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탑여행-趣,美,香...

탑3-1> 합천 매화산 청량사 삼층석탑 2 - 무아지경으로 이끌던...1703






4.

 

내 마음의 문제일까? 건축적 요소와 각각의 기물에 대한 나의 성급한 관점 때문일까?

석등위치와 석축의 양식과 높이가 바뀐 걸 가지고 나는 청량사 전체의 느낌을 재단한다.

그러나 이건 내가 시간에 쫓겨서 새로운 변화를 음미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사전에 가람배치의 변화를 알고서 먹었던 내 마음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자리를 계속 음미한 것을 통해 느낀 것이니 결코 순간적인 평가만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모습은 결코 청량사 최초의 배치 원형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현재 금당의 석불과 석등, 석탑이 동시대에 원칙을 가지고 배열된 듯 변경했지만,

석탑과 석등/석불은 내가 보기에 최소 3, 100여년의 시차를 가지고 있으며,

만약 석등이 이전에 조성됐었더라도, 석등이 가장 바깥쪽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석탑이 800년 전후의 당대 모든 양식을 갖춘 것에 비해,

석등과 석불은 800년 전후 양식보다 9세기 후반~10세기 초반 양식과 친연성이 높다.

    

 

<예전 청량사 배치... 청량사는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석등에서부터 석탑 - 대웅전까지 사선으로 유도되는 시선을 따라가면

뒷배경이 되는 매화산까지 한눈에 들어와, 건축적인 안정감과 함께 공간이 확대 심연되는 느낌을 갖는다...

넓지 않은 청량사를 확대한 탁월한 공간경영이다...>

<현재 청량사 배치...석등이 석탑 뒤로 물러나면서 석탑-석등-대웅전의 유기적 관계도 어색하고,

건축적 안정감도 사라지면서, 매화산까지의 시야도 훨씬 좁혀졌다...

석탑은 온전히 살아났지만, 대웅전 앞마당과 뒷배경, 그리고 전면 조망을 위한 공간경영의지를 읽을 수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혹시 현재 모습을 원래모습이라 주장하는 분들의 근거가 석탑과 석등, 석불이 동시대 조성됐다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어, 각각의 조성시기에 대해 살펴본다...>

<신방석 유구가 남아있다고 해서 무조건 古式(고식)이 되는 건 아니지만, 통일신라시대 건축물 기단이 남은 곳이라면 신방석은 분명한 증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부재들이 석탑과 동시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량사의 오랜 연원을 말해 주는 건 확실한 거 같고, 다만 남아있는 규모를 고려하면 현재 대웅전은 지나치게 커진 감이 없지 않다...>

 

 

물론 대부분 청량사의 세 보물에 대한 설명은 9세기-동시대 조형물로 해설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청량사 석등이 고복형 석등 중 가장 앞선다는 주장까지 있다(석등/홍선)

그러나 먼저 석등을 보면, 지붕돌에 귀꽃은 없지만 보개형 상륜부로 마무리 되었고,

귀꽃이 솟은 하대복련과 별석의 괴임돌, 높지 않은 괴임 등은 9세기 후반의 특징이고,

백제식으로 얇게 조각된 복련과 엷고 자연스럽지 못하게 치석된 간주석과의 부조화,

또 경직된 화사석의 사천왕상 조각 등은 800년 전후 석등양식과 관련성이 적다.

    

 

<청량사 석등... 세월의 묵은 때를 벗은 모습이 말끔하다... 당당하고 탄탄한 느낌... 그러나 복련 하대석과 기대석, 지대석의 체감과 볼륨이 지나치게 크다. 그래서 더 높고 장중해진 게 아니라, 상부가 급속히 위축되고 상승감이 사라져 아쉽다는 생각...>

<선림원지 석등 간주석과 하부... 나는 청량사 석등 간주석을 보면, 선림원지 석등이 생각난다... 그리고 청량사 석등이 선림원지보다 조금 더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석굴암 본존불을 모본으로 조형된 석불좌상도 낮아진 육계와 자연스럽지 못한 편단,

사실적이지 않은 결가부좌와 지나치게 강조된 상호의 하관, 그리고 경직된 항마촉지인에

정교하지 못한 사각대좌와 날카로움을 잃어버린 신광과 약화된 두광 등,

청량사 석가여래좌상은 800년 전후 석불좌상에 비해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불상의 상호는 물론 좌대와 광배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소중한 보물...>

<석굴암 본존불... 비교를 위해 참고로 올려본다...>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좌대 부분... 좌대까지 완전히 노출되었다면 정말 보기 좋았을텐데...>


