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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17> 2) 감은사탑/고선사탑, 어느 탑이 먼저일까?...1307

 

 

 

 

 

 

 

 

5) 감은사와 고선사지 삼층석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경주 동쪽 진출로 / 동해로 이어지는 길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 고선사탑과 감은사탑

   (2) 석탑의 선후를 판단하는 근거들

   (3) 고선사탑과 감은사 동서탑의 차이점

   (4) 3탑의 선후를 가르는 주요한 논점들 - 어느 탑이 먼저 만들어졌을까?

   (5)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공통점과 차이점 -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과 품격에 대해...

 

  

 

(3) 고선사탑과 감은사 동서탑의 차이점

 

 

그러면 이제 3탑의 선후를 가늠할 마지막 근거는 차이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됐다. 2곳의 3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겉으로 드러난 것과 보이지 않는 차이를 이제 찾아가 본다. 먼저 그냥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게 ①고선사탑은 감은사탑과 달리 찰주가 없다. 또 감은사 동탑과 서탑의 찰주 높이가 다른데, 서탑이 50cm 길다(두탑의 느낌이 다른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②감은사탑에 없는 문비가 고선사에는 있다. 그것도 탑리리탑에 가장 가까운 고식이다. ③석재의 질도 다르다. 감은사가 회갈색에 가깝다면 고선사는 질 좋은 화강암에 가깝고, 강도도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외로 ④고선사탑은 감은사탑에 비해 옥개석 - 특히 전각부위의 반전들이 많이 깨졌다. 이유가 뭘까?

 

 

 

<감은사 서탑 남면 풍화도면/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에서...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무래도 석재의 질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건 700년대 중반 이후 조성되는 석탑의 재질이 균등한 것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데, 고선사탑의 제일 큰 문제가 지붕돌 부분파손이라면, 감은사탑은 풍화와 열화 등 자연적 영향에 의한 풍화와 열화 등이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도면은 ⓐ박보경의 동국대학교 석사논문/경주 고선사지 가람배치와 삼층석탑 연구와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2003~2004년) 자료에서 인용했음을 먼저 밝혀둔다...>  

 

 

 

 

 

 

또 ⑤고선사탑에 복발과 앙화가 남아 있지만 그건 직접적 비교와 무관하니 제외하면 우리가 의식 무의적으로 간과하는 게 ⑥노반의 마감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선사탑의 안쪽으로 깎아 상부를 마무리했는데 반해, 감은사탑은 기단부 갑석마감처럼 1단을 돌출시켜 마감했다. 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통일신라 석탑의 지붕돌과 몸돌이 만나는 부분은 2단의 괴임이 재료분리대 역할을 하는데, 고선사탑은 정형화된 석탑들처럼 지붕돌 낙수면에 2단 괴임을 깍아 만든데 반해 감은사탑은 3층 지붕돌 낙수면에 1단만 가공하고, 노반 하부에 1단을 돌출시켰으니 똑같지 않다. 일단 가장 큰 차이점을 하나 발견했다.

 

 

 

<고선사/감은사탑의 노반석 입면/위 박보경 논문에서... 이렇게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지?! 3층지붕돌 세로선이 연장된 부분까지가 하나의 부재다... 안쪽으로 턱을 둔 것은 고선사가 유일하고, 감은사탑처럼 노반 아래쪽에 지붕돌 괴임을 가공한 것도 드문 경우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본다. ⑦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의 가장 큰 차이는 지붕돌의 두께에 있다. 고선사탑의 지붕돌 두께가 각각 136, 131, 126cm인데 반해, 감은사탑은 각각 127, 121, 122cm로 다른 부재들의 편차를 뛰어넘을 정도로 고선사탑 지붕돌이 두껍다. 또 정확한 실측자료는 없지만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에서 고선사탑이 감은사탑보다 두껍게 보인다는 점도 감안하자.

