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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28> 불국사 다시보기(1)- 한국적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의 원형...1308

 

 

 

 

 

 

 

 

 

10. 700년대 후반 전성기 통일신라 불교의 완성

 

 

나는 지금까지 통일신라의 삼층석탑은 어떤 연원과 배경속에서 만들기 시작해, 어떤 유형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그 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리고 우리가 답사여행을 통해 볼 수 있는 석불과 석등 등 다른 불교미술과 비교하면서 당대 석탑의 비중도 가늠해 봤다.

 

그러면 이제 이처럼 상반된 미감을 조화롭게 해석하여, 정연함과 균질함에 우아한 세련미를 함께 갖춘 통일신라의 석탑은 왜 지속적으로 제작되지 못하고 경덕왕(742년)-혜공왕(765년)-선덕왕(780~785년)을 마지막으로 변해갔는지, 왜 석불과 석등, 승탑 등으로 불교미술의 중심이 이동하는지 불국사를 통해 통일신라 혹은 경주의 문제점과 한계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불국사 조감도... 무리가 되는 건 인정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이해를 위해 불국사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내 생각이지만 670년대 통일전쟁이 일단락되면서 문무왕-신문왕대 통일신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덕왕에 이르러 전성기를 열기 시작 경덕왕대에서 통일신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 문화적 전성기는 문무왕대부터 시작한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을 통해 정치적, 사상적, 행정적 체계를 이뤄나가는데, 국가적 역량이 동원된 이 대규모 프로젝트는 경덕왕대를 끝으로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국가든 정체성 확립기와 완성기를 기념하는 것은 건축이었다. 로마도 당나라도 일본도, 그리고 고구려, 백제도... 그리고 이를 통해 내적인 한계를 돌파하면 국가는 더욱 융성해지지만, 쏟아낸 잠재력에서 새로운 동력을 찾지 못하면 곧바로 몰락하는 것이 모든 국가들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경덕왕대 통일신라 역시 내적으로 응축된 힘을 대외적 확장이나 이상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하는데, 그 끝에 위치한 게 불국사와 석굴암 조성사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제 그 불국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불국사 전경... 통일신라의 모든 역량이 집결된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해 나는 얼만큼 충분히 생각하고 있을까? 하나씩 벗겨보고 싶다..>

 

 

 

 

 

   1) 불국사 다시보기

 

 

지금은 해제됐지만 우리나라 사적과 명승 1호로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통일신라 불교미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이자 인류의 세계문화유산이다. 언감생신, 이런 불국사를 내가 중언부언하는 게 어설프겠지만, 그래도 평소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 몇가지를 메모해보려 한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불국사에는 다보탑(국보20호), 삼층석탑(국보21호), 연화칠보교(국보22호/극락전-안양문쪽), 청운백운교(국보23호/대웅전-자하문쪽), 금동비로자나불(국보26호), 금동아미타불(국보27호), 사리탑(보물61호), 석조(보물1523호), 대웅전(보물1744호)과 삼층석탑에서 사리갖춤으로 출토된 世界最古(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126호) 등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대웅전과 극락전 앞의 석등과 금당 영역을 떠받치고 있는 대석단, 당간지주 등 비지정이지만 보물급 이상 유물들로 꽉 채워져 있다.

 

 

<석등과 다보탑... 다보탑 상륜부는 저 상태가 마감일까? 그 위로 용차와 보주는 없었을까? 그리고 그 위로 찰주는 노출되지 않았을까? 뭐 이런 거까지 찾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불국사를 이야기하면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대웅전), 무량수경/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미타불(극락전),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비로전) 세계가 복합적으로 구현되어 있으며, 특히 대웅전앞 다보탑과 석가탑은 법화경의 교리에 입각해 다보여래와 석가여래로 기획되었다거나, 석가탑과 다보탑, 금당이 정삼각형(중심점인 대웅전 계단에서 석가탑까지를 반지름으로 원을 그리면, 석가탑/다보탑/금당 뒷벽이 정삼각형 꼭지점에 위치한다)이 그려지는 매우 과학적이며 기하학적 완결성(석가탑과 다보탑의 중심거리는 86당척으로, 이를 이등분한 43당척이 대웅전 영역의 기준장이다/요네다미요지)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척도로 극락전 영역까지 동심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연구결과(홍광표)도 있는 걸보면 우리나라 최고의 유적지답게 다양한 연구들이 뒷받침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 거 같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불국사에서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건축의 외부공간/안영배 저/보진재/1998년에서... 불국사는 가람의 평면적 배치뿐만 아니라, 입체적으로도 가장 편안한 인간적 스케일로 기획되고 건축되엇다...>

