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여행...

일본답사> 동대사 2 - 한중일 건축비교와 건축답사...

 

나라 동대사 2



공간경영에서 느끼는 자연과의 교류와 조화,

상징물의 건축에서 느끼는 인간적 스케일과 체계성,

그리고 예술적 심미안에서 느끼는 시간에 대한 해석적 깊이와 안목...

내가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1. 나에게 건축답사의 의미는?...

2. 한중일 건축의 비교...

3. 대불전과 미륵전...

4. 노사나불...

5. 동대사와 문화재 관리...

6. 동대사의 기타 유적들...




1. 건축답사...


먼저 동대사는 나라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나라>라는 지명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원래 일본어에는 없던, 혹은 우리의 나라라는 말의 음역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나라라는 이름을 갖기 전, 원래의 지명은 헤이죠꼬(平城京)인데

헤이죠꼬의 한문을 거꾸로 읽으면 경성... 결국 서울이라는 뜻이다.


이제 동대사의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건축에 관심이 많다.

내 직업이기도 하지만 나의 해외여행 대부분은 건축과 유물들의 기행이다.

물론 축제나, 영화, 책 등을 통해 그들의 문화나 생각과도 간접교류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사상을 통해서도 그들을 읽지만

건축유적과 박물관 기행, 답사는 내게 늘 자극과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바티칸... 빌려옴... 유럽은 로마라는 뿌리를 강조한다... 누가 적자인지를 두고 다투기도 했고...> 

 

유럽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의 건축들을 비교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건축적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공간경영에서 느끼는 자연과의 교류와 조화,

상징물의 건축에서 느끼는 인간적 스케일과 체계성,

그리고 예술적 심미안에서 느끼는 시간에 대한 해석적 깊이와 안목...

내가 답사여행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해인사...건축이 공간과 어우러지는 과정은 면적에 있지만은 않다... 시선과 흐름, 스케일을 담보한다> 

 

 

보는 것만으로 나의 부족한 또는 배우고자 하는 것들을 채울 수는 없으나

자극과 경험은 또 다른 호기심과 갈증으로 나를 유도할 것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넓고, 깊고, 길게 나의 안목을 키워줄 것이다.

아직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로서는 그들의 일상과 생활을 공감하지 못하지만

시간과 필요가 나를 충전시키리라 믿는다...^^

 

<해인사와 불국사의 비교... 공간의 분할은 이미지가 되고 감성이 된다... 정연한 혹은 생동감있는...>

 

 

개개인에게 필요한 기능을 사회적으로 해석하고

과거의 전통을 기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미래의 꿈과 상징을 예술적으로 현실화 시키는 것...

그것이 건축이다.

 

<노틀담 성당 93... 건축은 상징과 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야기와 조각을 담는 공간이기도 하다...>

 

 

조각으로 장식하고, 그림을 입체화 시키고, 음악을 담는 공간...

그래서 건축은 문명이 되고, 시간 속에 축적된 문명은 문화가 된다.

그 문화가 있어 경제생활이 체계화 되고

우리는 정치와 사상의 꽃을 피웠다...

나에게 건축답사는 그런 의미다...

 


2. 한중일 고건축(목조건축물)의 비교...


그런 의미에서 동대사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지붕과 구조를 통해

삼국의 건축문화를 비교하는 기본적인 잣대를 정리해 보고

동대사에서의 짧은 생각이나마 첨언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남대문(난따이몬 南大門) - 국보다.

8세기 창건시 세워졌으나 바람에 쓰러지고(아마도 태풍이었겠지...?)

1180년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1203년 복구시킨 것으로

팔작지붕에 25.5m의 높이로 일본 최대의 산문이다.

중국 송나라의 양식을 도입해 재건하였다고 한다.

 

 

 

낯익은 팔작지붕의 중층구조이며, 누각과 마찬가지의 개방된 구조다.

조금 무겁지?

