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3)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들(720~780년대)...
(3) 700년대 조성된 석탑과 석불/석등/동종 등 다른 불교미술과의 상관관계
가) 700년대 통일신라 석불
나) 700년대 통일신라 석등
다) 700년대 통일신라 당간지주
라) 700년대 통일신라 금속공예
마) 700년대 통일신라 불교미술과 석탑
라) 700년대 통일신라 금속공예
또 이 시기의 금속공예까지 함께 살펴본다면 ①700년 전후 사리장엄구로 출토된 나원리탑 금동불입상, 황복사탑 금제불입상과 좌상을 시작으로 600년대 예상하지 못했던 상당수의 수준높은 금동불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를 통해 삼국시대 유행하던 호신불 성격의 금동불 등 소형불상이 불탑의 사리장엄구로 흡수 계승되고 있다는 것과, ②금속공예가 석탑조형에 복속되어 있지만, 세부 디테일이 석조와 달리 매우 정교하면서 장식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 소재의 특성이 있어, 광배와 좌대, 복련과 앙화 등 금속공예에서 선도적으로 실험된 다양한 양식과 습득된 경험이 다시 석불과 석등 조형 등에 반영되는 상호교류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신라 금동불/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제 금동불에 대해 사진으로나마 몇점을 감상해보자... 순서대로보면 맨 오른쪽이 700년대 중반 만들어진 약사여래고, 맨 왼쪽이 700년대 후반의 비로자나불, 가운데가 800년대 만들어진 비로자나불이다... 양식적인 면은 잘 모르겠고, 700년대 중후반 약사여래가 집중적으로 만들어지다가, 800년대 들어서면 비로자나불이 많이 조형된 것을 알 수 있다...>
<금동불/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불상과 아래 보이는 입상들은 모두 비슷한 손모양을 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모두 약사여래라 생각하는데, 모두 700년대 만들어진 불상들이다...>
<왼쪽은 경주박물관, 오른쪽은 중앙박물관 전시품이다... 왼쪽 금동불은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확실한 약사여래고, 좌대 복련의 문양을 기억할만 하고, 오른쪽 금동불에서는 동적으로 표현된 왼쪽 발모습이 재밌어서 올린다...>
③그리고 7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소조불을 대신해 분황사 금동불 이후 150년만에 상당한 금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대형 금동불이 조형됐는데, 불국사의 비로자나불좌상(국보26호)과 아미타여래좌상(국보27호) ,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28호)이 그것이며, ④700년대 후반 임해전지 출토 금봉불판과 석불상 조형에서 나타나듯이 다양한 크기의 약사여래(동방 정유리국을 관장하며 질병을 관장한다는 기복적 성격)상이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것을 보면, 역시 민간신앙화 되면서 타력신앙으로 후퇴하는 통일신라 불교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고,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27호... 불국사에는 1.8m 정도의 상당한 규모로 조성된 금동불이 2점 있는데, 아미타불은 극락전에 비로자나불은 비로전에 모셔져 있다... 국보26호 금동비로자나불은 사진이 너무 흐려서...>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28호/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입상도 높이가 1.8m 가량으로 좌불상과 규모가 같다. 그만큼 불국사의 좌상들이 크다는 이야기가 되고, 또 이 입상과 석굴암의 각종 부조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당양식에 근거한 사실주의가 주도하던 당시 불상들은 사람과 똑같은 비례(나보다는 크지만...^^)를 가진 등신불 규모로 제작됐다... 참고로 경주박물관이나 다른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불상의 손은 일제강점기까지는 온전히 남아있었다...>
<안압지 출토 판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역시 700년대 작품으로 어딘가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관봉 석조여래 좌상/보물431호/높이4m...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금동불들이 제작되다가 800년대 들어서면 양식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 첫 사례가 팔공산 갓바위 부처로 알려진 이 좌상이 아닐까 싶은데, 이전 글에서 올린 다른 불상들과 분위기가 약간 달라짐을 비교할 수 있어 올린다... 