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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문경/상주/예천 지역 석탑 3> 이 지역 삼층석탑의 모본,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1505

 

 

<상주, 문경, 예천지역 석탑과 문화재 분포도>

 

<상주지역 석탑과 문화재>

1.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경북 238호/높이 5.45m/700년대 후반,

                                    영산회괘불탱/보물 1278호/8.07m x 13.2m/1688년)

2.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117호/높이 6.24m/800년대 초중반)

3. 상주 증촌리 삼층석탑(석조여래좌상/보물 120호/높이 1.68m/9세기,

                                    석조여래입상/보물 118호/1.98m/900년 전후)

4.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683호/높이 9.21m/900년대 초반)

그 외 석조천인상(보물 661호/높이 1.2m/700년대)

5. 상주 복룡동 당간지주(경북 6호/높이 3.62m, 석조여래좌상/보물 119호/고려)

6. 상주 남장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990호/조선 초기,

                      보광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992호/조선 후기,

                      관음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993호/17세기)

 

<문경지역 석탑과 문화재>

A. 문경 사불산 대승사 (사면석불/경북 403호/600년 전후,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991호/조선초,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595호/1869년/부석사 제작)

B. 문경 봉서리 삼층석탑(높이 4.85m/800년 전후),

                                  봉정리 약사여래좌상 및 관음보살입상(경북 308호/9세기)

C.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보물 606, 607호/3층까지 높이 5.3m/800년대 초반/

                                  직지사 대웅전앞 2기/비로전앞 1기 등 3기)

D. 문경 희양산 봉암사(삼층석탑/보물 169호/높이 6.3m/870년 전후,

                                 지증대사탑/보물137호/높이 3.41m/883년,

                                 지증대사탑비/국보 315호/높이 4.12m/924년/최치원 사산비명 중 하나,

                                 정진대사원오탑/보물171호/높이 4.6m/960년 전후,

                                 정진대사원오탑비/보물 172호/높이 2.7m/965년,

                                 극락전/보물 1574호/고려시대 기단/조선중후반 재건,

                                 마애보살좌상/경북 121호/높이 6m/1400년 전후)

E.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51호/높이 4.26m/900년 전후)

F.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경북 185호/높이 2.7m/900년대 이후)

G. 문경 김룡사

 

 

<예천지역 석탑과 문화재>

가. 예천 청룡사 삼층석탑(높이 1.7m/10세기 이후,

                                     석조여래좌상/보물 424호/800년대 초중반,

                                     석조비로자나석불/보물 425호/900년 전후)

나. 예천 간방동 삼층석탑(경북 188호/높이 4m/800년대 중반)

다. 예천 동본리 삼층석탑(보물 426호/높이 4m/800년대 중후반,

                                     석조여래입상/보물 427호/높이 3.46m/800년대 후반)

라. 예천 한천사 삼층석탑(경북 5호/높이 3.6m/800년대 후반,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667호/높이 1.53m/800년대 초중반),

마.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53호/높이 4.3m/1011년),

바. 예천 용문산 용문사   (윤장대/보물 684호/1173년 제작/1625년 중수,

                                     대장전/보물 145호/1173년 창건/1665년 중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989호/1684년,

                                     보광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37호/1515년,

                                     팔상탱화/보물 1330호,

                                     영산회괘불탱/보물 1445호/1709년, 천불도/보물 1644호/1709년)

 

 

 

1. 문경 주변의 석탑들...

 

     그러면 문경지방의 석탑은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성되기 시작했을까? 문경지역 인근의 석탑 등을 통해 살펴본다.

먼저 봉서리탑이나 도천리탑이 만들어지기 이전, 주변에는 어떤 석탑들이 있었을까? 문화의 전파 방향을 생각하며 찾아보면, 맨 먼저 상주의 북장사 삼층석탑이 떠오르고, 다음 영주방향에서 추적하면 부석사 삼층석탑이, 그리고 소백산맥 너머에서 역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등에서 지리적 근접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 옥동 삼층석탑/보물 114호/높이 5.79m/800년대 중반... 참고로 안동지역에도 옥동 삼층석탑을 비롯 임하동, 죽전동, 안기동, 하리동 등에 많은 석탑들이 넓게 분포하고 있고, 그중 800년대 중반에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임하동 십이지 삼층석탑과 옥동 삼층석탑 등이 있지만, 이들 석탑 대부분은 도천사지탑 보다 조성시기가 늦고, 대부분 900년 전후의 석탑들이 많아 문경지역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굳이 이 지방의 영향력을 찾자면 신세동 및 조탑동, 운흥동 등 전탑이 아닐까 싶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높이 14.5m/700년대 후반...>

