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석가탑 - 손 댈 수없는 아름다움
(5) 수학적 비례와 경험적 완결성의 통일
그러면 왜 이런 규칙과 일정한 패턴을 갖추고 있으면서 2층 몸돌에 괴임을 하나로 만들고, 낙수면 경사를 다르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하나는 2층 몸돌에 사리공을 만들면서 몸돌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보다 두꺼운 부재를 사용해야만 했던 필요성 때문에 변형되었거나, 1층 지붕돌이 2층 지붕돌보다 지나치게 두꺼워지는 것이 부담스러워 시각적으로 얇게 보이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몸돌에 괴임까지 붙여서 가공하는 것은 그냥 몸돌에 우주만 표현하는 것에 비하면 최소 10배 이상의 정밀함과 숙련도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했을 이유는 구조적인 문제와 시각적인 문제 외에는 달리 접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황복사탑 각 부재 이음면... 이 방식은 황복사탑만이 아니라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화된 방식이다...>
<석가탑의 부재 이음면... 석가탑에만 있는 유일무이한 구성방식이다...>
그렇다면 혹시 황복사탑이나 천군리탑처럼 전통적인 방법으로 석가탑을 완성한 다음에 구조적인 문제와 시각적인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을 교체한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700년대 초반에 비해 일층몸돌도 얇아지고 상층기단부가 높아진 상황에서 기존의 비례를 그대로 적용하면 염불사지 쌍탑이나 보월동탑, 월광사지탑처럼 마감될 수밖에 없는데,
하나씩 살펴보면 염불사지 쌍탑에서는 2층 지붕돌보다 두껍고 넓은 1층 지붕돌로 인해 1층 몸돌이 너무 약해 보이는 문제가 발생하고, 보월동탑에서는 지붕돌의 넓이는 좁혔지만 두터운 1층 지붕돌로 인해 경쾌함과 상승감이 많이 사라졌고, 월광사탑에서는 각층 지붕돌을 얇게 만들면서 지붕돌의 둔중함은 보완했지만 그로인해 2~3층 몸돌이 급격히 작아져 너무 안정적으로 보이면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문제 등이 발생하게 된다.
<염불사지탑... 새로 끼워넣은 1층 지붕돌이 밝아서 유독 두껍게 보일수도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서탑 지붕돌을 복원한 것이니 거의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층 지붕돌 단면적이 일층 몸돌 단면적보다 넓게 보여 가늘다는 느낌이 든다...>
<월광사탑... 염불사지탑에 비해 일층몸돌이 훨씬 안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얇아진 각층 지붕돌로 인해 석탑의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게 보인다...>
<보월동탑... 염불사탑과 월광사탑의 중간 정도가 보월동탑일까? 1층 지붕돌과 일층 몸돌이 단면적에서 적절한 비례를 이루었다... 안정감 상승감, 모든 게 살아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없어 보이지 않나? 수학적 비례로만 구성된 예술이 생기를 잃고 박제화 되는 경우가 이럴 때가 아닐까? 만약 석가탑도 모든 부재를 수리적 체계로만 완성시키려했다면, 지금의 미감은 결코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2층 몸돌의 절반 두께까지 파내야했던 사리공은 상부의 압축력을 감당하기에 파손의 위험성도 커졌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아사달 혹은 김대성은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을 선택하게 된 거 아닐까? 1층 지붕돌에서 괴임을 잘라내 이질적이다 싶게 얇고 넓은 지붕돌로 재가공하여 교체하면서, 기존방식보다 훨씬 공력과 시간이 많이 투입되는 2층 몸돌에 괴임까지 조각하게 된다(우주만 있는 몸돌에서 파내야 할 체적이 10이라면, 석가탑처럼 가공하기 위해 파내야 할 체적은 30배가 넘을 것이다. 그만큼 복잡하고 힘든 정교한 과정이 수반된다는 말이다).
