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40>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의 정치/사상적 지형 변화(1)...1310

 

 

 

 

 

 

 

 

11. 700년대 후반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 조성체계의 변화와 석탑 편년

  

   1) 700년대 후반 통일신라의 정치(사상)적 지형 변화

 

 

사실 경덕왕의 몰락은 신라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라 1000년 역사에서 말기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통일신라 270년 역사를 3등분하든 4등분하든 중기 혹은 후기로 넘어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내가 다루고 있는 석탑 등 불교예술에서도 질적인 차이가 노출되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전 시대와 비교되는 결과적인 차이들이 있어 시대구분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그 이유에 대해 충분히 서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 늘 역사가 박제화 되고, 4지선다형식(요즘은 5지선다형인가?) 객관식 문제를 풀기 위한 암기사항으로 전락을 면치 못했지. 해서 오늘은 간략하게나마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금성과 금관경을 제외하고 북원경-중원경-서원경-남원경을 이으면 소백산맥이다... 600년대 후반 신문왕대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9주5소경은 통일신라 행정체계와 문화가 전파되는 실질적인 부심지였고, 800년대 들어서면 무주지방의 나주와 명주지방의 강릉이 새롭게 부상한다. 그러나 700년대 후반까지 한강과 예성강은 방치되어 있었고, 800년대 중반 그 지역이 새롭게 부상할 때쯤이면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은 매우 허약한 상태가 된다... 통일신라의 정체성이 소백산맥을 넘기란 그렇게 힘든 것이었다...>  

 

 

 

 

 

먼저 시대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말기의 기준점을 찾자면 일반적으로 경덕왕이 사망한 765년이 아니라 대략 780~785년을 기준점으로 삼는다. 그 이유는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766~780년까지 15년간 집권했고, 780년 등극한 선덕왕에 이르러 태종무열왕(김춘추)의 맥이 끊기면서 내물왕의 후손이 집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불국사와 석굴암을 완성한 혜공왕까지를 전대로 구분하게 되지만, 내물왕 10대손인 선덕왕 등극 이후에도 태종무열왕계는 여전히 막강한 권세를 지니고 있었고 선덕왕의 실제 후임자는 무열왕계 김주원이었다.

우습게도 경주 알천의 범람을 틈타 내물왕 12대손인 원성왕이 집권(822년 옛 웅진을 중심으로 옛 백제지역과 경상도 일부까지 장악하고 국호를 장안이라 칭하며 스스로 국주에 오른 김헌창이 바로 김주원의 아들이고, 또 다시 그의 아들은 여주 고달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산으로 진격하다 실패한다)하면서 785년부터 내물왕계가 군림체제를 지속시키지만, 그 이유 때문에 신라사의 시대구분 이유를 찾는 것은 핵심을 비켜난 족보타령에 불과하다. 

 

 

<역사를 보는 것은 이처럼 하나하나 알갱이들이 모인 전체를 보는 것도 좋은 길잡이가 되지만... 문막에서...> 

<주요한 줄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지를 쫓아가는 것도 필요한 방법이다... 경복궁 지광국사현묘탑옆 은행나무...>

 

 

왜냐하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이 왕위에 등극한 것은 불과 7세의 나이였고, 이때부터 15년간 집권했다 하더라도 김지정의 난으로 그가 사망한 시점은 22세의 나이에 불과하다. 이런 예가 이전에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이다. 그 역시 불과 5세때 왕위에 등극해(곧바로 황복사 삼층석탑을 세운다) 15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그의 형제였던 성덕왕이 왕위에 올랐었다. 가장 큰 차이라면 문무왕과 신문왕이 이뤄낸 시스템이 효소왕시절에는 작동했다는 말이고, 성덕왕과 경덕왕의 시스템은 혜공왕 시절에는 유지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전에 지속되던 시스템이 붕괴 변화하고 새로운 시대로 전환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점이 바로 신라 혹은 통일신라가 변화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성기게 보일지 모를 줄기와 가지들이 만들어내는 그물에 잎파리가 꽉 채워지면 하늘을 가리게 되고, 우리들 눈에 보이는 역사가 그런 조화일 수 있지만... 담양에서...>  

<결국 그 줄기와 뿌리를 찾아 이를 하나씩 혹은 군집으로 배열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역사를 읽는 주요한 방법이기도 하다... 담양에서...>

 

 

 

(2)

 

내 생각을 요약하면, 지배층 내부에 심각한 변화가 발생했는데 그 내용은 왕권파와 신권파, 전제정치파와 탈전제정치파, 그리고 친당파와 반당파의 대립이었고, 780년대 이후 탈전제정치와 친당정책을 거부한 신권파가 완벽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런 대립은 역사의 발전이나 진보의 측면에서는 타당한 결과로 귀결된 것이었을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입장이다. 먼저 왕권파와 귀족파의 대립부터 살펴보면, 이는 전제정치를 강요했던 통치체제에 대한 탈전제 정치파의 반항과 직결된다. 주제를 조금 벗어난 문제의식이지만, 이를 오늘날의 기준으로 독재와 민주의 대립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찌보면 독점된 권력보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진 권력의 분립 혹은 분산이 더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일 것이라는 게 우리들의 상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진실도 아니고 철학사상측면에서도 진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나무들의 껍질이 저마다 같을 수 없고...>

