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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32> 불국사 다시보기(5) - 석가탑과 똑같은 탑은 없다...1309

 

 

 

 

 

 

   2) 석가탑 - 손 댈 수없는 아름다움

 

       (1) 석가탑 조형의 시대적 배경

       (2) 석가탑과 똑같은 석탑은 없다.

       (3) 석가탑은 도면 없이 만들었을까?

       (4) 석가탑에 숨겨진 수학적 안배

       (5) 수학적 일관성과 경험적 완결성의 통일

       (6) 참고> 석가탑과 황금비율

       (7) 손 댈 수 없는 아름다움...

 

 

 

 

(1) 석가탑 조형의 시대적 배경

 

 

 

 

나는 지금까지 석탑이 유행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과 바탕이 되는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 살펴봤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습성과 전통을 계승하면서 목탑과 전탑에 때로는 경쟁적으로 때로는 기존의 양식을 습합하면서 석탑이 태동하던 시대와 달리, 구하기 쉬운 소재에 조성 기간도 짧아 경제성을 갖춘데다, 소재의 본성까지 살려낸 결구방식에 삼층석탑이란 양식적 규준을 가지고 있었던 통일신라에 전래된 조탑공덕경(680년)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704년)은 기존 탑 중수에 대한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면서 석탑 조형 활성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석가탑... 이제 본격적으로 석가탑에 대해 생각해보자...>

 

 

 

또한 초기 건탑에 가장 큰 제약인 사리신앙도 보완할 계기가 되었다. 즉 분묘의 기능과 예배 및 찬양의 대상으로 건립되는 불탑에는 반드시 사리가 안치되어야 하지만, 중국이나 인도에서 유입될 수밖에 없는 소위 진신사리를 무한히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공급을 관리하기 위해 문무왕은 불탑 조형을 국가에서만 시행하도록 통제했었다. 그런데 새롭게 전래된 조탑공덕경과 무구정경이 사리확보라는 구조적 한계와 사리신앙을 보완해 줄 근거가 될 수 있었는데, 부족한 사리를 화려한 보석 등 기물로 보충하고, 다라니경을 삽입한 소탑으로 기원의 가치를 높이면서 사리가 없는 불탑 건립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로인해 금속을 비롯한 각종 공예와 인쇄술이 발달할 수 있었고, 사리신앙을 보완한 다라니신앙이 절정에 이른 80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사리공이 없는 석탑도 만들어진다. 또한 진신사리가 없거나 고승의 사리로 대체된 석탑의 양적 확산은 가람배치에서 석탑의 비중을 그만큼 낮게 만든 양면성이 있다).

 

 

 

 

<석가탑 출토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재현품/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가 짐작할뿐 한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길이만큼, 이 다라니경에는 많은 열쇠가 숨겨져 있다...>

 

 

 

 

이제 석탑은 불교 내부의 교리에 의해서만 확대될 발판을 마련하고, 국가에서 통제했던 발주자와 제작자 조합이 해체 다양화되면서, 부처의 가호,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기복만이 아니라 부모의 명복과 개인의 구원, 그리고 시주의 공덕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정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불국사와 석굴암이고, 석가탑과 다보탑은 그런 시대배경 속에서 탄생한다.

 

 

 

