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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

일본역사> 법륭사에서 생각하는 쇼토쿠태자... 한일고대사2-1

 

 

 

법륭사에서 생각하는 쇼토쿠 태자의 꿈...한일고대사 2


1-1. 어떻게 쓸까?  

1-2. 무엇을 쓸까?


2-1. 법륭사 몽전에서 성덕태자를 만나다...

메모> X-1. 일본이라는 이름...

2-2. 일본 고대사 요약


3-1. 야요이 문화와 1차 도래인

메모> X-2. 왜라는 호칭...

3-2. 잃어버린 200년과 동북아시아

메모> X-3. 백제 한성시대, 왜국의 위치...

메모> X-4. 야마토 정권과 도래인...

메모> X-5.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3-3. 잃어버린 200년과 도래인


4-1. 불교의 전래와 백제...

4-2. 성덕태자의 등장...

4-3. 성덕태자의 헌법17조...

4-4. 성덕태자의 견수사 파견...

메모> Y-1. 천황의 호칭...

메모> Y-2. 천황의 역사...

메모> Y-3. 천황가의 3종 신기...

4-5. 성덕태자의 부활


5. 일본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1-1. 어떻게 쓸까?


내가 섰던 여행기중 그나마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

92년 여름, 두타산행기였던 것 같다.

사진과 글을 모아보고 싶은 욕심에서 시작했었다...

최치원이 말한 풍류 답습이든, 이이의 산수를 대하는 눈이든

아무튼 자연을 바라보며 뭔가의 자극을 갈구했던 글이었을 듯싶다...


여행을 하면서 차츰 나의 관심영역도 넓어지거나 혹은 좁혀지면서

답사기를 쓸 때쯤이면 늘상 고민을 한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하고...

그리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고...

 

 

<법륭사... 왼편이 서원, 오른편이 몽전. 왼편 하단이 남대문. 분홍색 국보, 남색 중요, 노란색 대보장전>

 


나는 어느 분야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우선 찾는다.

여행기, 기행문, 답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접해본 중에 80년대 나온 책자로는 박태순의 <국토와 기행>이 우선 꼽히고

90년대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일 듯싶다...

인문적 의미와 예술사적 접근의 차이가 있지만 내게는 첫 손에 꼽히는 책들이다.

 

그 중간에 사색으로는 <류시화>,

인물기행으로는 <곽재구>의 글들이 우선 생각나고

현학적이면서도 편안한 일기 형식으로는 <괴테>의 글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행과 답사를 벗어나 조금 더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면

토마스 캐힐의 <오디세우스, 와인빛 바다로 떠나다>가 가장 기억에 남고

견문과 식견을 두루 갖춘 글쓰기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좋아한다.

 

<사진과 글을 따로 가기로 했다...^^ 서원만 빼고 순서대로 들어간다...법륭사의 입구... 남대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본>은 항상 <교본>일뿐

내가 흉내 내고 답습할 만한 처지와 수준이 못됨을 충분히 인정하고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은

그들이 내게 주는 자극이, 늘 풍요롭고 선택의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1-2. 무엇을 쓸까?


법륭사에 대한 두 번째 글을 시작하면서

엉뚱한 출발로 서성이고 있지만

이는, 여행의 정리에 대한 모호함이 부른 내 자신의 어설픔을

먼저 고지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1000일을 맞는 블로그 중, 여행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고...

 

 <남대문... 국보... 동대사2편에서 말한 일본식 처마의 특징들이 골고루 잘 나타나있다...>


나는 여전히 답사여행을 떠나면서 역사를 먼저 들춰내고 싶고

또 역사의 향기를 맡고 싶은 욕심이 크다.

