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다) 700년대 통일신라 당간지주
그리고 석등과 함께 또 하나 살펴봐야할 석조유물이 당간지주다. 이미 여러편의 글에서 내 의견을 피력한 바 있지만 이 글에서는 처음 언급하는 것이니 700년대 당간지주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당(幢)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①인도에서 시작된 번과 당 게양문화가 중국에 정착한 것은 한나라 시기고, 500년대 중반이면 백제와 신라 등 한반도에서도 매우 활성화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물론 불교의 당은 깃발로 상징과 신호체제를 정비했던 군사문화와 결합되면서 중국이나 한반도, 일본 등에 빠르게 정착했지만, 이를 세우는 기초는 김유신장군 기간지주 같은 매우 단순한 양식의 깃발꽂이 기능에 불과했고, ③우리나라처럼 석당간과 석당간지주가 독창적인 양식을 가지고 정형화되면서 각 지방의 특색을 갖추며 전국적인 분포도를 보이고, 또한 천여년 넘게 지속적으로 조성된 예는 인도나 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고, 사찰의 장엄과 개인의 기원목적이 아닌 풍수비보의 목적으로 독립적으로 조성된 것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부안 죽막동 해양제사 유적 교역로/국립전주박물관에서... 당간지주에 대한 이야기를 죽막동 유적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정착된 이곳에는 제사장이었던 천군이 의례를 주관하던 소도들이 남아있고, 그곳에는 신목과 이 우주목을 간략화시킨 솟대 등이 있었는데, 현재까지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 유독 석당간과 석당간지주가 발달한데에는 그만한 문화적 연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5~6세기에 가장 번성했을 것으로 보인 이 죽막동 제사유적에서는 백제의 유물들 뿐만 아니라 남북조시대의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가야 등 고구려를 제외한 당대 주변 모든 나라의 폭넓은 시기 유물들이 고르게 출토되었다...>
<죽막동 제사 유물 석재모조품 재현물들... 왼쪽에 보이는 것이 숭배의 대상인 신목이고, 여기에는 원판, 칼, 거울, 매미, 낫, 도끼, 종, 곡옥, 판갑옷 등 다양한 모습으로 가공된 돌로 만든 모조품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유물들은 죽막동이나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죽막동에서는 신목 주위에 금줄을 치고 흙으로 만든 말(제갈공명처럼 인육을 대신한 만두를 만들었듯...) 등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나주 동문밖 석당간/보물49호/높이 11m/고려시대... 대부분 석당간은 구조적인 문제로 파괴되고 당간지주만 남은 게 대부분인데, 나주 석당간은 상부까지 완전히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하는 기본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석당간 외에도 담양 읍내리(보물505호/높이15m)와 부안 서외리, 영광 단주리, 양산 통도사에 석당간이 남아있는데, 통도사를 제외하면 모두 옛 백제(특히 마한)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 지역에서는 석당간이 지속적으로 유지 보수 관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외 철당간까지 남아 있는 곳으로는 청주 용두사지,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 보은 법주사 등 4곳이 있는데, 역시 이들 모두 옛 백제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석당간이 이처럼 폭 넓게 문화(예전 어르신들 말씀에 ‘좌우당간~~에’ 란 말도 있다^^)와 신앙의 대상으로 정착한 이유는 고대부터 한반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인류의 보편적 신앙 중 하나인 우주목신앙과 거석신앙에 융합한 불교의 생명력 혹은 포용력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주술적인 입목신앙이 국가적 행사로 승화된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이나 통일이전 신라의 금관에서도 확인되듯, ④우주목이 간소화된 솟대(소도의 신성을 표시)가 사찰의 신성을 표시하기 위한 당간으로 변형 유지된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이를 ⑤가장 선도적이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곳이 백제인들 특히 마한지방이었다고 보며, 그런 이유로 익산 미륵사지에서 만든 석당간이 우리나라 최초였다고 본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백제의 유작으로 보는 이유 ;
