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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여행> 0103 양양, 고성을...

 

원주...

내일은 뭘 할까?

갑자기 2일 몇 개의 약속이 잡히면서 갈팡질팡...

그래.. 바다를 보자...

또?

머리는 식을까?


사실 오는 길에 양평의 정약용 생가에 들렀다...

글쎄 가족단위로 몇 사람들이 오가고...

웨딩 촬영장소로 애용되는지 몇 팀이 열심히 사진 찍고 있다.

안 추울까?

늘 지나치기만 했던 정약용 생가...

그래 정약용... 오늘 마져 그냥 지나치기는 아쉽고...

 

* 정약용 생가 : 빌려옴...

 


 

한때는 우리나라 사상사의 가장 높은 자리에 나는 다산을 놓았다.

물론 그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과 열정, 그리고 안목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묘지에 올라서 양수리의 전망을 바라봤다.

시원한 맛이다. 앞의 비닐하우스와 틘 색깔의 지붕을 빼면...

담배를 하나 물어서 묘 앞에 놓는다.

 

* 묘지 : 빌려옴...

 


 

선생님!!!

나는 정약용의 어느 때를 선생이라 부르는가?

그분과 대화한다면 언제 때의 선생을 찾는가?

70세가 넘은 만년의? 아니면 거중기를 만들고 수원성을 만들던 2,30대의 선생?

아니면 암행어사로 다니던 30대의 활발한 시기의 청년?

그래도 역시 강진에 유배되던 4,50대의 정약용이 내게는 선생으로 생각된다.

같이 맞담배를 피우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 강진 천일각... 시원한 전망에 절로 환한 마음이...

 


 

천일포.(아마 기억이 맞다면,,,)

언젠가 강진에 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차를 세운 적이 있다.

너무 좋은 경치여서...

결국 색시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즐겼지만...

그 천일포가 보이는 곳에 천일각이 있고,

그곳 좌우로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다.

아마도 다산의 산책코스였을 것이다.

 

 


자료실에 들어가 몇 가지의 자료를 물어본다.

시큰둥한 대답과 건성의 대답...

어디에서 오셨어요?

그러더니 간단한 안내문과 자료집 한권, 그리고 CD를 하나 준다.

이곳은 학술자료가 없어서...너무 궁색하지?

 

다산의 <자찬묘비명>을 베껴 쓴다.

나는 사서와 육경을 모두 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의 모든 걸 아는가?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가?

 

* 강진 다산초당...

 


 

선생의 묘지를 바라보면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할지 궁색한 생각만 한다.

지난번엔 이이의 묘지에 갔었다.

성역화해 놓은 장소... 넓으면 이게 성역화인가?

병산서원에서 생각해본 이황의 사상들...

그리고 오늘 다시 정약용...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양수리의 시원한 전망과 주변의 풍광은 나를 더 왜소하게 만든다...

그래도 일단 다녀오니 미안한 감은 이제 덜은 것 같다.

 

* 양수리 두물머리 : 시원한 전망에... 빌려옴

 


 

사실 원주에서의 만남은 성과가 전혀 없었고,

그렇다고 그냥 숙소로 향하기엔 내일이 너무 답답하고...

전화를 하고... 싫어하는 목소리...

그래도...

일단 간다고 생각을 하니 목적지를 만들어야 한다.

 

차들이 많다.

야 하루 휴일인데도 이렇게 많이 움직이나?

또 내일은 비가 온다는데...

그래 낙산사, 진전사터, 그리고 선림원터를 가자...

 

* 늘 그려본다... 장엄한 바다의 주문을...

 


 

침대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모텔을 잡았다...

밤바다!!!

파도소리로 족하다.

창문을 열면 시원한 소리... 상큼한 파도소리가 출렁인다.

노트북을 들고 올라왔는데 전화벨에 그냥 잔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건봉사도 들르자...

 

* 추암 일출 : 너무 오래됐지?

 


 

잔뜩 무거워진 구름에 아침은 너무 흐리다.

창밖에 바다를 바라보며 일단은 탕에 몸을 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나?

낙산사로 향한다.

사실 낙산사가 유적이 많아서 유명한 절은 아니다.

의상대사와 의상대... 주변의 풍광에 좋은 자리를 잡고 있다.

 

* 의상대는 남아있을까?

 


 

의상과 원효...

들리는 전설은 애써 원효를 절하시키나 우리의 사상사에 원효의 무게는

몇몇의 의도대로 낮추어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은 못된다.

하지만, 당시의 신라에 필요했던 사상은 의상의 체계였다...

그리고 의상의 정신적 깊이가 원효에 멀리 처지는 것도 절대 아니고...

 

그래도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

함께 한 시대를, 신라의 정신세계를...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의 사상가의 最古(최고) 最高(최고)봉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

또 그들의 사상적 높이와 깊이가 있어 당과의 대치에서도 부족함이 없지 않았을까?

 

 


피곤함이 상상되지만 일단 차는 북쪽으로 향한다.

38선을 지나고... 건봉사로 향한다.