 

 

 

<고선사/감은사탑의 주요부위 실측치와 비례표/위 박보경 논문에서... 각각의 부재를 실측한 것인데, 경주석탑보수사업단의 치수와 약간 차이가 있다... 아무튼 고선사탑쪽이 감은사탑보다 지붕돌이 두껍고, 특히 낙수면보다 층급받침 부분이 더 두껍다...>

 

 

 

 

그리고 우리 눈으로 쉽게 식별되지는 않지만 ⑧감은사탑의 낙수면은 직선에 가까운 엷게 처진 곡선(첫 시작이◞ ◟모양)인데, 고선사탑의 낙수면은 S자를 늘여놓은 것 같은 부드러운 곡선(◞◜ ◝◟ 모양)이다.

 

 

 

<감은사 서탑 지붕돌 낙수면/위 박보경 논문에서...> 

<고선사탑 지붕돌 낙수면/위 박보경 논문에서... 이렇게 비교하면 낙수면의 마감 상태가 완전히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두 탑의 미감을 가르는 큰 요인이 된다...>  

<석가탑 낙수면/동 사업단에서... 물론 내 사진도 있지만, 이렇게 세부를 확대한 사진이 없어 인용한다... 석가탑은 두탑과 완전히 다르게 낙수면이 직선이다... 이건 다른 모든 석탑들과 분명한 차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모습이 아닌 우아한 상승감을 갖췄다는 게 석가탑의 오묘한 미감을 살리게 된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면, ⑨감은사탑 1/2/3층 지붕돌 이음새를 보면, 낙수면은 정중앙을 기준으로 균등하게 나눴다면, 층급받침은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음부위를 엇갈려 배치했다. 이에반해 고선사탑도 같은 방식이지만 3층 지붕돌 낙수면은 그렇게 시공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게 혹시 고선사탑 전각부위들의 파손과 관련 있는 것 아닐까?

 

 

<고선사탑 부분... 감은사탑과 달리 고선사탑의 지붕돌 훼손은 유달리 많다... 주변 자연환경 또는 사리구를 노린 고의적 파손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고선사탑 지붕돌과 은장 등 구조적 취약점이 파손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 이제 더 깊이 들어가 보자. ⑩이들 탑에는 4매로 나눠진 3층 지붕돌 낙수면을 결구하는 아령모양의 철제 은장이 각각 있는데, 감은사탑 은장 모서리는 방형인데 반해 고선사탑은 원형이고, ⑪찰주를 고정/긴결시킨 3층 지붕돌의 찰주공과 3층 몸돌의 사리공 구조가 다른데, 감은사탑이 찰주공과 사리공을 같이 사용했다면 고선사탑은 찰주공과 사리공이 각각 나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⑫고선사탑과 감은사탑의 하층기단부 중대석과 상층기단부 중대석은 똑같은 수의 부재로 만들어져 있지만, 이를 가공한 양식이 감은사 동탑은 각각 6가지와 3가지로, 감은사 서탑은 상하모두 4가지로, 고선사탑은 각각 4가지와 1가지로 만들어져 있다. 즉 감은사 동탑에 비해 고선사탑이 가장 정돈된 형태다.

 

 

 

<고선사/감은사탑의 상하층 기단부 중대석 조립 평면도/ 위 박보경 논문에서... 아래쪽에서 한번 더 정리하겠지만, 고선사탑의 부재가 가장 일관성 있게 정리된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뭐 이렇게 12가지씩이나 다른 점을 찾게 되면 당장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전문적인 수치를 들이대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확연해지고, 이점들로만 탑의 선후가 판가름 나겠냐는 질문이다. 이제 하나씩 풀어보자. 먼저 낙수면의 가공형태는 후대의 석가탑처럼 완전한 직선도 있으니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지붕돌이나 절단면의 두께도 큰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다만 문비의 유무나 노반의 요철, 삼층몸돌의 찰주공과 사리공, 은장의 형태와 기단부 중대석 가공 등은 검토할 대상이 분명하다. ①먼저 분황사탑, 탑리리탑의 감실을 모형화한 문비는 어쩌면 선행 양식으로 추정할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황복사탑과 장항리탑 등을 고려하면 통일신라석탑의 양식이 전형화 되기 이전의 혼재시기라고 이해한다면 이건 주요한 근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있고 없음은 논외...

