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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29> 불국사 다시보기(2)-관념적 위계구조와 휴먼 스케일의 조화...1308

 

 

 

 

 

10.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 불교의 완성 - 불국사

   1) 불국사 다시보기

      가)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완성 - 불국사

 

 

③때문에 나는 통일신라의 가람이 (도심 평지형에서) 산지(중층)형으로 변화된 것은, 선종(구산선문) 수행자들이 명상과 수행을 강조하기 위하여 도심과 번화가를 피해 심산유곡을 찾으려는 의지나 교단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도심과 평지의 주요 사찰터는 교종세력이 이미 선점했다는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사정도 컸을 것이다)에 앞서, 불교교리에 대한 관념적 형상화와 수직적 위계에 익숙한 통일신라인들의 교조적인 보수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문무왕-신문왕-성덕왕대부터 감은사/장항리사지 등을 만들 때나 황복사/나원리사지에서도 탑과 탑원을 조금 더 높은 곳에 배치한 것에서도 수직적 위계를 좋아하는 통일신라인들의 기호가 확인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국사의 석축과 석단은 자연지형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석굴암처럼 주변을 개조하고 인위적으로 조성하려는 독창적 의지의 소산이라는 점으로, 이는 백제식 가람배치와 커다란 차이로 나타난다.

 

 

<미륵사지 전경... 지금은 해체되어 이런 풍경을 느낄 수 없고, 가운데 거대한 목탑이 없어 쌍탑식으로 남아있지만 백제는 철저히 평지가람을 택했다... 또한 (비록 통일신라시대 건축되었지만) 백제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금산사나 법주사의 주건축물 기단부는, 불국사나 통도의 건축물 석기단부에 비해 확연히 낮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백제는 수평적 완결성과 함께 부지의 고저보다 건축 규모를 통한 수직적 위계를 보다 중시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연히 건축물의 기단부는 비례와 기능적 요소로만 이해했을 듯...>  

<감은사 전경... 이에 비해 감은사지는 현 부지 앞쪽의 넓은 평지를 놔두고, 일부러 높은 부지를 인위적으로 변형시켜 조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인들이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입지선정이다... 불국사는 이런 입지에 인공적으로 부지를 북돋아 석축까지 주요한 건축적 요소로 승화시켰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사찰건축은 도심평지형에서 산지형으로 변해가지만, (입지에 상관없이) 화엄사/보림사/실상사/대흥사/천은사 등의 좁고 작은 일주문과 (통도사)/무량사/도갑사/청평사 /선운사/신흥사 등의 삼문(일주문/천왕문/해탈문)에 연결된 낮은 담장에서 (시기와 지역에 관계없이) 도심평지형의 중문-회랑의 초기 건축양식이 퇴화 변형된 모습을 읽을 수 있지만, 특히 백제지역에서 그 전통은 완고하다 싶을 정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옴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일주문... 화엄사에 가 보신분들은 이 문을 보고 깜짝 놀라거나 의아해했을지도 모르겠다 ; 화엄사 정도의 거찰의 일주문이 겨우 이정도인가 하고 말이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작고 좁은 문에 낮은 담장이 연결된 양식을 주변지역인 천은사나 보림사 등에서도 쉽게 보셨을텐데, 나는 이것이 도심평지형에서 보이던 중문 + 회랑이 변두리나 산지형으로 바뀌면서 퇴화한 양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옛 백제지역에는 충실히 지켜지고 있다...>

 

 

 

또한 옛 신라와 백제지역의 사찰건축은 똑 같은 산지가람에서도 고유의 특성을 유지했는데, 핵심공간 진입방식에서 산지형 신라식 가람은 누하(부석사 안양루 등 누각 밑으로)진입을, 평지형 백제식 가람은 우각(화엄사에도 보제루라는 누각이 있지만, 밑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모서리를 돌아서...)진입을 고집하거나,

모악산이라는 같은 배경을 두고 입지를 선택할 때도, 백제인을 표방했던 진표율사는 수평적 배치가 가능한 금산사(통일신라 말기 불교는 교종이 주도하고 선종이 확산되는 경향을 띠는데, 이중 5교에서는 화엄종과 금산사에 근거를 둔 법상종이 대립한다) 부지를, 화엄종 교단이 주도한 귀신사(화엄십찰의 하나)는 중층적이고 수직적 위계가 자연스럽게 보장된 경사지를 선택한데서도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보제루... 평지형과 산지형이 멋진 조화를 이룬 가람배치가 화엄사라 생각되는데, 이곳에도 누각은 있지만 옆으로 돌아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서게끔 공간을 경영했다는 말은, 옛 백제사람들은 사찰을 출입할 때 누하진입 방식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즉 진입방식과 관련된 누각건축 도입여부는 기술이나 경제성 등의 문제도 아니고, 문화적 정서적 차이라는 점. 결국 건축의 기능과 목적보다, 건축의지와 전통이 우선 고려됐다는 말이다...>