전반적으로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놓친 감상들이

호불호와 단순 비교로 흐를 경우

정작 내게 중요한 인간적 깊이를 놓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유적답사가 그렇듯이 건축적 배치와 공간의 경영,

그리고 예술적 문화적 심미안이 여행의 충분조건을 보장하지만

그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은 내게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이유로 유적과 유물은 사람의 향기가 진해야 오래가고

역사가 살아 있어야 역동적이고

예술적 깊이가 있어야 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원의 중문과 오중탑이 보인다. 왼편 회랑으로 당문과 상토문, 객전과

서원원, 지장원등이 있고  보물급의 중요문화재들이 많다. 오른편은 실상원, 관음원, 보광원이 있다> 


그 형태가 비교에서 오든, 호불호에서 오든, 지무지에서 오든

바라보는 이의 폭만큼 역사가 묻어나고

보이지 않은 것들과 대화가 있는 만큼 깊이가 생기고

담을 수 있는 안목만큼 높이와 위상이 생길 것이다.




2-1. 법륭사 몽전에서 성덕태자를 만나다...


대보장전을 나와 동원으로 가는 길...

601년경 있었다는 이까루가궁에 세워진 몽전...

법륭사의 동원은 성덕태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살짝 건너뛰어 동대문을 지나 동원 가는길...  멀리 육각지붕의 몽전이 보인다...> 


나는 쇼토쿠 태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또 그가 일본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

몽전의 오래됨과 유서깊은 유물들...

그리고 건축공간의 허허로움을 채워야할 역사적 의의에 나는 답해야 한다.


법륭사에서 역사와 사람을 찾으라면 단연 성덕태자를 벗어날 수 없다.

적어도 내 생각에 일본의 뿌리는 성덕태자에 의해 기획되고

쇼토쿠 태자에 의해 토대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593년 스이코 천황(여제)의 섭정이 된 쇼토쿠 태자는

고분시대를 이끌던 야마토 정권의 호족중심체제를

중앙집권체제로 전환시키는 발판을 만들었고,

불교를 받아들여 선진문물과 일본의 정신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관료체제를 확립하고 헌법을 만들어 율령국가의 초석을 다지고

수나라(중국)와의 직접적 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사회에

적극적으로 일본을 부각시킨 인물이다.

 

<성덕태자상... 平安 헤이안 시대의 조각... 도록은 법륭사에서 발행한 법륭사편에서> 


쇼토쿠 태자가 607년 견수사를 통해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의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는 말은

일본정치 통합과 일본의 자주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메모> X-1. 일본(日本)이란 이름...


일본(日本)이란 국호도 사실 “해 뜨는 곳”에서 유래되었다.

또 그런 이유로 해를 따르는 민족이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민족과의 연관성을 많이 부여한 게 사실이다.

 

<성령원... 금당과 대보장전 사이에 위치...남쪽으로 경지가 있고 뒤편에는 동실이 있다... 국보...> 


고조선의 도읍이던 아사달(백악(白岳)도 같은 말)의 뜻이 <태양이 비치는 땅>이고

조선(朝鮮)이라는 나라의 이름도 <아침이 밝게 빛나는 땅>이라는 뜻임을 생각하면

일본민족이나 우리민족이나 모두 해를 정신적 중심으로 생각했고

이는 고구려까지 이어온 삼족오(해를 상징)에 대한 추앙(?)이나

더 멀리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쪽의 신목(神木, 신단수) 사상까지 이어진다.


결국 해를 쫓아 동으로 동으로 이동한 공간적 끄트머리가 일본이 되었고

그렇게 일본의 도래인이 된 민족(?) 혹은 사람들은 결국 국호까지도

일본이라 칭하며 해를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았다.

우리의 삼족오가 언제 까마귀로 바뀌고 호랑이로 바뀌었는지 몰라도

여전히 일본에서의 까마귀는 신조이며, 삼족오는 그들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해가 가장 아름답게 비추는 곳이고

일본은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해가 뜨는 동쪽은 여전히 우리정신의 지향점으로 남아있고

일본에게서 해가 지는 서쪽은 여전히 고대의 향수와 회귀의 지향점으로 남아있다.

 

<성령원(쇼로인)... 합각면의 단순한 처리와 목재의 색깔과 석고양생면의 간결함이...>


해와 삼족오...

