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 석등, 석탑의 상륜부 변화를 중심으로 추적해 본 비인 성북리 석탑의 층수...
③그리고 마지막, 현재의 모습을 변형된 삼층석탑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두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처음에는 ②번처럼 만들었는데, 후대 중탑과정에서 변형됐을 가능성과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조형했을 가능성 두가지다.
물론 어느쪽이든 3층석탑이라는 추정을 전제한다.
<이제 현재의 모습이 삼층석탑으로 불려도 문제될 게 없다는 가정에서 다시 석탑을 바라보자...>
사실 현재의 모습은 일반적인 삼층석탑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매우 낯설다.
그러나 석탑 상륜부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무엇보다 승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석등의 변화과정까지 고려해본다면
보개형 상륜부는 그리 낯설거나 불가능한 구성은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역시 이야기의 초점은 비인탑의 상륜부다...>
왜냐하면 승탑은 초기 형태인 태안사 적인선사와 보림사 보조선사 승탑에 비해
후대로 내려올수록 상륜부가 비대화되기 시작, 연곡사지 승탑을 거쳐
고달사지 승탑에 이르면 보개형으로 정형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주형으로 마감되었던 불국사나 법주사 사천왕 석등과 비교해보면,
보림사를 필두로 후대의 실상사, 화엄사 석등 역시 보개형 구성으로 변한다.
* 승탑 상륜부의 변화
- 보개형 상륜부로의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승탑과 석등, 석등의 상륜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중 편년이 확인된 몇 개의 승탑을 비교해 본다.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850~860년대 조형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의선사탑은 승탑의 초기 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승탑의 상륜부는 보주형으로 마감되었다...>
<861년,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화장이 아닌 매장풍습이 고착되었던 통일신라말기, 석가모니와 동격의 깨달은 자로서 추앙받은 고승들을 기린 승탑의 속성을 볼 때, 석관과 승탑, 여기에 승탑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은 중복의 의미가 컸을 거 같다... 게다가 사각형 지붕으로 마감된 석탑과 달리 팔각 원당형 몸체에 팔각지붕으로 마감된 승탑의 구조에서 석탑의 노반은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럼에도 다보탑 노반은 팔각형이다)... 그래선지 승탑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이 생략된 상태에서 앙화가 시작되었고, 앙화는 초기부터 매우 화려하게 장엄된다...>
<923년,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마찬가지로 지붕돌 위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없이 앙화부터 상륜부가 시작되었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 국보4호임에도 불구하고 제작편년과 어느 고승의 승탑인지 밝혀지지 않아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승탑이다... 원감국사 승탑으로 본다면 870년대가 맞겠지만, 대담하다고 밖에 말할 수없는 깊이 파인 낙수면 등은 고려초기의 치석수법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900년 전후 승탑 상륜부에 보개가 강조된 초기의 예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 승탑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보개 아래의 둥근 부재다... 이 부재를 보개석으로 불러야할지, 아니면 복발이나 보륜의 변형으로 봐야할지 모호한데, 이미 870년 보림사 석등의 예가 있고, 별도의 복발을 두지 않았던 승탑의 일반 예를 기준으로 본다면, 보륜의 변형으로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940년, 원주 흥법사 진공국사 승탑... 이 승탑 상륜부는 앙화는 물론 보륜도 없이 곧바로 보개부터 조각되어 있다...>
<977년, 여주 고달사 원종대사 혜진탑... 보개형 상륜부가 고착되면서, 석탑 상륜부 중 보개 위의(보개⟶수연⟶용차⟶보주) 구조가 무너지고, 또 다른 양식의 장엄이 시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025년,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
<1085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 우리나라 석탑과 석등, 승탑을 통털어 가장 화려하면서 아름답게 장엄된 상륜부이면서, 최후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붕돌 위로 앙화⟶앙화⟶보륜⟶보개⟶앙화가 새겨진 수연과⟶ 용차 혹은 보주 순서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보개 위 부재는 타원형이 아니기 때문에 수연으로 봐야할지 여의주(?)나 알로 봐야할지 불분명하고, 그냥 보주라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의 변형처럼)...>
그리고 보림사, 화엄사, 고달사 등지에서 확인되는 승탑과 석등의 보개형 장엄은
800년대 후반부터 고려전반기까지, 한시대를 풍미하며 정형화 되었다가,
1093년 나주 서문 석등과 1101년 대각암 승탑을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즉 나의 추론은, 250여년 한시적이지만 승탑과 석등에도 보개형이 유행했는데,
이 시기를 전후해 석탑에 이런 그런 시도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석등 상륜부의 변화
- 석탑, 승탑, 석등 상륜부 중 보개형 상륜부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석등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륜부의 변화가 촉발된 계기는 승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먼저 살펴봤던 것인데, 각각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 같이 비교해본다.