<운문사 전경... 같은 현상을 경상도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화엄사에 비해 운문사는 완전히 평지형 입지에 자리잡고 있다... 즉 화엄사와 정반대 입지임도 불구하고 운문사는 누하진입이 가능한 누각식 건축 출입문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은, 역시 건축적 기능보다 신라지역에 자리잡은 전통과 규준을 버리지 않은 고집 같은 게 읽혀진다는 말이다... 내가 늘 말하듯 지역정서가 가미된 문화의 DNA는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즉 백제식과 신라식 가람배치는 주변 자연환경에 적응한 건축문화의 귀결이면서, 동시에 사상과 신념을 구현하려는 건축적 태도와 의지/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의 산지가람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소산이거나 교종에서 도외시된 선종의 전술적 후퇴가 아니라, 수직적 위계질서와 관념적 완결성에 익숙한 통일신라인들의 기호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 원형이 불국사에 있고, 효대라 불리는 탑원(사사자석탑)을 가장 높은 입지에 배치한 화엄사와 7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중창된 부석사/해인사 등에서 자연지형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한, 수직적 체계의 산지가람이 완성됐다고 본다.

 

즉 잦은 전란과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서도 산지가람이 평지가람에 비해 생존경쟁력이 높은 현실적 이유(전란을 피할 수 있는 확률)도 있지만, 통일신라로 국한시키면 선종의 확산은 산지형 가람배치를 가속화한 것일뿐, 산지가람이 선종 때문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해인사 단면 스케치/앞 안영배 같은 책에서... 그리고 통일신라는 물론 우리나라 산지가람을 대표하는 해인사와 부석사는, 불국사와 달리 본격적으로 화엄학의 교리에 입각해  800년대를 전후해 체계를 갖추면서 건축된 통일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선종사찰이 아니다... 즉 선종과 산지형 가람배치는 교리적 관련성이 없다는 말이다...>  

<부석사 전경... 부석사는 결코 낮거나 완만하지 않은 입지를 일부러 선택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또한 주요 동선축과 시선축에 배치할 건축물들의 정면성을 과감하게 포기하고(실용성이 더 강조됐다는 말도 된다) 길이방향으로 배치해, 위에서 내려다보면 각 층급의 건축물들에 드러난 용마루는 광할한 대자연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유도하였다. 또 그래서 이런 광대한 자연을 품으로 끌어 안을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자신들이 구현하고 싶은 사상에 가장 적절한 입지를 선택하려는 오랜 노력이 쌓였기 때문에 통일신라 말기부터 풍수도참설은 더 빠르게 우리문화로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④네번째로 불국사 창건 과정에서 통일신라와 우리나라 가람의 스케일이 결정됐다고 보인다. 불국사와 가장 비교하기 좋은 사찰이 일본 나라의 동대사다. 조성된 시기(750년대)와 의도(국가와 종교의 일체성), 그리고 불교교리(화엄학)까지 일치하는 쌍둥이 같은 성격 때문이다. 그러나 동대사에 가보신 분들은 그 광대한 스케일과 어마어마한 규모(축소한 상태가 세계 최대다)에 놀라게 되는데, 이는 평지가람이 최대로 확장된 배치라는 점을 감안하면 백제식 가람의 완결태라 봐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 때문인지 우리는 스스로 사찰들의 스케일과 규모에 대해 비교를 회피하거나 자연에 순응한 결과라든지 인위적 요소를 배제한 자연주의적 성향이란 매우 방어적이고 모호한 논리를 펴곤 하는데, 역으로 가람배치에서 가장 관념적이고 인위적인 곳이 바로 우리나라 사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 나라 동대사(사진을 다른 걸로 바꾸려다가 한번 더 인용한다...ㅉ) 이게 2/3 정도로 축소된 규모라니... 축소지향 일본인이란 말은 본래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스케일만 지향했기에 이에 대한 반성으로 대두된 화두가 아니었을까? 이런 걸 보지 못했던 나는 일본인들은 너무 짜잘하다는 오해를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수종사에서... 뭐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옹기종기 앉아 있을 수 있는 구조라고 해서 더 인간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밑에서 다시...>

 

 

 

 

 

