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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조정래> 누구나 홀로 선 나무...0305

 

 

 

 

 

 

 

누구나 홀로 선 나무...0305

 

 

1.

 

나는 책을 대할 때 몇 개의 버릇(?)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언제 책을 샀고, 언제 다 읽었는가를 첫 장에 기록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드는 구절은 줄을 긋거나, 책장을 접어 표시를 한다는 것...

그리고 가급적 독후감을 써보는 것 등이다.

 

그중 첫 번째는 약간 치기어린 발상인지는 모르나,

나의 어떤 상황에서 어느 책을 읽었는가를 후일에 확인해보고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조정래 산문집에는 언제부터 읽었는지의 표식이 없다.

왜 없지? 아마도 조금씩 조금씩 읽을 것이란, 여유 없던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책은 일단 들면 끝을 보고자 하는게, 나의 또 다른 버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여유 없음”이 책장을 덮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쫓기는 마음인가?

 

내가 나의 “여유 없음”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

그건 이 책이 그렇게 가볍게 놓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이유 때문 일게다.

 

 

 

2.

 

수년전 가우디 건축전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었다.

별로 친절하지 않은 기획덕분에 짧은 외래어에 많은 상상이 덧붙여진 감상이었다.

그중 하나의 결론 ;

“야~~~ 그의 머릿속 어디에도 건축을 벗어난 빈자리는 없었겠구나”

감탄과 함께한 존경심...

 

그의 마지막 외출이었을 교통사고 전후에도

그의 머릿속은 성가족성당과 건축으로 꽉차있었을 것이다.

그게 그의 생이고 그의 머리이고, 그의 가슴이었을 것...

사람이 하나의 주제와 목표로 자신을 일생을 수놓을 수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게 있을까?

그것만큼 행복하고 영광된 삶이 있을까?

그의 어디에도 건축을 벗어난 틈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나의 믿음은

곧바로 그에 대한 존경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짧은 스페인여행 중 나는 그의 건축을 직접 대할 기회는 없었다.

단지 사진과 몇몇의 글로 그에 대한 흔적을 접했을 뿐...

그러나 그 짧음과 작음이 가우디에 대한 나의 감상을 저울질할 필요로 굳이 없다.

그는 여전히 훌륭한 사람으로 내게 남아 있으니...

 

 

 

3.

 

조정래 산문집을 보면서 웬 가우디이야기냐고?

일생을 문학... 글쓰기 하나로 살아온 사람...

동일한 부류의 사람으로 내게 남을 거란 생각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보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에 자유주의자란 잣대를 내세우는 조정래를

...주의자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는 없다.

그냥 그는 문학도이며, 소설가이며, 나의 앞 세대 사람일뿐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한글을 사랑하고

우리의 문학을 사랑하며

시대의 정신을 잃지 않은 꼿꼿한 선비 같은 사람이다.

- 선비(?) 갑자기 신영복씨가 생각나네? -

 

 

 

4.

 

“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

소설가로서의 화두 같은 이 두 물음을 조정래는 참여와 순수로 답한다.

그리고 어쩌면 줄타기 같은 모순항을 굳이 어렵게 풀지 않는다.

“순수는 아름답다. 그러나 참여가 포함된 순수는 더욱 아름답다”는

빅토르위고의 말로 답을 대신한다.

 

그에게 참여와 순수의 통일은

크게는 거대담론과 미시담론까지의 답이 되며,

작게는 작가지망생에게 제시하는 글쓰기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을 접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그가 제시하는 삶의 지렛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대표되는 조정래의 작품세계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인생과 역사는 그에게서 그렇게 통일되어 있다.

 

 

 

5.

 

지독하게도 소설 읽기를 싫어하는 나...^^

언젠가의 말처럼 나는 여전히 현실이 소설보다 풍부하다고 생각하며,

세익스피어보다 뛰어난 문호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소설가의 짓꿋은 농간을 즐기고 싶은 여유가 없다는 나의 가여운 선택을 핑계로

나는 여전히 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사람을 접할 때

그 사람의 (역사적)공과와 (사회적)영향과 (나와의)거리로 측정하는 버릇도 숨기지 않는다.

전 32권의 책 대신, 나는 역시 산문집 하나로 조정래를 접하며

평가하며,

상상한다.

 

어떠한 공과도 그 사람의 그릇을 넘지 못하며

어떠한 영향도 그 사람의 의도를 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여전히 이성의 과잉을 믿는지 모른다.

또 당연히 꺾일 나의 오만을 과신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사람을 만나고, 평가하고, 상상한다.

약간의 변명을 한다면 ;

완성태를 가진 사람의 첫(!) 산문집을 접하는 나의 접근방법의 문제일 수도 있다.

여전히 그는 하나의 목표에서 일탈하지 않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 누구나

홀로

나무.

그러나 서로가 뻗친 가지가 어깨동무 되어 숲을 이루어가는 것. ”

 

그가 “삶”이라 이름붙인 시를 다시보고 또다시 보면서 드는 생각...

20여년에 걸친 그의 완성태 제목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

 

그의 외로움을 감지하고

그의 고백을 담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내게 있음이 즐겁다...

산문집을 덮으면서 내게 있는 작은 여유가 즐거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