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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우리나라 석탑 편년 1> 삼국시대 석탑 (538~663년)...1310

 

 

 

 

 

 

 

 (1) 삼국시대 석탑 (538~663년)

 

<표5>

석    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570/국보9),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634/국보30),

 익산 미륵사지 석탑(639/국보11/쌍탑), 익산 왕궁리 오층탑(639~655/국보289)

목탑유구

 청암리 금강사지 팔각칠층목탑, 상오리, 원오리, 정릉사지 (이상 평양),

 요동성 영탑사, 황해도 봉산 토성리, 부여 능사 오층목탑(567년), 부여 금강사,

 익산 미륵사 구층탑(639), 경주 기림사탑(643), 경주 황룡사 구층탑(645)

목탑기록

 경주 흥륜사(544), 경주 천주사(589), 경주 영묘사(635), 울산 태화사(648)

 

*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을 상대로 신라-당이 승리한 663년을 기준점으로 잡았다. 왜냐하면 이 전투 이후부터 신라가 백제땅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실제 백제지역에 행정력을 미치기 시작한 시점은 677년 이후로 보인다.

** 석탑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아있거나, 심초석 등 유구가 발견된 목탑을 포함했다.

*** 당시 전탑을 쌓을 수 있는 벽돌 제작 기술은 백제에 한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인 것은 그런 기술을 가졌던 백제에서 전탑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지만(523년, 벽돌로 만들어진 무령왕릉이 있었고, 538년 성왕대를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일본에 와공기술자 등을 파견한 기록이 있으며, 부여/공주 박물관에는 백제시대 소조연화대좌 및 수준 높은 각종 전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당나라풍을 추종했던 신라는 돌을 벽돌처럼 잘라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분황사탑을 세웠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신라의 전탑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 목탑과 경쟁하면서 석탑이 태동한 시점으로, 백제석탑이 양식적으로 완결된 시기이기도 하다.

** 정림사탑은 백제문화의 최고 전성기였던 위덕왕대 중반으로 추정하였다.

*** 왕궁리 오층석탑에 대해서만 다시 요약하면 ;

   ①단층기단부 위에 목탑의 비례와 체감률을 그대로 차용한 형태로

   ②우리나라 석탑 최초로 별정 양식의 기단부가 만들어진 예고

   ③일층몸돌의 높이:넓이 비례가 우리나라 석탑을 통털어 가장 낮아 최초의 형태라 볼 수 있고

   ④단층기단부의 높이:넓이 비례도 탑리리탑과 비슷한 가장 오래된 낮고 넓은 비례로 만들어졌으며

      (갑석의 합각부위에는 내림마루를 약하게 표현하였는데, 정림사탑 지붕돌 우동에 비하면 매우 약화된 형태다)

   ⑤기단부 심초석은 미륵사서탑과 동일하게 목탑에서만 사용하던 방식으로 가장 古式이고

   ⑥감은사탑 이후 사용되지 않은 편방석 모양의 노반은 가장 古式이면서, 정림사탑에서 분화되어 발전한 형태고

   ⑦기단부 갑석 위 일층몸돌 괴임이 일단으로, 이는 감은사탑 이전 탑리리탑까지만 있었던 양식이며

   ⑧정림사탑은 4층, 왕궁리탑은 3층까지 낙수면 지붕돌이 8매로 만들어져 감은사/고선사탑 보다 古式에 속하는 양식적으로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그외 ⑨왕궁리와 제석사지 발굴 결과, 천도 등 다양한 이유로 익산 왕궁리에 행궁과 정사(절)가 조성되었고, 실제 제석사지에 화재가 있었던 점이 확인되면서 900년대 일본에서 기록된 ‘관세음응험기’의 내용과 일치한 점을 고려하면, 641년 이전부터 사찰이 운영되었고,

   ⑩왕궁리탑에서 출토된 금강경판의 필체와 사리외함의 문양 분석 결과 백제 무왕대 제작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이점까지 확인이 된다면 관세음응험기의 사리갖춤 이전(移轉) 내용과 완벽히 일치하게 된다. 이런 내용들을 감안하여 왕궁리탑 건립 시점을 639~655(의자왕의 실정이 시작)년으로 추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