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륭사 3-2 서원
1. 법륭사 서원
2. 법륭사의 가람배치
1) 가람배치에 대하여...
2) 삼국시대의 가람배치
3) 법륭사의 가라배치
4) 가람배치의 변화
5) 가람배치와 문명의 교류
3. 금당벽화
1) 금당에서 생각하는 그림
2) 채색벽화의 의의
3) 傳담징...
4. 법륭사 오중탑
1) 페놀로사
2) 그리피스의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
3) 우리나라의 탑과 일본 목탑의 비교
4) 석탑과 목탑의 비교
5) 일본 목탑들의 비교
6) 다시 생각하는 황룡사 목탑...
5. 법륭사를 정리하면서...
5. 오중탑
이제 내가 꿈꾸고 꿈꾸던 오중탑으로 넘어간다...
사실 이 당시 일본여행을 계획하면서 억지로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 법륭사다.
이런 저런 이유로 수차례 일본을 다녀왔지만 유독 교토만은 비껴갔다...
그러나 이 지역을 보지 않고 일본에 대해 말하기가 엄두도 나지 않았고
특히 법륭사의 오중탑과, 백제관음, 그리고 광륭사의 반가사유상 없이
일본의 역사와 문명, 그리고 그들의 사회문화를 말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1) 페놀로사...
얼어붙은 음악...
언제가 책에서 읽었던 이 한마디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한마디를 체험하기 위해 나는 드디어... 오중탑 앞에 섰다...
그래서 일본여행에 대한 글도 쓰게 되었고
결국은 법륭사의 마지막을 오중탑으로 정리하려 한다.
사실 <얼어붙은 음악...>에 대해 말하려면 몇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건축이란 얼어붙은 음악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괴테다...
나는 상당히 오랜 기간 법륭사 오중탑을 지칭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고
괴테의 말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아무튼 훌륭하고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음악이 얼어붙은... 괴테 아니면 또 누가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일본의 목탑을 보고 이 표현을 쓴 이는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페놀로사다.
그는 1880년대부터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의 모든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은 메이지 유신 당시 미술고문으로
미술의 근대적 사실을 유포시키고 일본 전통의 미술적 가치를 강조하여
피폐한 일본예술의 부흥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다.
그로 인해서 서구적 관점에서 동양 미술들이 재평가 되었고
동양의 전통 예술이, 기술이 아닌 미술의 근대주의로 정착되는 계기를 맞았으며,
작게는 동양의 사군자나 서(書)가 미술인가 아닌가의 논쟁을 포함하여
넓게는 오늘날 일본적인 문화와 예술이
서구의 관점으로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것을 막은 방패의 논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동면 잡마길상토... 오중탑 동서남북면에는 이런 잡상이 있다... 백제대향로가 생각나는 이유???>
또한 페놀로사와 그리피스 등에 의하여 한국(조선)의 미술적 수준이 재평가 되었고
법륭사를 비롯한 오사카, 나라, 교토의 많은 문화재와 임진년 조일전쟁의 의미 등
고대부터 중세까지 한반도를 통한 문화의 전파과정 영향력도 일부 밝혀졌다.
페놀로사에 의해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은 5백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는데
쇼토쿠 태자 성상으로 알려져 한 번도 풀어본 적 없던 비단헝겊보자기를 풀면서
화려한 청동투조의 관을 보고 내뱉은 첫마디가
“ 이것은 한국에서 온 보물이구나! ” 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의 예술적 수준과 일본 미술사에 미친 한국의 영향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몽전의 구세관음... 다시한번 인용한다... 1년에 두번만 공개한다... 4월과 11월>
2) 그리피스의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Penollosa; 후일 보스턴미술관 동양미술 학예관)에 이어
일본에서 활동했던 그리피스((William Eliot Griffis)도 그의 주장을 이어나갔는데
1919년 <아시아 매거진 8월호>를 통해
' 한국이 일본예술의 근원임은 추측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많은 자료가 일본에 넘쳐난다...
