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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여행> 백제 금동 대향로... 부여박물관 - 부여산책 2

 

부여산책 2... 백제 금동 대향로

 

* 백제 금동 대향로는 사진으로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다.

  해서,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디카), 부여박물관간 도록 사진, 그리고 인터넷의 자료들에 의존했다...

  부분적으로 구입했던 복각품의 사진도 조금 곁들고...

  이 곳의 자료 사진들은 인용된 것들이 많으니 참조바람...^^

 

* 다음에 시간이 되면 복각품의 부분 사진을 찍어서 보완할 예정임...

 


아무리 바빠도 <백제대향로>를 건성으로 볼 수는 없는 일...

내가 진품으로 백제 대향로를 본 적이 있나? 없었나?

너무 익숙하고 친숙해서 기억을 못하네? ㅠㅠㅠ

숱한 자료와 사진을 통해, 혹은 특별전시를 통해(그래 본 것 같다...^^) 소개된 대향로...

사실 부여박물관의 위상도 백제 대향로가 발견된 이전과 이후로 구별될 수 있다.

게다가 부여박물관이 93년 이전하고 1년 후 발견된 것으로 기억되니 더더욱...

 

<찾아보니 예전 1993년에 샀던 도록이 있다... 표지에서부터 달라졌다...>

 


처음 백제 대향로는 <백제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라고 불리웠다...

용트림하는 용이 받침을 이루고

연꽃문양의 향로가 아래쪽은 수중계를, 위쪽은 신선계를 나타내는 봉래산이,

그리고 맨 위에는 봉황이 가슴을 활짝 펴고 있어,

<불교와 도교의 독창적인 백제적 해석>으로 설명되곤 했고,

처음에는 <백제지역에서 발견된 중국 유물>이라는 중국과 일본 학계의 주장에

한국의 고고학계는 제대로 이의제기도 못한 체 <백제>만을 강조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중 가장 마음에 든다... 복각품을 하나 사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96년 국보로 지정된 지금의 공식명칭은 <백제 금동 대향로>다...

언제, 왜 이렇게 바뀌었지?(이하 “대향로”라고 부른다...)

ㅎㅎ 나의 궁금증은 사실 명칭 때문은 아니며 향로의 의미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음~~~ 고민이다... 백제 대향로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써야할지...^^


대향로에 대한 나의 의견은 대체적으로

강우방씨와 서정록씨, 정수일씨 등의 주장에 근거하는 입장이다...

^^ 내 입맛에 맞는 분들만 찾는 군...

 

 


대향로에 대한 자료들을 찾고 도록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부여박물관에서 사온 백제 대향로에 향불을 붙여 보면서

그리고 이렇게 메모를 하면서 딱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백제인의 사상>...


구전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그림이 되고,

현대의 디지털은 그림을 영상으로 바꾸었다...

자본주의의 특징도 보는 것이다...

흔한 말로 <삐까 번쩍...>이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특징이지?

아무튼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시대가 현재다...

 

<중앙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향로... 주변에는 중국 한대 BC113년 박산향로에서부터 북위의 향로와 대향로까지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여러 사진들이 설명되어 있다... 가히 " 향로의 완성태이자 정수 "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크기도 다른 향로에 비해 2~3배인 64cm 정도... 중국의 어떤이는 " 향로문화의 정수가 중국에 있다했는데... 한국에서 가져올 딱하나의 유물... 살아서 친견할 수 있을지..."라며 한탄했다는 말도...^^>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나...

나는 그려 보고 싶었다...

백제가 보고 싶어 <서동요>를 봤고

백제가 보고 싶어 <백제관음>을 노래했고

백제가 보고 싶어 <정림사탑>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그리고 백제가 보고 싶어 <백제 금동 대향로>에 향을 살라본다...


 

<복각품의 하부... 용틀임이 이렇게 멋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세련되고 역동적이면서도 안정된 용트림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천지의 시작과 변화무쌍한 물의 본질을 이렇게 용의 춤사위로 보여준

그 어떤 예술작품도 나는 보지 못했다...

 

 

 

 

수많은 불교의 영역에서 연꽃을 만나고, 우리는 꽃 중의 왕을 연이라 부른다...

그러나 연꽃은 꼭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의 의미만은 아니다.