 

 

 

<고선사탑 문비...문비 내부에 있는 못구멍으로 추정해보면, 고선사탑에는 실제 청동판 문이 부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랬으면 또 어떤 느낌이었을지...>

 

 

 

 

 

②두 번째, 노반의 요철은 초기 감은사탑처럼 1단으로 가공되다가 천군리탑에 이어 석가탑에서는 상층기단부의 부연과 갑석처럼 완전한 2단을 이루기 때문에, 고선사탑을 감은사탑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확실치 않는 게, 감은사탑보다 10년이 늦은 황복사탑은 고선사처럼 노반의 끝이 안으로 들어간 거 같아 보이고, 오히려 장항리탑에서는 2단 마감이 확실하다. 또한 노반이 놓이는 삼층지붕돌 괴임을 보면, 고선사탑은 후대 탑들처럼 지붕돌에 2단 괴임을 하나의 돌에 가공했지만, 지붕돌과 노반에 각각 1단씩 가공한 감은사탑은 아직 정형화되기 이전 양식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괴임에서는 감은사탑이, 돌출에서는 고선사탑이 각각 앞선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구조와 결구를 제외한 마감에서의 다양한 실험 중 하나로 이해한다면, 이를 근거로 선행을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점은 무승부...

 

 

* 석탑 노반의 변화...

 

 

<왕궁리탑 상륜부/앞 선 글 재인용... 그러면 백제석탑에서 통일신라 석탑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노반만 간단히 살펴볼까? 왕궁리탑은 5층이었고, 낙수면의 경사가 매우 적어 노반이 눈에 잘 띠지 않는다... 그래선지 왕궁리탑은 양식적인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고, 두겁석 같은 판석에 석탑 부재로서는 비중이 거의 없는 작은 직면체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낙수면의 경사가 커, 눈에 잘 띠는 신라석탑에서 노반은 눈에 잘 띨뿐만 아니라, 미감을 좌우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왕궁리탑 상륜부... 이 3개의 부재를 노반, 복발, 앙화라 불러야할지 모르겠지만, 맨 위 부재는 앙화와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특히 철주가 꽂혔던 구멍이 없다... 백제석탑의 상륜부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감은사 서탑 3층 및 노반 서면/동 사업단에서... 안쪽으로 턱이 진 고선사탑이 상승감을 강조했다면, 두겁석처럼 돌출되게 가공한 감은사탑부터 노반은 양식적으로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1단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에서처럼 감은사탑은 노반하부에 괴임을 가공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가탑 3층 및 노반 북면/ 동 사업단에서... 그리고 석가탑에서는 우리가 흔히보는 2단으로 절곡된 노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층급받침과 낙수면의 비례도 비교할 수 있고, 각각의 부재들이 하나로 간소화될 때의 달라진 느낌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석가탑의 노반이 후대 통일신라석탑들의 가장 일반적 형태지만, 정림사탑에서 시작한 최상 지붕층 위 노반은 왕궁리 → 고선사 → 감은사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실험이 병행되면서 정착된 완결태라 볼 수 있다...>

 

 

 

 

 

③세 번째로 노반과 삼층몸돌로 이어지는 찰주공의 문제다. 사실 현존하지 않는 고선사탑의 찰주 때문에 적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실측된 단면도를 통해 추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면을 보면 고선사탑의 찰주가 꽂혔던 앙화와 복발, 노반의 구멍은 감은사탑에 비해 매우 가늘다. 상륜부를 포함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높이는 현존 감은사를 비롯해 봉암사, 실상사 등을 참조해 대략 ‘지대석의 길이 x 2 + 하층(감은사탑) 혹은 상층(석가탑)기단부의 높이’로 추정하는데, 이 공식을 적용하면 고선사탑의 전체높이는 677x2+52 = 14m06cm 전후가 되니 감은사 서탑과 거의 비슷하다(또 5m 이상의 무게가 있어야 아래 지붕돌들을 은장 등의 별도부재 도움없이 누를 수 있는 무게, 즉 압축력이 생긴다).

