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륭사 1 - 백제관음
흠~~~
동대사 이후 한참이 되어도 법륭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부담스럽거나 충분한 준비가 없기 때문일거라 생각된다.
사실 이런 글들이
유적지를 소개하는 글도 아니고
게다가 일본에 대한 정리도 아니고
단순한 자료의 모음도 아니다 보니(모두 다일수도 있지만...)
초점과 대상을 잡기 어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예서 멈추면 아주 포기할지도 모르다...
1. 법륭사
일본의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 지정) 1호(?) 호류지...
2,300여점의 보물과 아스까 시대부터 내려온 19동의 건물...
190종의 중요문화재가 있으며, 일본의 국보만 40여점이 있는 곳이다...
대략 601년부터 시작하여 607년 완성이 되고
670년 소실이 되었다가 739년경에 재차 완공되어
오늘날 일본의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유서 깊은 절이다.
법륭사는 아스까 시대의 가람이 그대로 유지 되고 있는 서원과
601년경 조성된 이까루가궁이 있었다고 알려진 동원,
그리고 그 사이에 성덕회관과 종원사가 있는 구역으로 나뉘어 진다.
국보인 남대문을 지나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보물급의 담장을 지나
국보인 중문과 금당, 오중탑, 대강당, 종루, 경루, 회랑을 중심으로
동서로 서실과 동실, 서엔당, 식당과 대보장전으로 서원이 이루어져있고
동원은 몽전을 중심으로 태자전과 중궁사가 배치되어 있다.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일본의 국보이고 보물들이다.
<서원으로 들어서는 길... 남대문과 오중탑이 보인다...>
2. 국보와 보물
내가 국보와 보물 지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가장 편리하고 보편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비교의 계량화를 경계한다.
오래된 것, 가장 큰 것, 혹은 높은 것,
국보인가 보물로 지정되었는가 여부는
사실 유물과 유적을 바라보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연의 설명들이 중요성을 부각하고
시대의 특징과 형식들이 내재한 격과 품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공정히 존중된다면
충분히 일리 있는 접근임도 부정하지 않는다...
<서원의 전경... 오중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이 보이고 왼편으로 중문, 뒤쪽이 대강당...>
단지, 지명도와 경중의 판단근거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의 확인이 아니라
문화적 심미안과 현재적 의의,
그리고 사상적 체계를 현실에 구현하는 창조적 활동이 보장하는
풍요로운 정신사와 보편적 안목의 형성은
온전히 개개인의 몫임은 분명하다.
3. 법륭사가 소중한 이유...
법륭사가 유명하고 소중한 이유는 많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서원의 금당과 오중탑이 그것이다.
601년부터 늦어도 739년 몽전이 재건되기까지 그 어떤 건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을 법륭사는 소유하고 있다.
<금당과 오중탑... 아무래도 내가 건축쪽에 있기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이유는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예술성이 높은 유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동양의 삼미(三美)로 꼽는 것이 <중국의 운강석불>과 <한국의 석굴암>,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곳에 있다.
그것은 <담징의 사불(석가, 아미타, 미륵, 역사)정토도>가 되기도 하고,
백제관음이 되기도 하며,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이 되기도 한다.
이 보물(!)들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동양을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금당벽면, 담징이 그린 사불정토도중, 아미타정토도...>
세 번째 이유는 일본이 일본답게 된 역사적 출발점이 법륭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몽전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성덕태자>의 흔적들이다.
중앙집권을 추진하면서 소위 천황의 권위를 일본의 역사에 세우며
오늘날 일본의 정신이 된 근간을 만든 헌법 17조는 쇼토쿠 태자의 유산이다.
그는 아스카 문화의 정점에 있으며, 일본문화의 서막을 올린 인물이다.
<백제 위덕왕 시대, 아좌태자가 그린 성덕태자상... 1950년에 발행된 천엔권 지폐의 인물이다...>
이런 이유가 내가 법륭사에 가야할 이유였고
내가 일본을 알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할 이유였다.
4. 대보장전에서...
대보장전에 모셔진 <백제관음>...
CCTV외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는 어두운 곳...
