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예천 청룡사 삼층석탑(높이 1.7m/10세기 이후)
때는 800년대 후반, 전국이 혼란에 휩싸이고 경주의 중앙집권력이 극도로 악화돼 지방곳곳에 대한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할 즈음, 통일신라의 모든 근간이 퇴색하지만 아직 정국은 방향을 잡히지 못한체 후삼국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즈음 만들어진 석탑에도 그런 영향이 나타나니 안정감과 상승감에 바탕을 둔 조화로운 비례와 균제미가 사라진다. 이를 한편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인 정연함을 뒷받침할 통일된 사상의 이완과 시스템의 해체로 해석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창작의 자유로움과 새로운 기운의 모색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규모는 물론 질적 저하로 귀결되는 흐름 속에서도, 석탑과 불상을 조형할 수 있는 경제력은 귀족과 지방군권을 장악한 호족들에 한정되어 있었으니, 여전히 사찰 경영과 불탑 조형은 여전히 일반 백성들의 신심만으로는 참여할 수 없는 한정된 영역이었음도 분명했을 거 같다. 여기에 탄탄한 내공과 눈썰미, 그리고 숙련된 솜씨를 지닌 석공조직은 해체되고, 지극한 정성을 추동할만한 안목을 가진 여유로운 발원자도 등장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전통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양식을 만들 역동적인 기운도 읽을 수 없었던 때가 이시기가 아니였을까 생각된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왕조가 지속된지 230년, 이 지역에 불어닥친 소용돌이는 단순한 전란이나 왕위다툼 수준이 아니라, 역성혁명이 가능할 수 있는 엄청난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했을 것이다... 그때 백성들이 의탁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힘 = 무력이 아니었을까?...>
그런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석탑이 문경 내화리탑과 예천 청룡사지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엄밀히 청룡사지탑은 규모나 완성도에서 내화리탑을 따르지 못하고, 시기적으로도 내화리탑 보다 훨씬 후대로 추정되지만, 지붕돌 가공기법은 화달리탑과 비슷한 유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이전의 석탑들이 가졌던 강건하거나 부드럽거나 어떤 평가를 내리든 조화롭게 보이는 낙수면 처리에 실패했다는 말이다(신라말/고려초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정형화 되지 못한 지붕돌에 있고, 고려시대 석탑은 끝내 통일신라 석탑의 지붕돌을 재현하지 못한체, 다양한 형태를 띠게 된다).
<예천 청룡사 삼층석탑... 기단부는 망실되고 삼층탑신만 남았다... 일층몸돌 주위의 부재는 기단부의 지대석으로 보이고, 이 비례라면 이 석탑도 단층기단부에 탑신이 올라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층 지붕돌 두께도 균일하지 않고, 긴장감을 찾을 수 없으며, 우주가 형식적으로 선각돼 있어 석탑이 더 유약해 보인다...>
청룡사지탑이 있는 청룡사에는 석불과 광배 및 좌대까지 온전하게 갖춘 여래상과 석불과 좌대만 남은 비로자나불상 등 2기의 석불좌상이 있다. 이중 통일신라 전성기 기운이 잘 살아있는 800년대 초중반의 석조여래좌상이 있어, 청룡사 창건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 때라면 청룡사는 예천지역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지방불교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여래상을 모본으로 900년 전후에 조형된 것으로 생각되고, 균형과 비례는 물론 치석수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석불들을 따르지 못한 석탑은 훨씬 후대에 조성된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고려 초반까지 청룡사는 사세를 유지했다고 생각된다.