<석가탑과 다보탑과의 거리... 이 기준은 비단 불국사 대웅전 영역의 기준 척도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사찰의 기본단위로도 적용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척도라고 생각된다...>

 

 

 

 

인도의 윤회설이 연상되는 김대성의 설화는 왜 만들어졌고, 전생과 현생의 부모가 의미하는 건 무엇이며, 대웅전 앞의 두탑은 처음부터 석가탑/다보탑으로 불렸는지, 과연 석가탑이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이며 조성시기는 김대성이 손을 대기 시작한 750년이 맞고, 대석단은 어떻게 해석할까? 등등의 의문이 그것이다.

 

여기에 몇차례의 여행과 스쳐지나간 풍월들이 모이면서 현재 팔작지붕과 맛배지붕으로 만들어진 안양문과 자하문의 양식과 규모는 적정하며, 대웅전 앞의 좌경루와 우종루 외에 극락전 오른쪽 끝에는 어떤 누각건축이 있어야하고, 연화칠보교와 청운백운교에도 많은 의미가 있는데 관음전이나 비로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징적 의미가 없었을까? 하는 점 등으로 질문들은 쌓이게 된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내 전문영역이 아니므로 의구심을 호기심으로 각색만하면 어려울 거 없지만, 최소 몇가지는 정리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완성 - 불국사

 

 

먼저 불국사가 창건되면서 통일신라의 가람배치, 더 나아가 한국적 가람배치의 원형이 완성됐다는 점이 중요한 거 같다. 통일신라의 사찰건축은 (황룡사 가람배치 등에 영향을 미쳤으나) 도교의 기승으로 가람건축이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 고구려와, 정림사-미륵사-왕궁리사지 등으로 이어지다 맥이 끊긴 백제, 고구려 정복과 함께 800여년만에 요동까지 진출하며 천하패업을 달성한 당나라 가람배치 양식 등을 모본으로 600년대 후반 사천왕사-망덕사 등 다양한 가람배치를 실험한다.

 

그리고 700년 전후 감은사/고선사/나원리/황복사/장항리/천군리사지 등에서 ' 석탑 ' 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찰건축의 규모와 체계로 변화를 모색하여, 드디어 75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의 전형을 창출해내는데, 그 최고의 경지에 불국사 창건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은사지 전경... 앞에서도 밝혔지만, 감은사 등 700년대 중반까지 만들어진 사찰의 중심은 금당이나 불상, 경전이 아니라 탑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때문에 2탑1금당 가람배치 역시, 탑의 비중을 축소하여 금당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탑의 위상을 더욱 중시했기에 통일신라인들이 적용했던 양식이라 생각한다...>

 

 

 

 

물론 불국사는 모든 사찰이 따라야할 기본단위나 척도가 되기에 규모와 수준, 완결성에서 비교불가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대사찰이 갖춰야할 체계와 규모뿐 아니라 불국정토가 구현될 수 있는 사찰의 입지, 가람배치의 양식, 각 불전의 공간구획과 척도, 전각/석탑/불상/석등/동종/당간지주 등 주요 건축과 장엄기물들의 구성과 배치, 주변환경과의 조화와 조경 등 기본적인 규준과 척도, 그리고 양식에 이르기까지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의 교과서적인 답안을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또 이렇게 절정에 이른 모범이 있어 700년대 후반부터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부석사/해인사/동화사 등 통일신라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는 700년대 초반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개척할 수 있었고...

 

이렇게 본다면 불국사 창건은 우리나라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그리고 건축적 공간경영은 불국사 이전과 이후로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최상의 품격을 갖춘 유일무이한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이제 일본의 동대사를 비롯해 화엄사/금산사/법주사 등 동시대 조성된 사찰과 그 이전 이후 가람배치를 머릿속으로 연상 비교하면서 불국사를 다시 찬찬히 뜯어보기로 한다.