<750년 전후, 불국사 대웅전 석등... 미륵사지 석등에 이어 통일신라 최초의 석등으로, 지붕돌 위 상륜부는 가장 단순한 보주형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이런 양식은 화엄사 사사자석탑과 석등에서도 확인된다...>
<868년, 담양 무등산 개선사지 석등... 최초의 고복형 간주석을 갖춘 석등으로 평가되는 개선사지 석등은, 상륜부 구성에서도 석탑이나 승탑과 다른 계보로 변화함하는 단초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석탑과 달리 노반과 복발이 없고, 승탑과 달리 앙화가 없으며, 복련 위로 ⟶괴임석⟶보륜⟶보개⟶보주의 단순한 구조로 장엄된 것으로 보인다...>
<870년, 장흥 가지산 보림사 석등... 보개형 상륜부는 승탑이 먼저일까? 아니면 석등이 먼저일까?... 상륜부 장엄은 승탑에서 먼저 시작됐을지 모르지만, 완벽한 보개형 상륜부는 보림사 석등이 최초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노반과 복발이 없고, 역시 앙화도 없다. 보개 아래에는 복련⟶보륜⟶앙련으로 구성된, 축소된 고복형 간주석이 있고, 보개 위에는 연꽃잎 문양이 새겨진 원형의 수연이 있다... 보개 위의 원형 보주는 200년 후에 만들어질 지광국사 현묘탑과 비슷한 양식으로 생각된다...>
<920년대, 구례 지리산 화엄사 석등... 시대가 흘러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화엄사와 실상사의 고복형 석등들도 완전한 보개형 상륜부로 조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개 위 아래로 앙화와 보주가 강조되었는데, 이런 양식 중 가장 안정적인 최후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1020년, 개성 현화사지 석등... 50여년 전의 논산 관촉사 석등과 또 다르지만, 현화사지 석등 상륜부는 앙화⟶보륜⟶보개⟶보주의 구조 중 보주가 어떻게 특화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093년, 나주 서문 석등... 2단 지붕처럼 보개가 살아있고, 그 위는 보주로 단순화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05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 고려를 거쳐 조선초기에 이르면 승탑과 석등의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가 모두 사라지고, 각각 가장 초기 형태인 도의선사탑이나 불국사 석등처럼) 단순한 보주형으로 회귀됨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800년대 중반이후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시대 전반기까지의 석탑들 중,
표충사 삼층석탑에서는 일반 석탑과 달리 새로운 해석이 가미된 노반이 등장하였고,
고려시대 조형된 충주 미륵사지 오층석탑의 노반은 지붕돌처럼 가공된 예가 있으며,
상륜부에서 보다 적극적인 변형을 보인 군산 죽산리 탑동 삼층석탑과,
노반의 돌출된 몰딩이 지붕돌처럼 조형된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삼층석탑 등,
비록 시도된 예가 많지 않을 뿐, 영호남과 충청지방, 통일신라와 고려,
석가탑 계열과 정림사지탑 계열을 막론하고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석탑 상륜부의 다양한 변화
- 노반과 복발을 중심으로...
- 승탑과 석등의 상륜부 변화보다, 우리는 먼저 이들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석탑의 상륜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석탑의 기본구조를 차용하면서 승탑과 석등이 등장했지만, 역으로 승탑과 석등의 영향을 받아 석탑 상륜부도 시대의 해석과 유행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했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순서를 바꿔 마지막에 살펴본다.
