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홍천 괘석리 사사자 석탑
3-1. 사자와 석탑
나의 여정이 그렇듯이 일부러 먼 곳 물걸리에서 부터 오늘의 답사가 시작되었다.
찾아오는 길보다, 오던 길을 나서는 것은 항상 가볍고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 길고 굽이굽이 숨어 들어온 길도 순식간에 벗어나는 것은
호사스런 눈 맛이 주는 잔잔한 감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시의 익숙함이 시간의 속도마저 제어하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사자 석탑을 봐야 하는데...
답사여행 길잡이에는 홍천읍사무소라고 되어 있으나
지금은 홍천군의회의 안마당으로 바뀌었다.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장소가
초행길을 더듬는 나에게 생소함이란 모든 것을 더디게 만든다...
더군다나 사사자 석탑이라는 이형은 모든 면에서 친근하지 못한게 사실이다.
<홍천군 의회 앞마당에 놓여있는 괘석리 사사자석탑...>
사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탑이 몇 기가 있다.
모두가 떠올리듯이 화엄사에 사사자 석탑이 두기가 있고,
제천 사자빈사지에 한기, 그리고 함안 주리사지에 한기,
그리고 이곳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까지 다섯기가 아닐까 싶은데
아직 제천과 함안의 석탑은 보지 못하고 자료만 보았다.
<사사자 석탑의 원형이 되면서도 멋진 조화를 부린 화엄사 효대의 사사자 석탑...>
그리고 석탑에 사사자가 안치되거나 사자 석물이 있던 탑으로는
다보탑, 분황사탑, 중흥사탑, 그리고 안동 관덕리탑이 있는데
중흥사지는 석등만 보고(광주박물관) 절터는 가보지 못했고,
관덕리탑의 사자는 대구박물관에 있다는데 역시 보지 못했다.
<분황사... 사자가 탑의 수호신처럼 하층 기단부를 지키고 있다...>
탑을 벗어나 사자와 관련된 불교의 유물들을 잠깐 살펴보면
법주사를 비롯해 중흥사지, 영암사지의 신라시대 서있는 쌍사자 석등과
고달사지, 회암사지, 청룡사터의 앉아있는 석등을 비롯해
용주사, 범어사 등의 계단을 장식하는 사자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2000년 경복궁 뜰안의 고달사 석등... 2002년경 옥개석이 얹어졌고 현재는 용산박물관 내부로...>
3-2 사자와 불교, 그리고 우리나라의 사자상들...
다보탑과 화엄사처럼 사자가 왜 탑에 올라갔을까?
불교에서 사자는 부처의 화신이면서
불법과 부처를 수호하며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다보탑... 4기의 사자상이 어떠 위치였는가에 논란이 많다... 나는 현재 위치였다고 보는 입장...>
사자후는 부처의 설법을, 사자빈신삼매는 부처의 용맹을,
사자심은 불심을, 사자유는 보리심을, 사자좌는 부처의 자리다.
그리고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아우흠(A,U,M)의 사자와 역사들 입모양은
창조의 완전성과 경험과 의식, 침묵과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분황사탑 사자상... 언제보아도 늠름함과 건강한 긴장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예술품...>
사자와 불교가 인도의 아소카왕때부터 친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불교에서 사자가 불교의 상징물로 부각된 것은 화엄종의 영향이라 보는데
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코끼리나 연꽃과 함께 있다면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항상 사자와 함께 그려지며,
화엄경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얻는 이야기가 담긴 경전이다.
<보광사에서... 사자위에 타고 있는게 아마도...^^>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사자의 생명력도 생각보다는 길다.
대가야 김수로왕 비인 허황옥이 머물던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면 2천년이 되고,
삼국시대에 이미 관상용으로 초원과 해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되었고
신라장군 이사부가 목각사자로 울릉도를 항복시킨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자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대중적으로 인지된 동물이었다.
<범어사 돌계단에 자리잡은 사자상...>
<용주사를 지키고 있는 사자상...>
<경복궁의 여러 석수들... 사자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지는 몰라도...>
<이화여대 석수... 신라에서 조선으로 내려올수록 단순화되고 희화화되면서 이름까지 바뀐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도교와 신선사상이 토착화되면서
사자가 해태로 희화화되어 재탄생하고
궁궐과 일부 절에서는 용만큼은 아니지만 시비의 잣대로 상징화되기도 했다.
