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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30> 불국사 다시보기(3) - 이상의 해체와 이성의 과잉...1308

 

 

 

   (2)) 불국사 - 이상의 해체와 이성의 과잉

 

 

이런 특성과 보편성, 독창성, 발전성, 완결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국사가 마냥 만만하게 보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숨겨지지 않는 극대화된 관념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점은 또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면 친절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교리에 집착한 이성의 과잉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처음 불국사를 접한 사람들은 석축과 계단, 그리고 관음전에서 내려다본 다보탑 상륜부와 지붕들을 어렴풋이 기억하면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강조할 것이고, 좋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넓고 좁은, 높고 낮은 변화와 음률을 느낄 것이며, 많이 가본 사람들은 불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을 찾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공간, 하나의 유물 앞에서만 머물면서 전체를 그리거나 충분히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사리탑이 어디 있었는지,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은 어디에 있었고 근엄한 무설전은 어떻게 대할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관음전에서 바라 본 다보탑과 전각들... 첩첩히 쌓인 처마들은 우리들의 시선을 다보탑 너머 멀리 명활산과 남산으로 유도한다... 불국사는 체계와 위엄을 갖추면서도 답답하지 않은 장치들을 갖췄다...>

<관음전 앞마당의 낮은 담장... 높은 축대 위의 공간은 매우 폐쇄적인 성을 연상시키게 마련이다. 최상의 공간이면서도 고립적이고 완결된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개의 사찰 담장들이 그렇듯, 바람과 우리들의 시선이 자유로운 넘나들 수 있는 낮은 담장은 공간감을 무한히 확대하면서, 주변자연과 상호보완적으로 기획되어 있다... 오르고 싶은, 내려다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할 장치를 갖추면서 말이다...>

 

 

 

 

 

 

결국 이성의 과잉은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분절을 낳고, 단절은 거리감을 만들며, 거리감은 어지러움과 비난 혹은 체념과 경외로 변질되게 마련일까? 그래서 우리는 부석사처럼 사방이 확 뜨인 시원시원함(이면에 숨은 느긋함을 포함해서)을 선호하거나, 한 손에 들어올 듯 아기자기한 선암사를 편안해하거나, 한 눈에 보이면서도 변화무상한 통도사를 즐기고, 각황전/미륵전/팔상전과 대웅전 등 하나의 기호로 화엄사/금산사/법주사/수덕사 등을 기억하는 게 편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불국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집합되어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이라는 아이콘만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넓고 좁고 낮고 높은 음률장단에서 공간경영의 묘미도 느낀다. 산지이면서도 평면적인 구성에 안정되고 편안한 기운을 느끼며, 격식과 권위로 구성된 복잡한 공간에서 정연하고 차분한 정적과 품위도 느끼며, 정면성이 강조된 직사각형 모듈의 연속에서 적당한 긴장감과 폐쇄적이지만 답답하지 않은 공간운영에 안도감과 포만감도 담을 수 있고... 그래서 좋은 거고, 또 그래서 어려운 거고...

 

 

<대웅전 뒤쪽 무설전 영역... 엄정하고 차분한 맛배지붕의 무설전은 사찰의 강당이 갖춰야할 규모와 기품을 잃지 않았다... 1970년대 복원된 건물이지만 매우 기분좋은 건축이다... 무설전... 이 공간에서 우리 마음이 차분해지는 건 현판의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웅전 영역... 개방된 공간은 자유로움을 보장해주고, 자유로움은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느끼는 웃음과 활력... 그들이 사진에 담는 것은 다보탑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일 것이고, 그때의 시간을 영원히 보존하고 싶어하는 짧은 멈춤일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는 탁월한 공간운영과 건축적 묘미보다 각색된 이미지와 설화로 기억되는 게 사실이다. 경덕왕/혜공왕이 주도한 통일신라 최대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성의 원찰로 둔갑했고, 법흥왕(528년)과 진흥왕(574년)의 어머니는 김대성의 전생과 현생의 부모로 바뀌었으며, 백제정복의 기념은 김대성이 사냥한 곰에 대한 추모로,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석가탑 조성에 부역한 백제출신의 석공 아사달로 격하되고,

 

그림자가 있을 수 없는(무영/無影) 비로자나불의 광휘는 영지에 비치지 않는 無影(석가)탑으로 각색됐고, 유래를 알 수 없는 석가탑과 다보탑이란 이름은 무구정광탑과 칠보탑 등과 혼용되었고, 다시 꿈틀거리는 미륵신앙의 총화 미륵전은 이름까지 잃어버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와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에 기록되기 1~200년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1024/1038년)기 등은 불국사에 대한 또 다른 상상과 해석을 가능케 하는데, 그렇게보면 지금의 설화들은 심모원려의 고심을 대단한 간접화법으로 변색 유통시켰음을 추측케 한다.

