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륭사에서 생각하는 쇼토쿠 태자의 꿈...한일고대사 2-2
1-1. 어떻게 쓸까?
1-2. 무엇을 쓸까?
2-1. 법륭사 몽전에서 성덕태자를 만나다...
메모> X-1. 일본이라는 이름...
2-2. 일본 고대사 요약
3-1. 야요이 문화와 1차 도래인
메모> X-2. 왜라는 호칭...
3-2. 잃어버린 200년과 동북아시아
메모> X-3. 백제 한성시대, 왜국의 위치...
메모> X-4. 야마토 정권과 도래인...
메모> X-5.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3-3. 잃어버린 200년과 도래인
4-1. 불교의 전래와 백제...
4-2. 성덕태자의 등장...
4-3. 성덕태자의 헌법17조...
4-4. 성덕태자의 견수사 파견...
메모> Y-1. 천황의 호칭...
메모> Y-2. 천황의 역사...
메모> Y-3. 천황가의 3종 신기...
4-5. 성덕태자의 부활
5. 일본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4-1. 불교의 전래와 백제
야마토 정권의 말기에 일본은 이제 기지개를 자주적으로 편다...
양질전화... 국가적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농업생산력의 급증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전쟁의 무기로 철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일본은 규슈에서 근기까지 영역이 확장되고 체계를 갖추어 간다.
그리고 이때의 한반도 도래인은 전체 인구의 1/3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9세기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등록된 씨족의 32%가 도래인 씨족)
씨성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로 변혁시킨 결정적 계기는
538년 백제 성명왕(일본의 기록 - 우리는 성왕이라 부른다),
긴메이 천황 시대에 일본으로 전래된 <불교의 영향>이었다.
<구세(救世)관음상, 아스카... 백제관음상과 함께 견줄만한 관음상이다. 두툼한 얼굴과 안정된 몸매>
<몽전의 주불이며,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비불이다...>
당시 대표적인 호족은 모노노베씨와 소가씨로 대변되는데
모노노베씨는 나랏신의 진노를 산다는 이유로 불교의 수용을 반대하였고
소가씨는 숭불을 주장하였다.
즉 국가체제의 현상유지 세력과 적극적인 체제개혁 세력의 대립은
숭불논쟁의 형식으로 권력투쟁이 일어났고
이 다툼은 일본의 처음이자 마지막 종교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소가씨가 백제계 도래인으로(3세쯤 된다)
이 시기부터 일본의 주요 정치와 문화, 문물은 백제계가 주도하게 된다.
소가씨의 백제와 불교에 대한 의존은 우리의 역사적 상상을 뛰어넘는데
천황위에 군림하였던 소가씨는 적극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천황이 살던 왕궁과 도읍지 이름까지도 백제로 바꾸었을 정도다.
<광목천상, 아스카... 신체의 비례중 얼굴이 비중이 클수록 어리게 보이는게 사실...>
<2-2편에서는 법륭사에 안치되어있는 문화재를 중심으로 자료를... 법륭사발행 법륭사편>
성덕태자비의 할머니에 해당하는 30대 민달천황에서
성덕태자의 사후 34대 서명천황대까지 천황이 살았던 곳이
백제천이 흐르던 백제땅(오사카설, 나라현설, 가시하라시설이 있다),
백제 대궁이었으며
그 옆으로는 백제대사(百濟大寺)를 건립하고 구중탑을 세웠다고
일본서기와 일본서기를 연구한 많은 논문들이 기록하고 있고
현재는 백제천을 소가천(會我川)으로 부른다고 한다.
가야와 전라도 지역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백제계에 통합되고
일본의 정치, 종교의 중심에는 백제계를 비롯한 많은 도래인들이 등장하는데
고구려인과 신라인의 구별이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4-2. 성덕태자의 등장...
이 시기... 소가씨 번영의 기대주가 바로 성덕태자다.
