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계 봉서리 삼층석탑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런 정도의 석탑을 만들 수 있었던 문경이란 지역의 저력(?)에 대해 생각해 봤다. 왜냐하면 봉서리탑 외에도 봉암사 삼층석탑(보물169호, 6.3m)과 내화리 삼층석탑(보물51호, 4.3m)을 비롯, 직지사로 옮겨진 도천사지 삼층석탑 3기(보물606,607호) 등 보물급 석탑만 5기 이상을 보유하고 있어, 양과 질 양면에서 어느 지역에도 떨어지지 않는 뛰어난 수준의 석탑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 문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문경이란 어떤 지역이었고, 이 석탑들은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을까?
* 여기에서부터는 글과 사진을 연관시키지 말고, 따로 따로 보시길...
글은 문경의 공간적 역사적 변화를, 사진과 사진에 대한 설명은 문경지역의 탑을 모은 것이니 참고...^^
<문경 호계 봉서리 삼층석탑... 이런 정도의 비례와 엄정한 기운을 갖춘 석탑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곳에 정착할 수 있었을까? 먼저 문경 지역의 석탑들을 찾아본다...>
먼저 문경은 서북방향이 소백산맥에 가로 막혀 있고, 동북방향의 예천과 서남방향의 상주 중간에 위치하면서 남동방향 낙동강을 경계로 안동과 접해 있다.
이런 입지만 생각한다면 소백산맥 서북쪽 문화가 맨 먼저 건너 온 첫 번째 문화의 교류지역이고, 수로문화가 더디게 발달했던 중세 이전을 생각한다면 안동보다 대구-김천-상주에서 올라온 문화가 문경을 거쳐 예천을 통해 올라가던지, 안동-영주에서 올라온 문화가 예천을 통해 문경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문경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유적지는 봉암사일 거고, 여기에는 상륜부까지 온전히 남은 귀한 삼층석탑이 제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다. 잘 배분된 비례와 적절한 체감을 갖춰 안정감과 함께 단아한 미감을 가진 삼층석탑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경은 하나의 문화가 마지막에 도달하여 완성되는 곳이라기보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는 곳이든지, 한지역의 주류문화가 거쳐 가는 연결통로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곳이기도 한데, 그나마 이런 역할이 중시됐던 시기도 고려 초기까지가 아니었을지 생각 된다.
왜냐하면 신라를 거쳐 한반도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개성, 한양으로 옮겨간 고려와 조선시대 영남 지역 사상과 문화는 문경에 머무를 새도 없이 소백산맥을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봉암사탑 조성시기는 언제일까? 노반까지 4.1m(상륜부까지 6.3m) 높이로 규모가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각층 5단층급 받침을 살리는 등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정형화된 규범을 따르고 있어 전성기의 여운이 강하게 남아있다.
석탑 조성 연도는 승탑이나 부도비 건립연도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오히려 다를 때가 더 많을 듯 싶다), 지증대사적조탑(882년)이 조성된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렇지만 적조탑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한 860~870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증대사 사후라면 탑과 승탑을 동시기에 세웠을리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반증하듯 문경시 일대의 유적들은 통일신라에서 고려초까지 집중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문경지방의 유물을 통해 살펴보더라도, 600년 전후에 조형한 대승사 사면석불이 첫 출발이었지만, 완성도 높은 꽃을 피운 때는 봉암사의 지증대사 적조탑이 만들어진 882년에서, 정진대사 원오탑이 건립된 965년까지였다고 생각되며, 봉암사 이후 변변한 유물을 생산하지 못하다가 1604년과 1624년에야 비로서 대승사와 김룡사가 중수되니, 문경은 신라에서 고려초까지 격변을 겪은 이후 오랫동안 시대의 흐름과 필요에서 비껴서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세부 양식을 살펴보면 일층몸돌 괴임이 정형에서 벗어나 있고, 기단부 갑석 부연이 완전히 퇴화하는 등 800년대 후반의 특징이 살아있으며, 무엇보다 문경지방 석탑의 대표적 특징인 하층기단부가 생략된 1단 기단부에 탑신이 올라 있다...
크지 않은 규모의 석탑임에도 상승감이 돋보이는 건, 각층 지붕돌의 낙수면 경사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석가탑 1층 지붕돌과 비슷하게 매우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여, 희양산을 배경으로 바라보면 상승감이 더 크게 살아난다... 단층기단 임에도 정갈하게 정돈된 느낌에 담백 단아한 미감을 가진 매우 우수한 석탑이다...>
2.