일본 고유의 예술은 9세기에 들어서나 겨우 발아했다. ’고 주장한다.
1919년 당시 그리피스의 <일본이 한국에 진 부채>란 글을 조금 더 인용해 보면 ;
... ...
근대의 국수적 역사관이나 거짓된 황국신민사상으로 인해
자칫 야마토가 일본전역에 걸쳐 통치했던 것처럼 속기 쉽다.
백제가 552년부터 시작해 일본으로 보낸 불교는 국가적 경사로 받아들여졌고
쉬지 않고 빛을 발한 열정적이고 절대적인 백제의 불교전파는
세계 어디에도 비견할 만한 예가 없다...
... ...
불교유입으로 이들의 정치적 위상은 야만에서 문명으로 격상했다.
새 종교인 불교를 통해 문자, 저술, 건축, 예술이 들어오고
한국으로부터 깨인 사람들이 수백명 들어와 열심히 왜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절대적 영향 아래 야만 왜인이 인간다워지고
사회와 건설전반이 통째로 변화된 것이다.
... ...
야마도국의 문화가 얼마나 왜소한 것이며
반대로 한국이 베풀어준 문명의 세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는
황국신민사상이 팽배하면서 직장을 잃거나 억압당한
일본 국내학자들의 저술이나 외국인의 글을 읽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아니면 그 당시 순수한 일본문학이나 문물 자산이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주는 자 한국의 풍요로움과 받은 자 일본의 빈곤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 ...
<북면 석가열반상토... 실제로 찍으면 아주 어둡다...>
그 당시 일본의 미술사 형성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들의 관점을 살펴보면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역사, 미술사학자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무엇이었고
무엇을 공격하고, 누구를 위해 방어 논리를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데
고대사와 한국과의 관련성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거부감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와 우월성 등의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의 정체성과 문명의 뿌리에 대한 훨씬 근본에 대한 고민임을 알 수 있다.
동양의 고대 역사와 문화예술, 그리고 미술사 체계정립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근대초기 예술사에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듯이
동양의 미술역사가 서양에 알려지는데 페널로사에 진 빚이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영향에는 항상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법이지만...
<약사사 쌍탑... 인터넷에서 빌려옴...>
아무튼 페널로사가 얼어붙은 음악이란 찬사를 보낸 유적은
법륭사 오중탑이 아니라 약사사(야쿠시지)의 쌍탑을 보고 한 감탄사다.
이 두 탑의 차이는 정림사탑과 신복사지탑의 차이와 비슷하다.
신복사지탑도 조형과 완성도에서 뛰어난 탑이지만 약사사 쌍탑은
페놀로사의 말처럼, 얼어붙은 음악을 실감 할 만큼 좋은 탑이다...
3) 우리나라의 탑과 법륭사 오중탑의 비교...
일본의 목탑을 법륭사에서만 본 것은 아니지만
오중탑을 바라보는 순간 나로서는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직선으로 내려뻗은 처마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과
깊은 처마와 상대적으로 가냘픈 탑신이 주는 역동성과 생동감...
그리고 적절한 체감과 비례로 하늘로 뻗어 올라간 상승감...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하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하고
화려한 형태이면서도 절제된...
사실 석탑의 미감에 익숙한 나로서는 목탑을 접할 기회도 적었지만
비교할 무엇의 잣대도 불분명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찾아보아도 법주사 팔상전과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건축이고, 최근에 들어와 보탑사의 본전이 유일한 맥을 잇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96... 오래되기도 했지만 비가 오는 날이라...>
팔상전과 보탑사는 전각의 기능이 강하고
쌍봉사 대웅전이 탑파 형식을 유지해 왔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모습은 원형에 가깝게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쌍봉사 대웅전>
팔상전과 대웅전은 중심에 심주가 있어 한국목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법륭사의 오중탑도 이러한 구조다.