금강산 건봉사... 금강산이란 접두어만으로도 그 무게를 가질 수 있는 절.

물론 금강산을 직접 드나들 수 있는 요즘은 그 무게가 많이 가벼워 졌겠지만...

 

소개된 책자를 기준으로 보면 이곳은 돌을 가지고 만든 재미있는 유적들이 많은 것 같다.

석기둥? 이라 해야 하나?

그러나 생각만큼 다양하거나 집중적이지는 못하다.

 

  

* 낙산 동종과 해수관음... 600년의 간극을 이어주었는데... 동종은 이제 녹아 버리고...

 

 


 

게다가 지금은 비가 온다.

오면서 생각한다.

참 이렇게도 날을 못 맞췄나?

단지 남부지방에 비가 오고, 또 이곳은 해안가니 하는 위안을 삼았는데...

 

그나마 다행은 이곳이 빛이 있다는 점과, 비가 덜 내린다는 점...

사진에 빛이 없으면 힘이 없는데...

너무 필름만 낭비하는 거 아냐?

그래도 자주 올 곳이 못 된다는 생각에 연신 셔터를 누른다.

 

 

 

 

군부대를 지나고, 비포장 길을 지나고...

왔다 갔다는 흔적만큼의 깊이는 없는 듯...

얼마 전까지는 그나마 사회적 분위기를(냉전과 반공, 그리고 권위) 역할 수 있는 의미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다.

진전사터에서는 국보라는 석탑을 보고 싶고,

선림원터는 여주 고달사터와 맞먹을 듯싶은 석조물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건봉사를 나와 진전사터를 향할 때 나의 양말은 이미 젖었고,

나는 슬리퍼를 신었다.

관동팔경의 하나씩이 되는 청간정, 청학정, 송지호 등은 푯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잠깐 차를 세워 송지호를 바라본다.

그래, 바다를 앞두고 호수를 보는 맛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설악산 자락의 진전사터...

찾기가 쉽지 않다.

물어 물어서 절터를 찾는다.

 

* 미천골이라 불리나? 진전사 들어가는 길...

 

 

그래도 앞선 발자국을 따라 탑을 바라본다.

단정한 맛, 다부진 맛, 까무잡잡한 석탑은 그렇게 의젓하게 서있다.

멀리서 바라본 가녀리고 왜소한 맛은 아마도 까만 색 때문이었으리라.

 

팔부신중의 화려한 멋은 빛의 농간인가 맛이 없다.

역시 빛이 중요하다.

그래 이런 의미에서 낭만주의 화가들의 과학성은 인정된다.

단지 우리들의 관찰과 너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완성되지만...

 

 


105mm 렌즈는 너무 가깝다.

할 수없이 길을 만들어 탑과 거리를 유지하려는데...

이거 눈이 장난이 아니다.

이제 신발은 완전히 젖었고, 잠깐의 헛디딤은 무릎을 넘어간다.

참으로 깊은 곳이다.

물론 설악산 자락이지만, 너무나 흐리고, 비까지 내리는데 원경은 바라볼 수 없다.

이곳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더 큰 맛이겠는데... 아쉽다.

 

 

도의선사!

중국에 달마대사가 선종의 교조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선종의 1조이다.

신라의 국법인 교종을 배제하고 마음의 수양을 우선한 선종은 이렇게 자리를 잡는다.

결국 지방호족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결국은 신라의 멸망과 고려조 개창의 뿌리가 된다.

또 하나의 시대를 앞서간 정신이 만들어 진 곳이다.

 

중생이 곧 부처이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사상...

당시로는 반역이며 진보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상적 뿌리는 이곳 진전사터를 공간 삼아 뿌리를 내렸다.

 

 


도의선사의 부도를 찾는다.

부도의 원조!

그러나 결국은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위치의 불명확한 점도 있겠으나. 눈 때문에 도저히 가늠이 안 된다.

민박집은 눈을 치우려다 문의 2/3가량이 눈으로 덮혀 있다.

저곳 저수지에서의 시야도 시원할텐데... 역시 상상 속 전망이다.

 

 

가끔 이렇게 자문한다.

나는 미술사학도 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부도까지 찾는가?

젊어 보지 못하면 아쉬워서???

그건 아니다.

 

* 도의선사 부도 : 끝내 찾지 못하고...ㅠㅠ 빌려옴

 

 

책으로 정보로 도의선사를 마음이나 머리에 담기에 나의 시간은 너무 한정되어 있다.

하나의 상징물을 통해 그들을 나는 재해석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는 지광국사의 정신을 설파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광국사의 부도비와 부도탑을 보며, 그의 국가적 영향력은 금방 가늠된다.

역으로 해석되는 그의 영향과 사상적 깊이를 나는 평가한다.

 

 

그가 남긴 책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의 상징은 나의 마음에 남는다.

내가 유적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것이다.

나의 자답은 여전히 불충분하며 조금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한계이지, 유적의 한계는 아니다.