한두가지 메모할 수 있는 건 800년대에도 여전히 경주를 벗어나면 대구 달공산 일대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중시됐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이 여래상도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로 추정되는데 그만큼 약사신앙 열풍이 700년대 후반부터 강하게 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⑤불상 외에 대규모 금속공예라 볼 수 있는 동종도 통일신라만의 독창적인 제작기법(밀랍주물법)과 양식(음통, 움통, 종구, 용뉴, 비천상 등)을 확립하면서 대중화된 것도 이 시기인데, ⑥당대에 조성된 통일신라 동종으로는 상원사 동종(725년), 성덕대왕신종(771년), 그리고 일본 시마네켄 야스기시에 있는 운주지 소장 종이 있고(그리고 이와 비슷하거나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동종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국보367호로 지정됐다가 황수영박사의 이의제기로 해제된 용문산 상원사 동종이다. 나는 이 종이 백제의 종이라 생각하고 있다^^), ⑦성덕대왕신종 등 대규모의 동종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종각이라는 별개의 전각이 가람배치에 주요건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백제에서 시작한 7당 가람배치 양식이 완전히 신라화 됐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성덕대왕신종/국보29호/높이3.75m, 무게18.9톤/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경덕왕 다음인 혜공왕 771년에 완성된 우리나라 최고의 동종... 사실 종에 대해서는 이 하나로 세상의 만종을 비교 감당할 수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중 하나다...>
<운주지 소장 통일신라 동종/진천종박물관에서... 일본 운주지에 소장된 동종의 재현품이다... 소리는 못 들었지만 통일신라종을 대표할만 하게 보인다...>
<용문산 상원사 동종... 작년(2012년)에 동종에 대해 정리해보려다 스톱했던 게 이 동종 때문이었다. 하나는 너무 모른다는 점도 있었지만, 신라종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고민하다가 이 동종의 존재를 알고나서, 직접 본 다음으로 정리를 미뤘는데 벌써 1년이 다 돼간다...ㅠㅠ 1929년 라디오에서부터 시작된 '제야의 종 타종' 행사의 장본인이 바로 이 종소리였고, 통일신라종으로 국보로 지정됐다가 가짜로 바꿔치기 됐다는 문제제기로 국보지정이 해제된 비운의 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종을 백제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60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성덕대왕신종 규모의 동종 3구를 이미 제작했다... 갑자기 어떤 기술력이 생겨서 만들 수 있었을까? 혹시 백제에서 가져간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데, 이 상원사 동종이 바로 일본종을 꼭 빼 닮았음을 사진으로 본 것... 물론 종 상대 아래에 있는 유두의 모습은 신라종 양식이지만 종선과 종대등 문양이 일본종과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많은 일본 학자들이 일본종으로 주장을 하지만, 1972년 남천우 박사는 통일신라 진품이라 주장했고, 작년에 KIST 도정만 박사가 이 종의 납 동위원소 비율을 분석하면서 일본과 중국, 북한이 아닌 남한산임을 분석하고, 제작시기도 성덕대왕신종과 100여년 시차내에 든다는 주장을 하면서 재차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 같이 올린다... 참고로 용문산 상원사에는 연원을 알 수 없지만 법주사나 화엄사 사자상에 비교할만한 멋진 사자상이 있다...>
<불국사 종루... 수미범종각이란 말에서 수미산을 형상화했음을 짐작케 할 수 있는데 다음 불국사편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아무튼 이 정도 규모의 동종들이 제작되면서 종각은 확실히 가람배치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종 제작기술의 발달은 건축과 가람배치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꼬리가 몸통을 흔든 모습일까?^^>
마) 700년대 통일신라 불교미술과 석탑
이렇게 전성기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각 분야를 간단히 살펴봤는데 이들의 상관관계를 정리해보면 ①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석탑과 석불, 석등, 동종, 승탑 중에서 이 시기에는 석탑과 석불이 월등하게 많으며, 특히 700년대 전반기는 석탑이 불교미술을 주도했다고 보이고, 특히 석불과 비교해보면 ②경주 일대에 조성된 석탑과 경주 남산에 조성된 석불을 제외하면, 석불이 조성된 곳은 10곳에 반해 석탑이 조성된 곳은 20여곳(현존 유물만 46기)으로, 질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석탑이 당시 불교신앙의 중심(최소 2~3년마다 한기씩 꾸준히 조성되었다)이었으며, ③또 석불의 경우 경주 남산을 제외하면 70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경주를 벗어난 지방에 조성된 석불은 전무하다시피 경주와 지방의 차별이 극심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경주 낭산 중생사 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석굴암과 법륭사 등 일본의 십일면관음보살상만 알고 있었는데, 정작 경주에도 있을 줄은 몰랐다...ㅉㅉ 관음보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이미지는 사라지고 경직된 표정의 완전히 남성적인 얼굴이어 아쉬웠다... 700년대...>