<청룡사 석조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 내재된 당당함이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여래좌상과, 비로나자불 좌상의 약간이나마 움츠리고 경직된 모습을 제외하면, 규모와 세부 디테일에서 두 석불좌상은 한사람이 만든 거 같은 친연성이 있지만, 사실 비로자나불좌상은 소백산 장군봉(?)에서 수습하여 옮겨 온 불상이며, 결정적으로 좌대에서 큰 차이를 보여 시대의 선후를 구분한 것이다...>
9.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보물 683호/높이 9.21m/900년대 초반)
800년대 후반, 예천과 문경지방에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들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소외(?)됐던 상주에 900년 초반, 9m가 넘는 장대한 규모의 칠층석탑이 조성된다. 2층 기단에 5층 지붕돌까지 정연한 5단 층급이 살아있고, 지붕돌 위에도 괴임이 살아있는 걸보면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을 따랐다고 보이지만, 상층기단부나 일층몸돌의 면석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약화된 몸돌의 우주와, 문비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한 얇게 파인 일층몸돌의 감실, 그리고 탑신에 비해 왜소해 보이는 기단부와 이에 어울리지 않은 기단부 갑석의 두께 등 어딘지 조화가 깨뜨려진 모습으로 고려시대 초반기(900년대 후반) 석탑으로 주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비례의 석탑이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 문비를 대신해 몸돌에 감실이 등장한 것은 불탑의 가장 고전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이다. 고선사탑에서 시작, 문비로 석탑을 장엄하던 유행은 통일신라말기 급격히 퇴화하고, 고려초부터 다시 감실이 등장하는데 상오리탑의 감실은 매우 형식적이다... >
물론 내화리탑 다음으로 상오리탑을 소개하는 나는 이 석탑의 조성시기를 900년대 초반으로 본다(참고로 900년대 초는 완전한 국가 체계를 지닌 후백제와 고려가 건국된 이후 통일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가 열린 때로, 이 시기는 고려초이면서 동시에 통일신라의 말기다). 그럼 이 석탑은 어떤 연유로 갑자기 등장한 것일까? 많은 분들이 거론했듯이 나 역시 상오리탑은 충주 탑평리탑을 모본으로 만들어진 것(같은 칠층석탑이다)이라 생각하지만, 건탑의 주체는 900년대 초반까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견훤이 아닐까 생각한다(왕건이 지금의 충북지역으로 세력을 넓힌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충주유씨, 유긍달이 있어 고려의 영향도 추정할 수 있지만, 상주와 충주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세력권역이 구별되고, 궁예와 주도권 다툼을 마무리하지 못한 920년 전후 왕건에게 상주는 물론 소백산맥 안쪽에 석탑을 세울 여유가 없었다. 또 왕건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930년대 이후 고려초기의 석탑들은 통일신라의 전형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난다는 게 내 추론의 근거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은 탑평리 칠층석탑을 모본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시기에 조성된 유일한 칠층석탑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층몸돌에 연화문 괴임이 있는 춘천근화동 칠층석탑은 상오리탑 보다 후대에 조성됐고, 이들보다 늦은 1020년 조형된 개성 현화사 칠층석탑은 일층몸돌 괴임와 지붕돌 가공기법이 통일신라 석탑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900년대 초반,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가 등장하기 이전 890년대부터 전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견훤의 영향아래 구 백제지역에서는 삼층석탑이 아닌 오층석탑들이 등장하고, 이 경향은 왕건 이후 고려시대에 전승되어 구백제 지역 석탑조형의 대세를 이루게 된다(서산 보원사지, 정읍 남복리, 고부 장문리, 광주 장운동, (경기)광주 춘궁리, 이천 안흥사지, 부여 무량사와 세탑리 오층석탑 등이 이 시기 석탑으로 생각된다). 삼층석탑의 시대가 지고 5층석탑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던 초기 실험작이 상오리탑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 당시 오층 및 칠층석탑 일층몸돌 괴임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거나 연화문 장식이 없고, 아직 지붕돌의 전각 두께가 얇다는 특징이 있다.
<복원된 하층기단부 판석에도 부연이 있으나, 층급이 있어 자연스럽지 않다... 이 당시 기단부 결구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하는데,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몸돌의 규모에 비해 가늘어진 우주, 지붕돌에 비해 지나치게 넓고 뭉뚱한 몸돌, 그리고 그만큼 지붕처마가 깊지 않아 몽땅하게 보이는 괴체감에 엄정하지 못한 구성으로 고졸한 느낌도 드는데, 한편으로는 안성 죽산리나 충주 미륵사지 오층석탑처럼 둔중하게 무장한 무인 같다는 미감 때문에 건탑시기를 900년대 중반 이후로 추정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상주라는 지역을 감안한다면 고려보다는 견훤의 영향을 더 높게 치고 싶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을 보면서 견훤을 생각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아무튼 청주에서 보은을 거쳐 상주로 넘어가는 고갯길, 넓지도 좁지도 않은 산중턱에 오롯이 자리잡아 봉긋봉긋 솟아있는 봉우리들과 함께 상오리 칠층석탑을 보면, 불꽃이 사그라드는 하나의 왕조와 미쳐 펼쳐내지 못한 영웅의 기개가 겹치는 듯 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도 백성들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시대의 흐름이었겠지만, 첩첩산중 깊은 골에 무장한 사병들의 안식처가 되었을지, 고갯길을 넘나드는 장사군들의 이정표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역사 속에서 상오리탑은 쉽게 잊혀졌다.