상징이 주는 메타포는 때로는 구심점이 되고, 향수가 되기도 한다...

역사와 문화를 통한 인간들의 집단적 경험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DNA로 그렇게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2-2. 일본 고대사 정리...


말이 엉뚱하게 헛 나갔다...^^

동대사에서 시작한 일본의 6세기 중후반 이전의 일본 역사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쇼토쿠 태자 소개를 대신한다.


일본의 고대사는 크게 5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데(내 주관이다...^^) ;

 

<동원으로 들어가는 동대문... 국보... 남대문, 중문과 다르게 맛배지붕이다... 객사문과 비교하기는???>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신석기 조몬시대를 기점으로

BC 3세기 철기가 보급되고 벼농사가 시작된 야요이 시대를 1기로 보고

중국의 사서에 왜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57년부터

최초의 국가형태가 나타난 239년 히미코 여왕의 야마타이국을 거쳐

가야, 백제, 고구려인들이 일본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고분시대를 이끌던 야마토 정권 시기를 2기로 보고


백제, 신라와 가장 교류가 활발했던 아스카 시대와

다시 백제와 고구려 위주의 대외정책을 펼쳤던 하쿠호 시대를 3기

신라계의 후원으로 진신의 난을 거쳐 다이호 율령이 완성(701년)된 나라시대를 4기

그리고 마지막 백제계의 후원으로 교토로 천도하고

신라계 후지와라 성씨가 집권을 시작한 헤이안 시대를 5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떤 용도의 건물인지도 모르고 찍었던 것 같은데... 동원 가는길의 종원사 본당인듯...> 

 

 


불교가 생활화되고 일본의 동북부로 일본의 확장이 벌어지면서

원정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첫 쇼균으로 취임한 가마쿠라 막부시대로 시작하는

중세의 일본이 형성되기 전까지 일본의 고대사 후반기는

한반도와 밀접한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일본의 모든 근간이 형성되었다.


일본 역사의 고대사 중후반기에 해당하는 아스카, 하쿠호 시대에 일본은

국호와 천황이라는 직위와 명칭이 확보되었고,

최초의 연호인 대화(大和)가 선포되면서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로 화(和)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나라시대에는 율령체계가 정착되면서 국가의 틀을 완성하고

고사기,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이 간행되어 역사적 전통성을 확립하였고,

 

<동원의 중심 몽전(夢殿)... 쇼토쿠 태자의 꿈에...^^ 601년경에는 궁궐이 있던 자리다...> 


헤이안 시대에는 고쿠후(國風) 문화 혹은 후지와라 문화라 불리우던 귀족시대이자

글자가 제정되는 등 일본 고유의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한 시대이다.

한마디로 메이지 유신 시대를 제외하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천황이 일본역사 전면에 등장하는 3~400여년의 시대다.




3-1. 야요이 문화와 1차 도래인...


일본의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몇 가지만 짚어보면

벼농사가 시작되기 전후의 1기는

지금의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남방계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던 조몬인 시대가

한반도에서 넘어간 북방계의 도래인들이 철기를 앞세워

관서지방에 정착하며 야요이진(人)의 시대로 넘어가던 때다.


그리고 이때가 중국 한나라의 확장으로 고조선이 분화, 해체되면서

동이족이 고구려, 백제 등으로 재편되던 시점과 거의 일치하고

이 당시에 일본에 정착한 이들을 1기 도래인이라 칭할 수 있다.