한중일 세나라의 전통목조 구조는 지붕의 처마선과

지붕의 구조를 떠받치는 공포(포작),

그리고 포작과 지붕을 연결하는 구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창덕궁 인정전... 법륭사의 금당과 비교를 하면 조선시대와 아스카 시대의 비교가 되나?>

 

내가 이해하는 범위에서 간단하게 말해본다면

일본의 처마선은 매우 직선적으로 땅을 향해 꼿꼿이 내려서 있고

중국은 무척 과장된 곡선으로 하늘로 치켜 올려져 있고

우리나라의 처마선은 흔히 공글림이라고 표현하듯이

부드럽고 완만하게 만들어졌다.

 

<무량수전... 같은 팔작지붕이면서도 주심포와 하앙구조는 이렇게 다르다... 법륭사 금당과 비교...>

 

 

또한 일본의 처마선은 내림마루(합각마루)가 강조되고,

추녀마루가 짧거나 없으며, 추녀마루 끝부분이 우동과 추아동의 이중 장식이고

중국의 처마선은 내림마루보다 추녀마루가 강조되어 있고

추녀마루 위쪽에는 각종 잡상들로 꾸며지거나 화려한 장식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비슷한 비례를 가지고 있다.

 

<부여의 삼충사97... 추녀마루가 3단으로 분할되어 있다... 일본의 추녀마루와 비교해보면 ?...>

 

그리고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구조에서 면분할이 다른데

일본은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공포가 매우 높아

포벽을 이중 삼중의 뜬장혀(별장혀)로 보강하거나

첨자간을 연결시키는 출목도리가 아예 외부에 돌출되어 포작을 연결시키고 있다.

 

 

 

<중국의 예원06... 공포의 구조보다는 지붕의 처마선으로 건축을 장식했다...>

 

중국은 기둥과 지붕을 연결하는 공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고

처마는 매우 깊다. 장식의 요소가 공포에 있지 않고 지붕에 있다...

우리나라는 공포가 적절한 비례로 조성되어

처마가 내외부 공간의 매개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의 고건축이 출목첨자가 강조되었다면, 일본은 주심첨자가 강조되었다...


<광화문... 내림마루의 양생면에 잡상들... 그러나 처마의 선과 포작의 구조는 여전히 한국적이다...>

 

물론 이런 비교들은 의도적으로 정형화시킨 개인의견이고

우리나라의 전통 민가 가옥(종가집)들 공포구조가 간략하여 중국처럼 낮게 보이고

또한 궁궐건축에서는 중국에서처럼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의 양생면에 각종 잡상들이 조성돼 있고,

최근 일주문들은 다포작의 과장으로 일본처럼 기둥과 처마에 넓은 면이 생겨

상호 혼재된 측면들도 많이 있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건축의 멋과 맛을 전혀 다르게 인식시킨다.

 

<건축의 스케일은 중요하다... 실용적 기능과 상징적 의미는 사용하고 보는 이의 크기에 의해 좌우된다>

 

한가지 더, 일본의 지붕구조에서는 내림마루와 너새의 사이가 넓고

용마루를 형성하는 도둠(적새)과 지붕면 사이의 착고와 부고가 생략된 경우도 많다.

또한 습하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과 중국남부,

그리고 백제에서는 하앙식 구조가 발달하여

지붕의 처마를 최대한 넓고 길게 빼내었다.

 

 

<지붕의 구조...>

 

 


아무튼 남대문에서는 이러한 일본건축의 특징들이 보여 진다.

특히 공포구조를 연결하는 노출된 구조는 참 특이하게 보였고

그 신선함이 웅장한 크기보다 먼저 눈에 들어 왔다.

 

 

내부에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20명의 불사가 고박 69일 동안 만든 것으로 높이는 8M이다.

언젠가 경주여행 답사기를 쓰면서 A,U,M의 입모양을 말한 적이 있다.

이곳에는 두기의 아형과 흠형이 있는데

이렇게 크면서도 절제되고 강건하고 역동적인 역사상은 본 적이 없다.

 

 

<철조망에 갖힌... 우람함과 생동감이...>

 

 

경주박물관에 있는 불두나, 만복사지인가(?)의 불두에서 느끼던 힘...