(당간지주에 대한 제 이전 글을 보신 분들은 당간지주의 구조만 이해하시고, 건너 뛰시는 게 좋을 듯...)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236호/높이4m... 대부분 통일신라 중기 이전으로 제작편년을 추정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백제시대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기단의 안상이 백제 불상에서 사용했던 문양이 아니라는 점과 절정 기법의 세련미와 우아함을 갖춰 의구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백제 석조유물의 수준을 보면 미감은 문제될 것이 없고 기단부 역시 후대에 보수 관리하면서 교체되었다면 관점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구조적으로 ⓐ 당간지주란 기단 위에 지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박힌 지주를 기단이 감싸는 구조로 만들어진다. 즉 4m 높이의 지주가 세워지려면 최소 2m 가량이 묻혀야되니(노출이 2/3, 땅에 묻힌 부분이 1/3 정도로 추정한다), 당간지주는 6m 길이의 석재를 다듬어 세우고 기단과 지대석은 이를 대지에 긴결시키는 부재 역할을 하게 된다... 때문에 위 사진의 서편 당간지주 기단이 모두 파손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당간지주는 서 있는 것(부석사, 굴산사 등 수많은 당간지주가 기단없이 지금까지 서 있는 이유다)이며, 그만큼 기단부 파손과 훼손은 매우 잦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부터 발굴시 남긴 기록사진을 보면 현재처럼 보수 되기 이전에도 기단과 지대석은 완전히 땅에 묻혀 있거나 당간지주와 분리되어 있었듯이, 장마 등으로 인한 토층의 유실로 인해 기단부는 쉽게 파손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단은 얼마든지 후대에 교체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 두번째로 미륵사지 가람배치도와 복원 모형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3원3탑3금당 밖으로 당간지주를 감싼 회랑의 존재를 의아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즉 미륵사지는 3원과 연지 사이에 회랑으로 구획된 별도의 공간이 있었고, 이곳에는 당간지주 외에 아무런 유구의 흔적도 없음이 발굴조사 결과 확인됐다... 이는 630년대 미륵사지가 창건될 때부터, 3원으로 들어가기 전 당간만 조성된 공간은 야외 법회나 의례가 진행될 가장 넓은 공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니, 백제에서 새롭게 만든 석당간은 탑이나 금당만큼 신성을 가진 상징이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석당간은 신목과 솟대의 무속적 전통을 불교가 수용한 결과이며, 이후 풍수비보의 표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주술적 상징으로도 유효한 기능을 가졌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가람배치와 당간지주 조성이 700년대 이후에 증건한 결과이거나, 경덕왕대 김제 금산사를 창건한 진표율사에 의해서도 미륵사가 보수됐다는 추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지만 실제 660년 백제멸망에서부터 금산사가 창건되기까지 100여년간 옛 백제지역에는 일체의 건축/토목사업이 진행되지 않았고(사찰에 대한 창건이나 중건도 화엄사-금산사-법주사 등 경덕왕대부터 시작해, 귀신사 등 화엄십찰이 백제지역에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800년대 이후다)송나라에서 편찬한 송고승전에도 나오는 진표율사의 주요행적은 삼국사기 등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미륵사를 중건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 덧붙인다면 경덕왕이나 혜공왕 역시 금산사나 법주사 등 새로운 미륵도량에는 신라를 위해 시주를 할 수 있었도, 백제의 가장 상징적인 사찰인 미륵사의 중건을 반겼을리도 만무하다고 생각되고... 때문에 부분적인 보수는 있을 수 있어도 기존의 3원에 버금가는 공간을 확장하면서 대규모 회랑을 증축하고 당간지주를 새롭게 조성했다는 것은 무리가 많다고 생각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전창기/1999.03월... 미륵사지 박물관 모형과 가람배치도를 비교하면서...>
ⓓ 마지막으로 미륵사와 금산사 당간지주가 쌍둥이처럼 유사하다는 점을 전제로, 금산사 당간지주를 조성할 때 미륵사에서도 당간지주만 다시 교체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추론이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양식적인 면과 시대까지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점 역시 반론할 수 있는데, 통일신라 당간지주는 목당간에서 석당간으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며, 당간지주도 이전 양식과 일체의 동질성이 없이 변화(탑리리탑에서 감은사탑으로 갑자기 둔갑하듯이)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불국사 유형의 당간지주는 그 시대에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포되기 시작해 동일한 패턴을 유지하게 된다. 즉 한 번 바뀌는 건 어렵지만, 정형화된 양식이 다시 새롭게 변화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금산사 당간지주는 불국사 유형을 따르지 않았을까?...
