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천 비인에 가면 멋진 석탑이 한기 있다.
탄탄한 구성에 균형 잡힌 몸매하며, 경쾌하면서도 날렵한 자태는,
여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위축됨을 느낄 수 없는 의연함까지 갖춰,
내가 좋아하는 진한 중성성(中性性)에 옅은 여성적 미감이 곁들여진,
아름다운 비례와 세련된 기품을 가진 멋들어진 석탑이다.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보물 224호/높이 6.2m...>
20년은 못 되고 18년쯤 됐을까?
어스름한 석양빛에 가냘픈 몸매로만 기억되던 석탑...
언젠가 다시 나서면 내가 원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오겠다 맘먹은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좋아한다고 자주 봐지는 것도 아니고,
마음속에 있다고 지니고 다닐 수 없는 게 삶이듯,
참 오랜만에 해우다.
<하나라도 더 많이 봐야한다고 생각했던 90년대 중반... 시나브로 물들어 가는 석양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진하다...>
필름 한통을 꺼내 한바퀴 돌다가,
주차장까지 내려가 두통을 더 챙겨 다시 탑 주위를 서성였다.
탑은 변한 게 없는데, 주변은 정비되고 주차장도 들어섰으니,
이제야 조금씩 가치를 인정받아 가고 있는 셈일까?
아쉽다면 지금 이름보다 비인 오층석탑이 조금 더 익숙했고, 신비하게 들렸는데,
이젠 지명을 그대로 붙인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안내문... 예전이나 지금이나 안정감을 잃었다는 투는 같다...ㅠㅠ 아무튼 이 글에서는 ‘비인탑’이라 부르기로 한다...>
2.
줄자까지 들고 나와 이것저것 궁금했던 규격을 확인하면서 탑을 뜯어본다.
6.2m... 만만한 높이가 아니지?
현재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1단으로 이루어진 장방형 지대석이 있고,
20cm가 넘는 두툼한 괴임석에 미세한 안쏠림의 1단 기단부 위로,
정림사탑을 비롯 대부분 백제계 석탑처럼 괴임돌 없이 곧바로 탑신이 시작하는데,
<비인탑 기단부와 일층... 정림사탑의 간략화된 구성... 그럴 수없이 완벽한 모습 아닐까?...>
안쏠림이 살아있는 일층 몸체는 우주와 1매의 면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정림사탑을 재현한듯 2단의 층급받침이 있는데, 아래쪽은 두툼한 각형이고,
위쪽은 하부의 절반만 모죽임한 역사다리꼴 층급받침 위에 지붕돌이 놓여있다.
<비인탑 1층 부분... 이렇게 보면 정림사탑과 구별하기 힘들지?... 이 층급받침 형태에 대해 ‘모죽임’, ‘말각(抹角)’, ‘사다리꼴’ 등을 사용하고 있고, 고유섭 선생은 이를 ‘사능형(斜菱形)’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정림사탑에서 유례했는데, 직선으로 가공했을 때는 역사다리꼴, 약간의 곡선이 느껴지면 사능형으로 (나는) 표현하고 싶다...>
우동(합각마루)이 뚜렷하게 살아있는 지붕돌 위로,
탑신괴임과 우주가 각출된 몸돌에 다시 2단의 층급받침과 지붕돌이 반복된다.
그렇게 삼개층의 탑신과 지붕돌 위로,
모각된 우주와 1단의 층급/몰딩으로 이루어진 부재가 놓여있고,
그 위로는 노반처럼 1단 층급만 남은 부재와 또 하나의 지붕돌이 있고,
다시 그 위로는 1매석으로 가공된 노반과 복발은 상하가 각출되어 있다.
<비인탑 탑신부... 하나하나 살펴보자...>
3.
3층 지붕돌 위의 구성이 익숙하지 않아, 원형이었을까 의심스럽고 모호하지만,
3층까지 조합은 패턴도 일정하고 체감도 분명해 매우 탄탄한 구성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왜 비인탑을 가냘프다느니, 불안정하다느니 그렇게 생각했지?
탑신에 비해 지나치게 넓게 구성됐다는 지붕돌이 이제보니 시원스럽게만 보이고,
좁게만 느껴졌던 몸돌은 안정감을 해치지 않을만큼 훌륭한 비례를 갖췄다.