 

<세형동검... 여기에서부터는 법륭사를 벗어나 고고학 자료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백제편 1999년간>


철기문화가 정착되고 생산력이 증대하면서 인구가 늘어났던 2기부터는

중국의 사서에 왜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별도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사실 씨족 중심의 부락들이 30여개에서 100여개로 나뉘어져 있어

국가의 형태를 띠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시기이며

또 그런 이유로 야마타이국의 정복과 세력확장은 크게 주목받는 것이며

내 개인적으로는 이 당시 일본의 중심은 큐우슈우 지방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형 동검... 동이족의 세형동검은 비파형 동검과 중국형 동검의 중간적 형태인가?>


참고로 고고학적으로 동방문화권(동이족)을 대표했던 청동기의 유물이던

세형동검이나, 풍탁이 발굴된 지역들은 일치하는데

발해만 일대와 요동지역, 한반도 전역,

그리고 일본의 큐슈, 시코쿠, 관서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메모> X-2. 왜(倭)라는 호칭...


한서나 후한서에 나타나는 왜(倭)는

유순하다, 빙 돌다는 의미보다는

키가 작다, 추하다, 외지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왜 일본인들은 왜인이라 불리었을까?

굳이 어원과 역사 추적을 인용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먼저 환(環)과 왜(倭)와 화(和)의 일본식 발음이 와로 구별되지 않는다.

 

<지락면이라 이름붙여진 두상... 누구의 얼굴인지...^^ 나라시대, 법륭사 소장...> 


야요이 시대의 촌락형태가 외부침입을 막기 위해 둥근 호(濠-해자)로 에워싸여

환호(環濠)집단으로 불리웠고, 이 소규모의 환호집단이 부족연맹체로 발전하면서

대환(大環 - 일본식으로 읽으면 다이와 - 大和도 다이와로 읽히다) 구조로 바뀌고

고대국가의 형태를 띠면서 나라지역의 도읍지인 야마토가

일본(日本)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음을 소개한다.


日本도 일본인들은 니혼과 닛뽄으로 읽고, 야마토라 읽히기도 했으며,

중국식 발음인 지펀(日本)이 서양인들에 의해 Japen으로 불리는 것까지 생각하면

倭가 와(環, 和)의 와전 혹은 중국식 표현으로 추정하는 게

그리 근거 없는 소리만은 아닌 것  같다....

 

<부여 관북리 토기파편의 탁본... 백제인의 얼굴중 하나... 지락면과 비교???> 


게다가 왜의 작다라는 부정적 이미지는

서해안 일대(한반도와 중국의 동남부)의 왜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조선시대까지 한중일 삼국중 일인이 가장 작았고,

평균신장으로는 조선인이 가장 컸다...




3-2. 잃어버린 200년과 동북아시아...


1차 도래인들에 의해 재편되기 시작한 일본은 3세기 이후 극심한 몸살을 앓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흔히 잃어버린 200년 혹은 300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 한나라가 몰락 한 이후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중국 남동부와 한반도로 진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조금 멀게는 부여계(씨)가 백제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중국과 고구려쪽의 서북진과 연결되는데

비류왕의 둘째아들 근초고왕 대를 시작으로 촉발된 고구려와의 전면전,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호태왕)과 장수왕의 확장과 남진,

그후 백제를 중심으로 가야, 일본과의 동맹이 가장 확고했던

웅진시대의 동성왕, 무령왕과 성왕의 시기이다.


이때는 7세기 중반의 당/신라 - 고구려/백제/일본의 국제전 이전,

동북아시아가 가장 다이나맥 했던 200여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근초고왕 당시 백제의 대외진출(346~375년) 일본자료에는 초고왕, 속고왕, 조고왕으로 기록...>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멸망이후 5호 16국으로 분열되고

위, 진, 남북조로 이어지던 혼란과 혼돈(한족중심에서 보면)의 시대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한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시대 이후,

두 번째로 맞는 내연과 외연의 확대시기이기도 하다.


위-촉-오, 삼국지연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시기까지도

중국에서는 한족 중심의 촉에 정통성을 두었고

선비족과 동이족의 분파였던 연이나 제, 위나라의 주체들에게 배타성을 보이며

중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규슈 - 시코쿠 - 근거(관서) 지방으로 주무대가 옮겨진 시기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전방후원형식의 대규모 고분군들이 나타났고

씨족중심의 지방호족들이 득세하면서

나라지역에서는 야마토 국이 정치적 중심으로 떠올랐다.