고려초 이후 문경이 한반도의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건 1592년 임진왜란 때가 아니었나 싶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던 일본군은 이곳 새재와 죽령, 추풍령 등 3군으로 나뉘어 북상하는데, 그중 주력부대가 새재를 통과하게 되고, 새재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의 부대가 전멸(잘못된 전술이 부른 전략적 실패)하면서 한반도 전역은 일본군에 유린된 아픈 역사와 함께 말이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단층기단으로 문경지방의 전통을 따른 또 하나의 통일신라 석탑으로, 멀리 단양으로 향하는 고갯길목에 서 있다. 두꺼워진 지붕돌에 비해 얇은 전각이 조형돼 상당히 둔중한 느낌을 주는 탑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석탑의 비례와 조화가 많이 깨진 느낌이다... 봉암사탑 보다 늦은 900년 전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새재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임에도 오랫동안 방치된 이유를 찾아본다.
먼저 문경은 신라시대 국경 최북단에 위치한 접경지로, 정복전쟁이 마무리된 600년대 후반부터 800년대 중반까지 소백산맥 너머로 진출할 교두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600년대 후반부터 개발이 시작 700년대 중후반부터 확고하게 자리잡은 5소경(이중 김해를 제외한 원주, 청주, 충주, 남원은 소백산맥 바로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다)과 800년대 초반부터 낙향한 진골세력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정착한 강릉(명주), 공주(웅주), 광주(무주) 등이 등장하면서 통일신라의 무게 중심이 지방호족들로 전이되는 흐름에 묻혀 급격히 위상이 축소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내륙도시로 고착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교통로의 역참기능으로 규모와 역할이 축소된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대승사와 김룡사로 올라가는 초입, 당초 절터였던 곳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과수원 한가운데 서있음에도 조금은 처연한 느낌의 탑이다...>
즉 소백산맥 너머 문경새재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가장 짧은 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이었음에도, 경주와 상주에 이어 팔공산 권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간 영남의 문물이 문경새재를 넘기에는, 김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추풍령(221m)보다 높고 험해 대규모 물자이동에 불리했다는 지리적 요인도 크게 작용됐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영남지방에 쌓인 정치경제적 역량의 혜택은 물류가 흘러다니는 문경을 비롯해 김천, 고령, 의령(영양, 봉화도 포함) 보다도, 경주-대구-상주의 직교축인 선산-안동-영주에 고이면서 위상이 약화된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는 고려초기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 제법 맵시를 갖춘 오층석탑으로 통일신라의 기운이 살아있는 고려초 석탑으로 보인다... 이층 기단부에 지붕돌 층급받침이 정연하고, 상층기단부와 일층몸돌에 살아있는 안쏠림은 솜씨 좋은 목공을 거느린 건축가의 안목과 수준높은 석공의 내공을 함께 보는 듯 즐거운데, 두툼해진 전각은 개심사탑과 비슷하여 고려초 부활하기 시작한 백제의 미감이 느껴진다(이들은 모두 5층석탑이다)... 다시 올린다/150527...^^>
3.
결국 문경은 교통과 군사 목적이 강했을 때 발달할 수 있었던 지역으로, 새재로 통칭되는 문경의 고갯길은 괴산까지만 이르면 서남쪽으로 청주, 서쪽으로 진천, 동북쪽으로 충주로 향하는 다양한 갈래길이 발달할 수 있어, 김천에서 영동으로 넘어가는 추풍령(221m)이나, 영주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죽령(689m)보다 먼저 개발된 곳(문헌상 우리나라 최초(156년)의 고갯길)이었다.
또한 문경새재란 충주 미륵리로 넘어가는 계립령(520m, 하늘재라고도 불린다)을 시초로, 괴산으로 넘어가는 조령(632m)을 조선시대에 새롭게 확장하면서 이름붙인 새재,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추가로 개발한 이화령(548m) 등 다양한 경로와 이름의 통칭이기도 하다.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사실 봉서리탑을 보면서 맨 먼저 생각했던 탑이 도천사지탑이었다... 봉서리탑이 남성적이라면 도천사탑들은 중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느낌이 강한데, 상반된 미감 때문에 연상되었던 게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정연한 비례 등 700년대 전성기 석탑의 치석수법이 온전히 계승된 우수한 석탑들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경새재는 추풍령을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나 원주에서 단양을 거쳐 영주로 넘어가는 죽령을 관통한 중앙고속도로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에 중부내륙고속도로란 이름으로 개통되었지만, 최근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가장 짧은 거리로 안내될 만큼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이들보다 늦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고개의 높이 때문이었다. 근대화 이전의 주요 운송수단이 마차였다면, 근대화를 촉진시킨 주력 운송수단은 자동차가 아닌 기차. 그리고 기차는 5%의 경사가 한계치다. 때문에 어떤 목표였든 일본으로의 송출과 수탈을 목적으로 개통된 서울-부산간 철로는 지리적 한계 때문에 문경새재가 아닌 추풍령을 관통하게 되고, 이 교통로를 중심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공업 거점도시들은 문경새재를 비켜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자동차가 주요 교통수단이 된 다음, 결국 최대의 효율을 위해 개발한 마지막 교통로는 최초의 고갯길이 됐다.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
① 영주-제천-원주, 직선거리 72km로 2001년 중앙고속도록 개통(대구/춘천간 278km를 포함 총 387km로 55번),
소백산과 치악산 남측을 지나는 대표적 고갯길이 죽령이며, 고치령 등이 있다.