 

 

<번잡하던 대웅전 공간에 사람들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정적과 천년이 넘는 세월 그 자리를 지키는 건축들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좁지 않은 공간을 또다른 기억과 설화와 신화로 채운다... 한사람, 한시대가 담지 못하는 바람을 쫓으면서 말이다...>

<불국사와 석가탑에 숨겨 있는 불편한 진실은 불국사를 넘어 새로운 공간에서도 끊임없이 재생된다... 때로는 완결된 모습으로, 때로는 미완성 = 미생의 모습으로...>

 

 

 

 

 

불국사가 창건된지 300여년 후에 유행했던 이 설화들의 의도를 추측하면 은폐된 사실과 변화한 민심, 그리고 왜곡된 결과도 추적될 수 있다고 보는데, 혹시 통일신라의 불국토사상이 정복된 백제를 포함하여 전국토로 개방된 것이 아니라 사찰 내부로 축소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과, 이를 가리기위해 만들어진 설화들이 불국사에 또 다른 오해를 만들어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역효과가 발생한 게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시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은 궁궐인 월성의 확장에 따른 임해전지와 동궁의 조성, 대구로의 천도계획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진 통일신라 최고 최대의 건축 프로젝트로, 이전에 완공된 황룡사 구층탑만큼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사회문화적 이슈를 양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의 윤회설이 각색된 김대성의 탄생설화에서부터 조성목적도 그렇고 아사달과 무영탑, 아사녀의 비극에서 추정되는 불편한 진실도 그런 것들일 것이다.

 

 

<관음전... 불국사의 다양한 공간경영은 다양한 건축물로 채워진다... 높고 낮게, 혹은 크고 작게...>

<비로전에서 바라본 관음전 영역... 그 공간과 건축들은 때로는 막혀있고 때로는 뜨여있고, 때로는 석단으로 때로는 담장으로... 그럼에도 그 공간들이 분절적이지 않은 건, 유기적인 흐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설화들은 진위여부와 무관하게 대중적인 이미지로 친근하게 불국사를 포장했던 효과는 있으나, 역으로 생각하면 불국사 창건과정이 그만큼 난관도 많고 어려웠다는 말이 되고, 성덕왕-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제정치 속에 귀족의 반발이 확산되는 등 불국사가 건축될 당시 백성들이 체감하는 폐해도 컸으며, 왕실과 경주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주도하는 사찰건축은 더 이상 대중적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발원자가 왕실에서 개인(김대성은 재상출신 귀족이다)이나 승려(신림과 표훈의 관여나, 진표의 주도 등)로 무게중심이 이동함과 동시에, 그 이면에는 왕실에서 떨어져 나간 세속화된 불교교단(교종계열)이 점차 막강해질 토대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추측된다. 또한 사찰조성에 동원된 목공, 석공 등 기술자들도 더 이상 관에 소속된 장인들이 아니라 일반인(경주소속이 아닌 백제거주 아사달이 동원된다)들이 대거 가세할 수 있는 틈새가 발생하면서 문무왕이 왕실 주도로만 통제했던 석탑건립의 족쇄가 90여년만에 풀리게 된 게 아닌가 추정된다.

 

 

<불국사 수미범영루... 이 석단이 담고 있는 건 단순한 건축과 불교교리만이 아닐 것이다... 역사와 시대를 살아간 인간들의 숨결이 묻어 있고, 그를 지켜보는 인간들의 시선과 관심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인 것이다...>

<극락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석단...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큰 흐름을 놓치지 말자는 게 내 글의 목적이다...>

<나한전... 비로전 왼쪽, 극락전 뒤에 뒤쪽에 또 다른 영역이 있는데 현재는 조선시대 붙여진 전각의 이름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기단부 석단이 더 높아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음전-비로전에 비해 가장 낮고 작은 건축물 기단이 제일 높아 보인다...> 

 

 

 

 

 

결국 통일신라 최대 프로젝트인 불국사 건축과정에서 왕실과 교단, 그리고 동원체계가 변화한다는 것(불국사/석굴암은 741년 착공했지만 10여년간 지지부진한 진척 때문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사직하고 750년부터 직접 진두지휘를 했지만, 완공을 보지 못한채 774년 사망하고 혜공왕대에 낙성된다)은, 불국(佛國)이 불국사(佛國寺)에 국한되고, 불국토사상은 더 이상 통일신라 왕실의 독점소유에서 벗어나면서, 통일신라 왕이 자처해왔던 전륜성왕신앙은 더 이상 발붙일 기반이 붕괴(귀족과 지방호족들의 성장)됨을 의미한다.