소가씨는 스슌천황을 암살하고 일본 최초로 여제를 천황으로 즉위시키는데
그가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딸(친딸이라는 설도 있다)인 33대 천황 스이코이며,
소가노 우마코는 31대 용명천황의 아들 쇼토쿠를 태자로 삼고
593년 천황의 셋쇼(섭정)에 임명, 정치의 전면에 등장시킨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생후 4개월부터 말을 하고,
10여명과 동시에 대화를 했던(혹은 10개 국어를 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식인을 스승으로 삼아
(불법의 스승으로는 고구려의 혜자, 백제의 혜총 스님, 유교는 백제인 5경박사)
제왕학을 실천하게 된다.
<쇼토쿠태자상, 하쿠호(아스카와 헤이안 시대 중간의 연호, 백붕시대)... 법륭사에는 많은 쇼토쿠 태자상이 있다. 2-1편의 헤이안시대의 조각뿐만이 아니라 나라시대 등 여러 불당에 2세상, 7세상등이 있다...>
18세기 우지이의 말을 빌리면 쇼토쿠 태자 대에 이르러
일본은 상하가 의복을 입고 알몸을 면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쇼토쿠 태자는
역법을 수용하여, 천문지리를 통한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유교적 율령이 수용하여 관위 12계를 통한 관료체제를 확립하고
적극적으로 불교를 장려하여 정신적, 정치적 통합을 도모하면서
고조쿠(豪族)들의 개인절(우지데라(氏寺)) 건설붐을 일으켜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인 아스카 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아스카에서 나라로 천도하고 중앙집권을 추진하였다.
4-3. 쇼토쿠 태자의 헌법 17조...
그가 만든 헌법 17조(604년)는 중앙집권과 통합을 위해
지방의 호족을 설득시키려고 만든 관리의 규범이었지만
일본의 최초 성문법이면서 오늘날 일본의 근간에 흐르는 정신적 규범이 되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의 제1조
<화합은 가장 고귀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대화로 정해야 한다>는
오늘날 일본을 이끈 관료제도의 출발점이자 관료들의 자세로도 해석되지만,
와(和)를 소중히 여기라는 일본의 국시이자 이념이 되었다.
<몽위관음상, 하쿠호... 불교의 대중화에 관음사상은 주불에 변화와 무관하게 번성한다...>
헌법은 불교적 교리를 근간으로 만들어져 삼보귀의를 명시하면서도
유교와 불교, 신토의 대립을 지양한 유불신습합을 이루어냈고
이렇게 좋은 것만을 따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라 하여 일본인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고,
지방씨족과 중앙정부, 그리고 천황의 위계를 주장하는 등
현실정치세계를 반영하면서도
내가 성스럽지도 상대가 어리석지도 않다... 모두가 범부라는 식의
정신적 지침에 이르기까지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4-4. 쇼토쿠 태자의 견수사 파견...
그리고 쇼토쿠 태자가 특히 추앙받는 부분이 바로 견수사의 파견이다.
사실 오늘날 일본의 모든 역사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재창조, 재해석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는데
이때에 이미 한반도로부터의 영향력에 대해
일본은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즉 견수사의 파견시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의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 글을 보낸다>란 글귀는
한반도의 영향력에서는 이미 벗어났음을 증명해줌과 동시에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력을 가졌던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확인시켜 준다고
19세기말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은 주장하였다.
1200여년이 지나 부흥한 쇼토쿠 태자의 이 한마디는
드디어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선언으로 읽혔고,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견강부회의 증거로 해석되었다.
<유메치가이 관음상의 부분... 전면의 딱딱한 모습에 비해 훨씬 세련되어 보인다...>
한사람의 생을 사춘기 - 청년기 - 성인으로 나누어 생각한다면
일본은, 사춘기를 나라-헤이안 시대로,
청년기를 막부시대의 등장과 고립의 시대로
성인의 출발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의 시작으로 구분할 만한데
쇼토쿠 태자는 바로 이 사춘기 시절의 문명을 출발시킨 장본인이다.
자립의 기틀을 만들고
일본이 나아갈 체계의 방향타를 제시하며
대내외적으로 주체적인 문화와 문명을 세운 출발점에
쇼토쿠 태자가 위치하며,
그는 일본역사에서 근대의 100년을 제외하면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의 국가를 경영한 유일한 시대를 연 인물이다.