② 문경-괴산, 직선거리 39km로 2010년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마산/여주간 265km를 포함 총 302km로 45번),
월악산 남측을 지나는 대표적 고갯길이 문경새재이며, 계립령, 하늘재, 조령, 이화령 등이 있다.
③ 상주-보은-청주, 직선거리 60km로 2009년 당진영덕고속도로 개통(당진/상주간 197km를 포함 총 282km로 30번),
속리산 남측을 지나며, 화령, 말티재, 피반령, 활목고개, 비조령 등이 있다.
④ 김천-옥천-대전, 직선거리 59km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서울/부산 총 416km로 고속국도 1번),
황악산 북측을 지나며, 대표적인 고갯길이 추풍령이고, 궤방령, 우두령 등이 있다.
⑤ 고령-거창-함양-남원, 직선거리 99km로 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담양/대구간 총 181km로 12번),
가야산과 황석산, 장안산, 지리산 등을 지나며, 팔령, 여원치, 육십령 등이 있다.
⑥ 함안-진주-광양-순천-광주, 직선거리 144km로 1973년 남해고속도로 개통(부산/영암간 총 273km로 10번),
지리산과 백운산, 조계산, 무등산 등을 지나며, 소백산맥 끝자락을 우회한다... 아무튼 직선거리는 문경새재가 가장 짧다...^^>
속도를 위해 지리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하는 현재적 필요가 찾은 최적의 길이 가장 오래전에 개척했던 길이라는 점이 역사의 순환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미래를 지향하는 첨단의 기술과 창의적 상상이라는 것도 결국 역사적 교훈과 선조들의 지혜를 바탕으로 할 때 영속성을 갖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도천사지탑들은 김천 직지사 대웅전 앞 쌍탑과 비로전 앞 한기 등 모두 3기의 탑인데, 본래 한 곳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문경 도천사지는 호계 봉서리탑에서 동쪽 2.3km 지점, 산북면 서중리 56, 57, 65, 66번지 일대로, 낙동강 지류로 문경시내 동쪽으로 흐르는 영강의 지류인 금천에 인접해 있는데, 현재 웅천마을 주변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도천사(道川祠, 道川寺, 道天寺, 道泉寺)란 조선후기에 강제 폐사하고 양반들이 모여 유희를 즐기던 집강소 건물의 이름이었고(후에는 연계소(蓮桂所)로 불렸다고 한다), 본래의 이름은 영원사였다고 한다(법보신문/2013.10.08일)...
보다 자세한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3탑1금당은 유일한 배치가 되기도 하지만 금천과 3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석탄산업의 쇠퇴 이후 뒤늦은 고속도로의 개통이 문경지방 활성화와 직결되기 쉽지 않았고, 높아진 물류의 통과 빈도와 용이해진 접근성은 관광산업 발전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문경이 역사적으로나 정신사적으로 밀도를 가지고 활성화 됐던 전성기는 소백산맥을 접경으로 고구려/백제/신라가 대치하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말기 후백제와 고려가 패권을 다투던 시기였음이 분명하다.
정치적 군사적 필요가 행정력을 강화하게 되고, 이를 경제력이 뒷받침 할 때에야 비로서 문화적 여력은 한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사상으로 발현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갖추게 된다. 즉 이질적인 문명이 상호충돌 교류하면서, 동시에 자기정체성을 탐구할 때만 문화는 발달하고 사회는 품격을 갖추는 게 아닐까. 문경이란 지방의 역사를 궁리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비교적 최근인 1970년 1월 무너진 상태에서 발견됐는데, 1916년 일본인에게 매각하려다 실패한 이후 사리장엄구 때문에 도괴된 것으로 보인다... 도천사지탑들은 1974년 직지사의 현재 위치로 이건 되었는데, 복원된 노반에서부터 상륜부가 무겁게 보인다... 아쉬운 점 중 하나다...>
4.
