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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31> 불국사 다시보기(4) - 석가탑과 다보탑의 진짜 이름은??...1308

 

 

 

 

 

 

 

 

 

   다) 불국사 - 석가탑/다보탑의 진짜 이름과 무구정경/다라니신앙

 

 

많이 돌아왔다. 사실 2년전에 연재하던 <공간>이란 글에서 다뤄야했을 주제를 <삼층석탑>에서 다루고 있으니 핀트가 안 맞는 거 같지만, 또 그래야 석가탑도 제대로 볼 수 있겠다 싶어 멈추지 않았다. 물론 2년전에는 이렇게 쓰지 못했을 거고, 또 이렇게 안 썼을 거 같기도 하고...^^

 

이제 다시 석탑으로 돌아가는데,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먼저 불국사 대웅전 영역에는 2기의 탑이 있고 우리는 이를 다보탑과 석가탑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명칭은 조선시대에 고착된 것이고, 고려시대에는 칠보탑과 무구정광탑 등이라 불렀다는 말도 있는데, 불국사 삼층석탑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아무도 모른다가 정답 아닐까? 그럼 앞으로는 뭐라고 불러야할까? 두 탑의 이름에 대해서 한번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거 같은데...

 

 

<불국사 대웅전 영역의 석가탑과 다보탑... 우리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한번쯤은 이 탑들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문화재청을 제외한 모든 이(?^^)가 석가탑(국보21호의 공식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다)과 다보탑으로 부르고 있지만, 이는 1740년 작성된 불국사고금창기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명칭이고, 두 탑의 이름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화경이 동원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법화경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등장한 게 아니라 석가모니와 다보여래의 관계만 있고 칠보탑(!)의 형상만 기록 되었을 뿐 석가탑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또한 법화경에 근거하면,『 다보불은 보탑 가운데서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불게 내어드리면서... ... 보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 반쪽자리에 앉...』은 모습이기 때문에 이를 형상화한 것이 ‘이불병좌상’이며, 이 양식은 300년대 후반부터 300여년 동안 중국에서 유행하였고 우리쪽에서 찾아보면 발해에서 6기 정도의 유물이 출토 되었을 뿐 통일신라에서는 정착 되지 않은 형상이었다. 즉 법화경대로 한다면 지금의 다보탑 안에 석가모니가 앉아 계시는 것이니 석가탑이 따로 떨어져 건립될 이유가 없는 셈이다(그렇게 본다면 불국사 삼층석탑을 석가탑이라 부르지 않았던 당시의 통일신라인들이 현대의 우리보다 법화경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불병좌상/700년대 발해/중국 지린성(길림성) 동경성/일본 도쿄박물관 소장 복제품/국립중앙박물관... 소개 자체가 길었지만, 발해에서 만들 걸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복제품을 만들어 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는 말...^^ 600년대 후반부터 법화경은 주요한 경전으로 자리잡았고, 700년대 통일신라에서도 유행하지만 이를 불상으로 조형한 예는 발해에 한정될 뿐이었다...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는 분명 하나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함께 앉았다...^^>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보물97호... 여기 소개하는 이불병좌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이처럼 두 부처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의 석불, 청동불 등 유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데, 다보탑을 형상화한 그림에서는 몇 점 전래되고 있다... 즉 법화경을 불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 한편 석가탑 사리갖춤으로 출토된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를 통해 1024년엔 무구정광탑으로 불렸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건 사실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 같지만, 석가탑에서는 두 개의 중수기가 함께 발견되었고, 1038년 중수기에서 석가탑은 서삼층석탑으로 불렀다는 점이 추가로 확인됐다. 그럼 뭐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보탑이 무구정광탑이고, 석가탑은 그냥 서삼층석탑이라는 건가? 복잡하다...

