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70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들...
2)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들(690~720년대)...
(2) 경주 황복사 삼층석탑과 쌍둥이 석탑, 천군리 삼층쌍석탑 -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정형화
사실 황복사 삼층석탑에 대해서는 시대, 미감, 의미 등에 대해 앞선 글들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본다. 고선사/감은사탑의 양식을 간화, 경화, 약화시켜 모형화된 불탑, 정형화된 삼층석탑의 최초형태라는 점에 대해서 말이다. 게다가 조성 편년도 적확하기에 이의가 없고, 당대의 불교흐름까지 읽을 수 있는 단서들이 모두 망라하고 있다. 또 그런 의의가 있어 국보로 지정됐겠지만... 때문에 여기서는 쌍둥이처럼 닮은 천군리탑과 묶어서 설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선사탑이 감은사탑과 비교되는 것처럼, 황복사탑은 천군리탑과 비교해야 제 맛이 살아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주 황복사 삼층석탑/국보37호...>
<황복사탑 출토 금제여래불상/국립중앙박물관...
왼쪽이 국보80호로 692년 탑 창건시 봉안된 미륵불입상이고, 오른쪽이 국보79호로 706년 재 봉안된 아미타불좌상이다...>
<국보79호 여래좌상 전면...>
<국보79호 여래좌상 후면...>
<황복사탑 출토 사리갖춤... 나원리탑과 달리 황복사탑에는 각종 장식기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황복사탑 출토 사리갖춤... 나원리탑편에서 이미 올렸지만, 사리외함 뚜껑에 음각된 원문에 대해 소개하고자 다시 올린다...>
<황복사탑 사리외함 뚜껑 명문 해석/앞 한민주 같은 논문에서... 이럴 기회에 한번 읽이 보는 것도 좋을 듯...^^ * 참고로 해석문은 우리가 읽기 편하게 1차 가공 '해석'한 것으로 '번역'은 아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덕왕 생전에 '성덕'이란 호칭이 사용됐다고 생각해 사족을 붙였는데 고맙게도 islescop님이 지적해 주셔서 삭제했다/130808... 이자리에서 감사를...^^>
먼저, 황복사탑과 천군리탑은 높이도 규모도 똑같다. 물론 아쉬운 것은 황복사탑과 달리 보물로 지정된 천군리탑에 대한 도면이 없고, 부재수에 대한 계측자료도 없지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기단부나 일층몸돌의 규모는, 한군데서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공교롭게 황복사탑은 고선사탑과 같은 양식의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는데 반해, 천군리탑은 감은사탑과 같은 양식의 2탑1금당 구조로 만들어졌다. 서로 다른 가람배치에 똑같은 규모의 3탑이 조성됐는데, 다시 10년 후에 규모만 축소 되었을뿐 그런 행위가 재현됐다면 이건 너무 흥미롭지 않은가?
<경주 천군리 삼층석탑/보물168호... 동서 두탑은 높이가 1m 가량 차이(6.7m와 7.7m)나는데, 상륜부 때문이다...
노반까지 고려하면 황복사 삼층석탑과 거의 비슷하다...>
<천군리 동탑과 서탑...>
<주변환경이란 살아 움직이어 것이어서 탑의 주변이 늘 같은 건 아니다... 특히 농사를 짓고 있는 땅도 우리의 무관심과 달리 늘 변화한다...
여름과 겨울의 차이도 있지만, 10여년 사이 주변 농토는 복토가 계속 진행됐고, 기단부는 더 묻혔다...
그 작은 차이가 우리에게 미치는 미감에는 큰 차이로 나타난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바로 노반이다. 내 생각이지만 가람배치와 더불어 노반 역시 황복사탑은 고선사탑을, 천군리탑은 감은사탑을 닮았다. 즉 천군리탑 노반이 감은사탑과 마찬가지로 돌출된 두겁형식이라면, 황복사탑은 그렇지 않다. 물론 현재 모습은 윗부분이 뭉뚱하게 잘려 있는데, 내 생각이지만 뒤집힌 게 아닌가 싶다. 본래 고선사탑과 똑같은 형식처럼 턱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데, 감은사탑이나 석가탑 노반에만 익숙한 석탑 관리인이 이상하게 생각해 거꾸로 뒤집어 놓은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하나 더 첨언하면 역시 고선사지와 가람배치가 같은 나원리탑의 노반도 황복사탑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재밌지? 나는 이 두탑의 노반이 뒤집혀진 상태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고선사탑 형태의 노반은 나원리탑에 이어 황복사탑까지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지다가 천군리탑 이후부터 돌출된 양식으로 바뀐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이후 정형화된 노반의 양식만보면 고선사탑 양식에 대한 감은사탑의 판정승이 아닐까 싶다.