비록 철조망(모기장, 새장이라 해야 하나?)에 묻혀 있지만 그 생동감은 대단하다...



3. 대불전과 미륵전...


일본 고유의 풍으로 자리 잡은 당파풍의 곡선이 눈에 띈다...

나는 왜 저것을 보면 쇼군들의 투구가 생각날까?

(물론 전국시대-막부시대 중간(?)- 히데요시의 투구에서는 이런 느낌이 약하다)

참으로 독특하면서도 강렬하고

참신하면서도 독특한...

 

 

물론 이러한 구조도 일본 고대의 양식은 아니다.

그 깊은 연유는 알지 못하나,

중국의 형식을 송, 명대 이후부터의 건축에 적용하여

일본 고유의 것으로 정착 시켰다.

일본에 산재한 많은 성들의 천수각에도 이러한 당파풍이 보이는데

실제 몇 개의 성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세기에 재건되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고

내 기억으로는 통일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후반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의 스케일과 시선, 그리고 내부공간의 한국적 크기... 이런점에서 동대사는 허전하다...>

 


그리고 대불전의 당파풍 처마 밑에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이 창문으로 비로자나불의 얼굴이 빛을 받거나, 밖에서 보인다.

물론 이 창문을 보면서 내게 들었던 생각은 석굴암의 광창...

저 문이 열려 보았던 비로자나불의 상호는 어디를 향했을까?

 

<당파풍의 처마밑에 광창이 있다... 주심도리가 강조되어 있고, 포벽이 높다...>

 


대불전의 포벽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구조와 기능, 그리고 비례미...

주심포 계열의 단순함과 노출된 부재들의 건강함...

우진각 지붕 구조에 장중함과 근엄함을 갖춘...

우리네의 궁궐건축에서 보이는 권위와

중층구조와 규모에서 보이는 장중함...

그리고 굵고 크면서도 적절히 안배된 단순함과 절제된 안정감...


멀리서 보면 크기에 걸맞지 않게 장난감 같은 경쾌함을 가지면서도

의도되고 과장되지 않은 직선적 배치가 거슬리지 않는 긴장미로 나타나고

검은색의 기둥과 포벽의 하얀색깔이 일본식의 담백함을 보여준다면

내림처마의 이중구조가 주는 변형과 적절한 조화는 맛깔스러운 눈 맛을 살려준다.

 

 

 


대불전을 보면서 금산사의 미륵전을 많이 생각했다.

대불전이 규모에서는 미륵전의 몇 배 크기로 직접 비교가 쉽지는 않으나

각각 굵은 선과 강건함, 그리고 웅장한 맛에서는 충분한 비교꺼리가 되었다.

 

<금산사 미륵전...>

 

미륵전의 삼층지붕과 대불전의 이층지붕은 하단 지붕에 비해 충분한 높이와 무게로

투구를 눌러쓴 장수처럼 권위와 장중함을 표현한 점은 비슷하고

대불전의 이층과 미륵전의 삼층 전각은 낮고 짧아 두툼한 목에 긴장감을 가지면서

아래층의 처마의 넓이만큼 어깨선을 강조하여 남성적으로 보인 점도 비슷하다.

 

<광창안의 얼굴이 보이는지...>

 

단지 중층처마의 체감률은 금산사 미륵전이 훨씬 높아

대불전은 웅장하면서도 넓은 포용력을 보이지만

미륵전은 굳건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게 보인다.

특히 대불전은 중층지붕 사이에 당파풍의 처마와 치미의 곡선이 포인트라면

미륵전의 포인트는 3층에 걸린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보여주는 독특한 분위기다.

 

 

 

그런 만큼 미륵전은 작으면서도 긴장감과 웅혼함이 강조되었고

대불전은 크면서도 경쾌함과 넉넉함을 동시에 갖추었다.

출목도리가 강조된 화려한 외양의 미륵전은 긴장감이 넘치고

주심도리가 강조된 단순한 구조의 대불전은 경쾌하고...

비교할수록 재미있는 구조들이다...