 

게다가 이런 논의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지 40여년간 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관만 하다가,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 한국에게 세계최고의 목판인쇄물 보존국 지위까지 뺏기는 게 싫었던 (인쇄술의 발명국) 중국이 해당 다라니경은 당나라에서 인쇄해 신라로 보낸 것이라는 문제제기와, 여전히 ‘백만탑다라니(770년)’를 세계최고(最古)로 주장하는 일본측 주장 등으로, 유네스코에서 무구정광대라니경을 세계최고 기록유산으로 인정하지 않자(아직까지 공식 세계최고 인쇄본은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돼 대영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868년작,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일본인 기술자를 모셔와 재연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일들이니 아직 논란은 끝나지 않았고, 연구하려는 의지와 기술력도 없으면서 주장만 앞세워 발생된 일이니 부끄럽기도 하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석가탑 출토 복제품...  세계 최고 작품이기에 보존처리 등의 문제로 진품을 보기는 쉽지 않지만, 이 다라니경에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 중 일부를 추적해 본다...>

 

 

 

 

분명한 것은 석가탑과 다보탑의 창건 시점은 지금까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거로 통설로 알려진 750년이 아니라 741년이라는 점(그렇게 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제작편년도 741년 이전으로 앞당겨진다)과 둘 중 하나는 무구정광탑이라는 점이며, 다만 그 명칭도 창건 후 300여년이 지난 고려시대의 관점과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통일신라에서 그렇게 불렸던 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또 하나, 석가탑은 무영탑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명칭도 현진건이 설화를 ‘무영탑’이란 소설(1938년)로 각색하면서 인지도가 높아졌고, 일부에서는 그림자가 없이 세상을 고루 비추는 비로자나불의 광휘는 無影(무영)하다는 것을 연관시켜, 현재의 대웅전 영역에는 비로전과 비로자나불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750년대 신라의 불교교단은 화엄종이 주도하지 못했다(이는 800년대 전후부터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도 부실한 추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뭐지?

 

 

<쌍탑이 조성된 사찰에 비로자나불이 조성된 경우들이 있어, 현재 불국사의 대웅전 영역을 비로전으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 주요한 논거는 무영탑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 여기에서 논란의 중심이 되는 무구정광대다리니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다라니신앙이란 간단히 말하면 불경을 필사(寫經(사경))하여 봉안하는 소탑에 끼워 넣으면 99억 탑을 만든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으로, 무구정경은 소원을 비는 다양한 방식을 기술한 경전이고, 다라니는 주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렇게 본다면 밀교적 성격에 타력신앙이 가세했다고 볼 수 있다.

 

 

* 다라니신앙에 근거하여 석탑에 봉안 된 소탑 모음...

<앞서 올렸던 사진으로 70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나원리탑에서 출토된 금동삼층탑이다...>

<800년대 중반 만들어진 선림원진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납석제 소탑이다...> 

<역시 800년대 중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봉화 서동리 동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소석탑이다...>

<이 삼층청동탑도 사리갖춤으로 출토된 것으로 1300년대 고려시대 작품이다...> 

<고려시대 사리갖춤으로 출토된 소탑은, 통일신라의 석탑, 납석탑, 목탑보다 금동탑으로 만든 탑이 많고 형태도 다양하며, 77기 혹은 99기보다 하나씩 만들어진 경우가 더 많은 거 같다...>

<이 청동탑 역시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기단부에서 탑신, 상륜부까지 완전히 목탑을 모형화하였다...>

<그 외 동시대에 만들어진 사리갖춤으로 다양한 형태와 크기, 층수를 가진 청동탑들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시 14세기 고려시대 작품인데, 이 소탑은 인도의 스투파를 재현한 것으로 가장 초기 양식의 불탑도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통일신라가 무구정경다라니에 입각해 사리갖춤에 77 혹은 99기의 탑을 표현(!)한데 그쳤다면, 중국에서는 8만4천기, 일본에서는 실제로 100만개의 소탑을 만든 기록(한번씩이지만)과 유물(법륭사에서 만들어 9개 사찰에 10만개씩 배포하고 10만개는 보존했는데 이중 4~8만여기의 소탑이 남아있다)이 있어 그 스케일에 놀라지만, 실제 이 다라니신앙은 중국, 일본과 달리 통일신라에서만 지속적이며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는 점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교리가 한사람에 의해 충격적인 이벤트를 만들 수도 있고, 교단으로 형성되어 한 시대를 풍미할 수는 있으나, 통일신라에서 유행한 다라니신앙이 고려시대까지 유지됐다는 말은 신라와 한반도의 불교가 밀교적 성향을 가지고 무속적 전통과 밀접하게 접합된 결과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데, 700년대 초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통일신라의 석탑 조성도 이 다라니신앙에 의해 근거한다는 주장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무구정경에 근거한 조탑사례/앞 한민주 논문에서... 무구정경 혹은 소탑이 봉안된 석탑들이다...>