<양양 진전사지 부도/보물439호... 우리나라 조계종의 1대종사인 도의선사 부도로 추정되는 이 승탑은 8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승탑의 최초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전형적인 삼층석탑 기단부에 탑신을 대신하여 팔각원당형 몸체로 이루어졌는데, 흔히 부도로 불리는 승탑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대신하여 도의선사같은 고승/선승들의 사리가 안장된다... 부처와 선승의 사리가 깨달은 자라는 전제에서 동격으로 승화되는 것이지만, 그런만큼 승탑의 상징성과 격은 불탑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배경을 간과한 나에게 역사유물과 문화예술적인 관점에서 접하기 시작한 석가탑의 이해는 쉽지 않았었다. 어렸을 적에는 석가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삼층석탑인 줄 알았고, 여성적인 다보탑에 비해 석가탑은 남성적이라고 배웠으며, 우리나라 모든 삼층석탑은 석가탑을 모방한 것으로 이해했었기 때문이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과 다보탑... 저 장대한 다보탑이 우리 마음에는 왜 그렇게 작게 각인되어 있을까? 저 굳건하고 탄탄한 구성은 왜 여성적이라는 미감으로 평가되어야 했을까? 생각해볼수록 기존의 속설들은 의문투성이로 접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십원짜리 동전에 익숙한 내 마음에 불국사 대웅전 동쪽 행랑을 통해 들어서면서 내 시야를 꽉 채운 다보탑의 장대한 위용에 충격을 받았고, 당연히 기하학적 완성도와 철저한 비례로 만들어졌어야 할 석가탑에서 2층 지붕돌보다 두꺼워야할 1층 지붕돌이 더 얇다는 것을 느끼면서 당황했으며, 8.2m 혹은 7.7m라는 높이의 석가탑이 10.4m의 다보탑보다 더 높게 보이는 이유를 찾으려 갖은 고심을 했다. 게다가 남성적인 석가탑을 잉그리드 버그만이나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 같은 전후 헐리우드 여배우를 빗대 의인화한 유홍준씨의 글을 보며 더 헷갈렸지... 이제 그 석가탑에 대해 몇가지 정리해보려 한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과 석가탑... 책과 다른 분들의 자료에 미감을 의지해야했던 시절, 나는 석가탑이 다보탑과 다른 남성적 힘이 어디 있는가 한참 찾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레이스켈리??... 하긴 소피아로렌의 농염함이나 오드리햅번 같은 깜찍함보다, 그레이스켈리의 단아함에 잉그리드버그만 같은 시원함, 그리고 엘리자베스테일러 같은 우아함을 합쳐 놓은 게 더 어울리기는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석가탑은 바비인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2) 석가탑과 똑같은 석탑은 없다.

 

 

먼저 현대에 들어와 만든 삼층석탑 중 석가탑과 똑같은 미감을 보이는 탑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미감을 가장 잘 살려 최근에 조성한 탑은 용문산 상원사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단아한 미감에 건실함과 정연함을 충실히 재현했지만, 규모가 작아 석가탑과 비교는 부적절하다.

 

 

<용문산 상원사 삼층석탑... 비교적 근래에 들어와 조성한 석탑이지만, 800년대 중후반의 어느 삼층석탑보다 통일신라 석탑 미감을 충실히 살려다고 생각된다... 처음 봤을 땐 내가 왜 이탑을 지금까지 몰랐나 깜짝 놀랬었지...>

 

 

 

그렇다면 최대의 공력이 투입된 삼층석탑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1992년 동화사 통일대전에 조성된 좌우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가장 좋은 석재 산지로 알려진 전북 익산(미륵사지가 있다)의 황동석 2000톤을 가공하여 만든 17m 높이의 석탑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탑 역시 석가탑의 미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규모가 커지고 상층기단부 탱주가 하나여서가 아니라 석가탑과 비례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동화사 통일대전 전경...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1990년대는 이런 모습이었다... 좌대를 포함하여 33m 높이의 통일약사여래는 노태우 전대통령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군위 삼존석불의 본존불을 닮았다고 생각된다...>

<좌우 삼층석탑은 17m 높이로 우리들의 시선은 하층기단부를 넘지 못한다... 정말 크다...^^>

<불국사 쌍탑을 차용했는지 하나는 조각을, 또 한쪽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단순한 모습으로 배치했다... 두 탑의 상륜부 역시 장식과 간결한 대비를 살렸는데, 탱주를 하나만 만든 것은 팔부신중 배열 때문이었던 거 같다... 단순과 복잡, 화려와 절제가 대비되나??>

 

 

 

그렇다면 석가탑의 재현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혀 불가능했던 것일까? 딱 하나 있는 거 같다. 바로 근래에 만들어 석가탄신일 때 사용하던 18m 높이의 연등 석가탑이 그것이다.