 

 

     거대한 규모에 준수한 맛을 가진 탑평리탑의 기념비적 요소와, 탄탄하고 묵직한 구성으로 중후한 미감을 갖춘 부석사탑, 그리고 정연한 구성과 세련된 비례에 우아한 미감을 갖춘 북장사탑이 문경 주변에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은,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이 문경지방에서 융합될 수 있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경북 238호/높이 5.45m/700년대 후반... 700년대 초중반 조형된 경주 염불사지탑, 용명리탑 등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의 삼층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자양분이 있었다는 것과, 한 지역의 특성이 항상 외부적 요인들의 융합 결과로 재창조되는 것도 아닐 것이고, 하나하나의 탑이 각각의 유형을 복제, 모방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겠지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다양한 미감과 양식의 석탑이 산재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하고 자유로운 변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되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249호/높이 5.26m/700년대 후반... 700년대 초반 조형된 경주 황복사탑, 천군동탑 등 중후장대한 미감을 계승한 삼층석탑이다...>

 

 

     다만 이들 북장사탑이나 부석사탑, 탑평리탑 등은 700년대 중후반 통일신라 석탑의 전성기 유형을 대표하는 만큼, 문경지방의 석탑이 이들의 규모와 밀도를 뛰어 넘기에는 한계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상주나 영주, 충주 지역에 비해 열악했던 문경지방의 위상과 전성기가 지난 다음의 매너리즘, 그리고 약화된 경주의 통제력과 변화한 시대정신의 반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2.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보물 1186호/높이 9m/800년대 초반/직지사)

 

     그러면 문경지방 석탑은 이들 요소를 어떻게 수용하면서 변화했을까? 먼저 문경지방 석탑의 대표주자라 할만한 도천사지탑이 있는 직지사에는 비슷한 미감의 석탑이 한기 더 있어,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다(이 석탑 역시 외지 즉 구미 강락사지에서 이건한 것이다).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은 직지가 청풍료앞 삼층석탑으로 불린다...>

 

 

     똑같은 단층기단에 비슷한 규모와 양식을 갖춰, 도천사지탑과 한 곳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착각하기 좋은 강락사지탑은 현재 직지사 청풍료 뒤편에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호각형을 이룬 일층몸돌 괴임돌과 곡선으로 처리된 지붕돌 낙수면으로 인해, 도천사지탑에 비해 훨씬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미감을 가지고 있다.

 

 

 

     또 일층몸돌에 비해 급격하게 체감된 2,3층 몸돌로 인해 도천사지탑에 비해 안정감이 잘 살아있고, 지붕돌의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반전과, 도천사지탑에 비해 부담스럽지 않은 (복원된) 상륜부 덕분에 날렵하고 세련된 느낌이 더 크다. 이들간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3층 지붕돌까지 5단 층급받침이 살아있는 강락사지탑이 도천사지탑 보다 조금 더 앞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은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에 여성적인 자태의 아름다운 삼층석탑이다...>

 

 

 

 

3.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경북 238호/상륜부 제외 높이 5.45m/700년대 후반)

 

 

<상주 북장사 전경... 석탑 높이는 사찰의 중심 안마당에 막 들어섰을 때, 주불전의 용마루와 석탑의 노반이 일치할 때 제일 안정적이라고 한다... 본래 북장사의 가람배치를 추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주불전인 극락보전 앞마당에도 별도의 전각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여, 석탑 노반과 용마루가 일치되는 지점을 추정하여 사진을 찍어 봤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도천사지탑은 강락사지탑을 따랐을까? 글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이 이들의 모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상주 북장사탑은 기단부가 2단으로 되어 있고, 하층기단부의 탱주가 부석사탑과 같은 2개이며, 상층기단부 괴임과 일층몸돌 괴임이 (별석이 아닌) 상하층 기단부 갑석에 각각 모각 되어 있었고, 지붕돌 층급받침도 모두 5단이어서 규모로 보나 양식적으로도 700년대 후반 전성기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장사 삼층석탑... 상주 인평동 우암산 정상에 도괴된 부재들을 모아 1998년 현 위치로 이건한 석탑이다... 워낙 뛰어난 자태와 미감을 갖춘 보물급으로, 모범적인 복원에서도 칭찬 받을만 하다...>

