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36> 불국사(9) - 국보20호 다보탑 : 과거의 집대성...1309

 

 

 

 

 

 

3) 다보탑 - 통일신라 석탑의 전환점

    (1) 모목석탑의 완결 - 과거의 집대성

 

 

<다보탑/국보20호... 이제 다보탑에 도전(?)한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사실 삼층석탑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욕심이 있었다. 감은사/고선사탑, 석가탑/다보탑을 피하지 않고 장항리탑 등 통일신라의 오층석탑에 대해서는 한 번쯤 정리해 보겠다는...^^ 그만큼 부담스러웠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었지. 마른 수건을 비틀어 짜내봐야 50보 100보가 될지 모르지만, 내 언어로 내 생각으로 내 감성을 담아보겠다는...

 

혹 어설픈 접근이 되지 않을까 조심했고, 내 스스로 충분히 만족하며 다 털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번에 채우지 못한 것은 나의 한계라 생각하며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영욕과 세월의 무상에도 다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그들을 내 작은 가슴과 머리에 다 담겠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계를 느끼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초심으로 돌아가든지, 회피하든지, 게걸스럽게 변명하든지 셋 중 하나일 거라 생각된다. 나 역시 약간의 혼란과 중복 비약이 있었겠지만, 내게 축적된 지금까지의 의문들에 충실하면서 비교와 새로운 정보를 재구성하여 실체에 대한 접근을 우선하려 했다.

 

물론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알았던 것에는 깊이를, 체계적인 접근이 또 다른 발견을 가능케 해주어 즐거워지는 면도 있는데다, 나와 비슷한 문제제기와 접근방법을 가진 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는 안도감과 함께 더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다는 기쁨이 컸기에 계속되고 있지만, 어려운만큼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제 또 다른 숙제 - 다보탑을 정리해야(?) 한다. 역시 비슷한 벽을 느끼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이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입시준비 메모 같을 게 뻔하고, 감에 의지한 엉뚱한 주장도 많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수정까지 있어 완전하지 않은데, 새로운 접근을 생각하는 사람들, 어떤 주제든 한번쯤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다는 스스로 만든 굴레를 버리지 않아, 어디까지 누구를 만족시켜야 하는지 불분명하기에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사정을 감안해주실 누군가, 내 생각에 귀와 마음을 연 이를 생각하면서 또 다시 도전(?!!)해본다. 오늘은 다보탑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런 설명을 좋아했던 거 같다. 다보탑과 석가탑 어떤 걸 먼저 만들었을까? 석가탑과 다보탑 어떤 게 더 힘들까? 이제는 석가탑을 만들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다보탑을 먼저 만들었을 거라는 말이 공론화 되는 분위기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유형의 궁극을 자랑하는 다보탑은 무형의 완성태를 상징하는 석가탑에 밀리는 분위기지만, 어디까지나 유무형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관에 불과할 뿐 다보탑과 석가탑은 그렇게 비교될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불국사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건 아무래도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750년대 가람배치의 중심은 석탑이었고, 쌍탑가람 - 2탑1금당식 가람배치는 불탑의 비중을 가장 크게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공간경영이었다... 현대의 우리들 뇌리에 가장 먼저 두탑이 떠오르는 건 시공을 초월하려는 김대성과 아사달의 연출의도가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보탑의 석사자상... 그러나 우리는 다보탑을 대하면서 수많은 간접화법에 의존하고 있다... 사자가 네마리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어찌저찌해서 지금은 한마리 밖에 없다는 투의... 석사자상이 다보탑의 전부를 말 할 수 없음에도 정작 다보탑에 대한 직설화법이 부족한 이유는 다보탑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기 때문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전(!)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석가탑처럼 단순함의 미학은 버려지는 - 포기해야하는 많은 것들에 대한 미련을 감지한 이들에 의해, 절제된 기운에 대한 공감과 추상적으로 재구성되는 무한한 조화 속에서 경외감으로 발전되지만, 다보탑처럼 복잡하면서 어지럽지 않고, 화려하면서 지루하지 않으려면, 다양한 구성을 조형적 합리성으로 조화롭게 풀어내면서, 균형과 비례에 대한 치밀한 안배가 구현되어야만 한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움을 언어와 개념으로 설득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게끔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 말이다. 실패를 극복할 자신감이 없다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모험이고, 궁극에 대한 도전이며 도박이기 때문에 자주 시도된 예도 없고, 성공한 역사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다보탑은 조형된지 1300여년 그 누구도 모방하거나 흉내낼 엄두를 내지 못한 독보적인 존재였다...>

<용인 호암미술관의 다보탑 재현품... 상륜부를 살려 실측 치수로 재현했는데, 이게 더 나은 듯... 경주국립박물관 뜨락과 이곳... 축소된 형태를 몇기 보기는 했지만, 재현 조차 쉽지 않았던 것은 현대적 미감과 수요의 의미도 있지만, 조형 자체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750년대 통일신라인들은 최상의 미를 이렇게 표현할 줄 알았고, 시도했으며, 성공했다는 점일 듯...>

 

  

 

 

사실 다양한 공간경영에 대석단과 석가탑-다보탑으로 완성된 불국사와 석굴암은, 백제의 미륵사나 신라의 황룡사, 고려의 팔만대장경, 그리고 조선의 경복궁이나 화성 건축에 비견되는 대역사고, 불국사 조형에 당당한 지분을 갖고 있는 다보탑은 화려함과 정교함에서는 고려시대(1085년)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외에는 견줄 게 없는 우리나라 석조예술의 백미임이 분명하다. 불국사가 석가탑과 다보탑만으로 각인되는 것도 아쉽지만, 그만큼 독보적인 다보탑이 석가탑과 비교 대상이나 완성도에서 밀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모방과 변형조차 허용한 바 없는 유일무이한 다보탑의 의의와 특성에 대해 몇가지 메모해본다.