때문에 굳이 일본이나 중국, 인도 등의 규모와 스케일을 형식과 허상에 얽매인 집착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보다, 우리와 통일신라의 사찰이 훨씬 더 철저히 관념적(우리의 관념성은 조선시대 유학에까지 이어진다)으로 인간적인 스케일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게 맞다는 말이다. 물론 동원 가능한 경제력과 기술력에 따른 한계, 그리고 전래되는 친근한 규모와 선호하는 스케일이 있기 마련이고, 중후광고대((重厚廣高大)한 건축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주는 촉매제임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 규모에 디테일이 첨가되고 치밀한 기획과 기하학적 구성이 안정감과 완결성을 보장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기념비적 척도로 만들어진 건축과 프로젝트는 거부감과 함께 범접하기 힘든 장벽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은을 북경의 자금성을 축소해 모방한 건축이라는 오해를 받곤 하는데, 실제로는 자금성이 1406년 착공하여 1421년 준공된데 비해, 경복궁은 1394년 착공 이듬해인 1395년 완공된 궁전이다... 조선의 유학은 임진왜란 이후 예송논쟁 이후 급격히 관념화 되는 경향이 있지만, 조선을 건국할 때에도 유학적 체계를 건축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충분한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기념비적 스케일과 척도로 만들어진 대표적 건축공간이 궁궐과 종묘 등이다...> 

<도산서원... 그러면 조선의 유학이 선택한 서원의 규모는 어때야 할까? 물론 전교당 앞마당을 최대한 넓게 잡은 것은 아니지만, 그냥 편안한 넓이로 보일 거 같아 이 사진을 택했다... 사실 이만한 규모의 공간은 서원이기 때문에 규격화 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이나 일반 가옥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는 공간이다... 이 척도는 오랜 건축 경험의 축적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찰건축의 발달과정에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기준을 제시한 것은 기념비적 건축임에도 불구하고 휴먼 스케일을 선택한 불국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기념비적 스케일에 비교되는 것이 바로 휴먼 스케일이며, 인간적인 척도로 만들어진 공간은 건축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라는 주체의 통일성을 담보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인간적 척도를 강조하면서 밀도가 없다거나, 휴먼 스케일을 내세우면서 폐쇄적이고 주변세계인 자연과 동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조잡한 자기방어로 전락하겠지만, 그런 한계들을 벗어난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깊이와 우주적 일체감은 보다 편안하게 보장될 수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이런 관점에서 휴먼스케일로 완성되고 가장 인간적인 척도로 구현된 공간경영의 궁극을 이루었다고 말하는데 부족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불국사의 이 스케일은 고려와 조선을 통해 한국적인 공간의 척도로 정착하는데, 궁궐과 종묘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과 서원, 가정집은 불국사의 한 영역만큼의 스케일이거나, 병렬적 조합의 연속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팔공산 은해사 백흥암에서... 극락전 멋지지? 안 들키고 사진 찍느라 혼났던(물론 한번이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의 건축에 어울리려면 극락전 앞마당은 지금보다 두배는 넓어야 맞다... 그러면 건축과 공간의 부조화로 평가해야 할까? 아니면 건축규모와 관계없이 앞마당의 척도를 미리서 결정해버린 것일까?...> 

<불국사 조감도(분명 어디선가 찍었는데 잘 기억이...ㅉㅉ)... 현재 조감으로 보면 불국사는 최소 5개 이상의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각각의 공간을 임의로 구획하면 7개의 기본공간과 10개 이상의 조합도 가능하다... 사실 이렇게 다양하니까 어디에 붙여도 다 기준이 될 수 있는 거고, 다만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건 최초의 구성이기 때문이다??ㅎㅎㅎ>

 

 

 

 

 

⑤즉 불국사에서 만들어진 휴먼 스케일은 이후 만들어진 모든 건축공간의 구체적인 척도와 구성방식을 제시했는데, 그 기준이 석가탑과 다보탑의 간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일제강점기 요네다미요지에 의해서 제시된 86당척은 대략 26m, 그리고 이를 이등분하면 13m 가량이 되는데, 불국사에서 제시된 이 척도는 우리나라 사찰과 서원, 일반가옥 등의 기본단위로 정착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즉 사찰과 서원 등 중심공간의 안마당은 13m의 2배수 혹은 3배수를 규격으로 정사각형 보다는 직사각형 구조로 분할했는데, 이때의 가로:세로의 비는 3:2(39m x 26m 넓이의 마당으로 306평 정도 된다)를 기본 단위로, 넓어지면 4:3(많이 쓰이는 비례는 아니지만,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비례로 52m x 39m면 약 613평) 좁아지면 2:1.5(26m x 19.5m로 약 136평)를, 이 외에 √2:1(18m x 13m로 약 72평)의 구조도 만들어졌는데 이 넓이가 가장 부담없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 사실 두 탑으로 우리의 마음이 꽉 차 보임에도, 시선을 낮추면 대웅전 앞마당은 그리 좁은 공간이 아니다...>