아무튼 이런 역사적 지리적 조건과 함께 우리나라 대부분의 주요 고갯길에 빠짐없이 자리 잡았던 석불과 석탑 조형문화 중 유독 건탑 위주로 발달한 문경지방은, 소백산맥 안쪽 상주와 예천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이들 지역은 물론 김천이나 영주보다 먼저 개발되기 시작했고, 또 석탑이 불교예술을 주도하던 통일신라 전성기에는 그 지역들보다 수준 높은 석탑을 많이 보유하게 되었으며, 김천과 상주에서 올라온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예천과 연결시켜주는 매개역할에도 충실했다고 생각된다. 호계 봉서리 삼층석탑을 비롯한 문경지역의 석탑들은 그런 흐름 속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문경 도천사지 삼층석탑... 3탑 모두 거의 같은 높이와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층급받침은 각각 5단-5단-4단이고, 일층몸돌 밑에는 2단 각형의 괴임이 선명하고, 기단부 갑석의 부연도 확고하게 살아있다... 그리고 대웅전 앞 두기의 일층몸돌 괴임이 별석으로 구성된데 반해, 비로전 앞 석탑은 기단부 갑석에 치석된 차이가 있으며, 기단부 밑 지대석은 몸돌의 괴임처럼 2단 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단층기단부로 문경지방 석탑의 특징이 살아있다...>
이제 정리해보자. 5~600년대부터 각국의 성패를 좌우하던 접경지에 위치해 있던 문경은 800년대 들어와 그간 누적된 문화적 역량을 석탑 건립을 통해 꽃을 피웠는데, 한편에서는 상주에서 올라온 새로운 변화를 예천방향으로 전달해주면서, 또 한편에서는 영남지역에 고인 시대의 조류를 소백산맥 너머로 전파하는 첨병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원주, 충주, 청주, 남원 등 소백산맥 바깥쪽이 새로운 지역적 근거로 등장하면서 약화되기 시작, 통일신라 말기 이후 더 이상 성장동력을 찾지 못한체 자기정체성까지 해체된 게 아닐까 정리해본다.
<봉암사 가는 길...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일, 공간적 조건이든 시간적 의미든 하나의 경계가 세워지고 무너지는 것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문경은 경계를 넘나드는 접경에 위치해 있으면서, 보다 넓게 열릴 수 있는 조건을 살리지 못한체 오히려 폐쇄적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쪽만 바라보고, 모든 걸 의탁해 버린... 그래서 강직함이 보수적으로 보이고, 정연함이 배타적 긴장감으로 느껴지는지도...>
그리고 석탑만의 흐름을 본다면 700년대 중후반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의 영향으로 800년을 전후 봉서리탑, 도천사지탑 등 삼층석탑 조류가 문경에서 정착하여 꽃을 피웠고, 이 흐름이 800년대 중후반부터 예천에서 마무리되어 간다고 생각된다.
또 900년대 초반, 고려의 등장과 함께 삼층석탑의 전형이 해체되고 새로운 미감을 갖춘 석탑조형이 문경을 비롯한 상주와 예천 등지에서 시도되지만 지역 주도층이 완전히 와해된 문경은 더이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고, 900년대 중후반 조형된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이 문경지역 불교미술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생각한다. 이들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지증대사 적조탑 세부문양... 봉암사 다녀온지 너무 오래됐다...^^>
<문경 대하리 반송... 한지역의 성쇠... 역할이 없어지면 방향을 상실하고, 목적이 약해지면 기능이 쇠퇴하고, 손발이 둔해지면 정체성까지 상실하는... 시야가 닫히면 마음이 좁아지고, 그러면 손발도 굳어질까?..^^ 주체적인 의지와 객관적 조건에 대한 반응까지 DNA에 각인시켜 주어진 생명력, 본능만으로 천년, 만년을 버텨온 산천초목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만든 역사를 생각하고 있다...>
'탑여행-趣,美,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경/상주/예천 지역 석탑 4> 800년대 후반 예천지방 석탑과 동본리 삼층석탑의 복원(?)... 1506 (0) | 2015.06.01 |
---|---|
문경/상주/예천 지역 석탑 3> 이 지역 삼층석탑의 모본,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1505 (0) | 2015.05.30 |
문경 / 호계 봉서리 삼층석탑> 진지하면서 당당한, 사관학교 생도 같은 느낌의...1504 (0) | 2015.04.19 |
삼층석탑 69> 전성기 통일신라의 700년대 삼층석탑에 대한 메모 <목차>...1401 (0) | 2014.01.15 |
신라시대 삼층석탑 68> 국보130호 - 이형석탑의 대미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1312 (0) | 2013.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