 복스러운 표정... 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불상 중 하나다...>

<햇살이와 똘똘이에게 그랬다 ; 이 모습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이 느낌을 닮은 사람을 신랑감으로 찾아 오라고...ㅋㅋ>

 

 

 

 

 

⑧또 한편으로 밀교적이거나 개인 기복적 성격의 타력신앙으로 후퇴하는 양상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700년대 후반~800년대 초반부터 국가와 왕실이 발원하는 것이 아닌 사찰과 일반인이 직접 발원하는 석불좌상과 마애불상들이 경주 남산에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며, ⑨대승불교가 관음신앙에 힘입어 완전히 민간신앙으로 흡수되는 과정에 700년대 후반, 전염병의 창궐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약사신앙이 급속히 유행하면서 관음전, 약사전이 별원으로 자리잡게 되고, ⑩특히 화엄종이 대세를 장악하면서 불상조성에 비로자나불이 등장하면서 대승불교 최후의 꽃을 피워간다(역으로 선종이 발호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보물1021호/776년/산청 내원사에서... 석불좌대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제 사리갖춤에서 제작편년을 추정하고 있는데, 이때가 경덕왕 사후 혜공왕대(선덕대왕신종, 석굴암 등도 이때 완성된다)다... 당당하면서도 부드럽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느낌까지 가지고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 최초의 석조 비로자나불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 영지석불좌상... 다른 글들에서 내 의견을 피력한바 있지만, 나는 이 석불좌상이 석가탑과 관련있는 아사달의 작품으로 보고있다...^^ 그러니까 석가탑을 완성한 다음이거나, 석굴암 본존불을 조성한 바로 다음에 만들다가 중간에 스톱한 케이스... 자세히보면 오른쪽 팔뚝은 깎다가 말았고, 광배도 어깨까지 조각하다가 만 것으로 보고 있다... 두상 좌우와 상부에는 화불을 조성하려고 윤곽만 잡고, 두상은 코 높이에 맞춰 개략적으로 윤곽만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좌대의 복련위쪽에는 3단의 괴임이 있어 미륵곡 석불좌상의 좌대와 비슷하며, 안쏠림이 적용된 중대석에는 안상이 남아 있으며, 앙련은 원원사지 석등이나 미륵곡 석불좌상처럼 엷고 넓은 문양이지만, 매우 세련되고 우아한게 조각했다고 보인다... 높이 4.3m 당당한 크기로 시원시원한 모습과 우아한 기품을 함께 갖춘 정말 멋진 석불좌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사달은 정말로 이 석불좌상을 만들다가 아사녀가 그리워 영지에 뛰어들었을까? 그랬을 거 같다는 생각이...^^>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700년대 후반... 700년대 후반이 되면 남산에는 동쪽만이 아니라, 서쪽능선에도 다양한 불상과 마애불, 석탑들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그 중 석불좌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아직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기운을 가지고 있어, 성공적인 복원 사례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좌대의 중대석이 낮고, 연화문이 새겨진 복련과 앙련에는 최소의 기교만 살아있는 등 불대좌의 초기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리고 700년대 후반~800년대 초반이 되면 석불좌상은 양식적으로 완벽하게 체계를 갖춘다... 중대석은 점점 가늘면서 높아지고(석탑과 비슷한 비례로...) 광배도 점차 낮고 좁아지며, 석불과 광배는 별석으로 완전히 나뉘고... 참고로 이 시기 약사불의 유행은 금동불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 700년대 통일신라 석등

 

그 외 정치적 안정과 함께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가람건축 경험의 축적과 대규모화가 동시에 병행되면서 석축, 당간 조성이 활발해지고, 석탑과 함께 금당의 중심영역에 석등이 등장하게 되는데, 당대에 조성된 석등으로는 ①팔각 간주형으로 온전한 형태를 갖춘 불국사 대웅전(750년대)과 극락전앞 석등 2기와, 화사석을 잃어버렸지만 그나마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경주 원원사지, 영주 숙수사지, 그리고 장곡사 상대웅전 철조비로자나불좌대로 사용되고 있는 부재와 경주 분황사와 사천왕사지의 하대석 등이 있고, 통일신라 최고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흥륜사 석등도 80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걸로 보인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나는 이 석등이 통일신라 최초의 석등 중 하나며, 팔각 간주형 석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당당하고 기운넘치는 팔각기둥은 우리나라 석등 중 최고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고... 복련이 있는 하대석보다 좁아진 연화상대석, 상대석에 맞춰 작아진 화사석과 낮고 좁은 지붕돌이 조화와 비례를 깨뜨리기는 하지만, 최초의 형태로서 부족함은 없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와 비교되는 것 없이 홀로 서있을 때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만약 주변 사람들만 없었다면 완전히 앙증맞은 공예품 같은 느낌이었을 듯... 그러나 굵고 강한 팔각기둥만큼은 압권이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미륵전앞 석등은 이와 완전히 다르고...>