<황복사탑 실측도/앞 한민주 논문에서... 각 부분을 나눠 살펴볼까?>
<황복사탑 2층 옥개석 실측도/앞 한민주 논문에서... 옥개석의 층급받침과 낙수면의 비례를 보면,
고선사/감은사탑에 비해 많이 짧아 뭉뚱하게 보인다... 당연히 낙수면의 경사가 급해 탑의 미감을 좌우하게 되는데,
경사의 곡면은 감은사탑과 같은 양식이고, 비례는 나원리탑 지붕돌과 비슷하다...>
<나원리탑 지붕돌/재인용...>
<황복사탑 탑신...>
<황복사탑 기단부...>
<천군리탑 상륜부...>
<천군리탑 탑신...>
<천군리탑 기단부... 사진을 같은 각도와 거리에서 찍었으면 훨씬 비교가 쉬웠을텐데... 사진을 바꿨다...^^>
<천군리탑 상층기단부 괴임...>
하나 더 살펴볼 것은 황복사탑의 미감은 나원리탑에 이어 천군리탑까지 비슷하다는 점이다. 10m에 가까운 나원리탑을 비롯해 황복사탑과 천군리탑은 노반까지 7.3m에 이르는 거탑에 속한다. 우리의 상상과 달리 불국사의 석가탑과 같은 높이다. 물론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규모와 크기임을 느끼진 못한다. 이유는 뭘까? 회랑이다. 건축적으로 시야가 차단되고 구획된 회랑 안에서 이만한 규모의 석탑들은 최소 2배 이상의 체감을 느끼게 만든다. 황복사탑 옆의 낭산자락과 진평왕릉을 거쳐 산성지구까지 이어지는 너른 들판에서 황복사탑은 왜소할 수밖에 없으며, 황복사탑 → 진평왕릉을 직선으로 이어 정동(東)방향으로 산성지구를 넘으면 정확하게 천군리탑에 이르는데(동서로 같은 위도에 있다는 점도 참 호기롭다), 보문호 주변의 확 뜨인 벌판에서 천군리탑은 장대하게 보일 수 없을 뿐이다. 변화무상하고 장구한 자연과 역사 앞에 인간과 인간의 조형물이란 왜소해질 수밖에 없지만, 그런 한계를 알기에 인위적인 공간경영을 통해 인간은 큰 걸 더 크게, 혹은 작은 것도 크게 보일 수 있는 연출장치를 습득할 지혜를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황복사탑... 나원리사지와 같은 가람배치를 가졌던 황복사는 금당의 서쪽에 탑을 조성했는데, 나원리탑처럼 금당보다 높은 터를 닦아 산아래에 가깝게 탑을 배치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고선사는 덕동호에 묻혀 사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세곳은 같은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천군리 삼층쌍탑 전경... 이에비해 천군리사지는 감은사와 같은 2탑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도로 확인해보면, 신라의 궁궐이었을 경주 월성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궁과 황룡사지 등이 있고, 낭산을 넘으면 곧바로 황복사지다... 그리고 정동으로 바라보면 진평왕릉이 보이고, 진평왕릉 동쪽 산성지구(앞 고선사/감은사편에서 설명)를 넘으면 천군리사지가 나온다... 기억은 나지않지만, 어떤 자료에서는 경주의 사찰들이 별자리를 따랐다는 말이 있는데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월성을 기점으로 정동방향에 직선으로 주요 유적지가 있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황복사탑에서 바라본 진평왕릉... 뒷산이 산성지구다...>
<황복사탑과 천군리탑... 하나는 산에 의지해, 하나는 회랑에 의지해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런 경영의지와 회랑이 있었을 천군리사지에서 삼층 쌍 석탑은 지금과 전혀 다른 장중한 기품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장군처럼, 모진 비바람과 천둥번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꿋꿋함으로,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의연함으로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또 황복사탑은 금당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회랑이란 인위적 건축장치에 의해 장엄 효과를 높인 게 아니라, 자연지형을 이용한 효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상륜부가 살아있어 석가탑과 같은 규모로 보였을 것이었으니 옆산자락에 위축된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낭산의 기운을 호위 받는 장중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석탑들은 그런 미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을 것이다.