 

 

 

 <감은사 서탑 종단면도/동 사업단에서...>

<감은사 동탑 종단면도/ 동 사업단에서... 자세히보면 두탑의 높이는 14,032mm와 13,259mm로 77.3cm 차이가 있다... 그중 철주의 높이에서 54.3cm(서탑의 노출된 찰주가 3,878mm)가 차이나고, 하층 기단부에서 18.7cm 차이가 나는 것으로 측정되어 있는데, 하층 기단부는 지표면에서 노출된 상태기 때문에 서탑의 58.2cm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지대석과 찰주를 제외한 두 탑의 높이는 서탑이 9,872mm 동탑이 9,829mm로 실제 오차는 43mm에 불과하다...>  

 

 

 

 

 

그러면 찰주의 두께도 감은사탑만큼은 돼야 그 높이를 감당할 수 있었을텐데, 현재의 복발과 앙화는 크기가 생각보다 작고 실제 찰주구멍이 너무 가늘다. 또한 삼층지붕돌은 찰주에 비해 너무 헐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구멍이 너무 크다. 너무 가늘거나, 흔들림을 감당할 수 없는 넓은 하부 때문에 고선사탑의 찰주가 파손됐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고선사탑은 지금의 표충사나 백장암탑처럼 상륜부가 훨씬 낮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점도 선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기 어렵고...

 

 

 

<표충사 삼층석탑... 위 공식에 대비해 생각해보면 찰주까지 상륜부가 낮게 보인다... 그외 상륜부가 남아있는 석탑 중 상륜부 비례가 가장 낮은 탑이 백장암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은데, 위 공식은 석탑의 규모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되었다고 생각한다...> 

 

 

 

 

 

 

 

 

(4) 3탑의 선후를 가르는 주요한 논점들 - 어느 탑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까?

 

 

④삼층몸돌의 찰주공과 사리구함의 문제... 감은사탑은 찰주가 꽂힌 바로 아래에 사리구함이 있는데 반해, 고선사탑은 찰주가 꽂혔을 찰주공과 사리공이 별도로 가공되었다. 만약 감은사탑에서 찰주와 사리함을 같이 꽂으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선사탑에서는 두 개를 나누었다는 말은 일견 합리적일 수 있다.

 

 

<고선사/감은사탑 노반과 3층 지붕돌 및 몸돌 단면도/ 위 박보경 논문에서... 3층 몸돌의 찰주공과 사리공, 그리고 지붕돌의 가공 넓이, 노반에 뚫린 구멍의 직경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보면 고선사탑의 찰주는 감은사탑에 비해 너무 가늘지?>

 

 

 

 

그러나 감은사탑은 사리구가 남았지만, 고선사탑은 사리구가 남아있지 않다. 보관성과 편리성이 선후를 좌우하는 근거가 될까? 내가 인용하고 논문에서 박보경씨는 그렇게 주장하지만, 감은사탑 정도의 국가적 사업의 문제점을 시간과 재시공이 싫어 그냥 했을리 없다는 생각이 더 많다. 또한 조금 더 지나 감은사탑 등과 달리 규모가 작아지면서 이층몸돌까지 한개의 석재로 가공된 황복사탑부터 사리구함은 2층 몸돌로 내려가면서 해결됐기 때문에, 이점 역시 다양한 실험 중 하나로 선후를 판단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감은사 동탑 사리구함/국립중앙박물관에서/이 사진은 리움미술관 전시때 찍은 거다... 사천왕 철갑과 장식의 유사성으로, 앞선 글 사천왕사지 '녹유 사천왕상 전'을 만든 양지스님이 이 사리구도 만들었다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감은사 동탑 사리구/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사리구를 대표하는 것으로, 특히 천개 즉 지붕이 있는 통일신라만의 양식이며, 이를 단순화 한 송림사와 10세기 고려시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 서오층석탑 사리구는 중국까지 통털어도 매우 드문 양식이다. 참고로 서탑 사리구에는 지붕이 없다... 또 서탑에는 서탑에는 사리구 문이 없고, 동탑에는 문이 있는 점, 서탑에는 사리가 1과, 동탑에는 사리가 54과가 발굴된 점등을 근거로, 일각에서 서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로, 동탑은 문무왕의 사리가 아닐까 추정하는 등 의미를 달리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⑤그럼 삼층 지붕돌을 결구했던 은장의 형태가 문제가 되나? 석탑에 은장이 사용된 예는 백제의 미륵사 서탑과 장항리 오층탑 등으로 알고 있다. 먼저 감은사탑의 은장은 백제의 미륵사 서탑에서 사용하던 끝부분이 사각형으로 마무리된 방두형 은장이고, 고선사탑은 장항리탑에서 쓰인 것과 같은 원두형 은장이다. 백제 석공들의 경험이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추정에서 시작하면(43년의 시차가 있다), 분명 감은사탑이 고선사탑보다 먼저 만들어진 근거가 될 수 있다(경주 고선사지 가람배치와 삼층석탑 연구/박보경/동국대학교 석사논문 P92). 그러나 결과가 좋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고선사탑은 찰주뿐만 아니라 사리구도 분실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덕동호, 북천 상류에 위치한 고선사탑이 감은사탑보다 토사 유입 등으로 인한 충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은장의 긴결성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것은 결과론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은사탑에 비해 고선사탑은 지붕돌이 훨씬 많은 파손이 있었다는 것은 고의에 의한 인위적 파손보다, 삼층 지붕돌이 떨어지면서 발생한 훼손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강도와 구조적 안정성 때문에 도괴에까지 이르지 않았고 장항리탑이 근대까지 버텼던 기록도 있지만, 고선사의 방두형 은장이 꼭 선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여기서 첫 번째 단서가 나온다는 생각은 들고...