<원원사지 석등 부재... 불국사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걸로 보이는데, 복련은 오히려 백제식의 고풍이고, 연화상대석은 매우 세련되었고 우아하다... 화사석 아래 조출된 받침은 오히려 불국사에 비해 정돈된 느낌... 넓어지고 두터워진 지붕돌도 잘 조화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주 숙수사지 석등 부재... 부석사 가는 길, 지금의 소수서원 내에 남아있는 석등부재다... 숙수사지를 아예 서원으로 바꿔버린 소수서원 내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폭 넓은 시기에 만들어진 많은 불교유물들이 남아있어, 과거 영화로웠던 숙수사지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개인적으로 이 석등부재는 70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걸로 생각하고 있다...> 

<경주 읍성 석등/국립경주박물관... 높이 5.6m의 장대한 크기와 완벽에 가까운 비례와 세련된 조각, 그리고 우아한 느낌의 이 석등은 우리나라 석등의 여왕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 흥륜사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석등 상하대 연화대좌와 팔각간주석에 상부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추정한 도안에 따라 1976년 복원되었다(배례석-무구정광석-은 경주 최씨가에서 별도로 기증한 것이다).. 특히 흥륜사터에서 3단의 연꽃무늬 층급받침으로 만들어진 지붕돌이 있었지만, 비례가 맞지 않아 새로 제작된 것인만큼, 추정과 복원에 많은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높이와 비례에서 매우 잘 조화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보다 작지만, 임실 용암리 석등과 견줄만한 커다란 규모의 석등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역시 ②사천왕상 팔각간주형 석등 중 최고작으로 꼽히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석등도 이시기에 만들어지고, ③이형석등으로 통일신라의 자유롭고 독창적인 창작력과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과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앞 공양인물상 석등(현재 모습은 800년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수차례에 걸쳐 보수,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은 800년대 이후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상 석등/보물15호/3.9m... 화사석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조각으로는 가장 이른 형태이면서도 팔각간주형 석등으로서 보기 드문 크기와 장중한 기운을 가진 석등으로, 전성기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들과 비교하면 4m란 크기가 얼마나 장대한지 확인될까?^^ 자세히보면 연화하대석과 지대석 사이에 별석의 부재가 추가 되었고, 간주석 하부의 층급받침과 연화상대석 받침에서도 변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지붕돌 하부에는 물끊기 홈이 새겨져 있어 800년대 석탑에서 보이는 특징이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진표율사가 금산사 이후 시작한 법주사 창건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5호/높이3.3m... 비슷한 시기이지만 사천왕상 석등보다 조금 늦은 것으로 추정하는 관점들이 많다... 다만, 너무나 뛰어난 석조기예가 선보인 쌍사자 받침과 상부의 화사석 및 지붕돌의 부조화와 이질감이 지적되곤 하는데, 그럼에도 쌍사자석등 받침의 완벽함을 훼손하진 않는다고 생각된다... 물론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103호/국립광주박물관... 800년대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쌍사자석등으로 법주사석등을 잘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좁아진 지붕돌과 불륨감이 떨어진 사자로 인해 미감에는 차이가 있지만, 훌륭한 조형성과 비례는 뒤떨어지지 않는다... 법주사석등과 달리 연화하대석에 쌍사자받침을 끼워넣은 방식으로 양식과 결구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구를 세워 놓은 것 같은 고복형 석등은 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등장한다...>

 

 

 

 