이유는 둘중 하나다. 새로운 유형이 창작됐든지, 이전에 있었던 유형을 충실히 계승했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미륵사 유형과 불국사 유형은 지주 바깥면에 굴곡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양식적으로 대동소이하다(양식은 호불호의 선택 문제지 수준의 고저에 의해 판가름난 것은 아니라는 말)... 결국 금산사와 법주사의 각종 석조유물(쌍사자 석등 등)을 만들었던 석공들이 금산사 당간지주 허리에 굴곡을 두지 않았던 것은 귀찮아서가 아니라, 이미 그 지역에서 선호하는 양식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닐까?... 즉 미륵사 당간지주를 다시 교체했든, 기단만 보수를 했든 옛 백제지역에는 이미 선행했던 양식이 있었고, 그것이 전통이었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변화하지 않고 유지됐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금산사보다 크다는 말은 신성성과 의미에서도 더 높았다는 말이 되는 거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백제 유물이라 생각하는데, 이런 점들을 감안해 통일신라의 당간지주를 찾아가 본다...>
<금산사 당간지주/보물28호/높이3.55m... 규모에서만 약간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양식에 가장 수준높은 당간지주 중 하나다...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한 700년대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과 고구려 영향을 더 중시했던 신라에서는 석당간을 만들 기술력이 떨어져 600년대 중후반 문무왕/신문왕대부터 석당간지주가 정형화되지만 그 유형은 목당간이었고, 이때부터 700년대 초반까지 만들어진 것들이 경주 구황동의 분황사와 황룡사, 그리고 사천왕사(679년, 2.4m), 보문사지(보물123호, 3.8m), 남간사지(보물909호, 3.6m), 망덕사지(685년, 보물69호, 2.44m) 당간지주가 아닐까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들은 목당간을 결구하기 위한 원형 또는 사각형의 간공이 관통된 특징이 있고, 간구는 남간사지처럼 +자형도 있지만 이후 석당간, 철당간에 이르기까지 U자형으로 정착된다. 또한 당간지주 바깥면 모서리 1/2 혹은 1/3 지점부터 모죽임(모서리의 각을 45도 각도로 마감하는 방식)하거나, 상부를 완만한 사분원(1/4)형으로 마감하는 등 통일신라 초기 당간지주들은 가장 단순한 형태와 단조로운 가공에 그쳤었다.
* 700년 전후 통일신라 당간지주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123호/높이3.8m... 60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통일신라 초기의 당간지주들은 모두 기단과 지대석이 분실된 상태다(그만큼 땅에 깊이 박힌 것만 남아있을테고)... 목당간 지주의 경우 석당간 지주에 비해 비교적 간격이 좁고 간공이 관통되어 있는데, 간공은 일반적으로 원형에서 사각형으로 갯수도 3개에서 2개로 작아지는 것으로 추정하는 거 같다...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와 중초사지 당간지주(826년)처럼 바깥면에 1단의 굴곡이 있는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4각형에 3개의 간공이 뚫려있다...>
<경주 남산 남간사지 당간지주/보물909호/높이3.6m... 어느쪽이 먼저일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원형에 2개의 간공이라 조금 뒤로 설정해봤다... 왜냐하면 사천왕사지에서 망덕사지 당간지주까지 변하는데 불과 6년 차이로 이 시기의 제작편년 추정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단 간공에서부터 모죽임이 나타나있다...>
<망덕사지 당간지주/보물69호/높이2.44m... 설화처럼 임시로 조성했기 때문인지 규모가 작고, 개인적으로 석당간 지주로 생각하고 있는데 미륵사지나 금산사와 달리 내부에 간공이 없다. 물론 고정핀을 끼워 넣을 간공이 없는 당간지주도 많긴 하지만... 남간사지와 마찬가지로 지주 바깥면 모서리는 모죽임(또는 모따기라고도 한다) 되어 있다...>
그러나 700년대 초반 성덕왕대 들어오면서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에 대한 요구는 당간지주의 조형성까지 자극하게 되고 불국사에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진 당간지주로 ⓐ고 신라 지역(소백산맥 동남쪽)에서 유행한 바깥면에 2단 굴곡을 둔 불국사 유형으로, 경주 불국사, 삼랑사지(보물127호, 3.66m), 주전지 등과 영주 숙수사지(보물58호, 3.65m), 고령 지산동(보물54호, 3.14m)당간지주가 있고, ⓑ고 백제지역(충청/전라/경기)에서 지속적으로 전승된 바깥면 중앙에 세로방향의 돌출된 선문양이 있는 미륵사지(보물236호, 4m) 유형인 금산사 당간지주(보물28호, 3.55m)가 있는데, 공통적으로는 상부의 사분원에 1단 굴곡을 두어 공굴림하고, 기둥의 측면 외부로 돌대(돌출된 선문양)를 양각하는 등 공예적 구성이 돋보이며, 특수형으로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보물910호, 1.46m)가 있는데 이 시기에 강조되는 장식적 구성의 방편이었다고 보인다.