수련은 아침에 꽃을 열고, 해질 때 닫으니 태양의 광휘를 상징한다고 선조들은 생각했다.

고구려 벽화와 백제 고분에 나오는 천장의 연꽃은(물론 석굴암의 천장도 연꽃이다...)

이미 불교전래 이전 중동과 서역에서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내려오던 오랜 상징물이다.

 

 


용의 기운을 받아 피어난 연잎에 새겨진 물고기와 새와 사람을

불교전래 이전 연화도에서 연원을 찾든, 아니면 불교의 사생(胎,卵,化,混生)이라 주장하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그린 세계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교감의 전령이라는 점...

이것은 지하세계나 사후의 세계를 그리는 종교적 사상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

 

 


흔히 당초문으로 명명된 무늬는 똑같이 유운문으로도 표현한다.

중국과 당나라의 영향을 피하지 않는 적극적인 표현이 <唐草紋>이란 개념이라면

流雲紋은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이니만큼 훨씬 포괄적임이 분명하다...

비슷한 문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7세기 이후 모든 것에 당초문이라 이름 했지만...

아무튼 대향로는 용과 연꽃이 떠받치는 세상을 유운문(혹은 유운당초문)으로 구획했다.

 

 




봉래산이라 이름 해도 좋고, 수미산이라 해도 좋고, 삼산형 산악도라 해도 좋다...

소위 불교와 도교를 끄집어내려는 갖은 노력들은 대향로의 이름까지 분쟁시켰으니...

도교적 입장이면 봉래산에 신선들의 놀음(선계)이 될 것이고

불교의 입장이라면 수미산의 연화세계가 될 것이고

전래의 입장이라면 천상의 세계가 될 수도 있는

74개의 봉우리와 39마리의 동물과 16인의 사람들...

 

 


수렵도를 보면서 고구려 벽화의 기마상을 찾아

멀리 <페르시아 사산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유운문의 공간구획으로 <시베리아 알타이계 샤머니즘>을 거론하는 이도 있고

코끼리와 호랑이, 원숭이를 찾아서 불교의 원류 <인도>를 거론하는 이도 있다...

 

 


그림조각 하나를 놓고 우리는 너무 많은 해석을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곰 같이 생겼으면 단군신화에서부터 시작해 웅진이라고 도읍이름을 붙인 백제까지...

사슴 같이 생겼으면 부여-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해 서역까지 쫓아가 <우주사슴> 신화를...

수렵도를 보면서 최고의 제사장 <샤먼>이 갖춘 말과 활에서 고구려 벽화까지...

시비와 경중의 문제에 치우치기에 대향로는 너무 많은 그림조각을 담고 있다...

 

 


분명한 한 가지는, 대향로를 만든 이가 욕심이 넘치고 넘쳐 무궁한 포용력으로

모든 문화와 사상과 정신세계를 통섭하는 세계관을 가졌다는 것...

나도 그림 하나를 찾았다.. 낚시하는 노인네...

왜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낚시를 즐길 사회를 그린 마르크스가 생각나지?...ㅎㅎㅎ

기막히지 않나? 1500년의 시차와 동서양의 극단에 서서 똑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게?

 

 




맨 위로 올라가면 다섯 봉우리 위에 기러기 다섯 마리가 봉황을 우러러보고

다섯명의 악사들이 각기 다른 연주를 하고 있다...

아~~~ 박물관에 재현된 악기들이라는 게 바로 대향로의 악기들이네? ^^

<서정록>씨는 천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부여계의 신화를 끌어 들였다...

 

 


자연 그의 주장을 쫓아가면 상제의 전령으로서 음악과 가무의 새,

바람의 새, 태양의 새로서 봉황이 맨 꼭대기 장식을 차지하게 된다.

또 누군가 한마디 했다... 봉황다리에 <며느리 발톱>을 왜 빼느냐고...

ㅎㅎㅎ 이 발톱 두 개가 있어 봉황은 다시 주작으로 바뀌고 삼족오 다리로 바뀐다...^^

 

 

 


끝없는 시시비비에 지쳐설까?

강우방씨가 한마디 했다 ;

<불교 유입 이전 한국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 민속신앙 전체를 상징하는 100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ㅎㅎㅎㅎㅎ

물론 강우방씨는 대향로의 특성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키는 언급을 하였지만...