<봉정사 극락전 영역... 석단으로 구획되고 전면이 트여 있어 그렇지, 사실 이 정도가 조선시대 산지형 사찰건축의 기본 단위라 생각되는데, 극락전 좌우측의 고금당과 화엄강당의 거리가 석가탑과 다보탑의 거리다... 직접 재 보시라...^^>

<금당의 높이와 금당 앞마당 넓이의 비례/앞 안영배 책에서... 우리나라 사찰건축은 평면적 모듈뿐만 아니라 수직적 높이에 대한 기준 척도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오랜 경험이 누적되면서 찾은 가장 편안한 심리적 스케일을 재발견하는 것이지만...그리고 불국사 역시 위 그림 같은 비례로 수평과 수직의 척도가 결정됐다... 또한 이 그림에는 빠져 있지만 사람의 시선과 용마루를 잇는 시선에 석탑의 노반까지의 높이가 결정된다... 물론 이런 현상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정착하는 것이지만...> 

 

 

 

 

물론 이런 스케일과 척도는 불국사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앞에서부터 글을 쭉 따라오신 이들은 감을 잡겠지만, 불국사에서 회랑으로 둘러진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만 생각하면 고선사지/나원리사지/황복사지와 똑같은 양식이고, 고선사지의 탑원이었던 극락전 영역을 또 빼면 감은사지와 같은 양식이 된다. 탑의 규모만큼 영역이 축소되거나 넓어졌을 뿐이다.

 

닭이 먼전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탑의 규모와 사찰의 규모는 그렇게 긴밀하게 기획되고 상호균형과 비례를 맞춰 건축되었고, 불국사는 이전 양식들을 통합하여 새로운 체계로 확장될 수 있었으니 그것이 다불전시대의 개막이고, 석탑의 규모를 전제로 완성된 사찰건축의 마지막 정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동시대 당나라나 일본 동대사의 규모와 양식을 충분히 참고했음에도 김대성이 선택한 것은 석탑을 만들어냈던 백제 사찰과 감은사/고선사지 등 700년대 초반 실험에서 확인된 인간적 척도를 선호했다는 말이 된다.

 

 

<감은사지와 고선사지 가람배치도/앞 글에서 재인용... 감은사지는 대웅전 영역과, 고선사지는 대웅전 + 극락전 영역과 당연히 같은 구조고, 이런 경험들의 총화가 바로 불국사 가람배치라는 말이다... 불국사처럼 탑이 있는 대웅전 전면이 더 깊고, 텅빈 무설전 영역이 좁은데 반해, 초기 가람건축인 감은사는 중문-금당-강당의 간격이 균등한 매우 기계적이고 도식화된 모습이다...>

<고선사 가람배치도/앞 박보경 논문에서... 고선사 역시 감은사처럼 중문-금당-강당의 간격이 균등하다. 다만 탑원은 금당이나 강당에 맞추지 않고 비대칭적인 비례를 적용했는데, 불국사의 극락전 영역도 금당 좌우 화랑보다 조금 더 넓게 조성되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미 익산 미륵사지처럼 광대한 공간을 건축했던 고대 우리 선조들이,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에서 보이는 광대한 척도와 스케일을 포기했던 이유는 ; 국토가 좁고 마음이 좁아서 규모를 축소했거나,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불교의 폐단을 반성하고,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산지로 밀려난 결과가 아니라, 김대성이 제시하고 통일신라인들이 선호했던 인간적 척도에서 기인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금산사(↑)와 수종사(↓) 앞마당의 비교... 이렇게 비교하면 금산사는 수종사의 수십배에 달하는 앞마당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종사 앞마당에 올라 좁다고 답답해 하는 분들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산사 앞마당과 비교할 수 없는 넓이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드라마틱한 공간을 수종사 앞마당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적 사찰건축과 서원, 궁궐, 일반가옥에서 나타나는 휴먼 스케일과 인간적 척도는 드넓은 주변경관을 차경할 수 있는 개방성과 자연의 흐름에 동화되는 일체감이 있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체계화 될 수 있었다... 만약 높은 담과 벽을 만들어야 하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방식이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수종사 앞마당... 그래도 좁기는 좁지?^^ 건축과 인위적으로 구획한 공간이 좁다고 스케일이 작은 것은 아니다.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마음이 좁을 뿐이지...>