<광화문앞의 해태상... 해태상중 가장 크고 멋있는... 왜 이 사진이 없지? 일단 엔사이버에서 빌려옴...>
참고로 멸종 위기에 처한 인도사자는 벵골만 호랑이보다 작다.
또 하나, 사자와 호랑이와 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북한에서 실험한 것으로는 곰이 일등, 호랑이가 이등이었고,
에버랜드에서는 곰이 없지만 호랑이가 동물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다...^^
<보광사의 호랑이... 호랑이가 산신각 밖으로 나와서 벽화로 남은 유일한 예?... 민화풍이라는 설명도>
동물원과 영화사 이니셜로 남아있는 사자는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불교를 통해, 혹은 도교와 신선사상을 통해
종교와 권력의 상징으로 우리의 삶에 접목되어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자상은 분황사탑을 수호하는 사자가 가장 늠름하고
앙증맞고 귀여운 모습은 경복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경복궁에 있는... 내가 본 것중에서는 가장 귀엽고 앙증맞은 상이다... 균형도 자태도 좋다...^^>
3-3. 신라불교와 사사자 석탑
아무튼 사자는 불교를 통해 우리의 기억에 각인 되었고 탑에 올라갔다면
화엄종의 파급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답습이나 모방의 전파 때문일까?
화엄종의 보급으로 사자와 관련된 탑들을 생각하면
안동과 전탑을 중심으로 그리던 영역이 훨씬 확대가 된다.
<제천 장락동... 아무리 중국의 전탑을 모방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탑들은 지붕처마가 조금이라도 깊다>
태백의 정암사 - 여주 신륵사 - 제천 장락동 - 안동 - 팔공산 송림사의 맥에
영주 부석사와 지리산 구례 화엄사를 중심으로
이제는 남서쪽으로는 광양에서 북으로는 홍천, 금강산 금장암까지 확대가 되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생각에 불과하고
괘석리 사사자탑이나 함안 주리사지 탑은 모방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 싶다...
<화엄사 원통전 앞의 사사자 석탑... 뜯어 볼수록 정성스러운 모습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상징으로 종파를 구분하고 지역적 분포를 찾는 게
충분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는 많은 무리가 따르고,
게다가 사사자 석탑이 꼭 화엄종의 영향력과 일치한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불교의 흐름과 지역의 분포, 그리고 상징물을 연결시켜 접근하는 것이
근거가 없거나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청룡사지의 사자석등... 신라에서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자가 석등과 함께한 경우가 적지않다...>
신라의 불교는 크게 오대종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보덕의 열반종과 자장율사의 계율종을 통해
신라시대 불교는 권력의 힘을 얻어 확산되고 체계를 잡았고,
원효의 정토종과 의상의 화엄종을 통해 정복전쟁의 혼란기를 수습했고,
이후 진표율사의 법상종 시기를 거쳐 신라말기의 구산선문으로 분화된다.
신라불교의 이러한 종파적 변화와 흐름은 불교의 지역적 전파나
중심사찰의 창건이나 영향력과도 직결되는데
고구려 스님이던 <보덕의 열반종>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며
백제의 남조불교 영향보다 고구려의 북조 대승불교를 계승하였고,
그의 주요한 사찰도 평양과 전주 등 옛 고구려 백제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석가모니 사리를 가져와 적멸보궁을 만들었던 <계율종의 개창자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를 비롯해 통도사,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법흥사를 창건하였고
태백산 정암사의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문수보살과 관련이 깊다.
<법흥사 가는길의 주천 사자암 마애불이다... 암자이름이 사자...>
그 사상적 깊이나 영향력만큼 폭이 넓었던 <원효는
화쟁사상으로> 우리나라 불교의 정수를 이루며 지눌과 쌍벽을 이루게 되는데
정토종, 원융종을 비롯해 다양한 이름과 분파로 뿌리를 내리고
약사여래가 협시한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며,
신라의 수도 경주의 분황사를 근거로 의상의 화엄종과 대립하였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면서 관음사상으로 대중에 접근한 <의상의 화엄종>은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부석사를 중심으로 해인사, 범어사, 보원사 등
화엄십찰을 창건하면서 불교를 국가의 체계로 정립시켰고,
<범어사 전경...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고른 사진임...^^>
정복전쟁 100여년 후 <진표율사는 법상종>을 개창하여
금산사, 법주사, 동화사를 창건하였고 미륵사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서로 보완하고 대립하면서 고려조까지 이어져
한편에서는 화엄종이 무신정권 시대까지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고,
정토종, 선종, 법상종의 흐름이 <의천의 천태종>으로 귀결되면서
우리나라 불교는 토착화되고 도교와 신선사상까지 수용하여
보조국사 <지눌의 조계종>을 거쳐 조선시대로 흘러간다.
