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주천강 2... 070524
주천강 사자암에서 생각하는 종교의 의미...
이제 무릉리 요선정을 찾아 나서야 한다...
갈때의 익숙한 이정표가 나오는 길에서는 왜 안 보이지?
일단의 작은 채움과 성과는 부차적인 것들에게서 긴장감을 풀어 버렸는지 모른다...
중간 중간 시원한 풍광에 마음을 풀어놓고 기억의 흔적들을 담아 본다...
영월군 주천면, 그리고 수주면... 하나같이 물과 술이 들어간 지명들...
그만큼 물이 많고, 맑은 물로 우려낸 술이 유명하며
나같이 술 먹는 사람들이라도 그 분위기에 취할만큼 시원한 풍광들이다...
이정표의 사자산 미륵암을 나는 오래전부터 사자암이라 부르고 있다...
사자산 법흥사와 주천강의 합수머리 미륵암을 줄이고 줄여서...^^
사자암이 있는 도화동, 무릉동의 이름이 말하듯이
굵지는 않지만 깊고, 산속에 묻혀 있지만 시원시원한 경관이 마음을 열어준다.
굳이 이중환의 택리지를 거론치 않더라도
속세를 피해 살 만한 지역이지만, 나같이 떠도는 이에게는 조금은 좁은 곳...
아무런 안내표식도 없는 소박한 삼층석탑이 외로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기교도 없고, 격식도 없고, 누군가를 흉내 내지도 못한 형태만이 남은 모습...
닳고 닳아서 굳이 예술과 권위에서 자유로운 모습...
비교될 이유 없는 자유스러움을 우리는 굳이 허접함과 조잡함으로 비하하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고 자연스러움... 똑같은 모습을 두고 우리의 마음은 달리 움직인다...^^
주천강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중 하나를 지나면 미륵암으로 들어가는 길...
언제부터인지 모를 암자가 불공드리는 이들로 차있고 터를 잡고 있다...
옹색한 사자 두 마리와 석탑도 조성되어 있고...
요선정에 오르는 호젓한 곳은 그럴 수 없이 편한 길이다...
좁은 공간에 붉은 기둥의 요선정과 다층탑 한기,
그리고 복주머니처럼 생긴 바위에 망연한 눈망울의 마애여래상이 지키는 곳이다...
너무 좁아서 아늑하고, 주천강의 연초록물의 호위를 받아 시원한 곳이다...
나이를 알지 못하는 굵은 소나무와 기기생생의 모습들로 꽉 채워진 공간...
요선정 앞의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다층탑을 오늘서야 봤다...
사람들은 항상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알고자 하는 것만 아는지도 모른다.
수백년 혹은 수십년을 엄연히 존재했던 탑을 나는 이제야 본다...
내 기억에 저장되지 않지만 내게 존재했던 많은 것들도 이러했을까?
자의든 타의든,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나를 갈구했든 피했든
나는 나를 이루는 많은 것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 의미하는 것만을 허용하고, 나를 갈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는지도...
<가끔은 이 마애불이 영주 기흥동을 생각하게 한다... 자세히 보면 아주 다른데도...^^>
이기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살면서도, 또 그것이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기적이라는 말에 대해 회피하거나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과연 그게 옳은 것인가? 나는 이기적이지 않는가?
<97년 사진... 사진도 세월을 타나보다... 희미해지고 연약해진 빛깔이...^^>
언듯 연결되지 않는 존재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과
나의 기억창고를 채우는 혹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나의 이기적 관심을 저울질 한다.
두 개의 다른 출발과, 두 개의 다른 결말을 충분히 알면서도
하나의 공간에서 나는 연결되지 않은 주제를 붙들고 있다...
사자암이 내게 오래 기억되는 것은 바위를 뚫고 올라온 멋진 소나무와
절벽에서 내려다보이는 주천강의 연초록빛 때문이다...
깊은 곳에 간직된 심원의 흐름처럼 좁지 않고 작지 않은 강물이 예쁜 빛깔로 흐른다...
도화의 화사함과 아늑함 보다는, 무릉의 선경과 시원한 풍광을 좋아 하나 보다...
숙종도, 양사언도, 강희맹도 그의 마음을 남기고 담아갔다...
화순의 적벽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그려보는 것은
수치에 익숙한 우리들로서는 가당치 않은 비유..
그러나 작은 것을 크게 보고, 부분을 전체로 형상화 하는데
조선의 유학자들만큼 소질 많은 이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좁은 이 공간, 높지 않은 절벽, 깊지 않은 이 풍광을 무릉으로 이름했다...
연초록 물빛과 하얀빛의 기묘한 형상들의 바위가 어우러져 깊은 산에 맞닿았다...
주천강은 그렇게 신록에 휩싸여,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으로 존재한다...
물이 색깔로 기억되고,
계곡이 바람으로 기억되고,
조망이 허허로움으로 기억되는 곳...
소나무 껍질에 묻은 세월의 연륜과 흔적들을 벗 삼아 잠시 마음이 노니는데
쉬이 떠나질 못한다...