<중층형으로 중심에 심주가 보인다...>
쌍봉사 대웅전은 탑파 형식을 갖춰 오중탑처럼
지붕의 처마가 깊고 몸체가 작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포작의 결구로 지붕을 빼내고 처마 끝을 치켜세워
상승감과 화려한 맛을 갖추고 있다면
오중탑은 오다루키라는 하앙식 구조와 주심포 양식으로 결구하여
단순하면서도 조금 더 깊고(길고) 낮게 처마를 갈무리 하였다는 점이다.
<법륭사 오중탑은 비례와 미감때문에 정림사 오층탑과 많이 비교 되곤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을 통해 오중탑의 맛을 비교하고 싶지만
석탑중심으로 남아있는 현재로서는 쉽지가 않다.
단지, 결구방식에서 목탑의 구조를 전용한 미륵사지 서탑을 제외하면
정림사지 오층탑(백제)과 실상사 백장암의 삼층석탑(통일신라)이 유일하다.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97... 완전한 목탑식 구조다...>
두 탑을 제외하고 석탑 중 몸돌과 지붕돌의 넓이 비례가 큰 것을 고르라면
내 생각에는 전남 금곡사의 삼층석탑이 목탑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고,
<금곡사 삼층석탑97... 각층 몸돌 위에 지붕돌 처마가 상당히 넓다...>
<비인탑97... 정림사탑을 닮은 오층석탑(사층만 남았다)이다... 깊은 처마는 하앙식 목탑구조다...>
1층 몸돌의 너비가 좁아 목탑식 체감을 가진 석탑을 고르라면
의성탑리 석탑과 빙산사터 탑이 있지만, 이 탑들에서 느끼는 맛은
중국의 전탑에서 느끼는 둔중함이 없고, 일본 목탑에서 느끼는 긴장감도 없다.
<의성탑리 오층석탑... 근처의 빙산사터 오층탑도 비슷한 미감이다...>
언젠가 탑의 미감을 이야기하면서 몸돌과 처마 넓이의 비례에 대해 지적한바 있는데
역시 중국의 목탑이나 전탑은 그 비례가 가장 작아 기름지고 뭉뚱하며,
<중국 소주의 호구탑06... 동양의 피사탑이라 불리고 조금씩 기운다... 몸체와 지붕의 넓이 차이가...>
일본의 목탑은 그 비례가 크고 깊어 날렵하고 세련된 맛을 보이며
한국의 탑은 그 비례가 중간적으로 안정감과 상승감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4) 목탑과 석탑의 비교...
일본 목탑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지만
목탑과 석탑의 가장 큰 차이는 기단부의 높이와 비례, 1층 몸체의 넓이다.
정혜사지탑처럼 기단부가 과장된 탑을 제외하더라도
석가탑과 백장암탑을 비교해보면 얼마만큼 차이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처음 백장암탑을 보고 왜 국보로 지정되었을까 많은 의문을 가졌었다...>
정림사탑과 백장암탑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석탑을 대표하는 감은사탑 등과 완전히 다른 미감을 가지고 있다.
정림사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는 설명이 있어 익숙할 뿐
석탑으로서 정림사탑은 참 불안정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백장암탑은 돌로 만든 완전한 목탑구조 탑이다.
<백장암 석탑 세부... 난간의 문양... 빌려옴...>
참고로 백장암에 새겨진 난간 문양은,
법륭사탑 난간의 모양과 똑같은 모습으로,
(흔히 卍자 문양이라고 부른다)
백장암탑의 연대추론과 관련성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법륭사 오중탑 세부... 난간의 문양...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빌려옴...>
목탑구조의 불안함은 법륭사탑을 제외한 모든 일본 목탑에서 느낄 수 있는데
단지 약사사의 목탑과 금당은 차양지붕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아름다운 비례와 세련된 맛으로 상쇄되었고
법륭사탑은 에도시대에 덧붙인 1층의 겹처마로 상당히 안정감 있게 보인다.
5) 일본 목탑들의 비교...