<수종사에서... 물론 너무 광할한 풍경이어서 일부분만 땡겨 찍었고, 빛도 색도 맘에 안들지만 금산사와 비교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올린다...^^ 저 좁은 마당(↑↑)에서 이런 호방한 풍광을 예상할 수 있을까? 아무튼 한국 건축의 특징이자 장점 중 하나는 주변환경을 모두 끌어 들이는 자연과의 소통에 있다. 즉 바람과 빛의 흐름을 차단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수용하는 개방적인 유형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나라가 가장 역동적일 때는 내부에서 아웅다웅 하는 때가 아닌, 대외적으로 적극 진출할 때였다는 생각이 드는데 고구려가 그렇고, 백제가 그랬고, 장보고가 그랬듯이 우리의 에너지원은 외부와 접촉에서 활성화되고, 이를 경영할 수 있을 때였다... >

 

 

 

 

한가지 더 첨언한다면 불국사에서는 이런 척도를 기준으로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등 비대칭적 대비의 연속조합과 비례의 조정 등을 통해 다양한 공간을 연출했으며, 이때의 건축물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L자형/ ㄷ자형/ □형(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요사채에 이런 양식이 많다)이 아닌 철저히 독립적으로 조형했고, 회랑 외에는 (수당을 비롯해 고구려 건축에서 보이는) 異形의 건축물을 중첩시키지 않았던 특징도 보인다.

 

 

<팔공산 은해사 가람배치도... 조선시대 완결된 가람배치로 보이는데, 불국사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건축평면이 있어 골라봤다... 승려를 국가에서 시험을 치뤄 뽑는데, 도성은 출입하지 못하고... 결국 탁발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물론 인도와 달리 중국에서부터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승려들은 절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백제에서부터 이어진 7당가람은 폐기되고, 사찰과 일반가옥의 형태가 혼합되기 시작(절에서 독립적인 살림살이를 하려면, 건축도 이에 순응해야만 한다)하면서 강당도 사라지고 개방된 공간은 복합적으로 사용(이는 경제적 이유가 컸다)되었으며, 보다 많은 신도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신앙을 수용하니 통일신라 이후 풍수리지 도관에 주도권을 뺏겼던 무속적 성격들이 불교로 유입되고, 그 흔적을 산신각/칠성각 등으로 남겼다... 조선시대가 만든 다불전은 통일신라와 다른 성격이라는 말이다...>

<장안성 대흥성 흥경국/수나라/중국의 건축에서(이 도면도 공간이라는 글에서 올렸던 거 같은데...) 계단이나 수직적 구성도 비교할만 하지만, 각각의 건축물들이 중첩되면서 완전히 집합체가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전통은 고구려와 현재의 북한지역까지만 공유한 양식이라 생각된다... 백제와 신라에서 이런 건축이 발달하지 않는 것은 기술의 문제보다 자연적(기후) 차이에서 기인한 살림집의 전통이 기념비적 건축이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다만 대웅전과 극락전 등이 병렬적이지만 일방향의 직사각형 모듈로 조성된 불국사는 시선축과 동선축을 분리시켰고, 이런 불편(궁궐과 종묘 등 기념비적 건축물은 관념적 완결성과 정면성 확보를 위해 시선과 동선의 불편을 감수한다)을 해소하기 위해 후대의 가람건축인 부석사/통도사 등에서는 동선축을 굴절시키는 방향(자연환경에 순응해서 인간적이 되고, 인간적 척도를 완성하기 위해 관념적이 되는...)으로 변화해 나간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왜 불국사는 인간적 척도를 고집하면서도 권위적인 일방향과 정면성을 고집했을까? 이는 관념적 완결성을 지향한 통일신라인들의 특성에도 기인하지만, 실용성과 기능성을 살려야 하는 생활공간이 아닌 불국토의 장엄과 충실히 교리를 구현해야 하는 사찰건축의 목적 때문인데,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네트워크 공간으로 승화되기에 불국사는 너무 이상적이고 관념적이란 태생적 한계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부석사 안양루와 무량수전... 가장 많이 찍히는 각도이고, 여러 사진을 골라봐도 이 각도가 제일 좋타... 동선축과 분리된 시선의 축은 건축공간의 깊이와 다양한 변화를 잉태하게 된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본다...>

<부석사 안양루와 무량수전... 무량수전의 정면성을 살리면 이런 프레임인데, 아래쪽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완전히 축이 굴절되었음이 확인된다... 만약 이 방향으로 동선을 잡았다면 부석사는 지금같은 조망감과 편안함을 가질 수 있을까? 건축물의 위계와 권위적인 정면성, 그리고 일방향의 균질성이 모든 건축의 규범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굴절과 교차에서 파생될 다양한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안목과 깊이가 있었을 때 가능한 말이지만...>

 

 

 

 

 

⑥아무튼 이렇게 만들어진 기본 단위는 병렬적 혹은 입체적 조합의 모듈이 되어, 탑-금당-강당이라는 최소 단위로 구성됐던 이전 사찰들(정림사/감은사 등)과 달리 기본 금당이 4개 이상(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등)으로 구성되는 多佛典(다불전) 시대를 연 출발점이 불국사였고, 이때부터 사찰의 규모가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고 또 이때부터 금당에는 이름이 붙었다고 생각된다. 즉 불교교리가 심화 이해되고, 화엄학을 통해 대승불교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었던 700년대 전반기 이후부터 금당이라 불리던 불전에는 00전, 혹은 00당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 출발이 불국사로 본다.