일광과 조명으로 인한 미미한 간섭 마져도 차단하려는 듯
무거운 침묵만 흐르는 곳...
후레쉬만 터트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진기를 들 수 있었다.
사람들도 없었고,
혼자서 혼자서 백제관음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유물과 보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 노력하면서...
<여기 대부분의 그림자료는 1998년 2월 법륭사에서 발행된 <백제관음> 책자를 스캔하였다...>
내가 법륭사에 온 이유...
나라에 온 이유...
일본에 온 이유...
물론 이 모든 물음들이 대보장전을 나오고
동원으로 걸어가는 길에 머릿속을 스쳤던 질문일지라도
혹은 지금 이순간에 만들어지고 확인되는 자극일지라도
백제관음을 둘러싼 어두운 침묵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뿐이었다...
처음 <모나리자>를 보면서 어리둥절했던 치기어린 반문도 없고
<석굴암 본존불>을 보면서 알아야할 그 어떤 것을 찾지도 않았고
처음 <감은사탑>을 보면서 가슴을 울리던 그 벅찬 감동도 없었지만
팽팽한 긴장감과 깊고 깊은 침묵 속에서
많은 우문들이 던져지고 많은 현답을 갈구했다...
단체여행의 한계가 아니고
보아야할 또 다른 것들이 없었다면
누군가에 의해 떠밀리기 전까지 백제관음 앞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1987~88년경 촬영>
기왕 백제관음상에 시작했으니 법륭사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1969~72년경 촬영>
5. 백제관음...
백제관음상은 녹나무의 둥치 하나를 가지고 깎아 조각한 목조 불상이다.
현재 일본의 공식자료들은 백제와의 관련성을 드러내지 않고
유래 불문으로 소개하지만
공식명칭이 백제관음(百濟觀音)이고,
2차대전 이전까지는 584년 백제에서 전래된 불상으로 기록된 문건들이 많다.
최근 국내에서는 얼굴의 모습과 조각 양식을 분석하면서
담징의 사불정토도와 연관시켜 고구려계를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수많은 이들에 의해 찬미되었고,
흔히 8등신의 신체비례를 부각시켜 <동양의 비너스>라 불리우기도 한다.
이를 소개한 글을 잠깐 인용해보면 ;
“ 늘씬한 몸매는 소년과 같고,
우아한 얼굴 생김새는 여성적이다.
신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상이다 ”
“ 그 백제 사람이 만든 이 향기도 드높은 불상을 우러러 보자니,
조각가의 마음에 안겨 있었을 동경이 과연 어디에 담겨 있었을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이른바 미모는 아닌 단아한 용모는 그야말로 동양적인 맛의 얼굴이지만,
하반신의 늘씬하게 뻗어내린 청려한 선은, 어느 나라의 것이런가.
섬세한 힘으로 버텨진 미묘한 손의 표정,
색채의 박락은 저녁노을의 여광으로 넘치고,
천의며 옷 무늬의 흐름은, 스스로가 자아내는 리듬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무릎 아래의 뜻밖의 기다란 것이 빚어내는 신비한 미에,
이 작가의, 이 세상에서 만날 길없는 존재에 대한 사모의 정을 뜨끔 뜨끔 느낀다. ”
전아한 용모와
늘씬한 자태...
자연스러운 몸가짐과
생동감이 넘치는 장식들...
우아한 섬섬옥수와
무미한 표정에 가려진 신비로운 미소...
백제관음의 아름다움은 역시
신비로움...
그것이다...
<석굴암의 대범천... 정병을 들고 있는 너무나 ... ...>
참고로 높이는 2.11m
석굴암에 있는 문수, 보현, 제석, 범천, 십일면관음상 등의 키와 거의 같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과 법륭사의 구면관음상의 비교... 내눈에는 너무나 똑같이 보이는데...>
또한 법륭사에 있는 구면관음상은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리고 백제관음은 1872년 전후부터 사진으로 촬영, 관리 되었고
1988년 대보장원 특별실로 옮기기 전에는
금당의 북면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0~41년 촬영... 사진으로 남은 기록중 가장 오래된 것이 187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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