<황복사 삼층석탑 사리갖춤/재인용... 이미 앞서 소개했지만, 무엇보다 다라니 신앙에 근거한 가장 초기의 사리갖춤으로, 황복사탑에서는 사리외함에 99기의 소탑을 새겨 넣었다...>

<황복사 삼층석탑... 명활산 너머 천군리탑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즉 600년대와 달리 700년대 들어와 불교교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가람배치를 체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불탑건립과 사찰건축 조성체계의 사상적 근거인 소의경전(所衣經典)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통일신라인의 기호에 가장 잘 맞아 떨어진 것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고, 이 경전을 근거로 불탑건립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질적인 변화 발전은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현장법사의 신역불교 산물인 법화경, 화엄경 등이 통일신라에 신속히 유입될 수 있는 구조와, 원효와 의상 등의 노력과 성과로 통일신라인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정신세계로 대승불교를 해석 이해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며, 이때부터 불탑의 무한공덕 개념이 강조 복원되면서 석탑건립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법화경과 화엄경(법화경이 중생들을 향한 자비와 믿음의 실천을 강조했다면, 화엄경은 깨달음의 당당함의 장엄이 강조되었다고 한다) 등 소의경전을 근거로 600년대까지 불상과 보살이 입체적인 안치되던 금당이 분화될 수 있었고, 각종 전각에는 독립적인 당호와 독자적 양식을 가진 불상이 조성될 수 있게 되었다.

 

 

<봉정사 대웅전 내부... 석가모니불 좌우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가는 대부분의 사찰에 안치된 불상은 이런 형식이다...>

<충주 청룡사 극락보전 내부... 즉 하나의 불상만 있거나 주불 좌우에 협시불이 함께 있는 경우, 그리고 삼존불이 있거나 5불과 6보살이 협시를 하더라도 청룡사 처럼 모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물론 이런 구조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에 정착된 양식이기는 하지만, 과연 700년대 통일신라 시대에도 그랬을까? 600년대까지 백제에서는 어떻게 배열했을까?... >

<동대사 호케도 내부/동대사 안내책자에서... 불국사와 같은 시기(750년대)에 만들어진 동대사의 법화전(동대사에 법화전이 있기 때문에 현재 불국사에 터만 남은 극락전 뒤쪽을 법화전지로 추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부 모습이다... 물론 이 모습도 1100년대에 바뀐 모습일 수 있지만 법륭사 금당 내부의 불상과 보살, 역사의 배열을 보더라도 그 원형은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일본의 고건축 금당 내부는 이처럼 각종 입상들이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금당내부는 완전한 불국토를 이루고 있어 내부에 많은 대중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불국사가 건축되기 이전까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통일신라의 금당 내부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백제와 일본은 하나의 금당에 완벽한 불국토를 형상화했다면, 불국사는 이 내부구조를 완전히 해체하여 전체 가람배치로 확대한 것은 아닐까? 내가 불국사가 佛國土라고 이해하는 의미다... 이런 내부구조를 가람배치 전체로 확장시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불전이 만들어지고, 또다시 이를 통합하기 위한 통불교적 성격이 강조되는 거 아니었을까? 이런 점을 근거로 현대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당호를 살펴보고자 한다...>   

 

 

 

 

    <표4> 우리나라 사찰 5대 전각의 당호와 불상의 배치 - 정토신앙에 대한 짧은 메모

 

전각의 당호

주불상과 좌우 협시불/보살

변상도(후불탱화)

소의경전

대웅전,

팔상전, 영산전

석가모니불 좌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제화갈라보살/관음보살과 미륵보살.

연등불/가라보살(과거)-석가모니불(현재)-미륵보살(미래) 구성도 있다.

영산회상도

법화경

(사바세계

→영산정토)

대웅보전

동방약사여래-석가모니불-서방아미타불.

삼계불로 구성, 대웅전보다 위계가 높다.