 

* 용인 호암미술관 사진 몇장... 

<너무 오래된 사진이기는 하지만, 호암미술관은 우리나라의 최고로 불리는 것들을 다양하게 재현했다... 전통적인 연못은 원형에 방형, 혹은 방형에 원형을 두면서 한쪽은 자연적인 또 한쪽은 인공적인 기법으로 마무리했는데 이곳 연못은 내외부가 비슷한 수법에 방형으로 만들어져 아쉽기는 하다... 아무튼 미술관 입구는 불국사 대석단의 청운백운교 혹은 연화칠보교에서 차용했고...>  

<정원 중간중간에는 이처럼 조선시대 궁궐의 담장을 재현했으며...> 

<저 문의 도안은 연경당에도 있고, 2000년대 복원한 경복궁내 건천궁에도 똑같은 도안이 있다...> 

<그리고 이 석단은 부석사 석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호암미술관에는 2개의 탑이 재현되었는데, 하나가 다보탑이고 또 하나가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다... 아 사진은 대략 97년 사진인 거 같은데, 그 때 가장 화려한 탑으로 꼽았던 2기의 탑이 이곳에 재현된 걸 보고 한참 기뻐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확인했으니까...ㅋㅋ 생각해보면 최상, 최고의 예술은 기획과 기술, 정성과 안목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경제적 후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삼성과 고 이병철씨에 대한 평가에 나역시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지만, 최고를 고르는 안목과 이를 재현하려는 의지(그것이 소유욕 때문이었다고 하더라도)는 높이 평가할만하며, 그렇게 고른 것들이 한자리에 모인 호암미술관은 1900년대 후반의 안목이 집대성된 곳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사진 몇장을 골라봤다...>

 

 

 

 

 

다보탑은 무엇보다 모목석탑의 완성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거 같다. 백제의 570년대 정림사탑과 639년 미륵사탑에서 시도된 목탑의 석탑으로의 번안은 741년 통일신라의 다보탑에 의해 완성된다. 82개에서 시작된 감은사/고선사탑의 부재수는 황복사탑에 이르러 27개(오층석탑임에도 나원리탑이 37개, 장항리탑은 27개다)까지 줄어들어 삼층석탑은 완전하게 전형화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갑자기 260개의 부재로 만들어진 다보탑이 탄생한다. 석가탑 부재수(노반까지 27개고, 상륜부는 대략 14~16개로 이루어지는데 다보탑은 12개다)의 10배에 달한다.

 

<모목석탑의 출발은 아무래도 정림사탑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정림사탑은 총 149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나??>

<다보탑 부분... 정림사탑이 목탑의 번안 혹은 모형이라면, 다보탑은 완전한 모목석탑이다... 석재로 표현할 수 있는 목조건축의 최대치가 다보탑에 구현되어 있다...>

 

 

또 목탑에나 있을 법한 4방 계단이 추가되고, 상층기단부는 우주와 심주에 공포구조만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목조건축적 결구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팔각(원당)형의 탑신으로 구성하고,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에는 목조건축의 난간과 대나무 등 다양한 형태의 기둥을 그대로 차용하여 입체적으로 구성하였다.

  

<다보탑 부분/경주석탑보수사업단에서... 이런 각도에서 세부 양식을 확인할 길이 없어 참고로 올린다...> 

 

 

 

 

왜 이런 석탑을, 그것도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처럼 하나의 몸돌에 조각이나 부조로 새기는 방식이 아닌 그토록 까다롭게 석재를 하나하나 잘라 목조건축 같은 결구방식과 양식을 그대로 살린 석탑을 만들어야만 했을까? 완성도 높은 조형의지와 구조적 안전성 때문일까(실제 고려와 조선시대의 지진에서 석가탑은 심하게 훼손되기도 했지만 다보탑이 건재했던 이유는, 성토된 부지와 복토된 기초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목조건축 결구방식이 적층식 석조건축보다 지진에 훨씬 강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런 문제 때문이었을까? 오히려 구조적인 기술의 문제보다 조형의 의도와 의지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을까?