 

 

 

<감은사탑 3층 지붕돌 평면도/ 동 사업단에서... 3층 지붕돌의 넓이가 3m45cm면 우리 생각보다 크지? 아무튼 이 도면을 보면 은장의 머리모양이 각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감은사 동탑 3층/동 사업단에서... 은장으로 결구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긴결 상태는 많이 이완돼 있다...>

 

 

 

⑥이제 마지막 상하층 기단부 중대석의 가공 유형이다. 물론 이 점을 근거로 박보경씨는 같은 논문을 통해 동일한 형태로 가공된 부재를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선사탑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지 못한 감은사탑 보다 늦게 조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한사람 혹은 같은 그룹이 만들었다면 박보경씨의 말처럼 맨처음 감은사 동탑을 만들어보고, 이를 반성하면서 감은사 서탑을 만든 다음, 경험을 더욱 발전시켜 단일한 형태의 부재로 동시에 가공하여 조립할 수 있었던 고선사탑이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합리적인 추정이라 판단된다. 이렇게 되면 박보경씨의 이야기대로 감은사 동탑 → 감은사 서탑 → 고선사탑의 순서가 되나?

 

 

<고선사/감은사탑 상하층 기단부 중대석 부재 가공 유형/ 위 박보경 논문에서... 이렇게 보면 고선사탑이 가장 합리적으로 정돈된 형태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고선사탑이 가장 늦다고 주장한다면, 3층 지붕돌 낙수면을 비롯해 각층의 층급받침과 상하층 기단부 갑석 부재의 정돈 상태가 제일 불규칙한 고선사탑이 가장 이르다는 주장도 성립한다... 즉 박보경씨의 문제접근은 일견 합리성이 있지만, 일관된 근거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결국, 가람배치에서는 고선사가 감은사 보다 앞서는 게 분명하지만, 은장과 부재 가공의 효율성 등을 살펴보면 감은사탑이 고선사탑보다 앞설 개연성도 많다. ⑦그러나 또 그런 이유 때문에 감은사탑이 고선사탑보다 늦게 조성됐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붕돌 받침과 낙수면을 비롯해 하층기단부 갑석은 감은사탑이 고선사탑보다 훨씬 정돈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복잡하지? 이제 정리해보면, 은장의 형태도 다양했을 수 있고 기단부 중대석을 가공할 수 있는 석재의 과부족과, 한곳에서 가공된 감은사 동서탑의 전체높이 편차는 43mm로, 0.4% 포인트 오차에 불과하지만 상층기단부 중대석은 동탑이 115mm 높고, 3층 지붕돌 낙수면은 서탑이 130mm 두꺼운만큼 여러 석공들이 모여 수공업적으로 가공한 한계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소재의 한계가 가공의 편리성을 제어했거나, 석공들의 숙련도에 따른 편차를 감안하고, 또한 조립에 편리하게 부재를 가공했다는 효율성만으로는 구조와 미감에서 아무런 차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선후를 판단할 결정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고선사탑의 복원도/ 위 박보경 논문에서... 이 도면을 보면 각층 층급받침의 이음선이 감은사탑에 비해 매우 불규칙하거나, 정돈되지 못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감은사 동탑 남측면도/ 동 사업단에서... 고선사탑에 비해 감은사탑은 각 부재 이음선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잘 정돈된 형태를 띠고 있다... 참고로 고선사/감은사탑의 지붕돌을 보면 낙수면 이음선이 중앙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통일신라인들은 지붕의 중앙선을 우리 눈에 잘 보이는 층급받침 보다, 낙수면을 중심으로 사고했음을 읽을 수 있는데, 나는 이 점이 통일신라의 개념적 완결성 혹은 관념적 합리성에 기인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주장하는 거지? 사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영향이 컸겠지만, 감은사탑을 봤을 때의 감동 때문에 처음에는 무조건 감은사탑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차례 보면서 제자리를 잃은 고선사탑의 가여운 처지와 원효, 가람배치 등을 생각하면서 고선사탑이 먼저가 아닐까 의문이 쌓이던 중, 최완수 위원의 석재가공 상태가 더 古式(고식)라는 주장에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결론을 내리겠다 마음먹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유명세 혹은 연민이라는 감상에 치우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오히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답습했거나 모방했다는 오해를 푸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의의와 의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정성을 다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면서 정리한다면 ; 한사람의 설계와 지휘아래 서로 다른 그룹의 석공들이 682년 전후, 감은사지 쌍탑과 고선사탑을 동시에 조성했다고 맘먹기로 했다. 이유? 아무도 나를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선후가 이들 탑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기 않거나 혹은 동시에 조성됐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그게 내 결론이다...^^