<높은 곳이면 해와 가까이 있을 거 같지만, 깊은 산일수록 쉽게 어두워진다...^^>
10.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경북 185호/높이 2.7m/900년대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들 지역에도 갈평리탑을 비롯해 개심사지탑 등 고려시대 석탑이 세워진다. 가장 큰 변화는 오층석탑의 등장이겠지만, 의외로 이들 지역의 석탑들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그 이후 맥은 단절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지붕돌이 얇아지지도 않았고, 처마선 끝부분이 들리지 않은 직선(완전한 수평)으로 백제계 석탑의 요소가 반영되지 않았으며, 기단부는 통돌이 아닌 면석을 가공하여 조립하였고, 일층몸돌도 하나의 통돌을 가공해 두세조각의 돌을 이어붙인 다른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과도 다르다.
<문경 갈평리 오층석탑... 같은 김씨의 왕위다툼에서 벗어난 새로운 왕조의 개창... 백성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완전히 달라졌음직 하지만, 아직 관성으로 남아있는 습성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래봐야 상주를 포함 예천과 문경에 각각 한기씩에 불과하지만 700년대 후반 이후 300여년 동안 꾸준히 석탑이 조형된 지역이니, 이런 의의를 환기시킨다는 의미에서 지난번 문경지역 석탑을 다룰 때 언급한 갈평리 오층석탑을 잠깐 살펴본다.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이단 기단부... 확실한 확인을 못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층기단부는 하나의 통돌을 가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층기단부 판석도 두매의 돌이고, 상층기단부 갑석이 하나의 돌... 이만큼의 무게와 여기에 투입된 공력이 천년을 버틴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층기단부 갑석의 하부를 보면, 보이지 않는 이곳까지 세심한 치석의 흔적이 남아있다... 부연과 조출기법이 사라졌지만 나름 계산된 가공을 통해 석탑의 완성도를 높인 증거이며, 같은 기법의 다른 고려석탑들에 비해 은밀하고 과장되지 않아 훨씬 좋았다...>
일단 갈평리탑은 개심사지탑 보다 먼저 조형되었는지, 보다 후대의 일인지 추측하긴 쉽지 않다. 하층기단부에 탱주가 엄연히 살아있는 걸 보면 900년대 중반을 넘지 않을 거 같기도 하고, 개심사탑보다 규모도 작아지고 특히 일층몸돌 괴임에 남은 연화문의 흔적과 음각 경계선 등 괴임을 처리한 수법을 보면 개심사탑의 아류 같기도 해 1000년대 이후 석탑으로 볼 수도 있는데, 어찌됐든 개심사탑과 매우 유사한 기법으로 조형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일층 부분... 치석에서 보이는 능숙하고 정교한 손놀림, 이런 걸 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마모된 몸돌 괴임에서 (개심사지탑에서 보이는) 연화문의 흔적을 찾는다면 너무 어거지일까?...^^>
갈평리탑은 개심사탑과 비슷하게 상하층 기단부의 갑석과 지붕돌의 절단면 등 수평선이 강조된 양식이다. 그러나 기단부와 몸돌의 우주가 깊이 모각되고 균형잡힌 비례를 보이고 있으며, 지붕돌의 반전도 또렷하여 경쾌한 리듬을 살린 점도 높이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개심사탑과 가장 큰 차이점이면서 이 석탑의 특징을 드러내는 지점은 각층의 몸돌 모두에 안쏠림을 적용하여 지붕돌만 빼내면 사다리꼴 구성을 이뤘다는 점을 것이다.
<갈평리탑 부분... 각층 몸돌의 안쏠림은 건축가에게 남은 관성적 눈썰미의 결과라기보다, 처음부터 사다리꼴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잘 맞아 떨어진다... 상승감을 염두에 두었을까? 아니면 단순함으로의 회귀였을까?...>
이로인해 작은 규모에 굵은 수평선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안정감 보다는 상승감을 강조한 석탑으로 보인다. 이런 구성은 영동 영국사 망탑동 삼층석탑에서 보인 수법으로, 한편 생각하면 유아적인 발상이면서, 또 한편 의도적인 구성이었다면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동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각층의 몸돌이 사다리꼴로, 이를 가공한 석공의 순진한 사고도 재밌지만, 한편으론 귀엽다는 생각도 드는 석탑이다...>
한가지 아쉽다면 이층까지에만 있는 몸돌 괴임이 그 위쪽으로도 모두 살아있었다면 훨씬 높은 완성도로 다가왔을텐데 하는 점이다.
