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횡성 상동리 삼층탑과 석불좌상
6-1. 상동리로 가는길에서...
어설픈 풍수지리에 대한 생각도, 실은 횡성 중금리 탑을 찾아가는
깊고 깊은 산속 길의 무료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공업적 지표도 전무하고 상업적 네트워크도 미비한 작은 도시는
풍수와 사람들의 인정, 그리고 계절의 변화만이 유일한 접근통로이기 때문이다.
<군도 406번 길... 다니는 길에 잠시 비도 내리고... 멀리 자작나무가 군집을 이루며 봄을 기다린다...>
답사여행 길잡이에도 나와 있지 않고, 지도와 이름, 그리고 방향만으로
정해진 목적지를 찾는 게 그리 만만하지도 않고
그 골속골짝에 깃든 민초들의 삶의 여정도 수많은 사연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엉뚱하게 저 마을은 인물이 나왔나,
저 집은 별 탈 없이 안녕하실까 하는 온갖 잡생각에 한없이 들어간다...^^
많이 확장된 국도로 가자니 너무 도는데다 무미건조하고
이름 없는 지방도는 방향과 감각을 자극하는데다
이정표를 놓칠라 온갖 정성도 필요하지만
주변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고,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다는
김수근씨의 말을 잠시 되새겨 본다.
그렇게 우리가 선택한 하드웨어는 우리의 감성을 규정하고
우리가 만든 도참사상은 우리네 터전에 등급을 매겼다... 시비를 떠나서...
6-2. 원주, 횡성지역의 불교유적...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고적도보에는 원주와 횡성지역의 불교유적을
경주의 양과 비교할 정도로 풍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법천사지, 거돈사지, 흥법사지 외에도
한곳에 석불이 4구나 있던 곳도 있고, 탑이 많았던 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용산 중앙박물관의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
그러나 대부분의 이곳 유적들은 제대로 관리 보존되지 못한체
제자리를 떠나 일본으로 박물관으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사실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마한의 세력권에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영향력에 놓인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또한 영동과 영서 문물교류의 중심지였다.
<용산 중앙박물관의 흥법사 진공국사 부도...>
그런 만큼 각 시대를 거치면서 누적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있었겠지만
또한 그러한 이유로 그만큼 많이 파괴되고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원주에 적지 않은 시간을 머물면서
늘 경주나 안동, 지리산, 팔공산 등을 그리워하는 내게도 문제가 있겠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역시 시대를 주도하고
문물이 고이고 확대재생산 되어야 제 몫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용산 중앙박물관의 천수사탑... 모두 일제 강점기때 경복궁으로 옮겨와 현재는 용산으로...>
홍천, 원주, 횡성의 많은 유물들도 관리의 질적 체계와 접근의 편의성,
그리고 적극적인 보존 의지와 홍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절한 이정표도 주변의 관리도 부실하여
필요로 하는 사람이외에는 무관심의 대상이고,
유물의 존재와 보존에 대한 자부심도 없다는 느낌이 컸다.
<홍천 물걸리 절터 바로옆 화장실... 필요가 시설을 만들고, 의지가 관리하는 법인데...>
6-3. 상동리 석탑과 석불좌상
횡성 공근면 상동리 석탑과 석불은 아담한 크기에
마을끝자락 한적한 도로변에 조그만 계류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서있었다.
석좌는 고려시대 작품이지만 불두는 최근에 만들어 안치했고
왜소하고 성근 솜씨로 조성되었다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20, 21호다.
그러나 답사기의 안내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참 편안한 느낌이었는데,
작고 소박하게... 소탈하고 은근하게...
멋도 부리지 않고, 권위도 포기하고,
최소의 공력과 약간의 장식을 가지고 역사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초라하거나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좁지 않은 논밭에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사람들과 함께하며
작은 마을의 장승처럼 의젓한 지킴이 노릇도 톡톡히 하기 때문이리라...
작은 물소리와 작은 봉오리들 속에 그렇게 다소곳이 어울렸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근래에 조성되어 올려졌다... 얼굴을 보면서 잠시 김복진이란 사람이 생각난다...>
<김복진... 현재 법주사 청동불상이 들어서기전, 1934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철근콘크리트 불상이
동양최대(?)의 크기로 조성돼 있었다... 균열문제로 해체되었다고 하는데 사상의 문제는 없었을지...>
7. 횡성 중금리 삼층쌍탑
7-1. 횡성댐 중금리
이제는 19번 국도를 찾아야 한다.