메모> X-3. 백제 한성시대, 왜국의 위치...

 

이런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집단이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동방 문화권의 분파인 고구려와 백제다.

특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보면 백제의 진출이 두드러지는데

산둥반도에서부터 양자강하류에 이어지는 중국으로의 진출과

가야의 속국화를 통한 신라의 압박, 그리고 일본으로의 진출이 그것이다.

 

<영산강일대 고분군... 옹관묘(3세기 후반), 전방후원묘, 횡혈식석실분(5세기 후반)이 혼재...>

 

백제의 활동영역 확장은 한반도 남부와 고대 일본의 정치적 지형을 완전히 바꾼다.

백제의 남하는 원삼국인 마한, 변한, 진한 뿐만이 아니라

후대의 가야와 영산강 일대에 존재했던 별개의 집단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만경강, 동진강 일대의 마한이나, 낙동강 일대의 변한과 달리

영산강 일대에는 별도의 고분형태, 부속 장식물, 금관장식, 곡옥 등을 갖춘

정치적 집단이 있었고, 이들은 부여계의 백제와 다른 씨족이었고,

그런 이유로 이들을 한반도내에 존재했던 왜인, <왜국>들이라 보는 입장이 있다.

진나라의 삼국지(200~265년) 위서 한전(韓傳)에서 왜는

마한, 변진(변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기록도 있음을 참고할 만하다.

 

<일본 강전선산(江田船山)고분 출토 관모... 동경박물관>

 


개인적 의견을 조금 비약시키면 3~4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

왜로 통칭할 수 있는 세력은 영산강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인데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는 전방후원묘는 일본의 관서지방 서쪽과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견되거나 발굴되었고

원형은 전라도 지역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익산 입점리 출토 관모... 전주박물관... 백제는 관모보다 관식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백제-왜 연합군의 가야지원과 가야의 동맹이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으로 와해, 분열되면서

4~6세기에 전라도 일대의 세력과 가야세력은 상당수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 고대사의 잃어버린 200년 혹은 300년은 이들의 등장과 긴밀하다고 본다.

 

<익산 입점리 출토 금동신발... 전주박물관>


(* 여기서 굳이 한반도 내의 왜국을 거론하는 이유는 고고학적 성과에 기초한다.

많은 유물들이 있지만 특히 전방후원묘가 논쟁의 중심에 있다.

전방후원묘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은 일본의 양식과 다르다는 소극적 입장을

일본학자들은 공격적으로 한반도 경영을 주장하기도 했으나(규모와 발전형태)

최근에는 백제와 왜에서 동시에 관직을 받았던 백제관인이라는 입장이 많다.

 

 <일본 강전선산고분 출토 금동신발... 동경박물관... 가장 화려한 금동신발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것> 


아무튼 중국의 삼국지나 한국의 삼국사기에서 왜에 대한 기록은

중국에서는 3세기후반, 백제에서는 428년(비류왕), 신라에서는 497년부터

고구려-백제-신라의 전쟁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7세기까지 사라진다.)




메모> X-4. 야마토 정권과 도래인...


야요이인들을 1차 도래인이라고 한다면

백제의 멸망이후의 660년을 전후한 시기의 도래인을 2차로 규정한다.

그러나 사실 일본의 기본은 야마토 정권 시기에 만들어지는데

나는 그들과 관련이 깊은 이들을 임의로 1.5차 도래인이라 규정하며

야마토 정권과 관련된 도래인들의 면면을 잠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의 전라도 세력에 이어 일본에 등장한 가야지역 출신의 영향이 큰데

가야는 농업생산성 및 군사력과 직결된 철기문물의 선도세력으로

낙동강 일대는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여러 가지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봉황문환두대도... 나주 신촌리 9호분... 중앙박물관... 중국이 용이라면 동이족은 봉황과...>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이 이시기의 기록이고,

또 하나는 가야지역의 옹관묘와 이형토기가 큐슈에서 동일한 형태로 발굴된 점,

그리고 오늘날 당(唐)나라 풍으로 불리우는 <가라>는

가야인 혹은 한반도인을 지칭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봉화문환두대도... 경남 거창 출토... 동경박물관> 


많은 접두사로 쓰이는 가라는 중국의 당나라보다는 한반도를 지칭한다.