* 700년대 중반 통일신라 당간지주 ; 불국사형...
<불국사 당간지주... 망덕사지 당간지주까지 초기의 양식을 일거에 뛰어넘는 아주 세련된 당간지주가 탄생하는데, 그 전형이 불국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참고로 사진의 맨 왼쪽 당간지주는 파손품을 교체한 후대 것으로 보인다(너무 차이가 나지만))... 미륵사지 유형과 동일하게 상부와 측면의 돌대(돌출된 선문양)가 있고, 바깥쪽 중간 허리부분을 세련된 비례와 수법으로 1단 층급을 두었는데 이후 경상도 지역 당간지주의 원형으로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최고 수준의 당간지주 중 하나라 생각되는데, 이건 왜 보물로도 지정되지 않았을까?? 그러니 높이도 규격도 아무런 자료도 없지...ㅉㅉ>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58호/높이3.65m... 기단과 지대석 등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매우 날씬하고 상승감이 잘 살아있는 당간지주다... 안쪽면의 긁힌 자국들이 당간의 붕괴시 발생한 흔적일지 모르겠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아주 능숙한 석공이 다듬은 솜씨임도 볼 수 있고...>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보물127호/높이3.66m... 숙수사지와 비슷한 높이인데 매우 우람하면서 돌대 등 선문양을 제외하면 매우 윤곽이 뚜렷하게 가공했다... 세부 디테일도 기계적이고 도식적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중간의 층급 가공에서는 아주 세련된 그라이언트 기법까지 볼 수 있어 감탄스럽기도 한 당간지주다... 물론 여기에 측면의 돌대가 강조되었다면 조잡해질 수도 있겠다 싶은데, 불륨과 매스만으로 미감을 살려낸 아주 현대적이고 수준높은 미감을 가진, 게다가 자신만만한 석공이 만들었을거라 추측해본다...^^ 불국사형의 최고 완결태가 아닐까 생각도...>
참고로 ⓓ고구려와 접경지역이던 경상도북부와 강원도 일대에는 800년대부터 강릉 대창리나 수문리 양식의 당간지주들이 만들어지는데, 망덕사지처럼 아무런 장식과 문양이 없는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초기 유형과 달리 괴체감과 당당한 힘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고려시대까지 전승된다(고구려형이라 부를지, 대창리형 혹은 강릉형이라 부를지 고민하고 있다...^^).
* 700년대 이후 고구려형 당간지주들...
<고령 지산동 당간지주/보물54호/3.14m... 바깥면에 굴곡이 있는 불국사 유형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고구려 유형을 닮았다...>
<홍천 희망리 당간지주/보물80호/높이5m... 물론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작품인데 강릉 당간지주로 올릴만한 사진이 없어 대체한다... 대체로 옛 고구려지역의 당간지주는 전후좌우 아무런 문양이 없이 굵고 당당함으로 승부하고 있는데, 사진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지만 평양의 중흥사지 당간지주도 양식과 미감이 거의 비슷하다...>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고려시대/높이3.9m... 내 개인 생각이기는 하지만(내 글이 다 그렇지...^^) 이 고구려 유형의 당간지주에 최대의 가공을 했을 때 완결태가 바로 이 법천사지 당간지주가 아닐까 싶어 같이 올려본다... 이 지역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 바깥면 모서리도 모죽임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박한 게 더 힘차게 보이지 않나?^^>
초기 백제의 미륵사지에서 3원3탑3금당 앞에 독립된 당간지주 영역을 두는 등 별도의 신앙체계를 갖추고 쌍탑식 당간으로 가람에 편입된 당간은, 600년대 중후반 통일신라의 도심 평지형 가람의 목당간(랜드마크적 효과)에서 출발해 불국사 유형(쌍 당간)으로 정착되고, 이후 구산선문이 주도하는 통일신라 후기 산지가람이 유행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세갈래로 지방화 되는 특징을 보이지만(일부에서는 당간지주의 확산이 선종에 대항하기 위한 교종, 특히 화엄종의 전유물이었다고 말하지만, 이는 침소봉대에 따른 비약이거나 결과를 원인으로 대체하거나 하는 착각이라 생각한다),
공간과 석재확보 등의 문제로 한기의 석당간→(가공과 조립 관리의 문제 때문에) 철당간으로 정착하고, 산문을 중시한 가람배치와 사내에서 거행된 야단법석을 활성화된 고려시대에는 일주문이나 괘불대와 중복 때문에 차츰 사라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일부 풍수비보의 일환으로 독립적으로 조성되다가, 주불전 영역에 괘불대 형식으로 퇴화되고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통일신라작 31기, 고려시대작품 19기 등 80여기가 남아있으며 이중 국보와 보물이 28기 가량 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당간지주 역시 700년대 가장 세련된 양식이 전형화 되면서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주요한 축으로 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국사 당간지주... 