여기에서 법륭사탑과 일본의 다른 목탑들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몇가지만 골라보면 일본의 삼대목탑은 법륭사(호류지) 오중탑을 비롯하여
다이고지(醍酉胡寺(제유호사)), 그리고 유리광사(류리고지) 오중탑이 꼽히고
일본의 건축 처마선은 동대사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수평(직선)에 가깝고
오중탑은 이에 충실하지만 해주산사, 유리광사, 흥복사의 처마는 공굴림이 있다.
<일본의 목탑... 한눈에 비교가 되는... 빌려옴...>
개인적으로는 법륭사와 약사사(야꾸시지) 탑을 가장 좋다고 보는 입장인데
특히 최상층(오층) 처마두께가 다른 탑은 너무 두꺼워 무거운 느낌이 있는데 반해
이 두탑의 최상층 처마두께는 하층부 처마두께와 적절한 비례로 조화를 이뤄
둔중함을 상쇄하고 상승감과 세련됨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약사사 탑... 쌍탑의 단청이 완전히 다르다... 빌려옴...>
그리고 일본 목탑들은 隅(스미)木과 오다루키라는
2단의 하앙구조로 처마가 깊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법륭사탑은 오다루키가 작고 내림처마의 우동이 2단인데 비해
여타의 목탑들은 오다루키가 隅木만큼 강조되어 2단으로 보이고,
내림처마의 우동이 3단 이상으로 설계되어 상당히 장식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법륭사탑은 긴장감과 절제의 미감이 높고
후대에 보강된 겹처마로 인해 불안정한 점을 많이 보완하였다고 생각된다.
<동사 오중탑... 1층 몸체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그리고 예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일본의 목탑 상륜부는
전체적인 체감과 불륨에서 충분한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다.
탑 상륜부의 크기가 탑의 미감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는
석가탑의 상륜부가 없었던 초기와 현재의 미감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본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에서도 상륜부가 있고 없음이 어떤 차이가 있고
석재로 상륜부가 장식된 보림사탑과
직지사나 실상사, 봉암사의 탑이 어떻게 미감이 다른지 알 수 있다.
<보림사탑97... 상륜부가 석재로 마감되어 볼륨감(부피)가 크다...>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일본의 목탑과 한국의 목탑에서 가장 결정적 차이중 하나가 상륜부의 크기이며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의 상륜부는 너무나 옹색할만큼
작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월정사탑이나 석가탑에서 상륜부의 높이가 차지하는 비례는
일본 목탑들의 상륜부가 차지하는 비례와 비슷하다.
<실상사 삼층석탑97... 보림사탑과 비교해보면 상륜부의 마감이 탑전체의 미감에 상당히 큰 비중을...>
상륜부의 높이와 부피는 평면상에 그려진 비례만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석굴암 본존불 두상은 전체적인 신체비례 보다 조금 크다.
보는 사람의 키와 거리가 계산되어 착시를 보정한 것으로
코르도나타나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한 미켈란젤로도 사용했던 기법이다.
그나마 보탑사의 본전은 팔상전 등에 비하여 상륜부를 강조하였으나
탑신 108척, 상륜부 33척의 비례는 전체 높이의 대략 23% 정도로
일본의 목탑이 전체 높이에서 차지하는 30% 전후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이보다 조금 큰 석가탑의 상륜부의 비례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탑사00... 영암사지를 닮은 석축위로 솟아 상륜부는 훨씬 작게 보인다...>
6) 다시 생각하는 황룡사 목탑 복원...
경주 탑골에서 황룡사탑의 복원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법륭사 오중탑을 보지 못했던 그 당시에는
주로 국내에 있는 탑을 기준으로 황룡사탑을 그렸었고
중국이나 일본의 목탑은 사진이나 연구자료 등을 참고했었다.
이제 법륭사 오중탑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황룡사탑을 그려본다...