韓國을 간코쿠로 읽기도 하지만, 가라노쿠니(韓の國)로 해석하고

신사 입구에 있는 고마이누(高麗犬)을

가라이누(唐犬)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봉황문환두대도...무령왕릉,공주박물관...나주, 거창과 비교하면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모양...> 

 

 

오늘날 남아있는 성들의 중심건축물인 천수각의 용마루 치미는 물고기 꼬리다.

혹자는 여기에서도 가야인(가라비토(唐人))들의 흔적을 찾는데

바로 가야국 김수로왕의 비였던 허황옥이 아유타국의 공주였고

아유타국의 전통이 신령한 물고기를 선행의 화신으로 섬겨

집집마다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는 쌍어장식을 달았다는데서 출발한다.

 

아유타국은 북인도 일대에 뿌리를 둔 드라비다족의 한 갈래였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북부에 집단으로 거주하는 타밀족이 그 후손이다.

그리고 타밀어를 비롯한 드라비다어의 방언에 가얄, 가예, 가라이, 가라 등은

대체로 물고기 일반, 잉어, 바닷고기를 뜻한다고 한다.

 

 

<오사카성 천수각... 치미를 부각시켜 찍지는 못했고... 아무튼 물고기 꼬리다...> 


결국 <가라>의 한자 소리는 가야를 지칭하고

한반도에서 온 것을 가리키던 <가라>가

외래의 문물 전체를 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고

당과의 직접적 교류이후 자연스럽게 당(唐)을 <가라>라고 표기했다는 설이다.

 

결국 백제의 문물은 <구다라...> 고구려의 문물은 <고마...>

가야의 문물은 <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보면 너무 비약일까?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가야에서 사라진 건축문화는

1500여년을 넘어 오늘날 일본에 물고기 꼬리를 상징으로 아직도 살아있다?




메모> X-5. 부안 동막동 제사유적...


그러면 이들 도일세력과 가야, 그리고 백제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이점은 말해주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므로 혼자 상상해 본다...


고대국사 형성 이전의 고고학적 판단 근거는 무덤과 취락구조, 그리고 토기다.

국가적 형태를 띠면서부터는 무덤의 부장품과 무기,

그리고 방어체계로서의 성곽의 출현이 문명의 지표다.

기록문화 이전의 문명의 지표는 이집트에서도 중국에서도 한반도에서도

고고학의 유물을 통해 추론이 되고 판단이 되고 잣대가 된다.

 

<나주 신촌리 9호 을분 출토 금동관... 백제가 영산강 유역까지 진출하기 이전 3세기후반에서 4세기초기의 대형옹관고분에서 발견되었다... 백제 진출이후 횡혈실석실분으로 고분형태는 바뀌고, 그 중간에

전방후원묘 시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475년 웅진도읍기의 익산 입점리 금동관보다 화려하다...> 


그리고 이때의 지배계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사장들이다.

그들을 통한 자연현상과의 교감과 이데올로기는 사회통합의 상징이자 장치다.

드라마 <주몽>과 <서동요>에서도, 그리고 <모세>와 <미이라>에서도

제사와 제의는 문화적 축제임과 동시에, 지배계급의 전통성을 과시하고

스스로의 지배권과 권위를 영속시키는 메카니즘이며 전유물이었다.

불교 등의 종교적 구심점이 해당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


이제까지 지배층들이 어떻게 불리웠고, 어떻게 역할을 해왔는가는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들이 소장했던, 혹은 그들과 같이 묻혔던 부장품들은

문명의 수준이 되었고, 교류의 증거가 되었고, 영향력의 범위가 되었다.

