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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감은사탑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한반도 최초 통합군주 문무왕...1504

 

   한 기업의 사보에 석탑과 관련된 역사문화 기행문에 대한 원고 요청이 있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흔쾌히 응했었는데, 제 글이 워낙 길다보니 글과 사진이 많이 편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ㅠㅠ 아쉬운 마음에 원고 초안을 약간 수정하고 사진을 모아, 몇편의 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1.

 

     경주에서 토함산 너머 감포 앞 바다에 다다르는 여정의 말미에 이르면,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통일신라 최초의 삼층석탑 두기가 장대하고 웅장한 규모를 뽐내며 당당히 들판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석탑의 나라 한국을 대표하는 국보, 감은사지 삼층석탑입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폐사지하면 허허로운 들판과 세월에 묻힌 돌탑을 그리기 십상이지만, 감은사지는 이 탑이 있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수록 또렷해지는 긴장감과 장중한 기운에 통쾌함마저 느껴지는 곳입니다.

 

<감은사탑은 이상적인 조화와 비례를 갖춰 높은 완성도를 가진 통일신라 최초의 삼층석탑이면서, 중국 일본과 비교해 독특한 석탑의 문화를 발전시킨 우리나라 문화예술사에서 시원양식으로 평가 받는 석탑입니다...>

 

 

2.

 

     감은사는 평생 전장을 누비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의 야욕을 꺾어, 신라의 정복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외연을 최대로 확장한 문무왕(文武王)을 기리기 위해 완성된 추복사찰로,

 

<2탑1금당의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 감은사지는, 쌍탑 배치라는 특성외에도 679년 사천왕사까지 계승되던 목탑 중심 가람배치에서 벗어나, 통일신라 삼층석탑 시대를 연 최초의 가람이기도 합니다...>

 

 

 

682년 아들 신문왕이 조성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삼층쌍탑에서는, 독창적이면서도 완벽한 구성에 정교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룩한 최고이면서 최후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리장엄구가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감은사지 서탑 사리장엄구, 보물366호, 국립경주박물관>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 보물1359호, 국립중앙박물관>

<동서탑 사리장엄구가 별건 보물로 지정된 이유는, 1959년 해체 복원된 서탑과 달리 동탑은 1996년 해체 복원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각각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1963년 부식으로 인해 훼손된 천개(혹은 보개라고도 한다)에도 불구하고 기단부의 정교하고 세련된 공예기술로 서탑사리장엄구가 먼저 보물로 지정되었고, 2002년 천개까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동탑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의 수준 높은 금속공예 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사리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작품의 규모나 질에서 전돌에 새긴 조각 중 최고로 평가받는 경주 사천왕사지(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일환으로 679년 창건된 사찰로, 고구려 백제와 달리 2탑 1금당의 구조를 가진 가람배치가 확인됐는데, 실제 유구로는 2개의 목탑과 2개의 석탑 등 총 4개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의 녹유사천왕상벽돌과 친연성이 매우 높아, 녹유사천왕상을 만든 <양지>가 감은사 동서탑의 사리장엄구도 같이 만든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해바다 수중대왕릉에 머물며, 멸망한 백제의 복수와 본국탈환을 목적으로 수도 경주를 직접 겨냥해 울산이나 감포 쪽으로 침공하려는 일본을 막기 위해 용이 된, 문무왕이 쉴 곳으로 만든 금당(金堂)의 유구가 남아있어 아직까지 그 깊고 넓은 울림을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금당 유구... 참고로 문무왕은 전통적인 매장(埋葬)방식이 아닌 서국(西國=인도)식 장례를 원했다고 합니다. 즉 화장 후 갠지스강에 유골을 뿌리던 인도의 장례를 생각한다면, 수중대왕릉의 연유도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다만 전통방식의 매장이었을지, 유골만 뿌렸을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감포 앞 바다, 문무대왕릉...>

<능지탑... 그런 연유로 일부에서는, 경주 사천왕사 인근의 능지탑을 문무왕의 화장터로 주장하기도 하고, 서탑과 동탑 사리기의 양식적 차이(서탑은 봉황장식 + 주악천인상, 동탑은 용장식 + 사천왕상 등)를 들어, 서탑사리기에는 부처의 사리가, 동탑사리기에는 문무왕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외 용과 관련된 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 또 있는데 부석사입니다. 부석사에는 귀국하는 의상대사를 호위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된 선묘를 기리는 선묘각과 함께, 무량수전 앞마당에도 돌로 만든 용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문무왕과 의상대사는 동시대 인물입니다...>

 

 

3.