삼신불/삼세불 봉안시,

삼여래탱화(三如來幀畫)

좌우로 신중단 신중탱화,

영단 감로탱화와 복합구성

대적광전,

대광명전, 화엄전

노사나불(보신)-비로자나불(법신)

-석가모니불(화신) 등 삼신불 구성

비로자나불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삼신탱화 또는

독립적인 보신,법신,화신탱

화엄경

(연화장세계)

극락전, 무량수전,

미타전, 수광전

아미타불 좌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지장보살.

극락회상도, 극락구품탱화,

아미타불화,

아미타불내영도, 관음도

정토삼부경

(서방극락정토)

약사전,

유리전, 유리보전

약사여래 좌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동방약사유리광회상도

(12대원호법신장+사천왕)

약사여래본원경

(정유리세계)

미륵전, 용화전

자씨전, 대자보전

가섭불 - 석가모니불 - 미륵불.

미륵불 좌우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

또는 묘향보살과 법륜보살.

용화회상도(龍華會上圖)

미륵탱화

도솔촌

(미륵정토→

용화세계)

①초기 금당으로만 불렸던 주요 전각에 당호가 붙은 것은 불교교단의 분파성에 기인한바 크지만, 여기에는 정토신앙이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②정토신앙이란 청정 불국토를 의미하지만, 인도불교에는 없는 중국 구역불교의 영향으로, 불경을 번역할 때 도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윤회를 통해 해탈을 주장하는 인도불교에서는 공간적 개념으로 불국토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없지만, 무릉도원 등 도교의 영향이 강했던 중국불교에서는 공간적 개념으로 불국토를 상징할 개념을 찾으면서 신앙으로 승화됐는데, 중국→한국→일본 등 동북아시아 대승불교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③정토신앙의 시대별 흐름을 살펴보면, 맨 처음 발생한 정토신앙은 미래불이 될 미륵보살이 이끄는 도솔촌의 미륵정토로 백제와 신라에서는 50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행, 600년대 한반도를 관통했다고 생각된다.

④그러나 도솔천 신앙을 정토신앙으로 끌어올려 경전으로 체계화 시킨 것은, <아섬불국경>으로 <유마경>에도 삽입된 동방 아섬불정토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⑤동방의 아섬불정토에 대해 서방의 아미타불정토를 주장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과 <무량수경>, <아미타경>, <무량수경>으로 이루어진 <정토삼부경>이 나타나 서방극락정토신앙이 660년대 이후 한반도를 휩쓸었다.

⑥정토신앙이 유행하자 본래 정토사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법화경>에 의거한 영산정토가 출현하고, 여기에서 영취산이 크게 부각되는데, 이는 중국 도교의 영향과 한반도 고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결합하면서 유행됐다고 생각된다(OO山 XX寺).

⑦그리고 서방극락정토 신앙을 모방해 약사여래의 정유리세계도 정토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700년대 중반에서 800년대까지 많은 금동약사여래불상이 조성되는 등 유행하지만, 통일신라에서는 동방정유리세계 보다 약사신앙으로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⑧그 외 <법화경>에 근거, 불이 아니라 보살의 세계로 동방청량산의 문수정토나 남방 보타낙가산의 관음정토 신앙도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⑨미륵정토를 대표하는 곳이 익산 미륵사지고, 극락정토를 표방해 극락전이 주불전이 된 사찰은 대부분 누군가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의 의미가 강하며, 이후 법화경을 설법한 석가모니의 영산정토에 대해 화엄종은 화엄경에 근거한 연화장정토신앙을 행하게 되었고, 이들을 금당에 형상화해 입체적으로 배치한 일본의 동대사, 법륭사에 그 원형이 잘 남아있고, 후대에는 이를 회화화한 정토변상도로 대체된 것으로 보인다.

⑩불국사에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등이 각각 별원으로 구성됐다는 말은, 영산정토, 아미타정토, 연화장정토, 관음정토 신앙이 750년대에 이미 고착됐음을 의미하며, 같은 시기 동대사에는 법화전이 별원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양한 금당과 당호... 