<이층 몸돌까지 살렸던 괴임이 삼층몸돌에서부터 없어졌다... 아쉽다...>
선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고 정교해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석탑에 우주의 깊은 모각과 지붕돌의 반전, 그리고 사다리꼴 몸돌로 상승감과 안정감을 훌륭하게 살려낸 갈평리탑... 이 지역 상당수 석탑들이 각각의 여정을 넘나드는 고갯길에 자리잡고 있어 많은 이들의 위안이 되었을 거 같은데, 특히 갈평리탑은 단아한 크기에 소담스러운 미감을 가져 쉬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을 거 같다.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아깝지 않을 정겨운 석탑이다.
<규모는 작지만 만만치 않은 공력과 능수능란한 솜씨가 엿보인다... 이만한 완성도를 갖춘 석탑을 만나기 쉽지 않을터... 어떤 이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진다...>
11.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보물 53호/높이 4.3m/1011년)
문경을 포함해 상주, 예천지역 석탑조형의 마지막은 개심사지 오층석탑이 아닐까 싶다.
<개심사지 오층석탑... 적절한 규모와 비례를 갖춘 우수한 석탑이다... 기단부의 갑석과 각층 지붕돌의 절단면 등 7개의 수평선이 우선 눈에 띄는 이 석탑은, 수평선이 주는 단정함과 차분함으로 매우 정적이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적절한 비례에 안정감이 강조된 이 오층석탑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조각한 부담스럽지 않은 인왕상과 팔부신중, 십이지신상 부조를 갖추고 있어 편안하게 보이는데, 특히 팔부신중은 어린아이 같은 신체비례를 갖추고 있음에도 어색함보다는 장난스럽고 친숙하게 처리한 기법이 돋보인다.
<개심사지석탑 부조... 인왕상이나 팔부신중은 둥굴둥굴한 곡선으로 조각되어 있어, 비례나 정교함을 뛰어넘는 해학이 느껴진다... 딱딱한 구성에 부드러운 추상이 살아있다...>
또한 개심사지탑 기단부 면석에는 1010년 돌을 깎기 시작해 1011년 완성했다는 명기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잘 짜여진 구성과 함께 당대의 조각양식과 석탑조형 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산이기도 하다.
<기단부 면석에는 음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 이 석탑의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몇가지를 더 살펴보면, 먼저 고려시대 석탑의 주요 특징인 지붕돌의 두툼한 절단면(전각 부위)에서 통일신라 석탑과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층급받침이 끝나는 처마선은 반전시키지 않고 통일신라 석탑과 똑같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또 지붕돌 낙수면은 매우 완만하면서도 합각선도 선명하고 전각의 반전도 또렷하여, 상하층기단부 갑석과 지붕돌 절단면의 진한 윤곽으로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미감에 변화를 꾀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별석으로 가공된 일층몸돌 괴임에는 연화문이 얇게 모각되어 있어, 탑신을 부처로 보고 이의 좌대로 괴임을 응용했던 일부 고려시대 석탑양식도 아울러 확인할 수 있다.
<상층기단부 갑석 하부도 면석 넓이에 맞춰 층급을 두었다... 이 석탑의 발원자와 석공이 들인 정성과 수준을 엿볼 수 있다...>
개심사지탑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부흥하기 시작한 백제의 오층석탑 양식이지만,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을 온전하게 재현하면서, 고려시대 석탑의 특질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복합적 요소의 석탑이다. 고려할 요소들이 많고, 기법과 양식이 다양해지면 자칫 통일성을 잃고 난잡해지거나, 각각의 구성들이 충돌하면서 비례를 놓치기 십상인데, 개심사지탑은 이 모든 구성을 조화롭게 풀어냈고, 게다가 크지않은 규모임에도 위축됨이 없고, 차분한 짜임새에 균형미까지 갖춘 훌륭한 석탑이다. 구 고구려의 영역에서 발흥해 한반도에 진정한 통일국가로 정착한 고려시대의 새로운 기운을 예천에서 꽃 피운 결실이 개심사지탑이 아닐까 싶다...
<낙동강의 상류지천인 내성천, 그 지류로 예천을 관통하는 한천변 논 한가운데 개심사지석탑이 서 있다... 남측 도로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산과 너른 들, 그리고 이를 휘돌아 감는 하천까지, 넉넉한 마음을 가진 천년전 예천사람들이 피워낸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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