 

     文과 武의 王, 문무왕 김법민은 아버지 김춘추의 외교력과 외삼촌 김유신의 무력을 정치적으로 활용, 살아서는 한반도를 통합하고 죽어서는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갈망했던 그의 염원은 만파식적(萬波息笛, 동해바다에 떠도는 섬 위, 대나무를 잘라 만들었다고 하는데, 용신(龍神)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보냈다고 합니다)으로 다시 되살아납니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문무왕은 이탈리아 통일에 실패했음에도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이상적 모델이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와 달리, 당대의 모든 분쟁을 종식시키고 한반도 최초의 통합군주로 신라를 반석에 올려놓았으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포용력으로는 태조 왕건이나 이성계보다 넓었을 것이고, 냉혹한 카리스마에서는 광종이나 태종 이방원보다 더 엄중했을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이나 근초고왕에 버금가는 전략적 판단과 세종대왕이나 고려의 성종만큼 국가경영에도 탁월했으니, 오늘날 한반도의 정치적 지형이 문무왕으로 인해 시발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한반도가 가장 다이나믹했던 시기 중 하나인 7세기는, 많은 영웅호걸과 역사에 기억할만한 위인들이 동시에 등장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 많은 인물들과 사상은 어쩌면 문무왕에 의해 통합되고 또 변화할 토대를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문무왕은 그리 조명 받지 못하는 인물이어서 아쉬운데, 르네상스가 태동됐던 시기 그 시대 한복판에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꿈꾸며 절치부심했던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 되어 오늘날에도 생명력이 유지되고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인물과 신념을 찾지 않아선지 한반도 최초의 통합군주인 그에 대한 홀대가 안타깝다고 생각해 몇몇 인물과 비교하면서 그에 집중해 봤습니다(체사레 보르자보다 더 우아하고 냉혹했다는 의미에서...^^)...>

 

 

4.

 

     문무왕의 위대함만큼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첫느낌은 크다는 점일 거 같습니다. 석탑 바로 앞에 서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렇게 큰 걸 만들 줄 알았다는데 놀라움과 함께, 당나라와 일본까지 뒤섞여 벌어졌던 동북아시아 최초의 삼국전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통일국가를 만들려했던 신라인들의 높고 큰 자부심이 이 탑에 온전히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 때문이겠지만, 감은사탑에 깃든 엄정한 기풍과 웅혼한 기상은 한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문화재청에 의하면 동서탑 각각 13.4m로 기록하고 있으나,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에 의하면 서탑이 14m, 동탑이 13.3m로 실측되고 있습니다. 석탑만의 높이는 지대석을 제외하고 9.9m로 거의 차이가 없고, 찰주의 길이에서 서탑이 55cm 높은데, 나머지 차이는 지대석의 차이입니다. 또 상층기단부는 동탑이 서탑보다 10cm 높습니다...>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이런 이유에서인지 두탑은 쌍둥이처럼 똑같지만, 오랜 시간 관찰하면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찰주가 낮고 기단부가 높은 동탑(바다쪽)이 안정된 느낌에 중후 후덕하여 넉넉한 포용력으로 다가오는 반면, 기단부가 살짝이나마 낮고 찰주가 높은 서탑에서는, 강직하고 예민한 느낌에 상승감이 살아나면서 카리스마 넘치는 위용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앞에 서면 가슴이 뜁니다. 의연함을 초월한 장중함이며 영혼을 충동질하는 진군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한치의 허틈이 없는 정연함은 하늘이 내려준 옥쇄처럼 또렷하며,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떠받치는 당당함 어디에도 어설프거나 위축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삼국의 역량, 신라의 염원은 금당에 담고, 백제의 세련된 우아함은 사리장엄구에 담고, 고구려의 넘치는 기상은 석탑에 새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고로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크기로, 같은 석공들이 동원돼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데, 찰주가 없다는 아쉬움이 있는 반면 감은사탑과 비교해 보다 편안하고 후덕한 포용력을 느낀다는 여성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원효가 창건을 주도했거나 원효를 추복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의 장중한 미감은 그 시대의 요청이 아니었을까요?...>

 

 

 

5.

 

     반복되는 일상의 자잘함을 쫙쫙 펴고 싶을 때 이 탑을 보면 좋습니다. 아이들 손을 붙잡고 감은사탑을 바라보며 한반도가 가장 다이나믹했던 7세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이야기를 해도 좋고, 각각의 질서가 재편됐던 시기 한중일 삼국전쟁을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희대의 명장 김유신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 원효와 의상의 정신까지 아우를 줄 알았던 문무왕의 크고 넓은 안목을 함께 노래하면 더 좋을 거 같습니다.

 

 

 

     만든 사람보다 기리려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석탑, 천년을 지나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절제된 미덕과 장엄하고 웅혼한 기운에 몸과 맘을 맡기고, 역사를 음미하며 석탑의 향기에 취하기에 감은사지 삼층석탑만한 문화유물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우리시대에는 그 누가 있어, 이만한 역사문화유물을 남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