 

 

 


4. 노사나불...


이제 대불전에 안치된 노사나불...

대불은 높이 15M 얼굴크기 5M, 무게 380톤의 규모이다.

전국의 동 500톤을 모아 여덟 번의 주조와 26년 동안 만든 역작이며

불상전체에 58kg의 금을 5배의 수은과 섞어 바르고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도금을 입혔고

쇼무천황이 56세에 동대사 건립후 4년만에 죽은 이유로

이때의 수은가스에 중독됐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동대사 요록에는 대불을 만들기 위해

순동 73만 9560근 (495.5톤)

백랍 1만 2618근(8.4톤)

연금 1만 446량(111.9톤)

(1근 = 670g, 1량 = 16근으로 계산함...)

수은 5만 6620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대사 건립에는

탄 1만 8156석

목재기증 5만 1590명

금기증 37만 2075명

목재부역 연 166만 5071명

금부역 연 51만 4902명이 동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상의 이미지는 굵은 선을 가지면서도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이다.

평범하다 할까?

처음 석굴암에 대한 답사기를 쓰면서 생각했던 얼굴...

동대사의 노사나불을 보면서 한참을 생각해봐도 비슷한 얼굴을 찾기 힘들었다...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얼굴이 없다는 게 신기하네...

생각해보니 언제부턴가 주불들의 사진을 포기한 때문은 아닌지...

 

<삼각대 없는 실내사진은 여전히...ㅠㅠ>

 

어느 절에 가도 습관처럼 버릇처럼 불상의 얼굴을 뜯어져라 본다...

불가시적인 부처의 권능과 신성을 표현해낸 얼굴...

문제는 그 얼굴에서 나는 시대를 읽으려 하고

사람들의 염원을 읽으려 한다는 점이다.

 

 

<잠시 석굴암의 본존불을 생각해 본다...>

 

 

불상의 의의와 가치가 조형성이나 예술성, 혹은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존재함을 모르는 바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 라고

수 없이 많은 지도와 질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누가, 어떻게 만들었느냐를 생각한다.

그 정답 없는 물음이 있어 여전히 뜯어보는 나는

한심하거나 미숙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서산 마애불의 미소도... 우리 딸의 입술과 똑같다...ㅎㅎㅎ>

 

 

오늘도 바라보는 노사나불...

감흥이 없다...

너무 커서 나와 친숙하지 못하고

너무 커서 나와 교류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는 너무나 평범하다...

권위와 규모는 때때로 친근함과 포용력의 반대측에 존재하는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인...

노사나불의 수인과 가장 비슷한 것은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상에서 볼 수 있고

노사나불처럼 오른손이 시무외인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불상은

서산 마애불과 월악산 미륵불상, 개태사 삼존불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모두다 삼존불이고, 입상에 부조로 전법륜인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도)...

의외로 없다는 생각...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상... 좌우 협시불을 두고 있는 모습도 비슷하다... 높이가 12m>

 

 

너무나 평범해서 비교되는 게 없다... ... ...

그리고 너무 커서 비교되는 게 없다...



옆에는 1년 동안 액운을 막아준다는 구멍이 있는데

기둥이 거꾸로 세워지면서 생긴 도리의 받침이 구멍이 된 것이다.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한다.

어린아이와 아가씨들, 그리고 나 같이 작은 사람...

슈퍼맨 포즈를 취하면 불쌍히 여기는 동료들이 앞뒤에서 빼준다...^^



5. 동대사 답사와 문화재의 관리...

 

사실 동대사는 하루에 돌 수 있는 절이 아니다.

물론 그 넓이와 다양한 전각들의 구성이 있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10월 며칠, 12월 며칠, 3~4월...

각 전각들마다 유지하고 있는 보물(국보급)들이 공개되는 날이 각기 다른 이유다...

동대사의 참 맛은 그 날들을 모두 채웠을 때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동대사를 소개하고 정리하면서 스스로 어설프다고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두번의 답사로 사진을 올리기에는 너무 빈약해서...^^

 

 

게다가 정창원의 보물이 1만여점이 넘는데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 와도 국보가 될 유물들은 수백, 수천점은 되리라 생각된다.