<송림사 오층전탑의 상륜부... 목탑과 전탑의 상륜부는 석탑 상륜부의 모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700년대 중후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송림사 전탑 상륜부 구성은, 우리나라 석탑 상륜부의 모본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이전 유물를 생각한다면, 법륭사 오중목탑의 상륜부를 참고할 수 있겠다...>
<다보탑 상륜부... 그럼 석탑 상륜부의 최초 형태는 어땠을까? 노반과 찰주만 남아있는 감은사탑과, 복발과 앙화까지 남아있는 고선사탑에, 송림사전탑의 상륜부를 오버랩 하면 되지 않을까? 이에 가장 합당한 예가 다보탑 상륜부라 생각된다. 노반과 복발, 앙화와 3개의 보륜, 그리고 보개와 보주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보탑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약화된 크기이지만, 고선사지탑의 노반과 복발, 앙화를 생각하면 원형의 규모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탑 상륜부... 노반까지 밖에 남아있지 않은 석가탑에 실상사탑, 봉암사탑, 백장암탑 등의 상륜부를 참고하여 복원한 모습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석탑 상륜부의 잣대가 되고 있다...>
<실상사 삼층석탑... 100여년 늦게 만들어진 실상사탑의 상륜부를 기준으로 석가탑 상륜부를 복원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특히 단순무결한 석가탑에 너무 장식적 요소가 많은 문양들이 사용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복잡한 구조의 다보탑 탑신과 상륜부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다보탑 상륜부의 보륜과 보주는 장식적 요소가 거의 없는 극히 단순한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화려한 탑신에 단순 담백한 상륜부의 다보탑, 단순 담백한 탑신에 화려한 문양의 상륜부를 갖춘 석가탑. 그렇게 대비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아무튼 현재의 석가탑 상륜부는 실상사탑을 기준으로 삼았고, 봉암사탑, 백장암탑의 상륜부도 모두 화려한 조각들로 치장되어 있다...>
<석탑 상륜부 명칭/솔뫼님 블로그에서 스크랩... 이 시점에서 상륜부 각각 부재들의 명칭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참고로 목탑이나 전탑 상륜부에는 오른쪽 도해처럼 보륜이 많고(9개), 월정사구층석탑 상륜부 수연은 긴타원형이다...>
<울주 석남사 삼층소탑... 800년대 중후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 상륜부도 전통양식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런 전형적인 양식을 벗어난 아래 석탑들의 상륜부와 비교해볼만 하다고 생각해 참고로 올린다...>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이제부터는 전통양식에서 변형된 석탑들을 몇 기 찾아본다... 대부분의 석탑들과 달리 상륜부 부재가 온전히 남은 석탑 중 하나로, 표충사탑에서 특이한 점은 매우 약화된 노반과 복발에 비해, 노반 몰딩은 상대적으로 과장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별석으로 가공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 지붕돌처럼 전각부분에 반전이 살아있다...>
<충주 미륵사지 오층석탑... 미륵사지탑의 노반 몰딩은 석탑의 지붕돌처럼 낙수면을 갖추고 있다... 이제 다시 주제(비인 성북리 석탑)로 돌아와 생각한다면, 지붕돌처럼 상륜부의 일부 부재를 가공했다고 우리는 이 탑을 6층석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첨부한다...>
<군산 죽산리 탑동 삼층석탑... 석탑 상륜부의 다양한 변형 중 하나로, 정림사지탑 계열의 죽산리탑 상륜부는 지붕돌 낙수면과 노반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로 특이한 형태다...>
<강진 월출산 월남사지 삼층석탑... 역시 같은 정림사지탑 계열이지만, 우주가 모각된 노반 위로 별석으로 가공된 부재가 있다... 미륵사지탑과 마찬가지로, 노반이 특이하거나 상륜부가 전형양식을 벗어났다고 해서, 이 석탑을 월남사지 오층석탑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형태에 앞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구조가 있고, 상륜부는 상륜부일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예들을 종합해보면, 승탑과 석등의 영향을 받아 석탑에서도