봄의 전령이 타고 오는길... 화개장터에서 이곳까지 이어진 19번 국도...
횡성댐을 찾고 갑천이란 곳을 찾아야 한다.
같은 길을 오가는 것보다는 횡성댐을 한바퀴 도는 게 즐거운 운전일 듯...
결국 산불조심 계도차량을 세워 길을 물었다...^^
지도에도 어디에도 중금리탑에 대한 안내가 없다.
단지 횡성댐 어디메쯤, 갑천과 횡성 사이만 짐작할 뿐...
시나브로 저무는 해를 아쉬워하며 횡성댐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 순간 두기의 탑이 시야에 들어오고...ㅎㅎㅎ 결국 찾았다...
<해는 넘어가고 비까지 내려 어두워지고... 필름은 다 떨어지는데... 전망이 괜찮아 횡성댐을 잡았는데
그때 중금리 삼층쌍탑이 멀리서 보였다...^^ 중금리 이정표를 보면서 들어가면 망향의 동산이 같이...>
답사여행 길잡이에는 “ 강원도에선 보기 드문, 규모가 꽤 큰 탑이지만
그리 품격을 갖춘 탑은 아니며
평평한 밭 가운데 두기의 탑이 쌍바라기를 하고 있고
강원도 유형문화재 19호로 지정되었다 ”고 하지만 역시 내게는 좋았던 탑...
7-2. 큰 탑이 좋다 ?...
최근에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을 보면서 전성기 신라의 삼층탑을 정리하고 있는데
첫 번째 잣대가 탑의 크기였다. 높이 5m 이상이 나의 기준이다.
높이 5m 이상이면 상륜부까지 7~9m 이상의 크기가 된다.
큰게 좋은가? 좋다! 석굴암 본존불도, 감은사탑도, 석가탑도
그 크기가 있어 그 장중함과 흡입력, 미적감동은 절대 비교를 허락지 않는다.
충분한 크기의 석가탑을 비롯한, 실상사, 직지사, 봉정사 등의 탑들과
술정리 동탑, 기성동, 봉기동, 천군동, 창림사, 양피사, 미탄사, 원원사 탑들은
여늬 탑들에 비해 한차원 다른 미감과 장엄함을 선보인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판석의 넓이에 비해 기단부가 약한 흠이 있지만, 충분한 크기를 가지고...>
물론 우리가 배운 도덕과 바른생활은 형식보다는 내용, 양보다는 질을 강조했고
심지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접하는 철학들은 현상보다는 본질을 겨냥했다.
진리와 미덕, 사실과 가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분석적이며 이성을 강조한 접근과
합리적 판단의 의의를 평가절하하거나 시비를 논할 의도는 없지만,
형식과 내용, 양과 질, 감정과 이성, 그리고 얼굴과 마음까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전자의 저급함 혹은 평가절하와 함께 후자의 우월함과 성숙함을 거론한다.
서양의 유적과 우리의 유물을 비교할 때도 그렇고
중국 일본의 나무로 만든 건물이나 탑과 우리네 석조유물을 비교할 때도 그렇다.
심지어 도덕이나 교양, 혹은 지식의 깊고 얕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내용과 질을 우선시하며,
감정을 가벼이 여기고 사람도 마음과 성격을 중시한다.
<왜 이부분을 쓰면서 종묘가 생각났는지 모른다... 조선 성리학이 그렇게 폐쇄적인 학문은 아닌데...>
도교의 자연관과 불교의 선종, 그리고 유교의 인물성 동이논쟁까지
과거 수천년의 정신사적 흔적에 기인한바 적지 않지만
감정과 이성, 얼굴과 마음은 논외로 치더라도
형식과 양, 현상이 저급하게 취급받아야 할 근거는 없다.
특히 인물성 동이 논쟁은 무극태극, 사단칠정, 인심도심논쟁의 쟁점을 이어받아
그 당시에는 이와 기의 본원성 문제로 표현되었지만 핵심은
진리와 본질에 대한 인식론의 문제였고, 인간의 도리와 마음을 주제로 삼아
조선후기의 심설논쟁에 이르기까지 400년을 넘게 조선 성리학의 버팀목이 되었다.