 

 

역사적으로 보면 왕권파와 신권파의 대립은 700년대 후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현됐다. 고려 중기에 시작된 무신정권도 왕권파와 신권파의 대립 중 하나였고, 조선 초기 태종과 김종서의 대립 및 세조와 사육신의 대립, 다시 중종반정으로 주도권을 잡은 조광조의 개혁도 그렇고, 조선 후기 정조와 외척과의 대립도 그런 유형들이다. 그러나 지배사상과 정치계급간의 권력이동이 없는 어설픈 정치지형만의 변동만으로는 어떤 명분으로 포장되든 쉽게 한계를 노출하게 되고, 실제 중세 한반도에서 신권파의 득세는 나라의 몰락(무신정권 후 몽골의 침략과 친원체제 확립, 세도정치 이후 조선의 몰락)으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역으로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황금기를 연 아우구스투스는 기존의 민주적인 견제정치의 틀을 완전히 깨뜨리고 황제 독주체제로 재편하면서 5현제 시대를 열었다. 

 

 

<같은 소나무라도 각각의 껍질이라 사람들의 지문처럼 다른 것이고...>

 

 

 

또한 자각된 대중에게 무력과 재력이 없다면 권력의 견제와 균형은 공염불에 불과하고, 일찍이 이를 간파한 공자나 맹자는 무력을 거세하고 각성한 군자에 의한 인의의 왕도를 설파했던 것이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력이든 지식이든 각성한 지성인에 의한 교화의 통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왕도와 통치에서 한발 벗어나 개개인의 각성과 자각을 통한 평화만이 살길이라 주장하신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예수가, 부국강병을 주창한 동서고금의 다양한 그룹과 또 다른 대립지점을 형성하지만, 이 모든 정치종교철학 사상들은 당대의 계급과 근본적인 신분제도를 깨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왕권파와 신권파, 혹은 독재와 민주체제의 대립은 옳고/그름 혹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할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걸 바라보고 읽은 눈과 마음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실제 우리는 경덕왕 사후 통일신라가 이전에 비해 무엇이 발전했는지 혹은 후퇴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지배층 내부가 혼란스러워졌다는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럼 하나 더 나아가 그 때 대립의 쟁점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보자. 단적으로 정리하면 친당(親唐)파와 반당파의 대립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선덕여왕 이후 150여년 지속된 친당체제는 780년대를 전후로 결정적 위기에 봉착한다. 어쩌면 750년대 안사의 난 이후 몰락을 거듭해 유명무실해진 당나라에 의지하려는 왕권파의 주장은 시대를 읽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귀족그룹이 통일신라의 주체성을 외치며 자주적 입장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같은 걸 보면서도 우리는 서로 보고 싶고 읽고 싶은 것만 찾게 된다...>

 

 

여기서도 또 하나의 역사적 반성을 끌어낼 수 있다. 자주파와 외교파의 대립이다. 물론 이 대립도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재현됨은 너무나 익숙한 상식이며, 2000년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 같은 질문(김구와 이승만, 여운형의 대립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이기도 하다. 이를 모아 약간 비약시키면 자주파와 외교파, 전제정치와 민주제도, 점진적 개혁과 근본적 혁명의 관점들은 시시비비, 선악, 혹은 선진적/후진적 구분으로 정립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당대 통일신라가 풀어야할 문제를 전제정치파와 반대파, 왕권파와 귀족파, 그리고 친당파와 반대파 모두 해결하지 못한 건 분명하다.

 

 

<즉 역사를 보든, 하나하나 나무들의 껍질을 보든 읽고자 하는 관점과 찾고자 하는 교훈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전제하고 싶다...>

 

 

 

 

(3)

 

내가 천년도 넘는 오래전 역사에서 진보의 기준을 들먹이는 게 무리이긴 하지만, 경덕왕 사후든 원성왕 이후든 통일신라는 그때부터 좋은 싫든 새롭게 변화한다. 헤겔의 미네르바 부엉이처럼 후대의 사학자들과 우리들은 분명히 그때를 신라역사의 전화기로 공통적으로 용인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전제정치의 해체, 왕권파의 붕괴, 그리고 친당파의 몰락에 기인한다는 점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정치지형의 변화는 통일신라 불교의 흐름과도 일치한다. 하나는 5교중 화엄종이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선종의 대중적 확산이 시작됐으며(물론 역사적으로는 9산이 5교보다 후대에 전성기를 이루게 되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는 불교의 양면이지 선후의 문제는 아니다. 즉 대승과 소승의 대립도 처음부터 불교의 양면에 해당하는 것으로 선후의 문제만으로 접근할 성질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이 불교를 통해 유행(도선국사(827~898년)가 활동했던 시기와 선종이 부흥하기 시작한 시점이 같아, 당대 불교가 얼마나 다양하고 생활에 깊숙이 결합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나무를 보더라도 우리에게는 늘 일정한 틀을 문제 삼는데...>