 

<대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절터... 혹자는 절터가 아니라 {신궁}이라 부른다... 일본유적과 비교...>

 


기러기든, 원앙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철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텃새와 철새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고대인에게 철새는 信의 상징이며

인간계와 천상을 연결시키는 전령의 의미였다...

소리가 연상되고, 하늘이 연상되고, 춤이 연상되는 새...

 

<박물관에는 대향로의 양각모양을 토대로 다섯 악기를 복원해 놓았다... 아마도 일본 법륭사 대보장전의 옥충추자 등을 근거로하여 옻칠에 자개공예가 백제 전성기에는 성행했다고 보는 입장인듯...>

  


나는? 기러기에 한 표...^^

108 양산박 호걸을 이끌고 나서는 길(아마도 흩어짐과 죽음에 대한 복선이었겠지)

낭자 연청이 기러기를 활로 쏘아 몇 마리 떨어뜨리는 걸 보고 송강이 한마디 하지요...

기러기는 인의예지신 오덕을 갖춘 영물인데 왜 살생 하느냐고...

 

 


슬퍼하고 범하지 않아 仁이요,

나 같은 바람둥이가 아니어 義요^^

나는데도 순서가 있어 禮요,

독수리로부터 무리를 지킬 줄 알아 知요,

떠난 곳을 꼭 다시 찾아 돌아와 信이라...

(하마터면 수호지 다시 읽을 뻔 했음...)

 

<향을 피울 수 있어 구입했다... 물론 절반 정도의 크기다... 대향로라 이름한 것도 크기때문...> 

 

 

아무튼, 그 기러기들을 춤추게 하려는 건지, 봉황의 울음에 장단을 맞추는 건지

백제가 사용하고 즐기던 다섯 가지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 위에

가슴을 떠억 내민 봉황이 꼬리를 치켜들고 초연하게 세상을 굽어본다...

 

 


세상에... 어깨를 잔뜩 웅크린 맹수들과

깃을 바짝 세운 수리의 자태는 봐왔지만

가슴을 내민 봉황을 본적이 있는가?


용틀임의 화려한 긴장감이 떠받친 그 복잡다단한 세상을

저리도 간결하고 심플한 가슴으로 마감할 수 있다니...

호오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ㅎㅎㅎ

 



아무래도 대향로 <뜯어보기>는 끝이 없다...

하긴, 백제반가사유상이나 백제관음에 비견할 유일무이한 향로이니

무엇이 과하겠는가마는 너무 늘어졌다...^^


불교와 도교와 중국과 인도를 다 묶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다.

중국의 용을 받침으로 하고,

인도의 연꽃을 몸체로 하여

한국의 봉황이 굽어보다...^^

 

<봉황과 삼족오 문양이 유난히 많은게 고구려-백제이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봉황을 대통령의 문장으로 사용하는 우리와 용을 유난히 강조하는 중국의 흐름을 신화의 전쟁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그리고 삼족오 문양은 예전에 언급했지만 현재 일본축구협회의 고유문장이기도 한다...> 

 


 

동이족의 샤머니즘이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종합한 꽃을 일본에서 피웠다면

중국은 유교를 기초로 불교와 도교와 샤머니즘을 융합하는 용광로가 되었고

각각의 이상세계를 극대화해본 경험을 가진 한국은???

너무나 분절적이고 파편화 되어 우리의 기억과 가슴도 채우지 못하지만

독창성과 보편성을 갖추면서, 역동적인 긴장감을 간직하고 있다...?

<다이나믹 코리아?>

 

<박물관에 모사된 백호도... 2002년 월드컵은 붉은 색과 호랑이로 채색됐었지... 다이나믹 코리아...> 


조금 어설프지?

우리는 흔히 철학을 분류할 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으로 구분한다.

이를 지역적으로 나눠보면 영미철학, 프랑스철학, 독일철학으로 서양철학은 구분되고

동양철학은 인도철학, 중국철학, 그리고 한국철학으로 구분한다...

전세계 200여개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 앞에 나라를 붙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일례로 일본철학이라고 들어 보셨나?