보다 장엄한 상륜부 구성을 위해 다양한 변형이 시도되었다는 점과,
특히 비인탑에서는 위 석탑들에서 시도된 모든 요소를 종합한
보개형 상륜부라는 보다 특화되고 완성된 형태로 추정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를 전제로 비인탑의 현재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보개형 상륜부가 유행했던 시기가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즉 비인탑의 조성시기는 빠르면 900년대 전후, 늦어도 1100년 이전이 아닐까?...>
결국 나는 서천 비인 성북리 오층석탑의 현재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층 지붕돌을 기준으로 위쪽과 아래쪽 부재들의 석질과 치석수법이 다르고,
석탑에서도 변형된 노반과 상륜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수용하여,
현재의 형태가 부재의 망실로 인한 불완전한 모습이 아닌 완전한 형태일 수 있음을 감안,
명칭부터 오층이 아니라 삼층석탑으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비인탑의 삼층지붕돌까지의 부재와 그 위쪽 부재는 석재의 색깔도 다르고, 돌을 다듬은 솜씨와 디테일한 양식에서 공통점이 없다...>
* 석탑 층수를 잘못 부여한 대표적인 예 ;
이처럼 명칭으로 인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예가 또 있는데,
하나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고, 또 하나가 청주 탑동 오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창림사지탑은 삼층만 남아있어 제대로 된 실측이나 검증도 없이
통일신라 전성기탑은 모두 삼층이기 때문에 삼층석탑이란 이름으로 고착된 경우고,
탑동탑은 본래의 (삼층)석탑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1개층의 부재,
즉 후대에 추가된 몸돌과 지붕돌이 있다는 이유로 오층석탑이라 불리는 경우다.
<창림사지 석탑과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정면도 비교/신용철과 한민주의 논문에서 인용...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황복사지탑과 천군동쌍탑, 그리고 창림사지탑은 거의 같은 규모와 비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삼층지붕돌 상단의 괴임의 넓이는 완전히 다르다. 황복사지탑과 천군동탑은 지붕돌 위에 곧바로 노반이 놓일 수 있게 좁게 마무리된 반면, 창림사지탑의 지붕돌 괴임은 이들보다 최소 2배는 넓다... 만약 창림사지탑이 삼층석탑으로 마감되려면 황복사지탑이나 천군동탑의 노반보다 두 배 이상의 넓이를 가진 노반이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만한 넓이의 노반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노반은 존재한 예가 없으며, 700년대의 석탑들, 특히 완성도 높은 비례와 치석수법으로 조형된 창림사지탑에 어울릴 수 없는 구조다... 창림사지탑의 삼층지붕돌 괴임의 넓이는, 창림사지탑이 삼층석탑일 수 없는 구조적이며 결정적인 증거다...>
<청주 탑동 오층석탑... 삼층지붕돌 위로 몸돌과 지붕돌로 추정되는 부재들이 있다는 이유로 오층석탑으로 불리는 탑이다... 그런데 삼층지붕돌 괴임을 잘 살펴보면, 이층지붕돌 괴임과 달리 (황복사지탑의 정면도에서 삼층과 이층 지붕돌 괴임의 차이만큼) 급격히 좁아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층 몸돌과 삼개층 지붕돌 규모와 체감만 놓고 추정해보면 상당히 건실하면서도 제법 규모가 있었을 보물급 석탑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 분명한 부재들 때문에 오층석탑으로 불린다는 것은 납득되기 어렵다(물론 후대에 추가된 부재들도 축적된 역사의 산물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기준으로 오층 운운한다는 것은 석탑의 진정한 가치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일이 아닐까?)... 아무튼 내 생각이지만, 일부부재가 훼손/망실된 몇몇 석탑의 명칭부여에는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었다는 생각이 앞선다... 조속히 시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찬가지로 비인탑은 청주 탑동탑처럼 1개층 분의 부재가 있다(그럴수도 있을 뿐인데...)는 이유로 오층탑이 됐다.
