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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우리나라 석탑 편년 2> 통일신라시대 전형기 (661~702년) 석탑...1310

 

 

 

 

 

 

   (2)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 (661~702년)

 

                                                                                                                                       <표6>

석 탑

 의성 탑리리 오층탑(663~677/국보77), 경주 감은사 삼층쌍탑(682/국보112),

 경주 고선사 삼층탑(682~686/국보38), 경주 나원리 오층탑(686~706/국보39),

 경주 황복사 삼층탑(692/국보37), 경주 장항리 오층쌍탑(702~715/국보236)

기 타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677), 경주 능지탑(681)

목탑유구

 경주 사천왕사 쌍목탑(679), 경주 망덕사 쌍목탑(685)

전탑유구

 울산 중산사(680), 경주 석장사/사천왕사,

 기타 경주의 삼랑사/덕동/인왕사/모량리는 700년대 이후 추정

 

* 통일신라 전기는 문무왕에서부터 효소왕까지로 잡았다.

** 670년대 의성, 군위, 울산을 제외하면 경주에만 탑이 조성된 시기로, 통일신라 석탑의 태동기다.

*** 목탑, 전탑과 함께 다양한 석탑들이 실험되던 시기로, 많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던 목탑과 전탑에 비해 석탑이 우위를 확보한 시점이기도 하다. 석탑의 다양한 층수와 결구방식이 실험되었으나 삼층석탑으로 전형화된 시기다.

 

 

* 탑리리탑 조성 시점은 백제의 각분야 장인들 동원이 가능해진 663년 이후, 통일전쟁 후 문무왕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을 동궁과 임해전지(안압지)가 준공된 674년 전후를 유력한 시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675년 예성강 일대 전투에서 패배한 당나라군이 676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지방으로 옮기고, 676년 기벌포에서 설인귀가 패배하면서 백제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 677년 초를 하한으로 잡았다.

** 탑리리탑을 내식으로 해석(?)하면 ; 왕궁리탑 기단부 위에 정림사탑을 세운 형상인데, 고난위도에 해당하는 지붕돌 낙수면 결구방식을 해결할 수 없어 분황사탑과 같은 전탑의 기술을 차용한 양식이다.

 

 

* 군위 삼존석굴앞 모전석탑은 훼손된 형태가 아닌 원형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된다. 근거는 단층에 합각지붕으로 이루어진 양식의 전탑이 중국에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추정연도는 탑리리탑과 같은 이유다.

** 앙련양식의 연화문석이 일층 갑석부위에 설치돼 연화탑으로도 불리는 능지탑은, 인근에서 발견된 문무왕비 때문에 문무왕의 화장터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완전하지 않지만 오층탑이라는 말도 있고, 고분 형식이라는 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고구려의 토탑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황복사나 원원사지에서 십이지신상이 확인된 만큼, 능지탑 조성연대가 681년이란 주장에 큰 무리가 없지만 십이지신상의 양식적 변천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 감은사/고선사탑 이후 ①이층기단부 ②상층기단부에 2개의 탱주 ③부연이 있는 상층기단부 갑석 ④호형+각형으로 마무리된 하층기단부와, 각형+각형으로 마무리된 상층기단부의 2단 괴임 ⑤각층 지붕돌에 2단 괴임 ⑥5단 층급받침의 지붕돌 양식 ⑦1~2단으로 돌출된 층급을 가진 노반 양식 ⑧우주와 탱주가 별석이 아닌 면석 형태로 가공 ⑨낙수면 하부가 완전히 직선으로 가공된 지붕돌 양식이 확정된다.

** 기단부 결구방식에서는 감은사/고선사/나원리탑(귀틀석+면석), 황복사탑(귀틀석+귀틀석), 장항리탑(면석+면석)이 각각 다른 방식을 사용했음이 확인되었다(신용철/동국대 박사논문 참조).

*** 왕궁리/탑리리탑에 비해서는 변화가 생기지만, 후대에 비해 차이가 날만큼 뚜렷하게 낮고 넓은 기단부와 일층몸돌, 그리고 기단부보다 월등하게 넓은 단면적을 가진 탑신을 특징을 갖는다.

**** 황복사탑을 제외하면 탑신만 9m가 넘는 기념비적 스케일을 갖추고 있다.

***** 이 시기 석탑의 미감은 조화와 비례에서의 완결성을 갖추면서, 정연함이 뒷받침된 안정감과 함께 장중한 기운을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