 

 

<내 기억으로 이 사진은 2011년 촬영이고, 올해 2013년에는 세종로 광장에 있었다... 석가탑은 석가탑과 똑같은 비례로만 재현된다는 생각... 잘 만들어졌지?>

 

 

 

 

 

 

물론 우리는 이 외에도 많은 석가탑 재현 모형을 볼 수 있고, 전북 익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 석재공장들이 만들어 놓은 모형도 숱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석탑들에서 석가탑의 미감을 느낀 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유는 뭘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석가탑은 석가탑과 똑같은 비례에 의해서만 충족되지 여타의 방법으로는 재현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즉 일층지붕돌은 이층지붕돌보다 일정한 비례로 얇아야하며, 일층지붕돌에 있어야 할 2층 몸돌의 괴임은 3층 몸돌이나 노반의 괴임 뿐만 아니라 1층 몸돌 괴임보다 두텁고 높게 보여야하고, 또한 낙수면은 직선이면서 1,2,3층의 낙수면은 절대 평행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구체적 척도를 무시한채, 1,2,3층의 지붕돌은 차례로 얇아지고, 각층 괴임 두께는 무시되며, 한국 전통의 처마곡선 미학을 염두에 둔 느슨한 곡선의 낙수면까지 적용되니 석가탑이 재현될리 없다.

 

<석가탑 부분... 이제 석가탑이 다른 석탑들과 같지 않은 점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거 같다...>

 

 

 

 

이런 특징은 석가탑의 단면도를 보면 더욱 확실해지지만, 한편 도면만으로는 석가탑의 미감을 추정하기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삼층석탑의 도면을 이렇게 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어떤 비례와 척도를 근거로 1층 지붕돌을 2층 지붕돌보다 얇게 그릴 수 있고, 또 얇아야 한다면 얼마나 얇게 만들지 설명할 방법이 있겠는지. 또 각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각도는 무슨 근거로 설정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동화사 통일대전 삼층석탑... 비례와 균형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이 석탑에서 석가탑의 미감과 기운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석가탑과 무엇이 다를까?... 먼저 이 석탑은 실제로나 시각적으로 낙수면이 평행하게 만들어졌다. 우리들의 관념이나 시선은 평행하지 않을 때의 혼란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쪽이 더 고도의 정밀함과 수준높은 완성도를 갖췄다고 평가될까??>

 

 

 

여기에 각층 지붕돌의 낙수면과 층급받침 두께비례와 경사각도는 어떤 이유로 제각각인지도 추측하기 불가능하다. 즉 도면으로 석가탑은 미리 그려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석가탑은 아사달의 경험적 수치만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황복사지 삼층석탑... 그러면 통일신라 삼층석탑이 전형화된 초기 석탑인 황복사탑 부터 하나씩 관찰 비교해 본다...>

 

<왼쪽은 솔뫼님 블로그에서, 오른쪽은 다른 곳에서 스크랩했는데, 우리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보는 삼층석탑의 단면도다... 오른쪽이 석가탑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원원사탑이나 봉기동, 술정리, 용명리탑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도면으로 삼층석탑을 그리다보면 왼쪽처럼 1층 지붕돌이 2층 지붕돌보다, 또 2층 지붕돌이 3층 지붕돌보다 두껍게 그릴 수밖에 없다... 또 낙수면도 당연히- 아무런 생각없이 - 자연스럽게 평행한 각도로 그리게 된다... 그러나 석가탑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3) 석가탑은 도면 없이 만들었을까?

 

 

 

내소사 대웅전 목수처럼 아사달도 아무 도면도 없이 혼자 머릿속에 완성된 석가탑 부재를 하나씩 하나씩 혼자서 절단하고 가공하여 완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단적으로 석가탑 바로 옆에 서 있는 다보탑을 보면 쉽게 판가름이 난다. 다보탑은 사전에 하나하나 부재의 규격과 치수가 기록된 도면없이 눈대중만으로 만들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다비드상 재현품... 실제 규모를 알 수 있게 주변 관광객들을 같이 넣어 찍었는데, 미켈란젤로는 아무런 스케치나 사전 준비없이 조각을 해나갔다고 한다. 욕조에 사람을 눕히고 물을 빼면 노출된 신체부위가 드러나는데, 그 레벨에 맞춰 동시에 조각했다고... 요즘으로 말하면 스캔하는 방향에서 조각이 완성됐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할까?  물론 그걸 가능케 했으니 천재라는 말을 들었을 터...>

 

 

 