 


 

 

아무튼 도의선사의 모든 뜻을 담기에 이번 여행은 너무 짧고 여건은 좋지 않다.

그러나 깊고 깊은 이곳에서 그마나 조금의 체취는 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역시 설악산은 생각보다 크고 깊다.

 

설악산을 보며 또 누구를 생각할 수 있을까?

만해? 조금 범위를 넓혀 강릉까지를 생각하면?

아니 이곳 동해안을 생각하면 역시 정선과 정철, 그리고 김홍도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이와 신사임당, 허균과 허난설헌...

그들이 있어 여전히 답사여행은 외롭지 않다.

이게 맛인가?

 

 

 


 

바빠진 발걸음은 이제 선림원터로 향한다.

보물이 4개...

그것도 모두 석조물...

고달사터와 비교되리라.

 

진전사터 탑과 거의 비슷한 선림원터의 탑을 바라본다.

정연한 느낌, 역시 단정하다.

마음의 수양만큼이나 차분한 느낌의 탑이다.

장중하거나 중후한 맛보다는 꼼꼼하지만 단순한 맛을 가지고 있다.

역시 사상은 상징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반면 석등과 부도, 부도비에서는 자못 화려한 여러 가지 맛을 갖추고 있다.

석등은 보기 좋다.

법주사나 회암사지의 앙증맞은 쌍사자나, 화엄사의 장대한 맛이 아니라

기교 넘치고, 특색 있는 상하비례는 잘 짜여진 퍼즐처럼 화려하다.

좋은 작품이다.

반이 없는 부도와 부도비는 역시 정성스레 만들어진 조각품들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대부분의 유적들은 신체다.

즉 신을 빙자한 인간의 육체가 그들 조각의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예술품을 담을 공간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그들의 건축이며 신전이 됐다.

 

동양에도 그런 조각들은 있지만 대부분 얼굴만이 중시되었다.

그들은 신체를 중시했지만 우리는 얼굴을 중시했다.

아름다운 몸과 차가운 이성이 서양 교육의 본류가 되었다면,

우리는 따뜻한 가슴과 온화한 표정을 교육의 원류로 삼았을까?

 

아무튼 우리네 유적들을 바라보며 늘 드는 생각이다.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신체의 비례를 표현한 작품들이 없지만,

아름다운 비례를 갖춘 상징물들은 많다.

석가탑이 그러하고, 감은사탑이 그러하고, 정림사지 탑이 그러하다.

 

 


그리스 로마의 유적들은 하나하나가 웅장하고 집요하다.

그러나 우리네 유적들은 뭔가의 조합을 전제하고,

자연과 조화를 통일시키지 못하면 자칫 맛을 잃을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그래서 나는 로마대성당과 불국사를 비교하는 것이며,

파르테논 신전이나 판테온과 석굴암을 비교하는 것이다.

예술은 크기를 뛰어넘는 깊이로 비교되어야 한다.

 

 


또 하나 질감의 차이도 있다.

톱으로 썰리고 연마지로 갈리는 대리석과,

정으로 쪼으고 해머로 깨뜨려야만 하는 화강암의 차이,

금은의 장식과 온갖 화려한 색깔로 채색된 그들의 미술과

이미 마음속의 추상으로 색깔이 배제되어 버린 동양화의 차이...

그리고,

우리들의 정교함은 털 한오라기, 땀구멍 하나까지 표현한 초상화가 있으며,

또한 모든게 함축된 백자의 단순한 구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즉 나의 주장은

우리들의 예술세계가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와 수준, 그리고 안목에서 자유롭고 정성스러우며,

이미 충분한 절차를 거쳐서 발전해온 과정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들의 유적은 절대 단절되어 있지 않은 긴 역사를 모두 담고 있다는 것이다.


비가 그쳐가고 햇볕이 잠깐 고개를 들 때 나의 여행은 끝이 났다.

세 번째 양말을 갈아 신고, 올라오는 길을 재촉한다.

나의 마음과 다르게 차는 너무 막힌다.

사실 어제부터 너무 많이 돌아다녔다.

 

몇 판 남은 사진기를 차창 너머로 그대로 찍어본다.

아, 경사진 고갯길, 그것도 눈길에서 차를 세운건 위험천만...

이곳도 진부령이나 대관령에 비해 낮지 않고 굽이도 많은 곳인데...

항상 남기는 마지막 한 장을 포기하고 사진기를 정리한다.

해가 없다.

다리도 후들거리고...

 


 

 

이제 동해안을 생각하면 뭔가 개운하다.

빚진걸 갚은 느낌...

미안한 마음도 많이 없어졌다.

물론 풍부한 건 아니지만...

짧고 빠듯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다.

이제 남은 일들은 어떻게 처리할까?

 

 


몇 년이 지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서산대사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내일의 해는 또 뜬다.

나는 다음에 이곳에 올 때 어떤 마음과 어떤 상태로 올 수 있을까?

조금 더 여유로워질까?

평안해질까?

풍부해질까?

조금 더 성숙해질까?

머릿속은 좀 비었는가?


이젠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