 

이성의 과잉(1차세계대전과 스탈린주의, 2차세계대전과 파시즘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를 반성하면서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하버마스로 이어지는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현대사회를 기능적, 도구적 합리성을 띤 사회로 진단한바 있다. 특히 2차대전과 파시즘을 반성하면서 이성의 과잉을 경계한 아도르노는 비판만이 유일한 무기라 설파하여 비판학파로도 불린다)은 전체주의와 전제정치를 잉태하게 되고, 그 폭주가 한계에 다다르면 남는 것은 비판을 위한 비난과 폭력적 해체뿐이다. 즉 불국사와 석굴암의 준공은, 민심을 통합하고 불국사에 불국토신앙을 담으려 했던 경덕왕과 김대성의 창건 의도와 무관하게, 불교의 관념적 평등성과 진보적인 해체성이 실현/확산되는 계기가 되면서 100여년 유지되던 전제정치가 급속히 무너진 것이다.

 

 

<나는 왜 불국사에서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생각했을까? 무슨 근거로 이성의 과잉을 부각시키고 있을까?>

<이렇게 자유롭고 무질서한 대중들을 보면서 말이다... 불국사라는 건축공간이 아니라, 이런 건축공간을 만들어낸 그 시대를 떠올렸기 때문일까?>

 

 

 

 

600년을 전후한 100여년간 신라는 백제와의 공방을 통해 단련하면서 체계를 잡았고, 다시 600년대 중반 30여년간 당나라와의 갈등 속에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700년을 전후한 시기 일본과의 100여년간 지속된 대립과 경쟁속에서 성장 발전하였으나, 700년대 중후반 안사의 난으로 시작된 당나라의 몰락과 일본과의 긴장관계까지 해소되면서 통일신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와 어정쩡한 관계설정 때문에 대륙을 향한 기상은 준비되지 않았고, 게다가 신라는 해양제국도 아니었다. 결국 대외적 변수가 사라지면서 안정기가 시작됐지만, 안정은 정체를, 정체는 나태를 가져오게 마련... 포화에 이른 에너지가 방향을 잃으면서 지금까지 억눌렸던 내부문제들이 돌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프로젝트가 시작되어서가 아니라, 그 시기가 그랬다는 말이고, 때문에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은 더더욱 미래를 향한 의지를 공표하는 시금석이 되었어야 했다.

 

<발해의 대외 교역로/역사신문에서... 이 지도를 보면 발해의 무게중심은 압록강과 백두산의 서쪽과 남쪽이 아니라는 걸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통일신라는 대동강을 향한 의지가 없었고, 예성강 유역도 방치되었을 뿐 아니라,  700년대까지 백제가 경영했던 해상교역루트는 복원되지 않았다...>

<남북조시대 대외 무역로와 장보고의 청해진루트... 통일신라의 발전방향은 이미 결정돼 있었다. 예성강을 너머 북쪽으로 진출하던지, 해상교역로를 뚫어 서해를 장악하든지...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는 그런 의지가 없었고, 800년대 초반 청해진이 설치된 것은 왕실과 귀족의 힘이 아니라 민간인 장보고에 의해 이뤄진다... 백제의 해상루트가 복원된 것이다...>

 

 

 

 

우리는 언제 사라진지 모르는 미륵사지 목탑보다 불타서 사라진지 800년이나 된 황룡사구층목탑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백제미의 총화가 담겼을 미륵사 목탑은 과거의 영화와 안타까운 연민만 남아있지만, 황룡사탑에서는 새롭게 발돋음하면서 불가능에 도전하려했던 신라의 굳은 의지가 응축된 기운을 찾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국사와 석굴암에는 미래를 향한 도전과 의지, 기운 같은 게 없다.  너무 정적이고 안정적이며, 너무나 정제 되어있고 완결적이다. 경주 6촌에서 시작해 수백년 동안 정복과 대외적 확장을 통해 성장한 신라에서 대외적 확장이 멈췄다는 것은 성장의 동력을 잃고, 방향을 상실한 것과 같다. 과거를 잊으면 미래가 없고, 이상이 사라지고 이성만 남은 시대와 건축에는 생동감이 사라지고 규제와 규범과 규준만 남을 뿐이다. 이상의 과잉은 우리를 창조적으로 미치게 하지만, 이성의 과잉은 모든 걸 폭력적으로 해체한다. 설화만 남은 불국사... 성공한 대업은 신화를 남기지만, 실패한 과업은 설화만 남기는 거 아닐까? 불국사가 창건되고 준공된 750 ~ 780년대부터 통일신라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체 과거의 영화속으로 침잠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불국사가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충분히 읽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한동안 불국사와 700년대 중후반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이상의 해체와 이성의 과잉일 거 같다...>

<생각해보면 많은 답사여행을 다니면서도 유독 궁궐, 무덤, 성 같은 곳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생각이 든다. 통치의 공간이고 권력의 상징이며, 전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시대와 사상과 문화예술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 불국사 역시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기념비적 건축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불국사에서 통치/권력/전쟁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 한다. 이중잣대일까?... 다음에 불국사를 가면 나는 무엇을 생각하게 될까? 그 때는 지금보다 더 열려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