 

 

* 감은사 동탑에서 읽을 수 있는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

<3층 지붕돌 앙시도/ 위 사업단에서... 이제 3층부터 2층, 1층 지붕돌 앙시도를 살펴볼텐데, 감은사탑이 층급받침과 낙수면을 각각 4개씩 총 8매의 석재로 지붕돌을 가공하면서, 어떻게 구조적 안정성을 획득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석조건축이란 하부부재가 상부부재의 하중(무게)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맨 아래쪽 부재로 그 하중들을 균일하게 전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흔들림과 뒤틀림에 취약한 적층식(쌓아 올린) 구조는 지구의 중력과 동일한 압축력만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층 지붕돌 앙시도/ 동 사업단에서... 2층을 중심으로 위(↑) 3층과 아래(↓) 1층의 층급받침 부재 크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2층은 12시 중앙선을 기준으로 小→大→小→大의 크기가 시계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에 반해 3층과 1층은  같은 방향으로 大→小→大→小 순서로 조립하여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킬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1층 지붕돌 앙시도/ 동 사업단에서... 결국 이런 구조적인 고민이 있어 감은사탑의 탑신은 1331년이 넘는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선사탑 보다 진일보된 양식이며, 또 그런 이유로 각층 지붕돌 전각부분이 고선사탑과 달리 지금까지 파손되지 않고 유지된 것이고...>

<왕궁리탑/재인용... 내가 건축업에 종사하는만큼 석탑을 만들었던 분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노력하는데(^^) 역시 건축의 첫번째 과제는 구조적 안정성이다. 여기에 실용성과 예술성이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런면에서보면 낙수면을 3등분하고 층급받침을 2개의 부재로 균등하게 나눴던 백제인들은 상당한 미감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왕궁리탑에서 감은사탑까지 기단부는 구조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완벽히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자료사진을 보면, 감은사탑(아래 사진↓)도 911 세계무역센터 붕괴처럼 지구 중력방향으로 내려 앉고 있었는데, 이는 왕궁리탑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감은사탑/동 사업단에서... 이 기단부의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은 계속됐고, 결국 70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석탑은 기단부가 더욱 강화되는데, 초기보다 좁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부재의 수를 줄이기 위해 탱주가 1로 바뀌게 된다...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인들은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법을 찾으면서 조금씩 개선하고 보다 완성된 형태를 찾을 줄 알았다는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말했던 '재구축'... 로마인들의 합리적 보수주의라는 특기가 통일신라인들에게도 있었다는 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