<당시 상륜부가 살아있었다면 전혀 다른 위용을 갖췄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큰 탑이지만...>
<그랬다면 황복사탑은 낭산들판을, 천군리탑은 보문호 주변 들판을 호령하는 기운을 더 느꼈을텐데...>
그렇다면 문무왕 사후 신문왕에서 효소왕까지 통일신라의 정국은 불안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 아닐까? 실제 677년 당나라가 대동강 이북으로 물러갔다고 하지만, 698년 발해가 건국될 때까지 북방영토는 늘 경계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일본군의 침탈은 멈추지 않은데다, 오랜 전란에 무기력해져 가는 진골세력과 귀족들은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독주하는 신라왕실에 또 다른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히 반란은 계속됐다. 702년 성덕왕이 등극할 때까지... 결국 682년부터 20여년간 통일신라는 축제의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왕실은 긴장해야 했고, 단호함과 엄중함을 과시해야만 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도 자비와 포용만 내세울 수 없었고... 여기에 본격적으로 의상이 등장하는 화엄종이 득세하니 권위와 규범은 더욱 강조됐을 것이고, 이런 시대의 요청을 고스란히 구현한 게 나원리탑을 비롯한 황복사와 천군리 삼층석탑이 아닐까? 특히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위쪽 사진과 같은 각도에서 잡았지만, 사진을 찍은 시점은 대략 10여년 차이가 있을 듯 싶다...
유적지 조사가 있었는지 주변 잡목들이 많이 정리된 모습...>
<황복사탑과 천군리탑의 전면 모습을 비교해 본다...>
다만, 이미 나원리탑에서 불필요한 부재를 간소화하면서 보다 정돈되고 깔끔한 모습을 선보였지만, 4m에 가까운 거대한 부재 가공과 운반에 대한 부담도 줄일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경제성과 효율성은 물론 규칙과 규범을 선호하는 통일신라인들에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배열을 배제하는 것은 숙명과 같은 관성이었고, 욕망이었다. 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석탑의 규모를 보다 현실적으로 조정하면서 내실을 기하는 것밖에는 없다.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면서, 이제부터 지켜야할 미감과 완성도를 높이면 된다. 1층 지붕돌과 1층 몸돌까지 하나의 돌로 완성했다(나원리탑 1층몸돌을 하나의 석재로 가공했다면 무게만 32Ton으로 성덕대왕신종보다 무겁지만, 황복사탑은 10Ton 내외면 충분했다). 이렇게 황복사탑과 천군리탑을 만들 때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양식적으로 완결태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고선사와 감은사를 조성할 때와 비교하면 10년의 차이... 682년과 692년 신라의 석탑은 가람배치와 패턴을 다시 반복했지만, 시대의 흐름만큼 양식도 규모도 많은 게 달라져 갔다.
<황복사 천군리탑과 가장 비슷한 미감을 가진 탑이 경주에 한기 더 있는데, 그것이 창림사지 삼층서탑이다... 855년 제작된 것으로 밝혀진 사리갖춤으로 인해 조성편년에 대한 이론이 많아 고심했는데, 나는 855년이 아니라 이들 탑보다는 조금 늦은 700년대 중반 제작설에 한표를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황복사탑과 천군리탑은 나원리탑과 함께 700년을 전후한 시기 통일신라가 필요로 하는 기운을 담고 있었다... 신문왕(682~691)은 문무왕(661~681)의 유지를 충실히 살리며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군주였지만, 그 사후 효소왕(692~701) 시절 통일신라는 절대적 위기의 시점이었고, 다행히 왕권이 아닌 문무왕과 신문왕이 만든 시스템이 있어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탑들은 당대의 시스템이 만든 것들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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