법륭사 오중탑을 백제시대 목탑의 원형으로 보고
황룡사탑이나 법륭사탑이나 모두 백제장인의 작품이었고
만약 황룡사탑에서도 백제식 하앙구조가 쓰였다면
2003년 1월 당시에 황룡사탑을 생각하면서 중심으로 잡았던
불일사 소탑과는 차이가 있는 미감과 형태로 그려질 것 같다.
그러나 우리네 삼국시대의 목탑이 꼭 법륭사와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고
당대의 유적들과 한중일 삼국의 문화적 차이 등을 고려하면
몇 가지의 단서를 가지고 황룡사탑은 내 스스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선 몇 가지 단서를 정리해보면 ;
1) 법륭사탑의 주요 비례 ;
상륜부의 높이는 전체높이의 대략 30% 내외
처마의 넓이는 일정한 체감률을 가지고 있는데 1층 처마넓이는 높이의 45%
그리고 9:10:11:12:13의 체감으로 처마는 좁아지고
5층의 처마 넓이는 노반부터 상륜부 높이와 거의 비슷하다.
몸체는 처마넓이의 대략 1/2이고
1층과 5층의 몸체넓이만 조금씩 넓게 조정되었다.
2) 황룡사탑의 전체 높이는 어떨까?
삼국유사 기록에 상륜부 42척, 본탑 183척으로 총 225척이라 하는데
당시에 쓰였던 고구려척은 당척보다 큰 35.6cm다.
이를 근거로 환산하면 80m 정도가 된다.
물론 황룡사탑에는 고구려척이 사용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유사가 쓰일 무렵의 신라, 고려척은 19.42cm로
고구려척이나 당척에 비하여 상당한 차이가 난다.
참고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척도는
1902년부터 사용한 일본곡척으로 30.303cm이고
이를 근거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평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접근 방법이 있는데
당시 탑의 전체 높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결정했다 하는데
하나는 기단부 한변의 2배 방식과, 기단부 대각선 길이의 2배 방식이 그것이다.
백제의 가람배치가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미륵사지에서는
석굴암에서 사용되던 1:√2의 비례가 주요 가람의 배치에서 적용된 것으로 보아
탑의 높이도 기단부 대각선 길이의 2배가 적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법륭사의 경우는 기단부 한변의 2배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접근 방식은 황룡사나 미륵사지 모두
삼국유사의 기록과 법륭사의 비례를 생각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고
현재 황룡사 기단부 한변의 길이도 22.2m 인 것으로 보아
법륭사탑의 미감이 황룡사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 같다.
3) 그리고 고려할 요소로
당대에 남아있는 탑과 그림, 그리고 기록을 무시할 수 없는데
경주 남산 탑골의 그림, 미륵사지 서탑, 정림사탑, 백장암탑,
그리고 조금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개성 불일사 소탑의 양식 등이
한중일의 문화적 차이와 함께 고려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개성 불일사 청동소탑... 다시한번 인용...>
아무튼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만약 황룡사탑에 하앙구조가 사용되었다면
법륭사탑의 미감과 비슷할 것이고,
우리네 석탑의 미감이나 비례가 적용된다면
익산 미륵사지 목탑의 복원모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익산 미륵사지 복원 모형... 내림처마에 우동을 2단으로 설정하는 등 황룡사와 많은 차이를 두지만
전체적으로는 불일사탑의 체감과 비슷하다... 우리눈에 익숙한 미감이다...>
아무튼 현재 박물관에 있는 황룡사 목탑의 복원모형은
내 스스로 인정은 안 되고, 오히려 미륵사지 모형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또다시 몇 년이 지나 이를 수정할지 모르지만
5. 법륭사를 정리하면서... 문명에 대한 짧은 메모...
이제 법륭사를 정리해 본다.
동대사에서 법륭사까지 너무 길게 잡았다.
한중일 건축비교, 가람배치, 고대역사, 그리고 불교와 쇼토쿠 태자까지...
몇 번 다녀온 경주답사기가 감상과 내 마음의 정리라면
일본여행기는 아무래도 메모와 자료정리가 주가 된 듯싶다.