요선이라 이름 하는 바위에 올라 가까이서 물을 희롱해 본다...
방울방울 빗줄기가 떨어지고 이제는 일어서야 할 시간...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이시는지... 그 하얀살결이 저렇게 점점이... 하얀 곡선이 인상적이었다>
들고 간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주천강을 노래한 신경림의 시를 읽어 본다...
다들 잠이 든 한밤중이면
몸 비틀어 바위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강물에
손을 담가보기도 하고
뻘겋게 머리가 까뭉개져
앓는 소리를 내는 앞산을 보며
천년 긴 세월을 되씹기도 한다... ... ...
<신경림 시인은 이곳에서 며칠을 묵었을까? 힘겹게 살아가며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을 그렸는데...>
<시를 이어가면 ;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틀밭틀에/ 깊드리에 흘린 이들의 피는 아직 선명한데/
성큼성큼 주천 장터로 들어서서 보면/ 짓눌리고 밟히는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숨가쁘게 사랑을 하고/
들뜬 기쁨에 소리 지르고/ 뒤엉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새벽/ 별들은 점잖지 못하다... ...>
고속도로를 포기한 차는 이제 조금 더디지만 짧은 길을 택했다...
굳이 확인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길은 여전히 여유롭다...
속도에 묻히고 시간에 내쫓긴 잡념들은 또 그렇게 나의 머릿속에 잔존한다.
비구름에 가려진 햇빛도 더 이상 가는 시간을 막지 못한다...
새로운 기대는 항상 반틈의 환상과 반틈의 두려움으로 차는 법...
얻음과 잃음, 비움과 채움, 사랑과 이별, 앎과 모름, 그리고 느낌과 외면의 줄타기는
항상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나의 의지와 꿈과 소망은 항상 시간의 소비와 채움의 인고를 필요로 하는 법...
애써 닫아두고 감추고 비껴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 생산의 의욕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모든 꿈과 소망은 지속성과 연속성에서만 의미를 부여받고 현재화 되지 않겠나...
잠시의 허허로운 바람이 또다시 좁은 현실의 채우지 못한 욕망을 부채질했나보다...
이름 없는 암자에, 수주면 미륵암에 나는
나의 시원하고 아름다운 염원을 담아 연등불사에 이름을 적었다...
범신론적 유물론자인 나도 종교의 이름에 기대고 마음의 염원을 산수에 의탁하나?
해결되지 못한 거, 고민 혹은 불안이 있어 현대의 종교는 유지되는지도 모른다.
종교는 더 이상 무한한 생명력과 절대 혹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신을 숭배하는 신앙이 아닐지 모른다.
권선징악과 구복과 기복의 염원이 종교의 실체도 아닐 것이다.
현재화 되지 못한 시간의 공백을 우리는 종교에 의지하고
거래되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마음의 위안을 종교적 공간에서 비우며
경험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함을 종교적 시간에 의탁하는 게 우리들이 아닐까...
기독교의 의심과 불교의 집착 어디쯤에서 나는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본다...
토템이즘, 애니미즘, 주술로 무장한 페티시즘에서 출발한 종교는 물질을 숭배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뿌리가 되는 조로아스터교의 짜라투스트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을 섬기고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신은 나를 믿으라 했다...
나는 니체처럼 신을 버렸을까?
인류 최고의 문학적 서사, 베다를 남긴 힌두교는 행복하기 위해서 버리라고 말한다.
현재를 버리지 못해 힌두교를 박차고 나온 불교는 스스로 구원하라고 가르친다.
몸으로 고행하는 힌두교도와 마음으로 수행하는 불교도는 같은 뿌리다.
이에 반해 내세를 갖지 못한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도덕을 위한 삶의 지침일 수 있다.
나는 바른생활을 살아가며 나 자신을 믿고 있을까?
조금씩의 차이가 근본적인 대립을 만들지 몰라도
여전히 나의 머릿속과 마음은 커다란 개념으로 대답한다...
나를 따르라, 너를 믿으라...
나는 나의 허전함과 빈곤함 어딘가에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의탁하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철학자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살아있다...
신화와 함께, 문학과 함께... 그리고 매트릭스처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꿈의 신 모피어스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트리니티(그녀의 방번호가 303호 맞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그녀는 마리아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101호에 살며,
그리스어로 새로움을 뜻하는 네오(neos, 거꾸로 하면 one, 초월적 존재다)의
무공과 선택이 매트릭스를 깨뜨리는지, 경험하지 못한 매트릭스를 만드는지 모르지만...
연결되지 않은 단상들이 녹음기에 저장되고, 활자가 되고,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다...
살아감과 희망하는 것, 꿈꾸는 것과 현재를 점유하는 것...
잠시의 사유와 일탈에서 나는 또 다른 매트릭스를 만들고 즐기고 있다...
연등을 달고, 나의 이름과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수탁하는 것도 그런 마음중 하나...
나는 여전히 현실의 시간과 가상의 공간을 넘나들며 석탄일에 절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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