그 유물들은 일년에 한번씩, 게다가 몇 점씩만 공개되니

한두번이나, 일년 정도의 기간이 아니라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두고 뭐라 말할 자격이 우리들에게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유물들을 1천 3백여년간 보존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보존할 수 있는 체계와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보존하는 거...

만드는 능력보다 관리하고자 하는 의지가 오히려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어쩌면 직접 만들지 못하는 그들의 능력이

관리와 보존에 대한 집요한 의지를 키웠는지도...)

 

<반가사유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중 하나다... 빌려옴...>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을 보기 위해

고등학생때부터 30분을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수학여행가서 땀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런 노력으로 보존되어 왔고, 그만큼 존중과 애착을 가지고 관리되어 왔다.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여유와 공감대...

그들이 세계 최고(最高, 最古)의 유물들을 가진 이유는

운 좋게 미군의 폭격을 피해서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

동대사에서 받았던 또 다른 자극 중 하나였다...


이런 연유로 나의 소개는 남대문과 대불전, 그리고 노사나불에 한정한다.

나머지의 유적과 유물들은 동대사에서 간행된 사진들과 간략한 소개로 대신한다.



6. 동대사의 기타 전각들...


종루는 나라따로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높이 3.9m, 무게 26톤의 범종이 걸려있는데

개안식 때 울린 종이라고 한다.

(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 무게도 26톤 아닌가?)

 

<종루... 국보... 처마의 흐름이 매우 활기차다...>

 

 

산가쓰도는 토다이지 창건 이전에 세워진 콘쇼지(금종사 金鍾寺)의 자취이며

건물은 카마꾸라 막부시대에 재건되었다.

음력 3월에 훗께까이 법화회(法華會)가 열려 훗께도 법화당이라고 불린다.

 

 

<법화당 내부의 집금강신상... 국보...>

  


니가쓰도에서는 3월에 오미즈또리 마쯔리가 열리는데

다이브쯔덴과 마찬가지로 752년에 건립되었고

1667년 화재로 소실되어 2년 뒤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본존으로 십일면관음이 모시고 있지만 비불로 지정되어 공개를 안 한다.

 

 

<범종... 일본종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정창원(쇼소인 正倉院)은 1만 2천여점의 보물을 보관하던 창고

코오묘황후가 봉납한 쇼무천황의 유애품과

중창에는 토오다이사의 대불개안회 때 사용한 여러 기구들과 무기류, 문서

남창에는 법회 때 사용하는 용구, 기악면, 악장속, 악기가 보관되어 있다.

 

<법화당 내부의 길상천상... 국보... 눈매와 이미지가...>

 


불교용품,악기, 복식, 회황, 문서 등을 비롯하여

한반도와 중국, 그리스,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인도의 것부터

관공방, 쿠다라노떼히또베(백제수부 百濟手部)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다.

 

<법화당 내부의 본존천개...>

 


759년 만들어져 있고 일본의 고대 건축양식인 아제꾸라(校倉)식이며 - 부여박물관

높이 13m, 동서 9m, 남북 33m의 크기다

고대의 주 창고를 쇼오소오(正倉)이라 하고

그 구역을 쇼오소오잉(정창원 正倉院)이라고 한다

 

 

<계단원 내부의 지국천... 투구를 쓰고 있는 눈초리가...>

 

 

토오다이사 대불전의 동쪽 회랑에서 니가쯔도오로 통하는 오솔길의 좌측에

카라꾸니산사(한국신사)

물론 아무리 지금의 지도를 찾아 봐도 표기가 없다...

이길로 올라가면 삼월당(산가쓰도) 앞으로 관음원이 나오고

이월당(니가쓰도) 뒤에 있는 산이 관음산이라 불린다...

화려한 수사와 복잡한 체계를 갖춘 화엄종은 역시 관음사상을 필요 했을 것이다...

 

<대불전 앞의 팔각등룡에 부조된 음성보살상... 비천상과 비교해 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