 

<안동 봉정사 대웅전/국보311호... 그래도 맨 먼저 대웅전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수덕사 대웅전을 더 좋아 하지만 앞 글에서 올렸으니까 같은 국보급에서 봉정사 대웅전을 올린다... >

<장흥 보림사 대웅보전... 몇차례 이야기 했지만 국보였다가 화재로 전소되면서 지정해제 된 건축물이다... 대웅전이 1불2보살 체계로 만들어진다면, 보(寶)자가 하나 더 들어간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동방약사여래와 서방아미타불 등 삼계불이 봉안된다... 한급이 높다고 이해하면 맞겠지?^^>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가장 긴 건축물이었지만 화재로 전소돼 보물 지정이 해제됐다... 대적광전/대광명전/대광보전/화엄전/비로전은 모두 같은 당호로 화엄경과 화엄사상에 근거한다... 때문에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보신인 노사나불과 화신인 석가모니불 등 삼신불이 함께 봉안된다... 대웅보전의 삼계불이 공간의 구분이라면, 대적광전의 삼신불은 부처의 다양한 모습을 개념적 구분으로 법신불이 진리 그 자체의 의미라면, 보신불은 보살이 부처가 된 아미타불 같은 경우를 말하며, 화신불 혹은 응신불은 인간세상에 직접 모습을 나타낸 석가모니를 의미한다... 이 삼신불을 조금 더 확장하여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같이 모시기도 한다...>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경주 불국사 비로전...>  

<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62호... 미륵전/용화전 등은 미륵불을 주불로 모신 불전으로 금산사 미륵전에는 좌우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또 가섭불-석가모니불-미륵불 등 삼존불로 구성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으로 구분한 세 부처가 된다...> 

<금산사 미륵전 현판... 미륵전에는 3개의 걸려 있는데,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 3층이 미륵전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주 금당은 무엇으로 불렸을까?>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67호... 아마 당호 중 가장 어려운 게 각황전이 아닐까 싶어 올리는데, 초기 장륙전으로 불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황룡사 구층목탑 및 금산사 미륵전과 같은 이름으로 불렸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화엄사가 중건된 통일신라 경덕왕대에는 화엄경으로 모든 벽면이 채워져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선종본산이었으니 성격이 모호해지고, 각황전이란 깨달은 왕 혹은 깨달은 자 중의 왕이란 의미로 석가모니를 뜻하는 것이니 대웅전과 같은 의미가 되는데, 화엄사에는 대웅전이 따로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18호... 무량수전/극락전/미타전/수광전은 모두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다...> 

<부여 무량사 극락전/보물356호...> 

<양산 통도사 영산전...사실 영산전/팔상전은 대웅전과 같은 의미다... 보다 후대에 구체화된 불전 이름이라 생각해 순서를 밑으로 내렸는데, 역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한다... 또 연등불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기도 한다...>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55호...>

 

<양산 통도사 약사전... 약사전/유리전 등은 같은 이름으로, 약사여래를 주불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로 협시한다...> 

<실상사 약사전... 그 외 우리에게 익숙한 관음전, 지장전/명부전, 응진전/나한전, 삼성각/칠성삭 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보살과 아라한을 모시는 불전으로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이, 지장전과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그리고 응진전과 나한전은 보살이 아닌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모시는 공간(석가모니를 주불로 대가섭과 아난, 혹은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에서 협시한다)이다... 그리고 삼성각/칠성각은 치성광여래를 중시으로 독성과 산신 또는 용왕이 좌우로 봉안되는데, 치성광여래는 북두칠성신앙을 불교에서 수용한 도교풍의 신선사상이 만들어낸 한자문화권의 부처라 말할 수 있겠다...>  

 

 

 

 

 