그러나 부족한 것 중 하나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제사,

혹은 제의의 장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백제에서도 그러한 대규모의 국가적 제사가 거행되었고

그 흔적들은 부여의 논티산성, 공주 송산리, 부여 능산리 고분군 등에 남아있다.

특히 주목할 만 한 곳이 부안의 죽막동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5~6세기 대가야의 무기와 마구류(기마병의 흔적)들이

합천에서 생산된 것으로 확인된 대형토기(옹)에 매납되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석제모조품들은 일본의 오끼노시마 제사유적 등

5세기후반, 6세기 일본 고분시대에 보편적으로 출토되는 제사유적들이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한마디로 부안의 죽막동은 대중국과의 교류시 안전항해를 기원함과 동시에

백제와 대가야, 그리고 일본이 제의를 지낸

국제적인 제장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부안 죽막동의 위치...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대중 항로는 산둥바도이고, 가야지역은 일본과 가깝다>

 


침소봉대의 의도는 아니나

당시 백제의 많은 문물들이 신라와 가야, 그리고 일본지역에서 발굴되었고

(백제에서 발굴된 신라와 가야, 일본의 유물들 보다 절대적으로 많다)

유독 부안의 죽막동에서 대가야와 일본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이곳이 삼국이 주요행사를 위해 같이 이용했거나

백제가 주도한 제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며

5세기말, 6세기 삼국의 관계를 상상하는데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3. 잃어버린 200년과 도래인...


아무튼 4~5세기 백제의 웅진천도와 사비천도로 인한 백제의 남하와

백제세력의 약화로 인한 가야의 쇠퇴기는 야마토 정권 수립기와 겹친다.


이 시기를 두고 학계에서 부각되는 두가지 쟁점은 임나일본부설과

기마민족 정복설이 있는데 이 역시 가야와 영산강 세력을 벗어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의 위치와 기마군단이라는 군사적 특징은 내 의견이기도 하지만

야마토 정권과 도래인들의 관계를 나처럼 추론하는 글들도 많다.

 

<김제 금동제판불... 김제에서는 많은 금동제판불이 발굴되었다... 전주박물관

6세기부터 시작되는 백제의 불상은 신라나 중국과 비교하면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독립된 반가사유상, 보주를 든 관음보살상, 특이한 형태의 삼존불 형식,

그리고 7세기부터 나타난 늘씬한 신체와 율동적인 자세 등이 그 특징이다... > 


거꾸로 일본에서는 20세기초반과 1970년대 이후 산발적으로

영산강, 낙동강일대, 그리고 규슈에서 근기지방에 이르는 고고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고대일본의 잃어버린 200년에 한반도 남부 경영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비슷한 유물들이 동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고학의 성과란 칼자루가 되기도 하고 칼날이 되기도 한다.

이자나기(65~70년) 호황시기 대대적이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던

규슈에서 근기지방에 이르는 발굴작업들은 대부분 황급히 폐쇄되거나

발굴의 성과들이 비밀에 붙여지고 일본의 필요에 의해서만 공개되고 있다.


한반도보다 빠른 구석기 유물은 조작으로 밝혀지는 등 많은 부작용이 드러났다.

결국 고고학의 성과나 역사적 유물, 기록, 실체는

어떤 의도로 어떻게 포장되고, 누구의 무기가 되는가가 다를 뿐이다.

역사적 흐름과 인문적 깊이가 부재한 편협함은 기능을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20세기 중후반 일본은 스스로의 성과를 부정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다.

 

<동경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일광삼존상...> 


이 시기에 대한 결론은 “ 새로운 거점을 찾아 기마군단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일본의 소국을 복속시키거나 정치적 타협을 통해 연맹체에 편입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규슈에서 긴키지방에 걸친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 ”

<맨눈으로 보는 일본/황영식/모티브/41p>의 표현(?!)에 나는 대체로 동감하지만,

그 주체는 <영산강 일대의 세력>과 <가야인>이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