그리스로마 신화와 철학은 있지만, 이태리철학이라고 이름 하지는 않는다...

 

<광배 탁본...> 


그만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갖춘 역사와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불교의 완성, 유교의 완성, 그리고 샤머니즘의 혼을 문화와 예술로 표현했지만

우리들의 선조는 게을렀거나 힘을 갖추지 않았다...

설혹, 충분히 인정을 받은 이들이 있더라도 스스로 자랑한바가 없다...

 

 


백제 대향로에 향을 담아 불을 붙인다...

구멍 사이사이에서 춤을 추는 연기가 바람에 일렁인다...

하늘로 올라가 펼쳐진 향기에 소리를 형상화 시킨다...

연기가 음이 되고, 음이 춤이 되고, 춤추는 세상이 번져가고...

백제인이 꿈꾸던 세계는 지하의 어두움도, 죽음의 이별도 없는 춤추는 세상이었을까?


 

<부여 외리 유적에서 발견된 8종류 문양전중 산수봉황무늬전돌...> 



백제의 8가지 문양전은 백제 회화의 정수이자 대향로의 연속이다...

연꽃구름무늬전돌, 연꽃무늬전돌, 반룡무늬전돌, 봉황무늬전돌,

산경치도깨비무늬전돌, 연꽃도깨비무늬전돌, 산수산경무늬전돌, 산수봉황무늬전돌...

특히 산수봉황무늬전돌은 대향로의 상부가 그대로 그려진 모습이고...

 

 


처음 대향로가 발견된 직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생소함에 모두가 의아해할 때,

산수봉황무늬전돌과 무령왕릉의 동탁은잔이 있어 백제의 것으로 증명될 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 무령왕릉의 동탁은잔까지 중국 수입품이라고 주장했지만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대향로에 포괄된 많은 상징들은 충분한 연결고리를 제공했고,

결정적으로 이 전돌이 있어 백제에서는 일반화된 형상임이 추정될 수 있었고...

 

 

<무령왕릉 동제은탁... 문양에서 대향로의 이미지들이... 그런 이유로 534년 이전 제작설을 주장하기도> 


가끔 집에 걸려 있는 전돌 탁본들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었다...

아마도 탁본에 관심이 있었던 93년경에 구입했던 액자들일 것이다...

과장과 해학적인 이미지, 풍성한 도안에 간결한 처리,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마감,

이제 조금은 백제의 깊이를 알만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아함>이라고 명명했던 <백제의 미감>을 수정해야 할지 모른다...

유려함에 세련됨을 추가하면 우아함으로 끝나지만

역동적인 긴장감에 화려함까지 더해지면 무엇이 될까?

신라의 풍만함에 부족하지 않고, 고구려의 간결함에 뒤지지 않고...

 

 


야외 전시된 각종 석조물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

부러진 반가사유상들을 바라보며 정말로 유려한 곡선을 담아본다...

중국과 신라와 일본에 있는 많은 반가사유상들의 곡선을 연결시키는 것도 재밌는 일...

뚜껑만 남은 청동제향로뚜껑을 보면서 일본 동대사나 법륭사의 <청동등>을 생각한다.

한국은 석등의 나라라고 하지만, 백제에는 일본처럼 청동등이 있었던 건 분명한 모양...

금동관음보살입상을 보면서 백제관음의 미감과 연화대를 다시 그려보고...

 

<부여 부소산 절터에서 발굴된 청동제향로뚜껑... 34cm> 

<금동관음보살입상... 부여 규암면, 백제 7세기, 국보 293호... 연화대를 보면서 백제관음이...>

<청양 본의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도제불상대좌... 100cm> 

 


너무나 포괄적이고 유연해서 사라졌을까?

샤머니즘에서 시작해 불교와 도교, 유교 어느 한곳 부족하지 않아 남지 않았을까?

백제의 미가 한마디로 규정되지 않는 것은 얇고 얕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넘치고, 너무 깊어서 대향로의 연기처럼 존재하지만 잡히지 않아서일까?

 

 


다양한 포용력은 유연함으로,

깊이 있는 유연함은 순발력으로,

순발력과 융합력은 적응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지만

그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낱낱으로 분절된 주체하지 못했던 역동성과 긴장미는 또 무엇으로 승화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