형식과 양의 문제가 저급한 거품처럼 평가 된데에는
면면한 사상적 깊이와 함께, 논쟁이 당쟁이 되고
당쟁 속에 피로 얼룩진 조선 성리학의 서슬이 묻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 허실과 관념적 토양이 너무 공고하게 고착되었다는데 있지만...
<조선 성리학의 합리적이고 진취적이고 생산적인 많은 의미는, 역사의 흐름이 지속될수록 퇴색되고
엄숙함과 자기완결적인 당쟁에 휩쌓이게 된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관념성이 문제였다...>
아무튼 형식과 양, 그리고 현상은 우리의 첫 번째 인지 대상이고
그 중요성은 내용과 질, 그리고 본질에 못지않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고, 양의 축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하나의 현상은 또 다른 현상의 본질 일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이 미국의 대중문화가 득세한 이유이기도 하고
도구적 이성과 관료주의를 비판한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출발이며,
일탈, 질주, 해체를 전제로 한 포스트 모더니즘이 발아된 계기이기도 하고
복잡계와 네트워크의 수평적 연대가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완고함은 폐쇄적이 되고, 엄숙함은 권위주의화 되고, 결국 높은 담은 고립되고 자족적이 된다...>
판테온과 석굴암, 베르사이유 궁전과 종묘를 직접 비교할 수는 없지만
보다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접근은 우리에게 다양한 미감을 보장할 수 있다.
호불호의 문제가 시비의 문제로 등치되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동일한 선상에서 동일한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프로쿠르스테스의 침대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모와 크기에 대한 비교와 차이에 인색할 이유는 없다.
감은사탑과 희망리 삼층탑의 우열을 나누고 호불호를 논하는 것이
결코 저급하거나 부질없는 사유는 절대 아니다.
규모와 불륨이 주는 권위의 깊이와 품격의 무게는 충분히 구별되어야 한다.
깊이와 넓이, 그리고 크기는 절대 중요하다...
다른 맛과 미감의 차이를 즐기는 것은 우리를 열린 길로 인도하지 않을까?
3-3. 횡성댐에서 중금리 쌍탑을 바라본다...
탑을 보러가면서 역시 럭비공 같은 나의 자유스러움이
엉뚱한 주제를 물고 늘어졌지만 중금리 탑을 보면서
규모 있는 탑이 주는 생동감과 희열은
오늘 보았던 여느 탑들이 주는 자극과 감상에 비할 바는 아니다.
기단부 판석 일부와 몸돌 일부가 복원되어 놓여 있는 쌍탑으로 5m 크기다.
석탑 양식은 창림사지탑이나 양피사지탑과 거의 흡사하다고 생각되며
쌍탑으로 놓인 모습은 경주의 천궁동이나 운문사, 월광사지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탑의 규모가 조금 작아졌을뿐 인근 영서지방에 남아있는
선림원탑, 거돈사탑 보다는 분명 규모 있는 든직함을 가지고 있다.
2000년 횡성댐을 건설하면서
갑천면 일대 260여 세대 수몰민들을 위한 기념관이 건립하였고
98년 2km 정도 떨어진 탑둔리란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는데
횡성댐을 바라보는 좋은 전망에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위치다...
갑자기 충주 탑평리 칠층탑이 보고 싶네...
일부 팔부중상이 복원되고 석질의 연륜으로 질감의 차이가 분명한 단점은 있지만
횡성댐을 내려다보는 시원한 조망을 갖추고 있고
탑 자체가 주는 건실함과 든든한 안정감은 충분히 약점을 보완 할만하다.
언제고 물과 탑을 같이 보고 싶을 때 올 곳이 생겼다는 즐거움이 컸던 만큼
당당하고 기품 넘쳤을 원형을 조용조용히 그려 본다...
<다른분들 블로그를 보면서 사진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될수록 많이 올렸다...>
8. 홍천, 횡성지역 답사여행을 마치며...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다고 떠났던 몇 시간의 흔적보다
컴앞에 앉아, 이생각 저생각에 담배연기로 폐를 혹사시키는 것이 더 힘들다.
하지만 물걸리 절터에서 드디어 사진을 찍었고
오랜 숙원중 하나였던 사사자 석탑을 보면서 화엄사탑의 또 다른 미를 발견했다.