 

 

<다보탑 부분... 어쩌면 가장 복잡해서 약할 것 같은 다보탑의 결구방식은, 목조건축의 긴결양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1300여년 자연재해에 의해 붕괴되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다... 물론 인위적인 도괴를 시도할 수 없는 아우라가 더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술자가 불탑조성의 발주자가 아닌 이상 어쩌면 건축주의 의지가 우선이었을 거 같다. 전륜성왕을 자처한 경덕왕의 과거를 집대성하고자 하는 욕심 같은 거 말이다. 지상에 전하는 모든 경전을 하나로 모아 불력으로 국난을 이기고자 했던 의지가 고려의 팔만대장경(1236~1251년 만들어졌는데, 거란 침입을 계기로 완간한 초조대장경(1011~29년)과, 대각국사 의천이 주도한 속장경(1087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을 만들었듯이, 불탑의 모든 전통을 하나로 집대성하고자 하는 의욕이 미륵사탑(639년)을 뛰어넘는 모목석탑을 완성하게 된다. 

 

<정림사탑에서 시작한 목탑의 석탑으로의 번안은, 639년 백제의 미륵사탑에서 정점에 오른다... 천하군림의 자신감과 시공을 초월하려는 기백이 없었다면 시도 조차할 수 없는 모험인 것이다...> 

<백제가 미륵사탑으로 모목석탑을 재현했다면, 통일신라는 다보탑으로 모목석탑을 완결시켰다... 한차원 높은 변화와 기술적 발전, 무엇보다 보다 확장된 정신세계를 추구하려는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런지...>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10호...  828년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백장암탑은 기단부에서부터 완전한 모목석탑으로 아마 마지막 형태가 아닐까 싶다... 기단부와 탑몸돌에 새겨진 난간은 경주 임해전지나 일본 법륭사 오중탑의 난간과 똑같은 문양으로 당대의 목건축 양식을 충실히 재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석재의 하나계는 이렇게 도안을 회화적이거나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인데, 다보탑은 실제로 재현했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통과 과거의 집대성은 자신감의 과시와 연결된다. 목탑-전탑-석탑의 모든 양식을 일통하여 석탑의 관점에서 불탑의 양식을 공고히 함은 물론, 고구려-백제-당-일본의 모든 불탑을 재해석한 다보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적 완결성과 독자성을 선언하는 기념비적 의의도 갖는다. 또한 통일된 이후에도 2등 국민에 불과한 백제와 아직도 호시탐탐 신라를 노리는 일본보다 뛰어남을 증명하면서 고구려-백제의 전통이 신라에 계승됨을 내국인들에게 각인시켜야했다. 기단부는 삼국에서 유행하던 목탑구조를 차용하고, 사면 기단부에 탑신의 몸돌은 고구려에서 유행한 팔각형을 살려내고 백제인 석공조직을 동원했다. 과거를 해체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를 재구축했다는 선언이었던 것이다.

 

<불국사에서 재현한 목조건축의 결구방식은 비단 다보탑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단 난간을 비롯해 석단의 세부 결구방식까지 목조건축 결구방식을 적용했다... 이건 차용이나 모방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기/871년/적멸의 궁전 사리장엄/한길아트/신대현에서 인용... 사리기는 무덤=묘탑이기 때문에 건축이고 금속공예다... 여기서도 팔각원당형의 몸체에 목조가구의 기단부를 두었다...>

 

 

 

 

여기에는 또 다른 근본에 대한 회귀도 내포하고 있다. 741년 경덕왕대면 이미 혜초가 다섯 개로 분열된 천축국, 즉 인도를 답사하고 남긴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727년)이 신라에도 유통되던 때다. 측천무후에 의해 부흥한 중국의 성당양식과 인도 스투파의 원형도 비교할 여유와 안목이 통일신라에는 있었고, 게다가 대승불교의 최후경전이라는 유마경까지 석굴암에 접목하고 있던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중국과 삼국시대의) 목탑 기단부와 인도의 스투파를 조합하여 석탑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사상적 문화적 장애가 해소되면서, 국제성과 보편성을 계승한 독창적인 다보탑이 창조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감은사/고선사탑을 비롯한 많은 석탑 조형에서 축적된 기술력과 불국사 대석단의 기획력이 뒷받침 되었을 것이고.

 

  

<인도 산치대탑/Daum이미지에서 스크랩... 기원전 3~2세기에 만들어진 최초의 스투파로 난간과 일산(우산) 등이 있다...>

 

<다보탑 부분... 다보탑의 세부구성은 인도의 스투파를 원형으로 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거 같다...>

<법륭사 금당... 다보탑의 기단부를 이해하려면, 앞 시대 만들어진 법륭사 금당과 오중탑의 기단부에 4방으로 조성된 계단부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을 거 같아서...>

<이건 앞 글에서 올린 불탑 사리갖춤의 청동소탑 부분이다... 다보탑의 기단부를 생각하려고...> 

<법주사 팔상전... 1600년대 중반 조형된 목탑이지만, 역시 4방으로 계단이 만들어지고 급격하게 수축된 상층부는 미륵사탑이나 다보탑 같은 체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탑의 미감이 살아있지 않다는 말...> 

<인도 스투파 도안/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진 찍을 때 하부까지 같이 담았다면 다보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나는 다보탑의 기본 기획은 목조건축 기단부에 인도의 스투파를 재해석하여 절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조합과 절충...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다보탑은 그런 조형의지와 의도를 가지고 만든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