천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미케란젤로가 와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무런 도면이나 스케치도 없이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순서로 조각을 완성한 미켈란젤로의 조각방식은 이전에도 흉내낼 수 없었고, 지금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천재 소리를 듣지만, 그는 결국 통돌을 다듬고 깎아 하나의 조각을 만들 때 천재이지 260개의 부속을 도면 없이 하나씩 부재를 미리 만들어 다보탑을 조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보탑 부분... 운이 좋아 다보탑 보존수리 공사 때 가설비계에 올라갈 기회가 있어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는데, 이 부재를 보고 깜짝 놀랬다... 당연히 탑신의 난간은 A 그림처럼 두개의 원형 부재를 이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1.5m가 넘는 판석을 B처럼 가공해서 만들졌기 때문이다... 이게 도면없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석가탑에도 도면이 있었다는 추정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근대를 전후한 200여년 조선사를 살펴봐도 이 정도 기획력과 주도면밀함을 갖춘 석조 공예와 건축은 대원군 시절의 경복궁 중건과 수원 화성 정도가 있고, 정조-채제공-정약용 정도의 조합이 경덕왕-김대성-아사달의 조합에 견줄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수원화성도 1년에 걸친 철저한 준비가 있어 가능했듯이 다보탑과 석가탑에 사전 기획과 검토된 도면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원 화성의 화홍문...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도시 개념을 접목한 18세기 조선의 읍성을 독창적으로 구현한 성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화성성역의궤'라는 도면과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30세때 홍문관 수찬의 지위로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은 성설을 기초로 작성한 옹성도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기중도설, 총설 등 6편을 저술했고, 이를 근거로 화성은 건축되었다...>

   

 

 

게다가 앞선 글들에서 설명했지만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 거리의 1/2을 모듈로 확장 배치하면서, 석가탑 지대석의 넓이가 대웅전의 1/10로 확정될만큼 전체 가람배치가 하나하나의 건축적 요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뿐 아니라, 기단부의 넓이와 석탑 전체의 높이, 각층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에서 황금비율이 찾아지는 등 석가탑 자체만으로도 매우 정교한 수리적 체계로 분석되고 있다. 또 그런 일정한 규칙과 패턴화 된 모듈이 있어 불국사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공간적 안정감도 획득된다.

 

 

<물론 사람들은 석가탑의 기단부 넓이와 금당의 넓이를 비교하진 않는다... 그러나 이를 건축한 김대성과 아사달은 각각의 규모와 크기 넓이에서 높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적 요소들을 평면적으로 때로는 입체적으로 기획 검토 도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가탑에도 일정한 비례와 기본적인 규칙적 변화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이 문제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일층 지붕돌에 있어야 할 괴임이 2층 몸돌에 일체화됐다는 점과, 각층 지붕돌 낙수면 경사각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즉 석가탑의 탑신을 자세히 보신 분들은 다른 탑에서는 사용된 예가 없는 예를 하나 찾을 수 있는데, 2층 몸돌 괴임이 1층 지붕돌에 가공된 것이 아니라, 2층 몸돌과 하나의 부재로 가공되어 있다.

 

 

<내가 이부분에 주목하는 이유는 ; 처음엔 몰랐기 때문이고, 다음엔 낯설었기 때문이고, 마지막에는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노반 괴임을 3층 지붕돌이 아닌 노반에 직접 가공한 감은사탑을 제외하면 모든 삼층석탑의 괴임을 하부 부재에 조각했던 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몸돌에 괴임이 가공된 예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용되지 않았다(상하층 기단부의 괴임도 각각 갑석에 붙어있고, 900년대 이후에는 1층 몸돌 괴임은 별석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2층 몸돌 괴임을 석가탑처럼 만든 사례는 없다). 또한 각층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도는 완전히 제각각으로 일정한 패턴과 규칙을 찾기 어렵다.

 

 

<석가탑 낙수면 경사각도... 자세히볼수록 경사각은 일관성이 없다... 무엇때문일까?>

<그러나 우리들 눈높이에서 보면 1층과 3층 경사각은 평행하고, 2층 지붕돌 경사각만 파격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석탑들과 석가탑의 이 차이점들은 궁극적으로 다른 석탑들이 흉내낼 수 없고 따라올 수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귀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