<경주 남산 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굴불사 사면석불의 입상들이 생각날만큼 닮은 거 같은데, 700년대 작품이다... 참고로 복련 위에 중대석 없이 앙련의 연화대좌가 꽂힌 게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의 기단부가 연상되는 듯...>
<경주 남산 용장골 약사여래 좌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그리고 다시 800년대 들어서면 약사여래좌상이 남산에 만들어진다... 현재는 광배까지 복원돼, 박물관 내부로 이전했다. 사진이 이게 더 좋은 거 같아 올린다...>
가람배치와 관련하여 ④750년대부터 통일신라의 통섭적인 학해불교가 반영되어 다불전 시대를 연 불국사 창건 이후, 석탑 없는 금당의 조성과 함께 백제 석등을 계승한 석등이 금당 앞에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면서 가람배치에 또 다른 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 ⑤좌상 중심의 석불을 비롯해 대규모 동종과 당간지주 등이 가람배치에 정착하면서 불국사에서 완성된 새로운 가람배치는 이후 화엄사, 금산사, 법주사 등으로 이어져 이전의 가람배치와 그 규모와 구성에서 완전히 차별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⑥불교를 무속적이고 주술적으로 이해했던 삼국시대의 신라에서 발달했던 금관 등 금속공예가 한동안 이어지지 못해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금동불은 제작되지 못하고, 부피감이 있는 금동불에서 느껴지는 600년대 고구려 계통과 양식과 규범에 치우친 도식화된 금동불이 주류를 이루지만, 600년대 후반부터 사리갖춤과 호신불 성격의 금동불이 본격적으로 조형되면서 예술성을 회복하고, 오히려 석불과 석등 등의 공예적 발달에 선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금동불입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제부터 보는 불상들은 모두 700년대 제작된 경주박물관 전시품들이다... 복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내가 눈여겨 봤던 것은 약사여래라는 점과 하부의 좌대다... 연꽃잎의 끝부분이 이처럼 위로 솟은 것을 귀꽃이라 하는데, 석불좌상이나 석등, 승탑의 귀꽃은 860년대부터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금동불의 제작편년이 잘못됐거나, 700년대 중반부터 금동불에서는 이미 귀꽃이 있었다는 말... 결국 좌대를 장엄했던 이런 장식적 요소들은 금동불이나 회화 등 금속공예에서부터 시작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설명했다... 참고로 좌대하부의 문양은 600년대 백제와 완전히 다른데, 안상이란 것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역시 같은 시기 조형된 약사불이고 이건 좌상이다... 불상의 양식도 중요하겠지만, 아무래도 내 눈에 띄는 건 좌대다. 7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돼, 800년대 중반 신라 불교미술을 주도한 석불좌상의 초기 실험들이 이런 금동불에서부터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 올린다...>
<안정감과 세련된 장식, 그리고 앙련의 문양까지 볼만한 게 많다...>
다만 석탑과 석불 이외의 유물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데 이는 손망실과 인위적인 훼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석등과 당간지주가 많이 보존되지 못한 것은 석탑과 석불에 비해 불교적 존엄성과 문화적인 神性(신성)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규모가 작거나 구조가 간단하여 여타 건축자재로 쉽게 사용할 수 있어 손망실 확률이 컸기 때문에 보존이 어려웠을 거라 생각되고, 특히 동종은 현재 국내에 신라종이 3구(상원사, 성덕대왕신종 외에 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충주동종이 있고, 선림원동종(804년)과 실상사동종(828년) 등 파종 2구가 더 있다)와 고려종이 10구에 불과하지만, 일본에는 더 많은 숫자의 신라종(4구)과 고려종(31구)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임진왜란 등 각종 전란과 일제강점기 때 강탈당하고 유출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짐작케 할 수 있다. 또한 동종의 경우 남아있는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람배치에서 경루와 더불어 종각(종루)의 위치와 규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증이 없을 뿐 아니라, 백제종에 대해서는 아예 연구나 시도조차 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요약할 수 있을 거 같다.