<그 틀의 같고 다름도 문제가 있겠지만, 개개인에게 형성된 주관도 선입견도 큰 편차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보면 통일신라는 대략 780년대부터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변했는데, 이때를 기준으로 ± 30년 동안 불교의 문화도 완전히 탈바꿈했다는 게 내 의견이다. 그리고 이 영향은 우리의 생각보다 지대한 것으로, 전제정치의 해체는 불사의 주관과 발주자의 독점체제가 무너짐과 동시에 관소속의 장인조직 붕괴를 야기한다는 말이 되고, 귀족들의 득세는 자신들의 권위양양을 위해 독자적인 불사를 추진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됨과 함께 자신들의 지역기반(지방의 호족을 인정하지 않았던 통일신라에서 무력과 재력을 갖춘 지방 호족세력은, 도독 등 지방관으로 파견된 진골그룹이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고려의 지방호족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때문에 장보고세력은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마지막으로 당나라와 신라 왕실의 법식과 규준들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변화들이 용인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역사적 산물인 정치와 문화와 사상이란 뿌리 내린 곳의 조건과 지형이 같을 수 없고...> 

<그 조건과 지형에 수종까지 다르다면, 어느 하나로 규정된 결론은 자칫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관인이었던 전문 기술자들은 승려조직에 흡수 되거나 귀족의 문하로 재편(이때 관에 소속된 장인조직은 급속하게 해체된다)되면서 전성기 석탑들이 보여주던 균질함(어느 지역에 건립되든 비슷비슷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질적인 수준에서 다양화 양극화 되고, 경주에 집중된 불사와 불탑 건립이 안동과 대구를 벗어나 소백산맥 경계(북으로부터 소백산(제천/원주), 월악산(충주), 덕유산, 지리산)를 넘어 전국화 되며, 발주자와 지역적 정서를 받아들여 다양한 양식들이 실험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 선종과 풍수지리의 영향은 후대로 갈수록 강조될 뿐이었다.

 

  

<해서 우리는 같은 곳, 같은 방향을 보면서도 때로는 부분만 보고...> 

<때로는 전체를 찾기도 하는 거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문제가 있으니, 하나의 표준과 질적인 기준이 해체되면 양은 확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퇴보라기보다 하나의 완성이 파생하는 보편화 과정이면서 대중화되는 방향으로, 억눌렸거나 과시하고픈 조성의지가 만든 양적확산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이전까지는 왕실에서 기획 결정하여 돈을 대고 관소속 장인들이 경주에서 만든 석탑부재를 창녕에 운반하거나 장인들을 파견하여 세웠는데, 어느날부터는 지방에 파견된 도독이나 이름난 승려가 왕실에 요청해 돈만 받고 부족한 돈은 자신이 보충해서 지역의 장인이나 승려에게 부탁해 창녕에 세웠다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그게 창녕 술정리 동서 삼층탑의 차이인데, 불과 3~40년의 차이가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차이들이 똑같은 곳에 만들어진 석탑의 미감을 이렇게 바꾸게 된다...>

<술정리 동탑과 서탑의 차이는 단순히 국보와 보물의 차이라기 보다, 불과 3~40년의 기간 동안 변할 수 있는 모든 역사를 담고 있다...>

 

 

 

게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여기저기 요청하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재원은 딸리고 알아서 만드는 경우까지 있었다면, 양은 많아지고 규모나 완성도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주체도 권력과 재력 있는 귀족과 승려와 사찰에 한정되었겠지만, 다시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만들어질 시스템은 더 이상 복원될 수 없었다. 즉 미켈란젤로의 걸작과 명품들은 한 천재의 외로운 집착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시작된 르네상스의 결과물이 집대성되고, 보다 높은 완성도를 향한 당대의 치열한 경쟁이 있었듯,

석가탑과 다보탑이 완성되기 위해서도 과거의 실험과 결과물을 종합할 수 있는 연속성과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자하는 창작의지와 경쟁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불국사와 석굴암은 애초부터 당나라나 일본, 발해 등 국제적 경쟁을 염두에 두면서 인도불교의 근본까지 천착할만큼 넓고 깊은 안목이 있었지만, 이후 그런 국제성과 보편성의 잣대가 사라진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등 불교미술은 이런 시야들이 해체되면서 더 발전할 시스템을 스스로 축소 조정했다는 말이 된다.

 

 

 

 

<또 시간의 흐름에 더해, 서로 바라보고 닮아야 하는 혹은 경쟁해야 하는 대상과 주변환경이 어떠냐에 따라, 그 결과는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음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경주 낭산과 경복궁의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