메모> Y-1. 천황이라는 호칭...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일본의 상징이자 마스코트인 천황에 대해 살펴보자...
덴노는 일본의 왕이다.
또 그런 이유로 우리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천황이라 쉽사리 말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 당사자로서 당연한 거부감과 함께
수직적 체계와 호칭에 집착하는 유교적 관습에 깊이 물든 우리로서는
왕보다 한단계 위의 호칭인 황제나 천황 등에 대해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다.
<유부인염대상(유夫人念대 인터넷상 한자가 없어서...^^), 하쿠호... 연화좌대의 줄기가 특이하다...>
그러나 텐노(天皇)란 호칭이 정착된 것은 이제 100여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1889년 제국헌법의 초안에서 텐노의 호칭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는데
이때에 코테이(皇帝), 고쿠테이(國帝)의 제안이 있었고
1936년 외교문서에서는 皇帝와 Emperor이 쓰였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실질적 주권자는 쇼군이라 불리던 막부의 실력자였기에
대외적으로 불리워지고 명명될 기회가 텐노에게는 최소 1200년간 없었다.
조선에서의 천황에 대한 인식은 미미했던 사실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1764년 11한번째에 통신사에 이르러 천황과 쇼군의 구별을 주장한 기록이 있고
천황은 허위, 허명, 왜황, 위황(僞皇)의 호칭으로 부른 기록만 남아있다.
<옥충부자, 아스카... 비단벌레의 날개 2천3백여개가 사용되었다는... 당시의 유행이었다고...>
그 이전 막부시절에 텐노는 미카도(御門), 덴시사마(天子樣)으로 쓰였고
무사들 사이에서는 교쿠(玉)라는 말이 천황을 가리키기도 했다.
궁중용어와 초기 일본인들은 스메라미코토(皇尊天皇)라 불렀고
(* 스베루-統べる-다스리다와 미코토의 합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미코토는 완벽한 모양-원 뜻을 천명(天命), 신탁(神託)으로 해석)
그 이전의 문헌에는 오키미(大君, 大王)이라 적었다.
이를 한자음으로 텐노라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는 분명치 않고,
최초로 천황(天皇)이란 문자가 기록된 것은
607년 법륭사 불상에 새겨진 것이 유일하며
그리고 이때에 야마토(大和)도 일본(日本)이라는 한자어로 표기 되었다.
메모> Y-2. 천황의 역사...
최초 국가적 형태를 띤 3세기 히미코의 야마타이 정권은
30여개 소국을 대표한 권위적 상징에 불과했고
4세기에 성립된 야마토 정권은 오기미를 중심으로
규슈에서 기나이로 이어지는 호족들의 느슨한 연합정권으로
씨성제도를 지배체제로 운영했다.
즉 왕은 존재하지만 종교적 혹은 제의의 정신적 구심역할에 불과했다.
이를 국가적 형태로 바꾸며 왕의 권위를 세운 때가
645년 소가씨를 멸망시킨 다이카 개신,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려 일어난 사건이 672년 진신의 난이고,
(* 이 진신의 난은 세키가하라 전투와 함께 일본 역사를 바꾼
가장 결정적인 두 개의 사건으로 불리운다.)
오키미의 높아진 지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701년 다이호 율령반포이고
천황이란 지위가 일본의 정치사에 주체로 나타난 것은 사실 이때부터다.
<사기사자침문... 네마리의 사자가 사냥을 하고 있는 문양... 아스카 시대>
일본의 천황은 서기전 660년부터 125대를 이어져왔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전 일본의 역사에 지대한 역할을 한 천황은 많지 않다.
또한 그 기록들도 많지가 않고 고고학상 천황의 묘가 확인된 것은
40대 덴무천황과 41대 지토천황의 합장묘 2기에 불과하다.
물론 천황묘가 2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불교의 영향(화장)이 크지만
불교가 정착된 쇼토쿠 태자이전의 30여명의 천황묘도 없거나 불분명하다.