 

또한 우리나라 가람배치를 대표하는 금산사/법주사/봉정사/선암사/보림사/대흥사/통도사/송광사/선운사(고려)/전등사(조선) 등이 몇 개의 영역을 병렬적 혹은 비대칭적으로 조합하여 수평방향으로 확장한 케이스라면, 화엄사/부석사/동화사/쌍계사/해인사(고려)/범어사(조선) 등은 기본 단위를 확장하기 위해 석단을 두어 입체적이고 수직적으로 공간을 확대한 케이스가 된다. 물론 이들의 공통점은 상하의 위계를 살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층단을 조성했다(여기에서 한국적 가람배치의 특징인 시선의 축과 동선의 축이 교차하거나 굴절되는 변화를 잉태할 수 있었다)는 점이며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그 맥을 이어갔다고 생각한다.

 

 

<통도사 가람배치도/재인용... 직사각형 모듈의 수평적 확장형태다... 각각의 영역이 분절적이면서도 일체감을 잃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천왕문에서 불이문, 그리고 대웅보전까지 이어지는 직선의 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병렬적인 구성에 직교축으로 배치된 우리나라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의 대표적 공간 중 하나...>

<화엄사 석단과 계단/앞 안영배 같은 책에서... 화엄사는 처음 창건에서부터 석단을 두어 앞마당 공간을 확장한 케이스라면, 부석사나 해인사는 산 위쪽과 아래쪽에 층급된 공간을 일방향으로 연장시키면서 사찰영역을 확장한 케이스다...>

<화엄사 각황전쪽에서 바라본 대웅전... 보제루로 내려가는 아래쪽은 상당한 단차가 있음에도 대웅전까지의 시선은 분절되게 보이지 않는다... 수직의 단차를 두어 권위와 위계를 살리면서, 아래쪽에는 탑을 두어 허전함을 상쇄하고, 위쪽에서는 건축적으로는 끊어진 공간을 ㄴ자로 꺾어 수평적으로 확장한다... 탁월한 구상 아닌가?>

 

 

 

 

 

 

또한 다불전 시대가 열리면서 각각의 전과 당에 대한 구별이 요구되어 이전까지 금당이라고만 불렸던 전각(지금도 법륭사는 금당으로 남아있어 백제시대까지는 당호가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에 드디어 당호가 붙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현판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고...). 이점 역시 대단히 유의미한 진전인데 한편으로는 각종 교리에 대한 해석을 가속화되면서 학해불교적 발전에 불을 붙이고, 각각의 종파적 특성이 부각되어 해당 주불전의 불상과 가람배치에도 엄격한 차별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한편 법화경이 가람배치에 유입되면서 기존의 미륵정토-미타(극락)정토에 이어 영산정토란 새로운 개념이 정착되는데, 우리가 ‘절’ 혹은 ‘사찰’하면 생각하는 대웅전은 바로 영산정토를 형상화한 것이며, 만약 이런 추정이 맞다면 통일신라 조금 더 확장해 우리나라 사찰에서 대웅전이란 당호가 붙여지기 시작한 최초의 유구는 불국사가 아닐까 싶다.

 

 

 

<불국사 대웅전... 현존하는 이 대웅전은 1765년 중건된 것으로 빨라도 인조시대쯤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통일신라 시대 건축 유구와 기품과는 많이 다른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우주와 탱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상부에 부연이 돌출된 갑석을 둔 기단부는, 700년대 석탑의 결구방식과 동일해 750년 전후 창건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즉 공포구조와 지붕은 조선후기 양식이지만, 건물의 규모는 크게 틀리지 않다는 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드디어 금당에도 당호가 붙여지기 시작한 출발점이 불국사는 점이다...>  