그리고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에서 통일신라의 석등도 정형화 됐는데 이를 백제석등과 비교해보자. ①화사석 위 지붕돌부터 살펴보면, 미륵사지 석등이 정림사탑 등을 닮아 전각부분 하부에서 낙수면의 반전을 따라 약한 들림이 있는데 반해, 통일신라의 석등은 감은사탑 지붕돌처럼 완전한 직선을 이루는 것으로 정착되고, ②백제의 마름모꼴 팔각원당형 화사석은 직사각형으로 바뀌며, ③화사석 밑 간주석 상부의 연화상대석은 백제식이 역삼각형으로 보일만큼 오목한 곡선으로 처리된데 반해 통일신라는 두툼한 호형의 볼록렌즈 같은 양식으로 바뀐다. ④또한 팔각간주석 상하에는 석탑과 동일하게 각각 2단의 괴임이 양식화 되고,

 

 

<익산 미륵사지 석등 복원품/국립전주박물관... 미륵사지에는 몇 기의 석등이 있었는데, 하나는 미륵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전주박물관에는 하부를 복원한 석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동이 살아있는 지붕돌 낙수면과 하부까지 반전이 살아있는 전각부분, 그리고 마름모꼴로 조형된 화사석 등 백제석등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 그리고 불국사나 원원사, 법주사 석등과 달리 화사석 받침이 완전히 안쪽에 들어가 있고, 연화상대석은 두 손을 오목하게 벌린 듯(통일신라 석등 상대석은 두 손에 단지를 잡은 듯 볼록하다) 경사진 모습과 아직 정형화되지 않거나 없는 간주석 상하부의 결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등 연화하대석... 백제석등의 복련은 이 부재외에 마애불과 소조 불대좌 등 여러곳에서 동일한 특징이 살아있다...>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233호... 무량사 오층석탑에 가려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나말여초- 900년대 전반기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백제의 미감이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유행과 전통적인 양식은 그렇게 세월을 뛰어넘어 전승되는 게 아닐런지...> 

 

 

 

 

⑤눈높이와 맞아 쉽게 눈에 띠는 연화상대석 앙련들이 화려하면서 다양한 문양으로 변하는데 반해 연화하대석 복련은 매우 더디게 변화하는데, 연꽃잎은 백제식의 엷고 넓은 단엽문과 달리 깊고 굵은 쌍엽문이 정형화되고, 800년대 중반부터 모서리의 반전이 극대화 되어 귀꽃이 등장한다는 점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연화하대석과 지대석 사이에 안상 등이 조각된 하대하석 또는 지복석이 있고 없음에 따라 분류할 수 있으나 주요한 분류기준은 아닌 것 같고, 통일신라에서 석등의 등장은 사찰의 개방성 증대와 함께 시작된 탑돌이(밤 문화?) 활성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조성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새로운 불교예법 정립과 대중적 문화가 이원적으로 분절 되어 간다는 점(구산선문이 등장할 수 있는 대중적 근거가 된다고 생각된다)과 가람배치가 점점 더 세속적이면서 복잡한 장식적 요소들이 첨가됨과 함께 석탑의 위상이 낮아지는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700년대 중반... 대웅전 앞 석등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미감은 완전히 다르다... 미감을 좌우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당연히 팔각간주석의 굵기와 느낌일 거 같은데, 석등에서 간주석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이기도 하다... 아무튼 극락전 앞에는 애초부터 석탑이 기획되지 않은채, 석등을 주불당 앞마당 한가운데에 배치했다...>

<경주 원원사지 석등 연화상대석... 규모가 크지 않고 단순한 석등에서 가장 많은 변화와 발전을 보이는 것은 연화상대석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걸 빼고 나면 상륜부와 하대석이니, 결국 화사석과 간주석이 가장 늦게 변화한다... 실제 700대 후반부터 간주석에는 쌍사자 받침도 등장하고, 800년대 중반부터 고복형도 등장하며, 화사석도 담양의 무등산 개선사지 석등처럼 팔각면이 다 뚫리는 경우나, 은해사처럼 화사석을 둘로 나눈 경우도 발생한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 가장 우아한 앙련 중 하나여서 골라봤다...>

<원원사지 석등 복련... 이 연화하대석은 문양도 백제풍이 남아있지만, 넓은 사각의 지대석에 곧바로 복련이 조각된 초기 형태다...>

<석굴암 앞 석등부재... 석굴암 조성과 같은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특징이면서 통일신라 연화문의 가장 대표적인 문양을 잘 보여주어 인용했다...>

<경주 읍성 석등-전 흥륜사지- 연화하대석... 그리고 시대가 내려가 장식성이 부가되면서 지대석과 하대석 사이에는 이처럼 별석 혹은 하나의 부재로 또다른 중대석이 만들어진 경우로 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림사 석등이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