사실 천황의 기록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의존하고 있으며
기원전 660년 제1대 천황인 진무에서 600년경 스이코 여제까지 33대 기록은
신화와 전승가요 등을 천황가의 계보로 둔갑시킨 설화적 사서일 수 있다.
기원전 660년도 후한 시대의 도참사상에 근거하여 찾은 신유년이라는 설도 있다.
(60갑자의 58번째 신유년에 지상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주장)
결국 천황이란 호칭과 존재와 실체는
역사적 고증과 과학적 증명이 필요한 하드웨어적인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상징을 공유하는 가의 신념의 문제다.
신은 증명의 대상은 아니지만,
현신인 천황을 어떤 코드로 접근하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행신승도좌상, 나라... 우리절집의 대선사들은 대부분 그림이지만, 일본은 목공조각이 대부분이다...>
아무튼 우리가 기억할만한 천황은 모두 이당시의 인물들인데
다이카 개신과 백촌강 전투를 벌인 덴지(天智)천황,
진신의 난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강력한 독재체제를 확립한 덴무(天武)천황,
이때 율령법전 제정, 역사서 편찬 등을 이루었고,
현신인으로 추앙받았다는 흔적이 있으며(일본의 가장 노랜 노래집 <만연집>)
헤이안으로 천도한 간무(桓武)천황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1086년 원정을 시작한 시라카와(白河)천황을 끝으로
천황은 역사속으로 숨겨진다.
쇼토쿠 태자가 꿈꾸던 중앙집권적 체제가 형성된지 500년
그리고 일본서기를 편찬하며 강력한 국가로 발전한지 300여년이
천황이 일본을 주도했던 유일한 시대이다.
메모> Y-3. 천황가의 3종 신기...
마지막으로 천황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세가지 물건이 있는데
이를 3종의 신기(조종의 신기)라고 부른다.
거울, 칼, 구슬이 그것이며 일본서기에서는 3종의 보물이라 칭했다.
<칠지도... 이소노가미신궁. 사실 칠지도가 천황가의 보물과는 무관하다... 1874년 보관이 확인되었고
백제 근초고왕대에 일본으로 전래된 유물... 최근에는 칠지도가 아니라 육지가 맞다는 주장도...>
참고로 동이족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신종3기는
거울, 칼, 북(방울, 종으로도...)이고 -주몽에서는 다물활이 등장하는데???
천부왕인, 신침일매(물과 관련), 황거종의 보물이라 일컫고
흔히 우사, 풍백, 운사가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다.
<동경, 일본 강전선산고분 출토... 당시의 거울은 동경이었을 것으로 추정... 원본은 화재로 소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몸을 상징하는 거울은 현재
황거의 가시코도코로로 불리는 사당에 보관되어 있으며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제사지내는 이세신궁이 창건된 이후
거울과 칼의 본체는 이세신궁과 아쓰다 신궁에 분리하여 보관되었다고 한다.
<의자손수대경, 무령왕릉... 일본 출토품과 똑같은 양식, 무령왕릉이 후대...>
3종의 신기를 여기서 거론하는 이유는 메이지 천황당시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일본의 역사와 천황가의 계보는 마지막으로 수정되는데
에도막부의 등장이전의 남북조 시대의 정통성을 여기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4-5. 쇼토쿠 태자의 부활...
역사의 격동기... 파란만장했던 삶을 역사에 미루고
622년 쇼토쿠 태자는 49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개혁의 피로였을지, 아니면 권력에 회의를 느꼈는지
혹은 소가씨와의 연합에 실패(혹은 패배)했는지 몰라도
강력한 중앙집권의 꿈을 미완으로 남긴 체 만년에는 불교에 몰두하다가
세상은 허무하고 오직 부처만이 진실이라는 절망을 토로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천황가가 불교와 분리된 것은 메이지 유신 때이다.)
<몽전... 그 이름만...>
그러나 그가 꿈꾼 세상은 100여년이 지나 일본에 펼쳐졌고,
1200여년이 지난 일본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가 시도했던 견수사는 구미사절단으로 부활하여 <문명개화>의 갈증을 풀었고
프러시아를 모델로 했던 국내법의 개정은 <부국강병>의 무기가 되었고
메이지 천황의 부활은 권력을 시각화, <천황을 가시화> 시켰다.