<장곡사 철조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역시 참고로 올리는데, 나는 청량사 외 장곡사, 고달사, 수도암, 청룡사(2기의 석불좌상 중 비로자나불 좌대가 사각이다)등 사각 석조대좌는 라말려초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 외 고려시대까지 넓혀 봐도 원주 용운사지, 영암 도갑사 등 현존하는 사각좌대는 많지 않다... 조성시기를 가늠하는데 석()불좌상과 대좌의 조성시기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하고...>

 

 

이런 이유로 석불좌상과 석등의 당당함을 폄하하거나 의미를 훼손하려는 건 아니지만,

석불과 석등이 석탑과 일정한 시대에 한꺼번에 조성되었다는 주장이나,

현재의 모습이 당시의 가람배치 원형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실상사 전경... 실상사는 부인사처럼 쌍탑 1석등 배치로, 불국사를 전형으로 완성됐다... 석등은 석탑과 금당의 중앙으로, 부석사처럼 석등의 독자적인 위상이 정립되기 이전에는 기능적인 의도가 강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때문에 스케일과 볼륨으로 보면 초기의 석등은 석탑과 금당에 비해 규모도 작고 장엄조식도 단조로웠다...>

<관촉사 전경... 980년대, 고려초에도 석불과 석탑 중앙에 석등이 배치된 예가 많고, 이런 배치는 미륵사지를 비롯 일본 법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원형임이 분명하다... 다만 시각적 안정감을 고려해서인지 초기에 비해 석등의 규모도 커지고 장엄조식도 풍부해졌다. 팔각간주석이 주도하던 석등 시대가 끝나고 고복형 석등 등이 등장하는 계기가 아니었을까?...>


 

즉 청량사 세 보물이 800년 전후에 만들어졌다면 현재의 모습이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륵사지에서부터 불국사까지 석등은 항상 금당과 불탑 사이에 조성되었고,

이 가람배치의 원칙은 백장암부인사실상사영암사관촉사충주 미륵사지 등

백제부터 일본, 신라를 거쳐 고려까지 그 전통적인 맥락이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해인사 전경... 제 짝이 아닌 어설픈 간주석이 끼어 있는 석등을 보면 현재의 배치가 원형인지 불분명하지만, 우리 눈에 익숙한 배치이기도 하다...>

<무량사 전경... 동시대 조성된 유물인가 여부를 떠나 익숙한 배치를 하나 더 골라보자면 무량사가 적당할 거 같아 골라봤는데, 역시 백장암, 영암사 등과 달리 석등이 맨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후대에 조성된 성주사, 무량사의 석탑과 석등처럼 그 위계를 달리하거나

부석사, 선림원지처럼 석탑과 석등의 조성시기가 다를 경우 특별한 원칙이 없을 수도 있어,

석탑과 석등이 동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전제에서 800년대 초반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배열되었다는 것은 조성시기 추정도 잘못 됐으며, 뚜렷한 근거도 없다는 말이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전경... 화엄사의 탑원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석등이 석탑을 보조하고 있는 방식이다...>

<회암사 무학대사 승탑... 회암사를 비롯해 신륵사, 청룡사 등 조려말 조선초가 되면 석등은 석탑이나 승탑을 보조하는 기능으로 위상이 바뀐다고 생각된다...

물론 석등은 신앙의 목적보다 기능이 우선할 수밖에 없지만, 라말려초에 비교하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숭유억불이 강제된 조선시대에는 불사에서 석등 장엄이 거의 사라지고, 무덤을 밝히는 장명등으로 위상도 달라진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석탑과 석등의 배치와 조합도 한 번 정리해 올려보겠다...>

 

 

그리고 또 하나, 청량사와 비슷한 조건과 조망권을 가진 사지(寺地)들을 찾아보면,

성주 법수사지와 김천 수도암 정도를 생각할 수 있지만,

(비슷한 높이의 감은사지, 창림사지, 문경 봉서리 등이 있으나 비교자체가 의미 없다)

석등의 위치도 모호한데다 제각각일 수 있어 원형을 추정하는 것은 더더욱 의미가 없다.

때문에 내 생각이지만 석탑을 조성한지 100여년이 지나 추가된 청량사 석등은

청량사의 장점을 보다 극대화 시킬 수 있었던 예전의 배치와 조합이 훨씬 어울렸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같은 가야산 자락에 있으면서 경주방향 대구 달성의 비슬산을 바라보며, 탁 트인 조망과 비슷한 높이에 악산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까지 법수사지는 청량사와 비견될만 하다... 특히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까지 비교해보면 더 재미있고...>

<법수사지 삼층석탑 앞에도 석등 하대석이 놓여있다... 물론 석등이 놓이기에는 터가 너무 좁고, 옮겨지기 쉬운 하대석뿐이라서 본래의 위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5.

 

사실 청량사의 변화로 인해 모든 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귀결된 것만은 아니다.