그러나 잘못된 명칭으로 인해 우리들의 사고는 경직되고,
우리들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을 석탑 변화에 대한 추적을 방해받으며,
결국 원형추정을 통해 보다 풍부해질 수 있는 문화적 상상력이 차단돼 버린다.
<즉 석탑의 위상 변화에 따른 다양하면서도 자유로운 변화 시도를 읽지 못하거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승탑과 석등에 역으로 영향을 받은 석탑 양식의 변화 등 석조조형물의 양식적 교류와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귀결되는 게 아닐런지...>
이제 정리해보자.
비인탑은 백제계 석탑 중 적층기법과 양식에서 정림사지탑과 가장 친연성이 높다.
고려시대 미감이 분명한 담양이나 가곡리 오층석탑처럼 신라식 적층도 아니고,
은선리나 죽산리 삼층석탑처럼 비례와 조형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또한 역사다리꼴(사능형) 층급받침 등 정림사지탑의 많은 수법을 계승한
장하리, 귀신사, 연동사지 삼층석탑에 비해서도 높은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정림사지탑 계열 석탑으로 사능형 층급받침으로 조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하면서 낯설게 느껴진다... 부재의 조합과 적층은 백제식이지만, 몸돌의 비례와 체감률은 완전히 통일신라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보개형 상륜부를 제외하고 바라본다면,
600년대 후반(백제는 660년에 멸망한 게 아니라 663년 이후에 서서히 몰락한다),
정림사지석탑을 재현하기 위해 규모를 축소했다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검박하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은 백제의 미감을 온전히 계승하고 있다.
<비인탑... 백제계, 정림사지계열 석탑으로 삼층이란 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역사적 전통을 비례와 조형기법에 온전히 살려낸 우수한 석탑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깊은 처마에 최대로 축약된 몸돌로 인해 자칫 불안정할 수 있는 미감에도
난숙한 솜씨로 깔끔하게 다듬은 치석에, 규칙적인 리듬과 극적인 체감 등,
뜯어볼수록 탄탄한 구성에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은은히 살려냈다.
다시는 재현할 수없는 정림사지탑의 결구와 적층기법을 충실히 보존한 모습에서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마지막 백제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정도로...
<비인탑을 올려다 본 모습... 비인탑과 정림사지탑을 비교할 때 생각되는 가장 큰 미감의 차이는, 규모나 비례보다는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주는 체감률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림사지탑을 올려다 본 모습... 삼층과 오층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감률을 가진 두 탑을 비교해보면, 석가탑 계열의 통일신라계 석탑과 정림사지탑 계열의 백제계 석탑이 주는 근원적인 미감차이가 어떻게 귀결되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다고 생각된다...>
세월이 흘러 신라의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백제의 정체성을 상징하듯,
삼층이 되어버린 정림사지 계열의 석탑...
다시 라말려초의 새로운 유행을 가미하여 보개형 상륜부로 재구성된 모습...
비인 성북리 오층석탑을 바라보는 나의 감상이다.
<비인 성북리 석탑... 처음 비인탑을 보면서 정림사지탑을 조성했던 석공이나 그들의 (멀지않은) 후손들이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비인탑의 층수든 상륜부는, 이미 새로운 유행과 사조를 받아들인 이후의 변형이라는 점과, 백제계와 통일신라계 석탑의 미감차이를 극명하게 느끼는 순간, 부분을 전체로 확대하려는 치기어린 관성과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가를 돌아보게 됐다... 또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더 오래된 과거를 향하거나, 최초의 원형을 모든 분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게 과연 진지하고 즐거운 상상일까 되물어 보고 있다... 다양한 변화를 용인하지 못하는 닫힌 마음과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편협한 시각은, 결국 경직된 사고와 또 다른 교조를 강요하는 건 아닐까? 너그러운 포용없이 합리적인 선택은 있을 수 없고, 풍요로운 인심없이 현명한 교감도 없을 듯싶다... 내가 가지고 있다는 구(矩)를 내려 놔야 할 거 같다. 비인탑을 생각하면서 드는 반성이다...^^>
<이젠 성북리 오층석탑이 아니라 비인 성북리 삼층석탑으로 불러도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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