돌에 선을 음각하는 것은 쉽지만, 면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선으로 그은 것도 아닌데, 저처럼 얇은 면을 깎아 내려면 얼마나 세심한 정성이 필요했을까? 보일듯 보이지 않을듯 그 깊이까지 계산한 미적감각은 정말 탁월함을 넘어선 게 아닐까? 내가 불국사 당간지주를 좋아하는 이유다... 아쉬워서 다시 한번...>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보물910호/높이1.46m... 연화문이 새겨진 독특한 형태인데 이런 장식문양이 있는 당간지주로는, 충주 미륵사지와 고창 흥덕 당간지주가 있다... 평면적으로 구성된 연꽃잎은 광배와도 틀리고, 앙련이나 복련과도 다른 묘한 느낌... 간구와 전체 지주를 1단 굴절시켜 가공한 것을 보면 상당한 공력과 고민이 따랐을 것으로 생각되고, 실제 땅에 묻힌게 훨씬 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당간지주다... 한번 뽑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불쑥...^^>
<석당/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런 석당들을 보면 당간용인지 석등용인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석당은 자세히보면 하부가 상부보다 두꺼운 민흘림으로 만들어져 있어 석당의 일부분으로 보는 게 맞을 싶다... 아무튼 석재의 특성상 원기둥 형식으로 적층한다는 것 자체가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철당간으로 만들어지거나 보완된 용두사지나 담양 읍내리가 16~20m 가까이 올라갈 수 있었지만, 석당간의 경우는 나주에서 처럼 11m 정도를 넘지 못했다... 즉 석당간은 만들기도 어려웠지만 효과를 크게 내기 어렵고, 보존과 관리가 특히 어려웠다는 말이다... 결국 영구적이지 않은 목재와 유지가 어려운 석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철당간이 정착하게 된다...
참고로 산지가람에서 당간은 산의 경사와 주변 나무들로 인해 장엄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어려운 점도 있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석재의 확보와 운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부석사의 경우처럼 4.3m 높이의 지주를 세우려면 6.5m 크기의 바위가 운반되어 두개 이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인데(구조적으로 석당은 1~2m 내외 부재들을 연결하여 만들 수 있지만, 당간지주는 하나의 돌로 완성되야만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즉 당간지주 조성은 석불이나 석탑처럼 정교한 조각과 많은 부재의 결구 같은 복잡하고 세심한 공정은 없지만, 가장 큰 규모의 석재 확보와 운반이라는 난관을 돌파해야 가능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좁고 가는 양식적 한계가 있어 조형성을 살리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물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나 로마의 열주 같은 장식을 만들 수도 있지만, 더 높고 큰 당간이란 주재를 지지하기 위한 부재로서 당간지주의 숙명과 한계가 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산지가람에서 당간지주를 세운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성과 인력이 동원되지 않고서는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다... 게다가 일주문 등 산문이 사찰의 경계를 대신하면서 당간지주 조성은 쉽게 포기될 수도 있었고(이런 이유로 선종사찰에 당간지주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처럼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즉 어려웠던 것이지 교리적으로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말)... 아무튼 사각기둥에 만족해야 했던 당간지주에 살리고자 했던 것은 기능적 안정감과 시각적 상승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석재의 괴체감을 살리면서 자칫 둔중해질 수 있는 석재의 질감을 살리면서, 최소의 가공과 문양을 새겨 안정감을 훼손하지 않고 상승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 미륵사지와 불국사에서 만든 당간지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가장 힘겨운 노역에 가장 조심스러운 가공(쉽게 부서졌을테니까), 가장 장대한 기물에 최소의 조각, 상승감만 있는 선형 부재에 살려야하는 안정감 등 당간지주는 석탑과 또 다른 상반된 요소들을 통일시킨 불교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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