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올라갈 시간이 다 됐다...
이시점에 <정림사지탑> 이정표는 왜 보이는 건지...^^
박물관에서 불과 2~3분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가
도저히~~~ 색시한테 욕을 좀 더 먹더라도 그냥 갈 수가 없다...
남아있는 필름이 절반, 그래~~~ 딱 한통만 더 찍는다...
정림사지 박물관이 생기면서 입구가 위로 올라갔다...
박물관도 좋지만 일단 탑으로 달려간다...
맑지 않고 푸르지 않은 하늘은 늘 고민하게 만든다...
갑자기 파란색이 간간이 눈에 띄고 햇볕이 너무 좋다...
오늘은 가로 사진만 찍기로 했다...
늘 탑의 상승감에 세로 사진만 가지다가 언제부턴가 가로사진이 궁해졌다...
블로그 탓도 있지만, 주변의 풍광을 함께 담고 심은 욕심 때문이다...
렌즈하나 필름 한통 반은 역시 적다...
땀을 흘리며 다시 주차장까지 달려갔다...(이럴줄 알았어...)
햇볕이 너무 좋다...
괜찮을 것 같다는 느낌...
부여박물관 뒤편에 서있는 당나라 유인원의 비석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은 정림사탑에 백제의 평정을 새겼고,
이 비석은 백제부흥운동을 압살한 공적을 기려 신라의 문무왕이 663년에 세웠다...
어라~~~ 조금 씁쓸하지...?
문화재의 등급과 보관 관리 규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사료적 가치 운운하며 정작 전수하고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은 할까?
어떠한 미적 가치와 평가기준에 의해 백제의 마지막 부흥운동을 압살한
당나라 유인원의 공적까지 비각을 세워 관리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료적 가치와 기려야할 가치의 구별은 뚜렷한 주체성과 정체성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택지적(사람이름)은 세상을 살 날이 많지 않은 것을 슬퍼하며
금속을 다루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빛을 내뿜어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명한 정기를 지니고 **하는 듯하다...>
654년 사택지적이 새긴 당탑비(堂塔碑) 내용이다...
<사택지적당탑비... 사택지적이라는 사람이 금당과 탑을 세운 기념으로 남긴 비석, 부분... 부여박물관>
사료적 가치도 확실하고, 백제인의 유려한 문장과 문화적 수준이 드러나 있고,
게다가 문장으로 남은 백제의 금석문화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사택지적당탑비>는 미지정 문화재다...
금당이라는 하나의 말로도 백제의 가람의 중심전각이 무엇인지 추정할 수도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지?
4면을 비잉 둘러 24~36행에 걸쳐 행마다 16~18자가 음각된 정림사탑은
<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음각이 있어 70년대까지 <평백제탑>이라 불리웠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는 정림사지석탑이라는 명칭도 1942년 발견된 기와명문 때문인데,
이 기와파편은 태평8년, 고려현종 1028년 중수된 기록을 추정하여
<후지와라 이치오>가 <정림사>라고 주장한 것이 일반화 되었을 뿐,
실제 백제에서는 어떻게 불리웠는지 불분명한 게 사실이다.
<정림사탑 1층 탑신에 음각된 글씨들... 대략 2000자가 조금 안된다... 위 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림...>
어찌됐든 이탑에 새겨진 명문을 기초로 하면 정림사탑은
660년 8월 15일 이전에 만들어졌고,
백제의 멸망 당시 전투상황과 백제의 규모 등 여러 가지 사료가 새겨져 있다.
(* 당시의 행정체계를 5도독, 37주, 250현 호24만, 인구 620만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혹자는 삼국사기의 5도독, 200성, 76만호를 기준으로
백제의 멸망당시 인구수를 350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는 점만 메모하고...)
실은 아무도 없는 절터에서 처음으로 정림사탑에 손을 대보며
햇빛에 아른거리는 대당평백제국석비란 글자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들이다...
사진만 찍고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온다는 게 그게 잘 안 된다...^^
나무조각 같다는 어느 분이 생각나 다시 살펴본다...^^
햇볕에 그을리고 반사된 탑에 옅은 구름 몇 조각이 하늘을 장식하고...