<수덕사 대웅전... 내 개인적인 사견일지 몰라도, 나는 이 건축이 우리나라 대웅전의 최고로 뽑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체감과 결구 비례... 어느하나 빠지는 게 없을 뿐더러, 대웅전이 갖춰야할 장중하고 근엄한 격식과 품격에 범접하기 쉽지 않은 기운을 담고 있으면서도 우아하고 세련된 마감과 비례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조화미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대웅전을 부각시키기 위한 잦은 불사로, 대웅전 앞 기물이 서너차례 바뀌었지만 아무래도 이 삼층석탑이 그나마 제일 나은듯싶고, 불국사의 팔작지붕과 비교하기 위해 추가한다... 백제지역의 건축풍에 통일신라식 기단부를 갖춘 고려시대 건축물(1200년대)로 우리나라 최고의 맛배지붕 건축이다...>

 

 

 

 

다만 불국사는 같은 시기에 조성된 금산사/법주사처럼 미륵정토와 아미정토, 연화화엄장(혹은 영산정토)이라는 3원의 구성(백제의 미륵사와 신라의 황룡사에서부터 3원 구성은 대사찰의 위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 거 같다)을 전제한 것과 비슷한 패턴인데, 이들 대규모 사찰건축의 출발점이나 다름없는 불국사는 미륵정토를 상징하는 용화전 혹은 미륵전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때문에 나는 법화전(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법화경에 근거한 불전이라면 대웅전과 중복이고, 선종적 영향이라면 법화전이라 이름 붙인 것은 후대의 일이라 생각된다)으로 추정되는 극락전 뒤쪽 공간은 용화전 영역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불국사 가람배치도/재인용... 평면으로 보면 다양한 넓이와 무질서한 조합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집스러울 정도로 일방향성을 살리면서 일체감을 흐트리지 않았다. 깨어진 비례와 대칭이 불편으로 느낄 여지가 없는 것은 일관된 체계속의 통합성과 각각의 독립성이 전체성을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굳이 '비대칭의 조화'라고 부르는 것이고...^^ 아무튼 극락전 뒤쪽은 법화전이 맞을까? 근데 법화전은 뭐지? 그리고 법화전 뒤쪽에 또 다른 금당은 없었을까? 약사적 같은 곳 말이다...^^ (너무 이른가?) 그리고 이 가람배치를 보면서 앞 글에서 이야기했던 불국사 구경의 가장 단거리 코스와 좋은 코스를 찾아보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당신이라면 어느쪽 계단으로 올라, 어느쪽 계단을 통해 내려오겠는가?...> 

 

<법주사 가람배치도/재인용... 창건 당시를 불교의 흐름을 생각하면 당연히 있어야 할 극락전이 없다. 또 대웅보전의 주불이 비로자나불인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대웅보전은 비로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바뀌는 게 맞다. 그렇게 되면 대웅전은 또 어디있었을까? 결국 초창기에 비해 너무 많은 변형이 있었다는 말인데, 원통보전과 대웅보전 사이 사천왕상 석등 쪽에 일층 금당이 하나 더 있었을 것이고(마곡사처럼), 원통보전 건너편 법주서점 자리에 극락전이나 관음전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미륵불이 서 있는 용화전이 초창기 터라면 법주사의 주 방향은 지금과 달리 90도 꺾인 남동향으로 바뀐다... 아무튼 법주사에는 극락전이 없고, 불국사에는 미륵전/용화전이 없다...>

 

 

 

 

 

⑦그리고 마지막으로 불국사에서 백제의 7당가람제가 한국적으로 완성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7당가람이란, ⓐ탑-ⓑ금당-ⓒ강당에 주요 부속건물로 ⓓ종루와 ⓔ경루가 있고, 불국정토의 경계를 상징하는 ⓕ중문과 ⓖ회랑까지가 7당이라 생각하는데(여기에 증원된 출가제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승원이 별원으로 구성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법륭사 서원 가람 배치도/재인용... 아무래도 백제의 7당 가람제가 완성된 형태는 법륭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일본은 석등이 아니라 청동등인데, 탑/금당과 강당 공간의 중심에 청동등이 서 있는 것이 특이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탑-금당-강당의 삼각구조가 통합되는 공간은 불국사처럼 금당 앞마당이 아니라 강당 앞이 된다...>

 

 

 

 

이전까지 가람인 감은사/고선사/나원리사지/황복사/장항리사지 등에서 종루와 경루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국가나 왕실(혹은 귀족)의 원찰형식으로 만들어지면서 출가제자들이 거주하는 승원의 공간이 가람영역에 수용되지 못했다고 보여지는데, 불국사에 이르러 이런 점들이 해소되면서 화엄사/금산사/법주사 등에서 완결적 모습인 칠당 가람제가 정착했고,

 

이후 산지가람이 보편화되면서 중문과 회랑의 조합이 해체되면서 일주문-(금강문이 세워지기도 한다)-천왕문-해탈문(불이문)의 3문 체계로 고착되고, 조선시대에는 불국사의 통섭적 다불전 성격이 근저에 깔리면서 산신각이나 삼성각/독성각/칠성각 등도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다불전은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적 영향력, 사찰의 의도가 다르지만...