19세기 일본이 선택한 탈아입구(脫亞入歐)는
서기 600년경 시작된 백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백제보다 더 발전한 문명을 위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7세기 쇼토쿠가 선택한 탈한입중(脫韓入中)의
재판 혹은 확장판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실패한 백제를 극복하기 위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신문물을 갈구하며 끊임없이 벤치마킹의 대상을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쇼토쿠 태자상... 백제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의 그림이다...>
그리고 다시 1991년 거품경기의 붕괴로 잃어버린 10년의 장기침체를
벗어나던 2002년... 밀레니엄의 첫 화두는 쇼토쿠 태자의 열풍으로 장식되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쇼토쿠의 외침... 이이토코토리(良いとこ取り)가 필요했을까?
21세기 일본은 쇼토쿠가 꿈꾸던 백제와 한반도, 그리고 중국의 극복을 넘어서
동서양 문화의 채장보단(採長補短)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일본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내가 백제를 비롯해 한반도 남부지역에 근거한 정치집단과
일본의 관계에 집착한 이유는 세가지다.
<동원방향에서 바라본 서원으로 가는 길... 이제 서원에 대한 소개를 준비해야 하는데...>
하나는 민족이란 개념에 대한 냉정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민족은 자본주의, 특히 19세기 이후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의 한반도와 일본을 현재의 한민족과 일본인으로
등치 혹은 대치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일본의 지식인들은 오히려 당당했다.
영국이 프랑스에서 떨어져 나가 더 큰 나라가 되었듯이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떨어져 나가 더 큰 제국을 만들었듯이
일본은 한반도와 백제에서 떨어져 나와 더 큰 나라가 되었다고...
야나기처럼 일본의 모든 국보는 조선인들이 만들었다고까지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현대의 일본인들은 과거를 부정하고 우리는 과거의 향수에 매달린다.
<서원은 역시 오중탑과 금당이 중심이다... 실루엣으로 만족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에 대해 아는 것보다 일본은 우리에 대해 더 깊이 안다.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인들은 왜국을 야만적이라고 경멸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들이 선진 문물을 흡수하면서 조선과 한반도에 연구했던 이유는 많겠지만
우리가 무시하고 경멸했던 일본은 조선을 앞지르고 한반도를 침략했다.
그리고 지금도 떨쳐버리지 못한 식민사관, 반도사관, 대륙사관 등은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남긴 부정적인 흔적들이다.
우리가 역사를, 국사를 포기하고 무시할 때 그들은 우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철저하고 한반도와의 관계를 거세하고 중국과의 교류만 주장했다.
<오중탑과 금당은 출입문인 중문과의 거리가 짧고, 대강당쪽이 넓다... 그래서 사진들이 다 이렇다..^^>
세 번째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와 역사를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한국-일본의 삼국관계까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결핍된 자극과 왜곡된 시야는 우리의 실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일본에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역사의 원형들이
철저하고 충분하게 유지되고 관리되어 있다.
우리의 고대사를 조금 더 입체적이고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단편들과 실체를
일본은 자신들의 뿌리로 보존하고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그들은 창조하고 생산하지 못했지만, 그 열등감만큼 소유하고 점유하고 있다...
서로의 열린마음을 주장하기 이전에 우리의 그릇을 키울 필요가 있다.
<언젠가 사진을 보고서 늘 그려왔던 오중탑... 생각만으로도...>
일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오랜 역사에 근거한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우월감과
근대의 피해의식과 현실적 열등감이 공존하고 있다.
이 양면의 의식이 우리에게는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선입견과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이루었는지 알아야 한다.
克日을 위해서는 지루하지만 꼭 밟아야할 인내의 시간 知日이 필요하다.
근거없이 그들을 무시했던 선조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내가 찍힌 거여서...^^ 탑도, 사람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법륭사에 대한 내 글도 마찬가지???>
법륭사... 몽전에서 쇼토쿠 태자를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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