 

 

<불국사 무설전... 강당의 호다...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①맨 먼저 눈에 띠는 건 <대석단>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불국사에 이르러 통일신라의 가람은 수직적 배치의 특징을 가지고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즉 이전까지 고구려-백제-신라의 가람배치는 도심형 평지가람을 전제로 했다. 당연히 수평적인 구조였고, 사찰의 위계는 남북을 중심축으로 한 전후 배치에 만족해야 했다. 때문에 건물의 높고 낮음과 넓고 좁음만 있을 뿐 실제 위계는 맨 앞에 있어서 상징이 된 것인지, 맨 뒤에 배치했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인지가 불분명한 맹점이 있었고, 사찰의 중요도와 권위는 면적의 확대와 해당 건축물의 규모와 높이에 의해 좌우될 뿐이었다(일본 나라의 동대사와 금산사/법주사 등을 생각해보라). 천재적인 건축가 김대성이 이런 맹점을 해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바로 사찰의 수직적 구성이었다고 생각된다.

 

<마음으로 그린 꿈, 역사로 이어지고/도면에 담긴 우리 건축/수원화성박물관에서... 아무래도 불국사의 출발은 석단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신라인들에게 가장 큰 크라우마는 백제였을 것이다. 게다가 성덕왕대 통일신라는 2차례에 걸친 일본의 대규모 선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동시기 일본은 이미 동대사를 완공하고 있었다... 끝나지 않았던 경쟁관계... 불국사는 어떻게 동대사를 극복하려 했을까?>

<석단을 만들어 수직적으로 공간을 경영한 것은 사찰건축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미 중국의 많은 사찰에서 시도되고 있었고, 그 연원은 궁궐건축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러나 불국사에서 시작된 통일신라의 가람경영에 석단은 일관된 양식으로 나타나, 한국적 원형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본래 인도에서 유래된 불교의 우주관과 상상속에서 구성된 수미산은 수직적 체계를 가진 신의 영역이었다. 때문에 관념적 완결성을 선호한 통일신라인들은 황룡사 구층탑 같은 수직적 건축을 선망하거나, 넓거나 접근성이 편안한 부지보다 감은사/장항리사지처럼 주변에 비해 높은 부지를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국사를 조성하면서 김대성은 속세인 사바세계와 불국정토를 수직적인 층급으로 나누어 구획하기 위해 중문과 회랑 밑으로 ‘ 대석단 ’ 을 만들었는데, 자연지형의 절토가 아닌 인위적인 복토를 통한 방식(불국사가 화엄사나 부석사 등에 비해 지진에 약한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이었다. 절토보다 훨씬 많은 공사기간과 인력이 동원(불국사는 김대성이 주도하기 10년 전에 이미 착공됐다)되었지만, 이로 인해 불국사는 각 금당의 높낮이를 조정하면서, 해당 영역의 넓고 좁음에 높고 낮은 리듬과 변화까지 주어 보다 입체적이고 밀도 있게 불국정토를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1910년대 불국사/같은 책에서... 불국사가 관리되지 않았을 때 석단이 부분적으로 붕괴된 것은, 절토한 부지가 아니라 복토한 땅을 석축으로 북돋아 지진 등 자연재해에 취약한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불국사의 석단이 중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표적인 석단을 비교해 볼까? 먼저 불국사 ; 뭔가 어설프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1910년대 사진에서도 확인되듯 처음부터 불국사의 석단은 인위적으로 가공한 부재 사이로 자연석을 쌓아서 만들었다... 인공과 자연의 이질적인 조화? 불국사는 석단에서부터 비대칭의 조화를 염두에 두었다는 말이다...> 

<부석사 석단... 이에비해 부석사는 철저히 최소로 가공한 자연석을 말그대로 막쌓기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높이와 규모에서 그 엄정함과 장중함은 단연 압도적이다...>

<화엄사 석단... 비교적 최근에 개축한 석단으로 그랭이 기법으로 또다른 미감을 보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거 같으면서도 철저히 인공적인 방식이다... 불국사와 부석사, 그리고 화엄사... 호불호로만 접근할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②두번째로 지식인(관념적이거나 숨은 그림 찾기를 좋아했을 것 같은) 건축가 김대성은 석단 혹은 석축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다양한 층수의 계단에, 수직적인 수미산과 도리천에 이르는 불교교리를 적극 수용하여 건축적으로 구현했다고 생각된다(부석사의 석단과 계단을 생각해보라).