여전히 좋은 그림이다...
여전히 장엄하다...
여전히 좋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는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꼭 이대로만 기억한다...
웅혼함과 우아함과 세련됨과 간결함...
백제 대향로가 있지만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백제의 미를 대표하는 탑...
그래~~~ 이 맛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지만...
<일본 법륭사 동원의 종각... 일본의 국보... 정림사탑 1층탑신과 종루 하부가 비슷한 느낌...>
정림사지 박물관은 <하앙식 구조>로 지어진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하앙식 구조는 완주군의 <화암사 극락전>이 유일하다...
일본 법륭사 금당을 비롯해 많은 나라시대 건축들에 하앙식 구조가 살아있다.
그리고 그 근원을 백제로 추정했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흔적을 찾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화암사 극락전의 구조를 찾아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후문...
<정림사지 박물관 전경...>
물론 화암사 극락전은 백제시대의 유물이 아닌 조선중기의 유적이지만
백제지방의 건축적 전통이 지역 기술자를 통해 기법이 전수 되었으며
대신라, 고려, 조선을 이어 1000년이 넘도록 그 맥이 끊기지 않은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여 주장되고 있다.
아무튼 일본에 남아있는 전각들에 비교하면 낮은 지붕에 충분치 않은 깊이로
하앙식 구조의 특징만 살렸을 뿐,
직선화된 처마와 간결한 추녀마루는 낮은 지붕으로 인해 미감이 상실된 느낌...
추녀마루의 우동장식과, 깊은 처마와 내림마루의 강건함이 부족하다...
그래도 고심은 많이 했을 듯싶은데...
<정림사 복원 모형...>
정림사 복원모형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정림사탑 바로 붙어서 금당을 배치했는데, 그 모형은 법륭사 금당과 흡사하다.
그러나 내림마루에 부연이 바짝 붙어 있어 힘이 떨어지고
법륭사 금당에 없는 우동장식은 조금 어설픈 느낌...
오히려 미륵사지 목탑모형은 추녀마루의 장식이 화려하게 살아있는데...
<일본 법륭사 금당...>
그리고 법륭사 금당과 똑같은 겹처마는 에도시대의 흔적 아닌가?
게다가 정림사탑 상륜부가 저런 모습이었을까?
내가 잘못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고증이 더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부여 왕궁도...>
오뎅 하나에 음료수 마시며 박물관 휴게소에서 정림사탑을 내려다본다...
내려다보는 게 조금은 낯선 느낌이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항상 불편함과 낯설은 자극을 동시에 준다...
복발모형으로 남은 상륜부를 쳐다보는데 왜 당파풍 일본지붕이 생각나는지...
마음의 조금은 또 정림사탑에 남겨 두기로 했다...
아무튼 언제고 여유롭게 오면 저 나무 그늘 아래서 한숨 자다가 일어나고 싶다...
정림사탑을 옆에 놓고 잠 한숨 푹 자보는 거...(길건너 여관에서는 자봤지?^^)
그럴 날도 있겠지...^^
서울로 올라오는 길...
어수선하고 바빴던 시간들이 스쳐간다.
다음 주는 더 바쁠 것 같고...
밀려 두었던 많은 것들도 떠오르고...
한주일이 왜 불편했을까?
단지 피곤했다는 것만은 이유가 되지 않는 듯...
뭔가의 자극을 찾고 있는 건가?
그보다는 변화의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강하다...
물론 신규 사업지 은행관련 업무는 늘 짐으로 남아있다...
신일 부도 여파는 많은 건설사에 무거운 부담으로 남을 것이고...
게다가 평창 동계올림픽도 무산된 마당에 SOC뿐만이 아니라
많은 프로젝트들이 후순위로 밀려나면 건설경기도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참 좋은 기회였는데...
새로운 변화와 그에 합당한 준비...
부족하고 내게 필요했던 게 그 점이 아닐런지...
이제는 생활패턴도 제반의 마음자세도 체크할 필요가 있다...
무척이나 피곤했던 한주일...
바짝 조여야할 심신이다...
대향로에 향을 사르며 짧은 부여산책을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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