아직 체화되고 익숙해지지 않은 것의 차이이고
깊이와 현재적 의의에 대한 나의 이해와 수용의 정도차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해외여행이란 특성은 비단 유적과 유물에 대한 개별적 이해보다
그들이 보존하고 관리하며 권리를 주장하는 문화와 문명이
현재와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는 관계의 지속성에 초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유적에 대한 답사기보다는 문명의 탐방처럼 범위가 넓어졌다.
사상, 경제양식, 정치체계, 사회문화, 역사...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양식에 접근하는 키워드와 관점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데 묶어 먼 후대에 이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문명이란 개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라의 문명, 고구려 백제의 문명, 그리고 한국의 문명과 일본의 문명...
특히 최근에 나를 자극했던 것은 사뮤엘 헌팅턴 류의 관점이다.
물론 여기에서 그의 문명의 충돌론을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짚어볼만한 것들이 있다.
서구의 오만함과 이슬람의 편협함, 그리고 중화의 자존심을 근거로
문명의 충돌을 예견 혹은 주장한 그가 나눈 세계의 문명권은
종교로는 서구기독교, 동방정교, 이슬람, 흰두, 유교, 그리고 일본(신도)이 있고
광의의 문명권으로는 크리스트교권, 라틴아메리카권, 아프리카권, 이슬람권,
흰두권, 중화권, 그리고 역시 일본권으로 구분했다.
즉, 어떤 구분으로도 그는 일본의 문명을 인류를 대표하는
혹은 지구에 존재하는 여러문명 중 대표적인 카테고리로 선정했다.
일본이 인류역사에 얼마만큼의 기여를 하였고
현실의 정치경제에 어느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또 불교라는 문화가 일본의 신도보다 생명력이 없는가를 지적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게 생각할 일이 많은 내용이다.
일본에 대한 비중 때문은 아니지만 헌팅턴 류의 주장이나
조금 더 넓게 잡아 칼 포퍼 식의 접근을 나는 썩 즐기지 않는 편이다.
서구중심적인 접근과 서구적인 위선, 그리고 편리한 이중 잣대에
사상적으로 깊이와 완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입장과 분석결과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여전히 그들의 관점과 분석의 도구는 유용하다는 게 나의 입장이다.
19세기말부터 1960년대까지 제국주의 시대를 관통했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그 이후 마케팅과 다국적 자본의 필요로 발달한 문화인류학은
사상의 옷을 입고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재단하기 시작했고
사상과 종교적 편향은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새롭게 각색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문명과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고민은 비단 그들만의 몫은 아니다.
그리고 또다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관점과 필요에 의해 역사를 재단하고 문화를 강요하고 있다.
진실과 실체를 벗어나 한동안 그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앞으로 수십년 간의 인류사를 재편하고 방향을 설정하게 될 것이다.
인물과 역사,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포괄하는 문명의 개념은
여전히 타자를 인식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위해 필요한 도구다.
차이를 이해하고 차별을 지양한 상생과 공존의 지향은
문명의 보편성과 시공간의 특수성을 풍부하게 이해하는 지표가 된다.
꼭 이만큼의 의의와 목적으로 문명은 해석되어야지
또다른 비약은 왜곡과 분리와 차별과 고립의 기폭제로만 작용할 것이다.
한정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존재하는 내가
짧은 여행으로 그들과 자유스러운 논의를 통해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역사와 유적을 통해 나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그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나의 자유이며, 또한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다.
상생과 공존을 위해...
일본에 대한 나의 관심과 고민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와 폭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약간의 비약과 무리가 따른 면도 있겠지만
일본을 정리하면서 한번쯤은 말하고 싶었던 사족(?)이다.
* 황룡사 관련은 예전에 올렸던 경주 탑골 답사기를 참고...
* 이전에 올린 글과 중복된 사진들은 최소화 시키려 노력했지만 이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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