 

* 사찰건축/가람배치에서의 삼문

<불국사 일주문... 모두 알다시피 일주문에는 기둥이 두개다...^^ 문이 없는 문이면서, 성역과 속세를 가르는 가장 큰 문이기도 하다...>

<범어사 일주문... 아마 우리나라 일주문 중 가장 유명한 게 아닐까 싶어 같이 올린다... 일주문을 보면서 한가지 생각할 게 있는데, 일주문의 기둥은 당간지주처럼 땅에 박히지 않고, 저렇게 주춧돌 위에 얹혀만 진다... 즉 그냥 올려져 있는 것이다... 뭐 이렇게 생각하면 거의 묘기에 가까운 구조가 되는데, 그래서 기둥 주위로 보조 부재들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오랜 세월 거친 폭풍에도 일주문이 온전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무겁게 만든 지붕의 압축력과, 주춧돌과 나무기둥의 일체성 때문이다... 가분수처럼 커질 수밖에 없는 지붕과, 본드로 붙여지지 않는 목재와 석재의 이질적인 소재가 밀착된 모습... 일주문의 미학이다...>

<금산사 금강문... 장항리 석탑 문비 좌우 조각처럼 금강역사가 지키는 문으로, 법주사와 직지사에도 있다... 일주문이 경계라면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이 지키는 금강문은 성역의 문을 지키는 수호신이 거주하는 곳이 된다... 이렇게되면 삼문이 아니라 사문이 되지? 경계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비교적 초기 사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금산사 천왕문... 지금의 문들이 초기형태는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절이니 같이 올리는데, 역시 수문장 역할을 하는 사천왕이 지키는 문이다... 생각해보면 두개의 기둥을 가로지르는 수평부재를 건축적으로 소화하는데 인류는 수십만년의 세월을 투자했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문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건축적으로 훨씬 진보하고 완벽해진 경이로운 모습을 보게 되는데, 아무도 그 경이를 느끼지 않는다... 사천왕의 이름과 방위와 관련되면서 기물을 해석하려 애를 쓸 뿐이다...>

<불국사 천왕문... 이건 아주 오래된 사진이고, 지금은 이 계단이 모두 없어진 걸로 봤는데...>

<범어사 천왕문... 불국사나 금산사와 달리 범어사 천왕문 앞쪽은 전혀 다른 느낌이지? 소나무들의 다양한 곡선이 그리는 편안함과 호사스러움이 근엄해야할 천왕문의 건축적 이미지를 상쇄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자연에 직선은 없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인 것이고... 그래서 올린다...^^>

<도갑사 해탈문/국보50호... 삼문 중 국보 건축물은 도갑사 해탈문이 유일한가? 이동로가 공사중이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앞쪽에서는 정면 사진을 찍어도 맛이 나지 않고, 측면은 맘에 안들어 이걸 올린다... 1457년 중건하기 시작했다면 최소 120~150년 전에 창건했다는 말이 되는데??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한 양식과 규모를 갖추고 있으나, 다포계 양식의 포작이 함께 혼용되고 있다고... 그런데 해탈문은 맛배지붕이 맞을까? 팔작지붕이 맞을까??>  

<마곡사 해탈문...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나? 1864년 중수되었다면 훨씬 이전 건축물인데 내 눈에는 일본 느낌이 많이 들기도하는데... 기둥이 높은데도 안쏠림이 살아있고, (본래 팔작지붕 건축물의 안정감과 상승감은 모서리 귀기둥과 용마루가 끝나는 지점에서 내려오는 내림마루의 체감률에 따라 다양한 미감을 나타내기 마련인데, 통도사(↓) 지붕선과 달리 마곡사(↑)는) 용마루가 일반적인 비례에 비해 넓어 내림마루와 기둥이 일치하는데도 불안하지 않아 상승감과 긴장감이 묘하게 조화를 이뤄,  이리저리 뜯어볼수록 맛깔스러운 매우 흥미로운 건축물이다...>

<통도사 불이문... 통도사는 평지형이면서도 건축의 넓고 좁음, 낮고 높음 뿐만 아니라 이렇게 각 영역에 단차까지 두어 매우 다양한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배치되어 있다... 마곡사와 함께 팔작지붕이며, 청기와를 올려 특이한... 신성한 영역에 들어서는 일주문은 문이 없는 문이지만, 금당 영역에 들어서는 마지막 관문 해탈문/불이문은 문이 아닌 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