<비인 오층석탑... 어느 사물이든 제각기 얼굴면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기획된 그 사물의 전면(前面)과 달리, 우리는 자신만의 정면(正面)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 사진은 내가 즐겨 찾는 각도는 아니지만 참고 삼아서,,, 아무튼 비인탑은 바라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느낌이 변화무상한 탑 중 하나다...>
평박하다는 개념이 무엇인지 증명하듯 완만하고 넓은 지붕돌의 낙수면에,
살짝 들어올린 처마의 반전과 합각면의 적극적인 귀솟음은 경쾌한 리듬을 주고,
낙수면 끝의 절단면은 얇지도 두껍지도 않아 지붕돌에 둔중한 느낌이 없다.
낮고 좁아 불안할 거 같은 몸돌이지만 넓은 지붕돌을 받친 층급받침이 정연하며,
오밀조밀 짜맞춘 부재들 하나하나는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비인탑 부분... 백제계 석탑들은 수많은 부재의 적층으로 이루어졌지만, 선보다는 면이 우선 드러난다...>
탑신에 비해 좁고 낮은 기단부와 크고 높은 일층몸체,
그리고 기단부보다 넓은 지붕돌과 두툼한 몸돌괴임에 단순한 층급받침 등,
백제계 석탑이 갖춘 모든 요소가 온전히 살아있는 이 석탑은
정림사지탑을 계승한 석탑 중 최고의 완성도와 세련된 기품을 가지고 있다.
<비인탑... 뭔가 아쉬운듯 하면서 막상 부족한 곳이나 보탤 것을 찾기에는 난감한... 그래서 더 뛰어난 완성도와 세련된 구성, 그리고 조화로운 비례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면 안 될까?...^^>
4.
안정적이면서도 훤출하게 솟아오른 일층몸체의 완벽한 구성과,
각각 8매와 4매로 나누어 조합한 각층 지붕돌의 이음선을 바라보면,
석재의 괴체감보다 목조건축의 결구방식을 충실히 살린 고집스러운 기법에서
신라계 석탑에서는 볼 수없는 경쾌한 리듬감과 발랄한 상승감을 느낀다.
<비인탑 부분... 가까이에서 올려보면 높은 일층으로 인해 날개를 활짝 편 우리네 기와집 처마 지붕 같은 느낌이 든다...>
수없이 많은 부재들로 조합되었지만, 답답하지 않고 시원시원하며,
하나하나의 부재들은 두툼하고 담백하지만, 눈에 거슬림이 없이 조화롭다.
또 제각각의 석재들이 적층되어 오밀조밀 할 거 같지만,
궁색하지 않고 시원시원하며, 너그러우면서도 풍요스럽게 보인다.
<비인탑 부분... 들어가고 나오고, 적절한 비례로 축소되거나 강조된 면 분할과 적층은, 여유로운 마음이 만들어낸 안정감으로 다가온다...>
최소의 가공에 단순한 각재들의 조합이지만, 다듬은 면들은 부드럽고,
차갑고 단단한 화강암을 가공했지만, 온화한 색감에 리듬이 살아있다.
감은사탑 앞에서면 베토벤의 교향곡이 생각나지만,
비인탑을 둘러보면 모차르트의 협주곡이 들리는 거 같고,
같은 베토벤 교향곡에서도 3번 ‘영웅’이나 5번 ‘운명’이 전성기 통일신라의 석탑을 노래했다면,
백제계 석탑에서는 1번이나 6번 ‘전원’이 떠오른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은 어느 석탑에 어울릴까?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 정도는 돼야 어울리지 않을까?... 그 탑 앞에서 그 음악을 들어보고 싶은데,,, 아무튼 고선사지탑과 비인탑을 같이 보면 신라계 석탑과 백제계 석탑의 확연한 차이가 들어온다...>
긴장감과 풍요로움, 안정감과 상승감,
신라계 석탑과 백제계 석탑은 그렇게 각기 다른 음감과 미감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 비인오층석탑은 정리사탑의 가장 충실하고 완벽한 계승자로
최후로 완성된 백제계 석탑의 결정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멋지고 아름다운 느낌...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이다.
<비인탑... 혹시 이 탑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백제계 석탑이 아니라, 백제의 마지막 석탑이 아닐까?...^^ 오늘은 그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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