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그러들지 않은 장마덕분에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도 안 된다는 강박감도 있지만...^^
거돈사지를 향하는 차는 자꾸 제자리를 빙빙 돈다...
애매한 이정표만 탓하며 남한강의 굽이굽이 흙탕물을 보면서 거돈사로 향한다.
<왼편 아래쪽 문막에 법천사지, 거돈사지, 미륵산이 있고, 왼편 위쪽에 흥법사지가 있다...>
그래 여기였지...ㅎㅎㅎ
안도의 한숨은 잠시 기억의 노쇠함을 증명하는 듯...
보원사지와 비슷한 배치일까? 그보다는 가로의 폭이 좁고 막다른 길...
선림원터의 석축과 비교하자니 그보다는 넓고 아늑한 맛이 있다...
고달사지에 비하면 저수지와 얕은 하천이 풍요로움을 더하고...
어차피 막다른 길인데 여기까지 이렇게 거창하게 포장해야 했을까?
<1000년된 느티나무와 생명을 찾을 수 없는 고목이 나란히 거돈사지를 지키고 있다... >
단단하고 단호한 모습의 원공국사승묘탑비를 본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진 부도와 비교하면 맛이 다르다.
부도의 둥글둥글하고 원만한 원의 이미지는
승묘탑 귀부의 다부진 이미지와 조금, 혹은 많이 다르다...^^
사실 문막일대의 흥법사, 거돈사, 법천사는 시대의 변화를 추적하기 적당한 곳이다.
고려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썼었다는 진공대사의 부도비 일부가 흥법사에 있고(940년경),
그로부터 80여년이 지나 고려의 체계가 정립된 광종대 이후 조성된
거돈사에는 원공국사의 승묘탑비가 세워지고
다시 60여년이 지나 고려의 문물이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11세기 후반 문종대에
지광국사 현묘탑과 현묘비가 법천사지에 건립된다.
<흥법사의 진공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 고달사지와 비교하면 재밌다...>
신라의 양식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퇴화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
자기성찰과 심성의 본원을 갈구하며 선종이 대세를 이루던 시기...
그리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새로운 사상적 기틀과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던 시기...
종교적 예술적 원심력이 다시 구심력을 찾으려는 시기에 흥법사의 유적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의 완숙한 경지를, 당시 고려의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했고
전통의 계승과 발전은 혼재되어 나타난다.
신라가 멸망한지 100여년이 지나 전통의 형태에 치중하여 겉모습은 변화가 없고
디테일한 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도 보이는 곳이 거돈사 승묘비와 부도의 느낌이다.
<비교하는 차원에서 한컷 추가... 법천사지에서 충분히 설명했나?^^>
다시 신라 멸망 150년이 지나 법천사지는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연곡사 동부도와 북부도에서 보여진 화려함과 섬세한 모습을 완전히 계승하면서도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에서 보여진 부도의 가장 초기의 방형(사각형 기단에 팔각원당 탑신)태를 새롭게 해석한
완벽하면서도 독보적인 모습의 지광국사현묘탑과 현묘탑비...
<고달사지의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 활달한 필치의 거침없는 손놀림이 느껴지는 당찬모습>
흥법사의 진공대사 귀부와 이수를 후대의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비와 비교하면
흥법사쪽이 귀부와 이수도 훨씬 부드럽지만, 이수는 초기형태에 훨씬 가깝다.
고달사의 혜진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생동감과 역동성,
그리고 굵고 활기찬 당당함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멋진 유적임이 분명하다.
바로 전대의 흥법사 귀부와 이수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조성된 고달사 유적은 이수의 기본형태를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또한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의 귀부와 이수에 와서는 새로운 변화의 흔적들이 나타나며
법천사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창조 된다...
<많이 간결해졌다... 그러나 정성과 규모에 맞는 단호함은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를 떨어버린 느낌...>
이런 의미에서 거돈사지는 흥법사에서 고달사를 거쳐 법천사로 넘어가는
중간의 과도기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법천사에서 느끼는 뭔지 모르는 허전함의 실체를 거돈사에서 느끼는지도 모르고...
사실 법천사의 유적들은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뛰어나고 아름다워서
내가 다가갈 그 어떤 여유와 빈틈이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뽐내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
너무나 고고하고 현란해서 자포자기를 유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그리고 아무도 현묘탑과 현묘탑비 같은, 비슷한 그 어떤 유물도 후대는 남기지 못했다.
<현묘탑은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보고... 잠시 거돈사에 피어있는 꽃밭에 앉아 본다...^^>
모든 전통의 계승과 발전은 모방과 답습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충분한 시행착오와 양적축적은 새로운 변화의 기틀과 완성태를 지향한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신라의 석탑이 석가탑으로 완성되듯, 현묘탑도 또다른 완성이었다.
그러나 석가탑이 모든 삼층석탑의 표준이 되고 모든 삼층탑들이 닮은꼴로 재생산되지만
현묘탑은 부도의 정점에 있으면서 어떠한 아류와 모방을 허락하지 않고 단절된다.
그차이는 석가탑을 찾는 이의 수와 현묘탑을 찾는 이의 양적인 차이만큼 비교된다....
아무튼 거돈사 승묘탑비를 만든 석공은
인근에 있는 고달사지와 흥법사지의 귀부를 보면서 움추린 머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용머리로 불리는 귀부를 꼿꼿하게 세워 당당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귀부와 이수의 각종 조각과 부조들이 단순화시켜 안정감을 되찾고
간결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작지만 다부진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하얀 삼층탑이 보인다...
참 하얗다...
나원리 오층탑을 백탑이라고 하는데 여기가 한수위 같은데...
그런데 뭔가 달라졌다...