 

먼저 33 도리천에 이르기 위해 청운백운교를 33개의 계단으로 형상화하고, 아미타정토로 극락왕생하는 것이 쉽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극락전 앞의 연화칠보교는 청운백운교보다 더 낮게(!) 조성하면서 7보와 10념왕생을 의미하는 계단에 구품연지를 두어 극락정토에 이르는 도정까지 구현했다. 또한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내려오는 16단의 계단을 3영역으로 나눠 상품, 중품, 하품으로 구분되는 극락왕생의 3배에 관무량수경의 16관법을 상징(3도 16단이라 부른다)하게 하여, 총 48대원을 이뤄 극락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통관절차를 형상화했다.

 

 

<석단과 계단/위 같은 책에서... 수직적으로 공간을 경영하려면 필연적으로 계단이라는 새로운 건축적 요소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건축가 김대성은 이 계단에 당시에 이해 가능한 불교의 교리를 모두 담으려 했던 거 같다...>  

<안양문 아래 연화칠보교... 우리는 불국사와 한국의 사찰건축에서 비대칭의 조화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불국사 전면에 비대칭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지 않았다... 청운백운교에 비해 절반에 불과한 연화칠보교도 그 의미를 해석하는데 급급했고... 만약 통행이 가능했다면, 당신은 청운백운교를 통해 자하문으로 들어서겠는가? 아니면 연화칠보교를 통해 안양문으로 먼저 들어서겠는가? 만약 이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불국사에는 훨씬 다양한 동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물론 나라면 한쪽으로 올라가서 - 한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을 거 같은데...)^^>

<대웅전 영역에서 극락전으로 통하는 3도 16단... 물론 회랑 기둥을 기준으로 형성된 분리대는 자연스럽게 복잡한 인파의 통행을 정돈하는 기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기능에 또 다른 의도를 김대성은 숨겨 놓았다...>

<화엄사 각황전에 오르는 계단... 불국사와 비슷하게 화엄사에도 같은 유형의 계단이 있다(재료분리대처럼 만들어진 장석이 있는 계단수를 세어보면 16단이 맞나?^^)...  물론 시각적으로 상승감과 함께 안정감을 두기 위해 분리대를 일정지점에서 끊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축적 의도외도 계단의 구성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관음전에 오르는 급하고 높은 계단을 보락교 혹은 낙가교라 불렀는데, 이는 관음보살이 주처하는 보타락가산(낙산사를 생각해보라)을 의미하듯, 우리가 모르거나 복잡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불국사의 수직적 구성에 따른 모든 계단에는 당대의 교리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

 

결국 불국사에서 시작한 가람의 수직적 구성은 사찰 순례를 위한 계단을 필수요소로 부각시켰고, 신라인들과 우리나라사람들은 계단에 온갖 상징적 의미들을 부여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든다. 5/ 7/ 9/ 10/ 12를 비롯해 108계단에 이르기까지, 이후 만들어지는 모든 사찰건축의 계단이 기능적인 편의성에 멈추지않고, 꼭 무엇인가 의미를 내포한 숫자로 구성해야 할 거 같은 강박증까지 만든 출발이 불국사 계단에 있지 않을까?

 

 

<불국사 극락전... 여기에 오르려면 6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3,5,7... 홀수에 익숙한 우리에게 불국사에는 짝수로 마감된 계단들이 많다... 관음도량인 낙산사 지장전 앞에도 6도교라는 게 있었다고 하는데, 육도윤회에 빠져 있는 중생들이 쉽게 왕래하여 법을 청해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름을 붙였다(양상현/불국토사상에 따른 다불전 사찰의 조영개념 연구)는 말이 있듯이, 이 계단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엄사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재료분리대가 시작하는 좌우 기점에는 다보탑 계단처럼 난간석이라 불리는 귀기둥이 세워져 있었을텐데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게 있었다면(각황전 앞에는 살아있다) 훨씬 시각적으로 안정적이었을텐데... 아무튼 이렇게 4단으로 나눠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알려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