이런 역사적 사상적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에 통불교적인 다불전 시대를 개척하고 다보탑-정혜사탑)-석굴암 삼층석탑(원형과 팔각원당형 기단)-화엄사 사사자석탑 등 석탑조형의 다양성을 열며 신기원을 이룩한 불국사와 석굴암의 소의경전을 찾는 것이며, 세계최고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라니경을 근거로 석가탑과 다보탑의 진정한 이름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이후 무구정경에 근거한 다라니신앙은 900년대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고려초기부터 변화하는데 이때 불탑 속에 소탑을 만들어 봉안한 다리니경은 보협인다라니경이었고 1000년 경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보협인석탑까지 조성하게 된다(이 석탑 각면에는 이불병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석탑에 소의경전이 봉안된 최초의 사례는 왕궁리탑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강경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불교 최대종파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 바로 금강경(과 전등법어임)이라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왕궁리탑 사리갖춤 중 금강경판/국보123호... 나는 개인적으로 불탑에 소의경전이 함께 봉안된 最古의 유물이 바로 이 금강경판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왕궁리 오층석탑의 백제건립도 공식화 되지 않은 상황에서 때이른 감이 있지만, 국립전주박물관의 설명문에도 이 금강경판이 무왕대 제작될 가능성을 명시하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금강경판... 이렇게 본다면 이 금강경판은 우리나라 석탑 사리갖춤에서 최고의 사경유물이 되고, 역시 최고의 소의경전은 금강경이 된다... 그리고 현대 우리나라 조계종의 소의경전도 금강경이다...> 

 

<보협인석탑/국보209호/동국대박물관에서... 고려시대 들어와 다라니신앙은 무구정광다라니경에서 보협인다라니경으로 바뀌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다... 아래 설명문의 충의왕 정홍숙은 900년대 중반 인물로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로 통일되기 이전 오대십국의 하나인 오월국의 왕으로, 인도의 아소카왕을 본따 8만4천기의 소탑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이 보협인석탑을 그 이후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석탑 하단 4면에는 이불이 각각 새겨져 있다...> 

 

 

 

 

 

 

아무튼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무구정경 다라니신앙의 유구가 보이는 최초 석탑이 황복사탑과 나원리탑이고, 그 시기는 700년대 초반이다. 이때(성덕왕대)부터 통일신라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석탑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데, 천군리쌍탑-장항리쌍탑-염불사쌍탑-창림사탑-미탄사탑-봉기동탑-용명리탑-원원사쌍탑-석가탑/다보탑-술정리탑-갈항사쌍탑-월광사탑-선본사탑-보월동탑-마동탑-낙산동탑-간월사쌍탑-정혜사탑-석굴암탑-화엄사탑 등과 조탑동-송림사-장락동-산해리-법흥사 등 전탑들이 그때 만들어졌다. 800년대 후반이 양적인 면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성기였다면, 700년대는 질적인 면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황금기라 부를만 하다. 그 근거가 바로 밀교적 성향을 앞세워 신라의 무속적 전통에 밀착한 무구정경과 다라니신앙이었다는 말이다.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133호/높이 6.3m... 800년대 중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에서도 사리갖춤으로 다라니경이 출토되었다...>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444호/높이 5m... 화엄사 서오층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선림원지탑에도 상층기단부에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물론 이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에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화엄사가 교종의 주요사찰 중 하나였다면, 선림원은 선종의 주요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려고 같이 올린다...>

 

 

 

 

 

또한 무구정경에서 우리는 석가모니의 혜안 같은 걸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무구정경은 탑의 중수를 새로운 불탑을 건립하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설파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탑은 아소카왕에 의해 양적으로 극대화(8만4천기)됐지만, 석가모니 생존시에도 무덤양식으로 존재했다. 문제는 관리였고... 새로운 탑을 만드는데 치중하다보면, 발원자의 맥이 끊길 때 관리하지 않는 무덤처럼 불탑은 생명력을 잃고 훼손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탑을 중수하는 것만으로도 건탑과 똑같이 공덕을 쌓는 것이라면, 지속적인 관리는 물론 기존의 탑에 수없이 많은 발원자들이 추가로 참여할 여지와 경제적으로 덜 부담되면서 탑을 쌓았다는 만족감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런 개방성과 경제성은 대중성과 지속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토 금동 불상 장식 조각판/863년... 새로운 불탑을 건립하면 다양한 사리갖춤이 봉안되는데, 왕궁리탑에서는 금동판에 경전을 사경하여 넣기도 하지만 이처럼 불상을 조각하기도 한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872년... 또한 불탑을 중수하면서 종이 외에도 금동판에 중수기 혹은 본기를 옮겨 중요한 기록 자료가 되는데, 통일신라 당시 불탑을 지속적으로 중수한 주요한 사상적 논거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 

 

 

 

 

 

 