<송광사...>
사상의 흐름은 상징을 통해 대중화 되고
대중적인 실천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려 노력한다.
종교의 영원성은 그렇게 가시적인 상징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법...
그러한 의미에서 나의 추론은 단초만을 던지는 것이지
어떠한 결론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수집의 깊이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아무튼 홍천 괘석리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사사자석탑을 찾은 이유다...
4.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이웃한 희망리 삼층석탑과 함께 홍천군의회 마당에 자리 잡은 사사자 석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고
아담한 크기에 마모가 심하고 지붕돌의 파손과
2층과 3층의 몸돌 분실 등 원형이 크게 손상된 상태에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예술적 자료적 가치보다는 사사자 석탑이라는 희귀성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름이 사사자 석탑이지 사자보다는 귀여운 강아지의 모습이다.
석탑 기단부의 굄돌이 강조되고 정성스러운 연화문으로 치장된 점을 빼면
화엄사 사사자 석탑의 천연덕스럽거나 장난스러운 혹은 편안한 모방에 가깝다.
그리고 지붕돌의 형태는 고려계 탑이라기보다는 신라시대의 느낌이 강하다.
바로 옆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희망리 삼층석탑은
홍천강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과장된 기단부에 비해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답신부가 너무 빈약해 보인다.
소박하고 간결하다는 설명보다는 조악하고 건성이라는 느낌까지 드는 것은
나의 주관적 관점일까? 아니면 고졸미를 보지 못하는 나의 얕은 미감 때문일까?
보물 540호인 괘석리 사사자석탑이 물걸리 유물들과 같은 시기에 지정되었다면
희망리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는 보물 79, 80호로
이들 유적보다 최소 10여 년 전 부터 관리되었다는 말인데
그당시 보물과 국보의 관리와 지정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늘 의문이다...
5. 홍천 수타사
5-1. 공작산 수타계곡, 수타사
물걸리에서 홍천으로 들어오는 길에 수타사를 들렀다.
횡성 상동리탑과 중금리탑을 보려면 수타사를 보고 갔어야 하는데
길을 잘못 잡은 덕분에 조금은 돌았다... 아무튼...
대개의 산사들이라는 게 요즘은 등산의 집결지나
주말 가족 나들이 공간으로 비교적 친숙해진 것이 일상화 되었고
그런 면에서 홍천의 수타사는 수타계곡과 공작산을 배경으로
홍천군민들에게 친숙한 문화,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내게는 십수년 전에 색시와 왔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때에 비하면 다리도 개축되고 몇몇 전각들도 새로이 조성된 걸보면
산사가 단순히 문화와 휴식의 공간만으로 남아있는 게 아니라
복원과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절 이름 자체가 정토세계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듯이 원효와 관련이 있지만
실상 그 이름은 조선후기인 1811년 경에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고
수타사(壽陀寺)가 유명한 이유는 풍수지리 때문이다.
공작이 앞을 품은 공작포란지지(孔雀抱卵之地)의 형국에
동쪽은 공작이 나래를 펴고 솟아오르는 듯한 동용공작(東聳孔雀)
서쪽은 소가 내달리는 듯하다는 서치우적(西馳牛迹)
남쪽으로는 용이 승천하는 듯하다는 남횡비룡(南橫飛龍)
북쪽으로는 용의 형상을 닮은 못이 유유히 넘쳐흘러 북류용담(北流龍潭)으로
묘사되는 공작산 수타(水墮)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물론 공작산 정상에서 풍수를 음미하지 못했기에 그 깊은 뜻을 알길 없는데다
수타계곡의 흐르는 계류와 담수가 자극하는 것은 옛적 웃음을 되살릴 수 있을 뿐...
아직 봄기운을 맞이하지 못한 산속에 녹색의 물이 흐르는 계곡을 거닐며
잠시나마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조금의 여유를 만들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별한 유적과 유물을 보기 위해 찾은 수타사는 아니다.