<석가탑 부분...>
또한 잘라낸 괴임 두께만큼 얇아진 1층 지붕돌은 층급받침과 낙수면의 경사와 비례가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부재 이음선을 숨길 수없는 석공사에서 눈에 거슬릴 수 있는 접합부가 노출되었고 1층 지붕돌은 2~3층 지붕돌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경사와 두께로 마무리 됐다. 어쩌면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고 시도한 과감한 선택이 예상 밖으로(!) 완성도를 높인 것이다.
<석가탑... 다보탑 보다 조금 먼 거리에서...>
그렇다면 석가탑은 전통양식에 따른 도면과 제작방식으로 1차 완성된 다음 한차례 수정을 통해 변형된 것은 아닐까? 물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의 조정은 741년에 1차로 석가탑이 완성된 당대에 현장에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10년후인 751년 김대성이 결합한 시점이나, 지진으로 도괴 위험에 처한 석가탑을 중수한 1030년대 전후 고려시대에 변형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석질에 대한 이해도나 가공의 숙련도, 전체적인 비례를 고려하면 741~751년 김대성-아사달에 의해 이루어진 건 아닐까 싶은데, 결국 석가탑은 수리적이며 관념적인 완성과정을 거친 이후, 다시 경험적 수치와 시각적 완결성을 위해 현장에서 재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1층 지붕돌을 고치지 않았다면, 석가탑의 미감은 염불사탑과 보월동탑의 중간 정도의 타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원원사탑과 비슷했을까?>
이론과 경험의 통일, 도면과 현장성의 결합, 관념과 현실의 통합을 위해 석가탑은 기존의 양식과 방식을 과감히 극복했다. 너무나 파격적으로... 결국 석가탑은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재단된 수학적 일관성과 기계적 비례의 일관성을 견지하면서, 철저히 경험적이면서 분절적인 비례를 재적용하여 매우 치밀한 안배에 의해 통일성을 획득한 유일한 비례를 창조해냈다. 석가탑 이전에도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하지 못했던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순간 1층 지붕돌이 눈에 거슬린 게 아니라, 석가탑 미감을 푸는 열쇠처럼 다가왔다... 공예화되고 모형화되어 가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역사에 석가탑은 건축적 의지를 되살렸다... 기계적 비례와 수리적 안정성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에서 수정된 것이다... 또 얇아진 1층 지붕돌은 석가탑의 이중성 - 상승감과 안정감은 각각 배가시켰다... 중간에서 한번 더 힘을 뻗어나가는 2단 로켓 발사체처럼, 쫙 벌어진 1층 지붕돌로 인해 석가탑은 대지를 제압하는 당당한(!) 힘을 얻고, 하늘로 뻗어가는 기운을 살릴 수 있었다... 내가 준수함과 세련됨이란 개념을 석가탑에서 피하는 이유다...>
(6) 참고> 석가탑의 황금비율
이런 석가탑의 비례를 황금비율로 해석한 예가 있어 잠깐 살펴본다. 황금비율이란 이탈리아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중동의 아라비아 숫자를 유럽에 보급해, 유럽 수학을 부흥시킨 장본인이다)가 발견해 1202년 쓴 <주판서/산반서>란 책에서 공식화되었는데, 자연속에 숨은 일정한 패턴과 규칙을 발견(!)하여 이를 체계화시킨 것으로, 오늘날 명함, 담배갑, 신용카드, 지갑, TV화면 등의 가로 x 세로비율에서부터 심지어 증권분석 등에서까지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사실 황금비율이 황금(!)비율이 된 이유는 그냥 보기에도 안정성과 합리성을 갖춰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갖췄지만,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은 편안한 자연스러움 즉 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파르테논 신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로 BC438년 완공됐다)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로마의 건축과 이를 계승한 고딕양식 이후 르네상스 양식에서 본격적으로 연구 적용되면서 규격화됐다.