물론 사경과 소탑 봉안이 문자를 쓸 수 있는 지식인의 동참과 인쇄술과 공예술의 발달이란 부수적 효과를 창출했고, 자원낭비를 막는 지구사랑(?)으로 연결될 것을 석가모니께서 미리 감안한 것은 아니겠지만, 탑의 관리와 중수도 건탑만큼 중요하다는 말은, 탑이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 되고, 그래서 다양한 이유의 폐찰 속에서도 석탑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석가탑 사리갖춤에서 1000년이 넘는 시간을 연결할 중수기와 고금기 등이 한꺼번에 발견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그래서 혼란스러운 것도 있지만, 그건 현대 우리들의 몫이지 석가모니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통해 인쇄술의 발달을 확인할 수 있듯이, 사경을 통해서 당시 다양한 실상을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되 리움박물관 등에서 촬영한 금/은 사경을 소개한다...>

<통일신라 시대부터 다양한 경전이 사경되는데, 당시 사경제작에는 종이를 만드는 사람, 불경을 필사한 사람, 불보살을 그리는 사람, 불경의 제목만 쓰는 사람, 불경을 읽어 주는 사람 등이 전문적인 역할분담을 통해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연구 확인되고 있다... 즉 글을 읽고 글씨를 쓰는 것만으로 지식인 대접을 받는 사회에서, 불탑에 봉안하기 위한 사경은 전문직업으로 먹고 살 수 있을만큼의 수요가 있었다는 말이고, 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한 기록물중 하나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돈황석굴의 사경 연습지였다... 후대가 되면 사경을 승려들이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통일신라 시대 지식인들은 불경을 늘 접해야 했다고 추정해도 틀리지 않을까??^^>

<그러나 이처럼 금은으로 화려하게 장엄된 사경에도 폐단이 심각했으니, 982년 고려사절요에서 지적한 통일신라의 사경 조성에 대한 비판이 그 내용이다/불국사 석가탑 발견 <보협인다라니경> 사경의 서풍/리송재 논문에서... ; 불경을 쓰고 불상을 만드는 것은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일 뿐이니, 어찌 진귀한 보배로 장식하여 도적이 도둑질할 마음을 내도록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석탑에 장엄된 사리갖춤을 도둑질하기 위해 그 당시부터 도괴 등의 폐해가 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런데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에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정도에 지나치자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고(멸망의 한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장사치들이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 서로 사고 팔아서 생계를 도모하기까지 하였는데 근대에 와서도 그 남은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원컨대 엄중히 금단하여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다라니신앙은 통일신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이를 위한 사치의 폐단도 심각했음을 추정할 수 있어 참고로 인용하였다..> 

 

 

 

 

그러면 이제 무구정광대다리경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던 불국사 두 탑의 명칭에 대해 정리를 할까? 내 결론은 석가탑과 다보탑으로 부르는 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삼층석탑이면서 유일하게 석가탑이라는 상징적 이름이 고착된 게 최소 300여년이 넘었고, 1740년 고금기를 재차 기록할 때도 당시에 가장 유행하고 통설로 받아들여진 것이 일부 각색된 것이라면 더 긴 연원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세계에 고착됐으며, 수십기의 다보탑이 만들어진 일본, 중국과 달리 불국사의 다보탑 역시 석가탑과 함께 유일무이하게 상징적이면서 독창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한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741년 만들어진 석가탑과 다보탑을 통해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통일신라에서부터 고려시대에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무구정경 - 다라니신앙이 맥이 끊기지 않고 광범위하게 유행하여, 조선시대에도 석탑이 보존 관리 중수될 수 있었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전통으로 고착됐다는 점을 유념하자는 것이다.

 

<인도 여행에서 돌아 온 지인이 선물한 다라니경/보리수 껍질로 만들었다고... 그리고 이 다라니신앙은 내가 몰라서 그렇지, 다라니경을 많이 선물하면 그만큼 복을 많이 받는다는 믿음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선물로 받기는 받았는데 힌두어인지 뭔지 모르는데다, 위 아래도 구별하지 못해 사진을 찍으면서 고심했다...ㅎㅎㅎ>

<다보탑... 이 탑은 무구정경탑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다보탑이었을까? 이제 석가탑, 다보탑으로 넘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