사진을 보면 2000년 겨울에 이곳은 복원공사로 녹색 갑바들이 여기저기 쳐있었다...
<2000년 12월... 비교해보면 탑이 해체 수리된 듯 하다...>
거돈사지 탑의 특징중 하나는 탑이 대웅전처럼 마당보다 높게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탑 밑, 기단부라 하기도 뭐하고 돋움부라 하기도 뭐하고...
아무튼 지금보다는 좁게 조적식 판재로 쌓은 석축위에 탑이 있었는데
지금은 판재에 두겁석을 놓고 계단까지 조성했다...
아마도 대웅전의 크기 혹은 높이와 연관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중층구조였을까?
아무튼~~~ 좋아졌는가?
자꾸 어색하다는 생각에 계단이 거슬린다.
<참 맑고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기단부 하부의 돋음처리가 제대로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부재 하나하나의 마감들이 매끄럽고 간결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우주의 돋을새김이나 옥개석 층급받침의 세련된 마무리...
깔끔하다. 그리고 깨끗하다...^^
지난번 글에서 나는 거돈사탑의 1층 탑신이 길어졌고
이러한 요소가 전체적인 탑의 미감을 좌우했다고 지적한바 있다.
이유가 뭘까?
천천히 뜯어보면 1층 탑신과 1층 옥개석(지붕돌)의 비례문제다.
혹자는 석가탑의 체감율을 탑신 4:2:2에 옥개석 4:3:2의 비례라고 지적한바 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하지만 기단부에서 층급받침을 포함한 1층 탑신의 옥개석까지의 높이는 대략
삼층 옥개석 넓이와 비슷한 비례를 가지고 있다.
탑의 체감율은 균형과 비례, 안정과 긴장에 따른 맛을 느끼게 하고
변화와 개성에 따른 나의 감상은 분명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거돈사탑은 1층 탑신높이가 3층 옥개석의 넓이보다 길다...
역으로 1층 탑신의 높이가 길어졌다기보다는 1층 옥개석의 넓이가 좁다는게 맞다...
옥개석의 넓이와 높이, 그리고 마감처리는 탑의 미감에 결정적인 요소다.
흔히 백제계와 신라계의 차이, 그리고 신라탑과 고려탑의 차이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석가탑... 기단부를 비롯해 옥개석의 변화와 차이를 비교해 보는것도 답사의 재미중 하나다...>
이렇게까지 뜯어보면 나의 석탑 순례는 비교와 분석에 좌우되어 미감을 놓치기 쉽다.
또는 절대미감을 전제하여 각부재와 마감처리 하나 하나를 비교하여
미감의 질량을 측정하는 우를 범할 수 도 있고...
변명하건데 이것은 나의 호불호의 문제이지, 등급의 차별을 위함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에 따른 미술사적인 변화와 역사적 배경을 찾고
나의 감상을 풍부하기 위한 시도라 변명해 본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여서인지 나에게 보이는 거돈사탑은
여리고, 가늘고, 단아한 맛이다...
정성스러운 손놀림과 완숙한 석공의 머릿속에 그려진 삼층석탑은
넓은 뜨락에 홀로 남아, 단정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거돈사의 허허로움을 채우며 서있다.
<원공대사 부도가 있던 곳은 맨 윗자리다... 현재 용산 국립박물관에...>
제법 넓고 호젓한 곳에 참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공대사 부도가 있던 곳으로 오르는 자연석 석축이 부분 부분 배치되고
완만한 경사에 자연스럽고 조용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그렇게 앉아 있다...
<배례석 같은 연꽃무늬의 부재... 작은 부재들이 만드는 공간감과 장치는 답사의 또다른 재미...>
가끔씩 떨어지는 빗줄기보다 내몸에서 흐르는 육수다 더 많다...
습습하고 변화무쌍한 날씨는 나의 걸음을 재촉한다.
아직 가보지 못했던 미륵산의 황산사 석탑과 주포리 미륵불이 행선지다.
<미륵산... 가운데 위쪽에 보이는 바위에 주포리 미륵불이 새겨져 있다... 너무 높다...ㅠㅠ>
체험, 웰빙, 그리고 전원주택지와 펜션의 분양...
각종 미사여구로 포장된 개발의 난잡함은 교통과 입지와 공공의 이익과 무관하다.
단지 자본의 흐름이며, 이에 편승한 삶의 몸부림이며, 새로운 자극에 대한 타협일 뿐이다.
<주포리 미륵불... 고려시대 양식... 꽤 클것 같은데 지금까지 몰랐다... 원주시 자료에서...>
어렵게 찾은 미륵산은 역시 나를 거부한다.
떨어지는 빗줄기와 저 산꼭대기~~~가 요구하는 시간과 노동의 흥정은
오르지 않는 나를 저울질하고... 결국 포기한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검은 구름을 향해 차는 방향을 돌리고
흥법사와 비두리를 다음으로 넘긴다...
<황산사의 삼층석탑... 골속 골속 들어간 곳에서도 30분을 걸어 올라야 한다는 말에 포기...^^>
거돈사지에서 봤던 느티나무를 보면서 담배를 물었던 기억이 남는다...
강원 - 원주 - 9호, 82년 11월 지정, 수령 1,000년...
저탑은 1000년도 넘은 나이...
탑을 보면서 몰랐던 억겁의 무게가 왜 나무에서 느껴졌을까?
살아있는 생물과 나이가 없는 돌의 차이일까?
<석축이 나무를 떠 받치는지... 나무가 석축의 한부분인지 모르게 그렇게 서있다...>
1000년전 작은 씨앗하나...
그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살아남았다... 1000년을...
그리고 나는 여전히 선택을 고민한다...
<커다란 고목과 작은 들꽃...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남은 것과 사라진 것... 우리네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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