<르 코르뷔제의 황금비율/건축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주)SEEDPOST/리차드 웨스턴 지음/2013년 1월/55 P에서... 르 코르뷔제는 미스 반 데어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과 함께 현대건축이 체계화되는데 큰 영향력을 미쳤던 건축가 중 하나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에서 시작된 자연적인 조화와 아름다운 비례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실제 건축에 적용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때부터라는 말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험과 독일의 철학 체계, 미국에서의 실험 등을 통해 체계를 잡아간 현대건축은 프랑스인 르 코르뷔제의 모듈과 황금비례 등의 개념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황금비율로 석가탑의 조형적 아름다움의 비밀을 찾으려는 이유는 석가탑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각층 지붕돌과 몸돌의 비례를 1:1.618로 해석한 김효율 교수는, 팔방금강좌의 배열도 피보나치수 8의 피보나치수열과 동일한 구조로 배열되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팔방금강좌의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그 배열에 대한 본격적 연구가 발표된 것은 2010년 이후다...>
이를 살펴보면 ; 석가탑 팔방금강좌의 연꽃잎은 단엽과 복엽 두가지 문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엽문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쫓아가면 단엽문 2개→복엽문 1개→단엽문 2개→복엽문 3개로 비보나치수열의 2+1+2+3=8로 같다는 주장이다.
<김효율 교수가 발표한 석가탑 팔방금강좌의 황금배열/미디어 붓다에서... 단엽문과 복엽문이 복잡하게 배열되어 있다... 이걸로 황금배열을 찾아낸 김효율 교수도 대단하신 분... 보통의 관심과 애정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약간 비약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엄격하게 피보나치수열를 적용하려면 ; 단엽문 1개, 복엽문 1개에서 시작해 단엽문 2개, 복엽문 3개로 가야하고, 그렇게 되면 단엽문 1개가 남게 된다. 물론 결과적으로 단엽문과 복엽문은 4개씩인데, 이를 단엽문-복엽문으로 번갈아 배치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김대성과 아사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는 없을 거 같지만, 즐거운 상상이 가능해 함께 소개했다.
<석가탑 팔방금강좌는 이처럼 두가지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김교수는 이 동심원의 비례까지 1:1, 1:2, 1:2파이 등 규칙적이고 규격화된 비례가 적용되었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피보나치수열을 잠깐 살펴보면 1,1,2,3,5,8,13,21...의 배열로 해바라기꽃씨, 앵무조개 무늬 등 자연에서 찾아지는 배열로 선행하는 두숫자의 합이 뒷수가 된다는 것인데(1+1=2, 1+2=3, 2+3=5, 3+5=8 등) 실제 우리가 보는 자연속의 모든 꽃잎은 모두가 3(붓꽃), 5(채송화, 패랭이), 8(모란, 코스모스), 13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무런 규칙이 없을 거 같은 과꽃/치커리(21장), 질경이/데이지(34장), 쑥부쟁이(55장 또는 89장)가 모두 피보나치수열로 이루어져 있는데, 결국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바라보고 자연스럽게 따라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보기 좋은,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비율(비결/기준/법칙 등)이 자연(!)속에 숨어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또한 황금비율이란 뒷 수로 앞 수를 나눌 때 나오는 약 1.618 비례인데(숫자가 클수록 89/55=1.618에 가까워지고 1/1=1, 2/1=2, 3/2=1.5, 5/3=1.666, 8/5=1.6, 13/8=1.625, 21/13=1.615 등도 비슷한 계열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뇌 없이(!)도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배열을 선택한 식물들은 인간보다 훨씬 고등생물이지도 모르겠다.
<이 꽃 이름이 데모르 후세카인 거 같은데(사진 찍을 때 써 있었는데, 이 꽃인지 다른 꽃인지 몰라서...ㅠㅠㅋㅋ), 각각 꽃잎을 한번씩 세어 보시길 바란다... 정말 피보나치의 배열로 이루어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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