 

 

     사실 북장사탑을 보면 너덜너덜 파손됐던 흔적이 주는 안쓰러움보다, 파편화된 하나하나의 부재까지 찾아내 이어 붙인 그 정성을 더 크게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북장사 삼층석탑 부분... 늘 말했지만, 지붕돌의 전각 부분은 파손된 상태로 방치하는 것보다, 원형추정이 가능하다면 복원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북장사탑 기단부... 상층기단부 갑석의 마구리 부분에도 부드러운 반전이 있어, 경쾌한 리듬은 물론 훨씬 세련된 느낌을 준다...>

<북장사탑 부분... 하층기단부 탱주가 2개로 부석사탑과 같아, 늦어도 800년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각난 부재의 치수와 유형을 확인하면 새롭게 부재를 깎아 신재로 대체하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북장사탑은 아무리 작은 파편이라도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살려낸 흔적이 역력하며, 지붕돌의 깨어진 전각을 비롯해 규모에 걸맞는 상륜부까지 훌륭하게 복원해내, 이에 들인 공력과 의지, 그리고 탁월한 눈썰미가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문경지방을 포함하여 상주, 예천지방의 최초이면서 최고의 삼층석탑으로 이 북장사탑을 꼽고 있고, 이 일대 석탑의 모본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생각한다.

 

<북장사 삼층석탑... 시원시원한 비례와 균형잡힌 조화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

 

 

 

 

4.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117호/높이 6.24m/800년대 초중반)

 

     그리고 북장사탑 다음 만들어진 탑이 봉서리탑이고, 그 다음 도천사지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탑이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앞선 석탑들에 비해 육중한 볼륨에 당당한 포부가 느껴지는 화달리탑은 부석사탑을 모델로 삼지 않았나 생각되는데, 중량감은 재현했지만 각각의 비례와 조화에서는 한발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화달리 삼층석탑... 규모나 비례에서 중후장대한 미감을 갖췄지만, 지붕돌 가공과 상층기단부 판석의 돌출이 눈에 거슬린다... 혹시 중수나 복원 과정에서 하층기단부 면석이 사라진 건 아닐까? 그렇지만 하층기단부 갑석의 두께를 생각하면, 애초부터 2단 기단부를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기단부 면석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돌출된 갑석과 두터워진 지붕돌임에도 낙수면에서 긴장감을 살리지 못한 면처리 기법이 눈에 거슬리는데, 이는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전문 석공들의 조직이 와해된 이후 (30년 정도 지나) 석탑 결구방식과 지붕돌 가공방식을 지방에서 자체 모색한 결과일 뿐 석탑의 조성시기를 800년대 중후반 이후로 후퇴할 근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포항 법광사 삼층석탑/828년 건탑/846년 이건/1698년,1747년,1750년 중수... 9세기, 즉 800년대 석탑의 편년을 가르는 주요한 잣대가 되는 탑이다... 하층기단부 탱주가 하나고, 상층기단부 갑석은 돌출되었으며, 일층몸돌 괴임은 700년대 석탑의 정형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820년대 만들어진 게 확실한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에서도 이전 시대와 달리 의도적으로 돌출된 상층기단부 갑석이 확인되기 때문이니, 화달리탑은 전성기 석탑의 제작/배급/관리 조직이 깨진 이후 석탑의 결구방식에서 자신감이 쇠퇴한 지방화된 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통일신라 후반기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진골세력들이 지방호족으로 전환할 즈음, 전국을 휩쓴 김헌창의 난을 제압하고 그 결정적 격전지였을 상주를 기념하기 위해 중후장대한 미감의 삼층석탑을 준비했지만, 전제정치가 해체되는 과정을 상징하듯 화달리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이 깨져가는 과도기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이 시기에 앞서 증촌리 삼층석탑도 조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직접 보지 못해 이번엔 제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