<선림원 동종/804년/국립춘천박물관에서... 1000년을 넘게 잘 버텨왔는데, 625 동란의 참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아쉽고...>
<선림원 동종 재현품/진천종박물관에서... 그래도 이렇게 재현품을 볼 수 있어 아주 고마운 일이라 생각된다...>
<재현 선림원 동종 부분... 유두로 불리는 연봉의 문양까지 보면 정말 정교하기 이를데 없지? 밀납으로 그 작은 부분까지 공들인 정성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실상사 동종/동국대박물관에서... 보기 좋지는 않지만, 이렇게 파종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700년대 초반부터 불어닥친 석탑조성의 열풍은 건축과 공예, 그리고 금속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발전에 자극제가 되고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통일신라의 문화를 몇단계 끌어 올리게 된다...>
아무튼 석탑을 비롯해 석불과 석등, 당간지주, 금동불과 동종 등 700년대 통일신라 불교미술은 경주에 집중된 한계가 있으나, 모든 분야의 양식들이 이 시기에 정형화 전형화되어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규준이 되었고, 또한 각각에서 최대 규모와 높은 품질을 구현할만큼 자신감에 넘쳐있었을 뿐만 아니라,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최상의 황금기를 맞으며 절정의 수준을 뽐내는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760년대부터 이완되기 시작한 정국장악력은 불교미술에 대한 발원자와 제작자의 체계를 깨뜨리게 되면서 원성왕대부터 급격히 퇴화, 지방화 돼 가는 것으로 보인다.
<700년대 조형된 금동불상들/국립경주박물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영덕 유금사 출토/국립중앙박물관... 역시 700년대 작품이다... 참 사랑스럽지?>
<사자상/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외에도 석탑의 기단부나 몸돌을 비롯해 건축물의 기단부나 기둥 등에도 이처럼 다양한 문양의 조각들이 만들어진다... 먹고살만하면 문화에 눈을 돌리면서 정신적 충족을 쫓게 되고, 그런 욕구와 의지들이 모여 상징과 디자인은 더욱 활성화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700년대 통일신라는 대외적인 자신감과 함께 정신적으로 충만한 의지들이 넘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다시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반에 이르면, 분열된 정치와 어수선한 혼란들을 잠재울 또다른 권위를 찾아가게 될 것이고... 당시 통일신라를 뒷받침하던 불교도 자신의 고행과 깨달음으로 평안을 유지하는 것보다, 부처의 가호에 의지한 타력신앙으로 후퇴하게 되고... 그러나 그것이 또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방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 언젠가 팔공산 갓바위에 올랐더니 지금은 이 약사여래좌상 앞에 입시 수험생 부모님들이 운집해 있었음을 보게 됐는데, 1200년 전에는 어떤 염원들을 가지고 이 부처님을 보러 올라왔었을까 생각들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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