사실 풍수지리를 통해 수타사의 특별한 맛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나 이만한 절집이 자리 잡아 지역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면 족한 법...
사람들도 복되고 절도 흥하면 지나가는 나 같은 구경꾼도 편한 법이다...
5-2. 풍수지리와 도참사상...
풍수지리... 오랜 시간 우리네 삶과 함께 했고
최근의 부동산 열풍도 천년전 도선국사의 묵은 주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고려태조 왕건의 탄생과 함께 시작한 도선대사의 풍수비보는
조선조에 궁궐과 왕릉, 그리고 집터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생활의 터전과 죽음의 공간, 그리고 공동체의 공간을 좌우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람이 살아가는 집에 대한 양택,
사람들이 머무는 마을과 도시의 입지를 결정하는 양기,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머무는 묘지에 대한 음택까지
도참사상은 왕을 낳고 역적을 만들며, 근현대의 대한민국에까지 뿌리를 내린
기복적 관념이 토착화된 관습적 민속이 되었다.
<풍수비보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운주사... 배의 형국과 무게를 맞추기 위한... 설화가 많은 곳...>
자연지리라고 말하기에 인문적 성격이 강하고
단순한 지리라고 말하기에는 문화적 성향도 짙은 게 풍수지리다.
그런 이유로 조선의 건국과 왕도의 결정까지 좌우할 정도로 부각되었지만
엄밀히 풍수지리는 땅과 인물에 대한 관념이라기보다
바람과 물이 흐르는 땅에 관한 이치다.
사실 산과 물이 있어야 바람이 있고
해와 방향이 있어야 빛이 있고
바람과 빛이 있어야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의 정서가 결정되는 것은
단순한 미신이나 개인적 성향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
더군다나 근현대의 공업이 문명을 주도하기 이전의 우리네 삶은
농업이 모든 지표가 되었고 삶을 질을 결정했기에 더더욱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물걸리...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들판이... 사람이 사는 곳과 바람이 머무는 곳을 구별했던 선조들>
더군다나 조선말기의 농민봉기에서부터 1960년대 공업이 산업을 주도하기 전까지
근 백여년을 혼란과 궁핍한 시기로 살아야만 했던 우리네 선조들에게
지도자와 위인에 대한 기대와 물질적 부에 대한 욕망은
그 어떠한 민속과 관습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시대적 환경도 있었을 거고...
5-3. 풍수지리가 주는 의미...
나는 개인적으로 최창조씨의 풍수지리에 관한 주장에 동조하는 편인데
물론 그분의 주장이 우리네 풍수비보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풍수지리의 현대적 의의를 해석하는데 있다면
나의 관심은 고려와 조선이라는 두 왕조를 만드는데 깊은 영향을 미친
도참사상의 역사적 영향력과 현대적 의의를 읽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여기서부터는 수타사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하나하나의 절집에도 풍수의 의의가 담겨있고
전국의 수많은 고택과 묘지들이 풍수지리에 의해 해석되고 재단되는데
풍수지리를 단순한 관습이나 봉건적 잔재로 격하시키기에는
우리네 유산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하고 부여한 의미들이 적지 않다...
물론 과학적 근거에 대해 일관성이 없고,
송광사는 연꽃의 한가운데여서 탑을 두지 않았는데
성주사지는 연꽃의 중심에 자리 잡았으면서도 탑이 4기나 있다는 등
아전인수식의 해석으로 상충된 경우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고,
게다가 비보의 주문은 운주사처럼 즐거운 설화가 될 수도 있지만
연약한 민초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족쇄와 운명일 수도 있는
양면의 칼날을 도참사상은 가지고 있다.
양택을 생각하기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태생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음택을 생각하기에 우리들이 살 수 있는 땅값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며
양기를 생각하기에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도시는 땅값 보상비에 좌지 된다.
정치적 득실과 향유할 수 있는 부에 풍수지리가 우지 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즐거운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풍수지리가 있어 산과 물이 인문적으로 대화될 수 있고
풍수비보가 있어 역사를 접근하는데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바람과 물의 흐름을 사람의 이치로 끌어들인
자연과 인간을 우주의 부분으로 확대 심화시킨 선조들의 안목이 즐겁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시내에서 풍수지리로 제일 좋은 곳이 네 곳이 있는데
하나는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
인왕산과 앵봉산 백련산 사이 어디쯤...
동작동과 반포동 사이, 그리고 대모산 북동쪽 어디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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