석탑과 석등의 조합이 깨지면서 석탑과 석등 각각을 차분히 살펴볼 여유가 생겨,

함께 있음으로 인한 부조화와 불안감도 해소됐고, 각각의 완성도가 높아졌다.

강건한 느낌의 석등과 함께 있어 조금은 위축되고 작게 보이던 석탑이 제 맛을 찾았고,

대자연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 돋보일 수 있게 되었으며,

세련된 비례와 체감의 석탑과 함께 있어 어진지 경직되고 작아보이던 석등도

스스로 완결적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청량사 석등과 석탑... 분리되고 순서가 바뀌면서 석등과 석탑은 스스로 완결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두 석물의 조합뿐만 아니라, 주변산세와의 조화, 시선을 유도하고 공간을 장악하는데 현재의 위치가 더 좋은 건지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현재의 변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아쉬워하는 것은,

어색한 조합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었던 새로운 경지로의 승화가 없어졌고,

우아함과 강건함의 인위적 조합에 배경이 될 수 있었던 자연과의 연결성이 약해졌고,

대웅전 앞마당의 허허로움을 채워주고 우리들의 시선을 무한확장 시켜주던 공간감,

건축과 자연을 하나로 연결시켜 준 깊고 넉넉한 안목의 시야가 끊어졌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눈부신 빛을 듬뿍 받던 예전의 모습... 여전히 나는 첫느낌에 목말라 하는 걸까?...

예전에는 분명히, 높지 않은 공간을 상하 2단으로 나누었지만, 석축으로 인해 윗공간은 더 깊어졌고,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시점의 이동은 석등과 석탑과 대웅전이 있던 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더 높여,

매화산까지 일체감을 부여하며 청량사 전체공간에 깊이감-심연성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탄생한 높지도 넓지도 않았던 공간에서 우리 시선은 세상으로 무한확장이 가능했다...>

    

 

청량사에 가면 경쾌함 속에 세련됨과 우아함을 함께 살린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750년대 통일신라 전성기를 구가하던 미감을 이어받아 800년 전후 조성된 삼층석탑 중,

단속사지 삼층쌍탑처럼 안정감을 우선 강조했던 무장사탑, 선본사탑의 미감과는 다른,

봉기동탑, 술정리탑, 갈항사탑, 월광사탑을 이어받은 진전사탑의 정연함과도 또 다른,

북장사탑의 완결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염불사탑, 용명리탑, 원원사탑의 우아함을 이어

단아하다고만 말하기엔 성숙하고, 세련됨 속에 기품을 살린 청량사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규모나 미감을 직접 비교하는 어렵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단속사탑, 진전사탑과 비교하면, 청량사탑은 염불사탑, 용명리탑의 미감을 잘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용명리 삼층석탑...>


 

어쩌면 신라 최고 문장가이자 사상가였던 최치원(857년 생~908년 이후 몰)

삼층석탑만 존재했던 청량사를 거닐며 세속과 선계를 가늠했을지 모르겠다.

또 석탑 앞 석등은 무언가 허전한 청량사를 보다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최치원의 발원으로 (견훤이) 예전의 위치를 골라 일부러 세웠을지도 모르며,

또 석등의 보충으로 청량사의 충만해진 생동감을 잊기 위해 혹은 우화등선을 핑계로

최치원은 더 이상 세상이 보이지 않은 더 깊고 높은 해인사로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청량사의 석등과 석탑이 유도하는 시선은 더 이상 대지를 향하지 않는다... 지금은 이렇게 앉아 하늘을 배경으로, 석등과 석탑이 가르키는 하늘을 바라보는 게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청량사는 부석사처럼 호방하고 장쾌한 조망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먼 시선을 보장하는 것으론 수도암과 비슷하지만 불필요하게 넓거나 허함도 없다.

평온한 용암사와도 다르며, 따사롭고 넉넉한데다 당당하기까지 한 법수사지와도 다르다.

약간의 세상과 꽉찬 자연에 먼 시선, 바람과 빛을 함께 담을 꼭 그만큼의 공간에

건축과 예술을 섞어 속계와 선계의 경계를 만들만한 장치들을 청량사는 담고 있었다.

그곳에 무아지경에 이른 석공의 솜씨로 빚은 삼층석탑이 있고, 그 앞에 석등이 있었다.

긴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던 녹색빛 청량사, 나는 여전히 예전의 사진 한 장을 더 좋아하는 거 같다...

    

 

<따로따로 또는 하나처럼, 한번은 땅을 한번은 하늘을...

그렇게 변화하는 환경에 내 시선을 맞추는 것도 세상 살아가는 지혜일까?...

상반된 미감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인공과 자연을 무심결에 조화시켰던 청량사의 공간경영은,

비울 수 있어 채우는 멋진 안목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비움과 채움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던 어느날 오후가 아직도 꿈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