십수년전 색시와 놀던 수타사도 둘러 봤고
인적도 드물고 차량도 없는 강원도 외진 길들을 둘러보며 풍수지리도 생각해 봤다.
그냥 오는 길이 아쉬워 돌았던 횡성에서는 뜻하지 않는 중금리탑을 보며 즐거웠고
많은 시간 머무는 원주 인근의 유적지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좋았다...
한 지역을 여행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했던 시간들이다.
한 시대의 상징물들을 보면서 사상을 생각하고 민초들의 삶을 생각해 본다.
민초와 민중, 백성과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정작 우리들의 기억을 채우는 것은 특정시대를 대표하는 지도자와 예술품이다.
<종묘 제례중에...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선도하지 못한 사상과 체계의 힘겨움이 느껴졌다.>
뛰어난 사람들과 문화는 시대를 선도하지만
역사와 제도는 그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민초들의 삶으로 규정된다.
독창적이든 탁월하든 그 정신을 선택하고 평가하는 것은
후대의 우리들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수준과 흐름이었다.
<횡성... 홍천강과 원주천의 중간크기... 홍천강의 도도한 흐름은 나름의 특성으로 유지되고,
원주천의 얕고 빠른 흐름은 교통의 요충이 되었는데, 횡성은 그 중간에서 자꾸 움추려드는 느낌...>
그 양면을 모두 보고, 흐름과 양식의 빛과 그림자를
동일한 기준과 가치에서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지
엘리트주의와 영웅사관, 혹은 계급의식이나 민중사관이라는 이름으로
형식과 현상을 재단하고 부정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지 않을까?
홍천의 깊은 산길을 벗어나 횡성에 들어오면서 FTA 깃발들이 나부낀다.
주변의 많은 경작지들이 검은 차양막이 드리워진 인삼밭으로 변했다.
농작을 포기하면 80%까지 지원되는 농업보조금의 또 다른 일면을 본다.
농사를 포기하고 일시불로 지원금을 받으며, 임대사업을 하지만
인삼밭이 어떤 흐름에서 경작이 되고 농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안다.
<횡성댐 인근, 갑천면을 가는 길에... 산불조심 깃발아래 FTA 관련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씁쓸한 마음으로 횡성댐 주변에서 봄의 전령들을 만났다.
흰색, 노란색, 분홍색... 군무로 마음을 휘잡는 감상은 없지만
계절의 변화가 주는 자연의 단장은 여전히 부푼 봄기운으로 들뜨게 만든다.
나는 꽃으로 계절을 보나?
용평에서 보았던 산벚꽃이나 이화의 요염한 자태들이 그립지만
여전히 나에게 봄의 색깔은 연두색이 아닐까...
새싹이 트고, 가지에 오른 물이 생명을 피우는 모습들...
내게 겨울과 봄의 경계는 연두빛 은은함으로 채워진다.
<홍천 물걸리 절터에서...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과 야생초... 여전히 나는 이름을 모른다...ㅎㅎㅎ>
이럴 때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눈 감고 하늘 볼일이 아니라면 바흐는 그렇고
아이들이 뛰노는 정겨운 모습을 보는 것도 아니니 모차르트도 안 어울리고
깊은 산속의 우람한 나무길을 걷는다면 베토벤이 어울린텐데...
차라리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쪽이 괜찮을려나?
CD를 뒤적이지만 내키지 않는다... 이런 봄에는
그리고 외지지만 깊지 않은 곳에서는 퓨전식의 크로스오버가 더 어울리겠지...
현장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휴일 근무를 하던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김부장 고향이 원주고, 김기사 고향이 홍천이어서 한참 웃었다.
자네들 물걸리 아나? 괘석리는? 상동리는? 중금리는?
그 친구들이 아는 것은 횡성댐과 희망리...
<종묘 제례중에...>
물론 나도 처음 돌았던 길들이고 역사의 흔적들이지만
아직 우리의 삶속에는 단절된 것들이 너무 많다.
역사도 민속도 사상도 인물도...
길 위에 디딘 발걸음으로 너무 많은 욕심을 채우는지 모르지만
또 길이 있어 생명이 품에 들어오고 마을이 생기는 게 아닌지...
아쉬움보다 우선인 것은 그들의 고향과
삶의 터전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가감 없이 공유하는 것...
조금이나마 여유 있고 관심 있는 내가 할 일이 아닐까...
괜한 헛소리가 그들의 식사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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