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공화국에 살면서...<시험과 성적> - 0711
5.
지인 자제의 대입시험과 직장 후배의 사표제출,
그리고 대선의 교육공약과 삼불정책 등이 떠돌아다니는 시점에
갑자기 내가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시험공화국>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 인생의 상당기간도 점수표가 딸린 시험으로 이루어졌고...
기왕 <시험과 성적>이란 주제로 시작한 글이니 삼천포로 확실하게 빠져볼까?
대학 나오면 또 어떤 시험들이 기다리고 있지?
고등시험이든, 고급시험이든 그 준말인 <고시>와 <공무원시험> <자격시험>등이 있지?
그 시험들은 무슨 의미이고, 정말 시험은 <자격과 능력을 결정하는 척도>일까?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의사, 감정평가사, 법무사, 세무사, 노무사, 건축사, 기술사...
그들은 그들이 정한 관문을 통과한 그들만의 성을 쌓았다.
자신들이 시험보고 고생한 만큼, 영원토록 그 절차를 유지해야 빛이 나는 것처럼...
물론 나는 <시험>의 수준과 순/역기능, 사회적 평판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학가는 척도와 각종 합격의 척도가 <시험>뿐이어야 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시험점수와 성적>으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은
가장 저급한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시험의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판단기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떠한 전문적 기능과 기술, 그리고 수준을 요하는 데에는
<교육의 절차와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르치는 선생과 보호하는 가정, 그리고 인재를 활용하고 감찰하는 사회...
(여기서 사회란 대학일 수도 있고, 회사나 정부조직 일수도 있다)
이 삼박자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험이 자격평가의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는 것은
선생과 가정과 사회가 공감하는 <고급의 평가기준>이 없다는 반증이다.
선생의 생활평가와 사회(대학, 회사, 정부조직 등)의 선별기준이 없으니
가장 저급한 <자격시험의 성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6.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선생과 학생의 신뢰가 없고, 선생과 사회의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그 신뢰가 깨지기 전에는 <촌지와 뇌물, 인맥 등>의 전근대적 고리의 역기능이 컸고,
그 <신뢰>가 깨어진 이후에는 <다양하고 열린 선별기준>을 갖추지 못했다.
촌지의 추방이 참교육의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육노동자의 계급성 획득이 교육기능의 올바른 정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균화, 평준화가 기회의 평등과 열린사회의 관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할 수 있는 미래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근본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기여입학 문제도 기여의 활성화가 입학과 연계되지 않으면 장려해야할 문제이고,
특수목적의 중,고등 교육기관들도 교육방침의 다변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고,
대학의 자율적인 선별기준 확립과 교원, 교육기관의 평가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대학입시의 경우 <삼불정책>의 시시비비와 관점의 긍부정이 아니라
<다양하고 열린, 공감할 수 있는 선별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다.
대학이 경쟁력과 장기적 안목을 갖춘 선별기준을 갖추지 못하는 한
본고사란 또 다른 저급한 평가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생활평가에 대한 신뢰가 없는 한
고등학교 등급과 수능시험 성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를 이루는 가정과 회사와 정부조직에 편입(?)될 최초의 관문을
<대학 입시>로 한정하고,
그 <대학의 서열>이 사회의 서열로 고착되는 사회에서
공교육의 다양한 기능 활성화도 찾기 어렵고,
대학을 가지 위한 <과외>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가치의 판단과 평가가 계량화되는 사회에서
<서열과 성적>은 피할 수없는 관문이고 통과의례이지만, 근본은 아니어야 한다.
서열과 성적을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평가기준,
혹은 그보다 고차원적인 선별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기준을 갖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은 <시험공화국>이다.
7.
며칠 전 직장 후배가 사표를 제출했다.
20대 후반에 적극적이고 성실한 친구인데 갑자기...
나에게 불만이 많은가...
그런 게 아니고... ;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별 차이가 없던 친구들이
출신학교와 직장 문제로 지금은 많은 차이가 벌어지고
결혼할 처자의 집에서도 건설업에 종사하는데 불만이란다.
해서 아예 건설업을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대학에 편입하려 한다는 말이다.
늦지 않을까?
그리고 요즘 같은 불경기에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일테고,
또 불확실한 몇 년 후에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기도 쉽지 않을텐데...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르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젊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나온 대학, 그리고 그 진학을 결정하는 <시험>...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성장하는 젊은이들에게 대학시험은
인생을 결정짓는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 단계의 통과절차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실감하는 많은 부모들에 의해, 보상심리와 비교우위에서
경쟁의 무기를 먼저 잡기 위한 <예습과 시험을 위한 과외>가 필수가 되고...
8.
우리나라의 도로는 한마디로 <불친절>하다.
지금 이 길을 놓치고, 이번 신호를 놓치면 어디서 유턴해 돌아와야할지 막막하다.
길을 잃어버릴지 모르는 불안함과 잃어버릴 시간에 대한 집착은
결국 끼어들기와 무리한 차선변경, 불법 유턴으로 점철된다.
대학 입시에서 실패하면 인생의 반틈에서 실패할지 모른다.
자격 시험에서 실패하면 인생의 전부를 포기해야할지 모른다.
끼어들기도 불법 유턴도 많이 없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리한 차선변경과 철판을 깐 끼어들기>를 강요받고 있다.
돌아갈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시간의 여백이 존재하지 않는 불친절...
<한번 시험>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과외>도 필요하고 <실업도 불사>해야 한다.
시험공화국에서 치루는 시험에는 의지와 성실과 분배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
시험을 포기하면 기회의 외면이고,
시험에 순응하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시험의 유혹에 순응하는 것은 <평범한 범인>이고
시험을 거부하는 것은 신과 동기동창을 선언하는 <교만>일까?
시험공화국에 살면서 필요한 것은
<평범과 오만>의 구별이 아닐지 모른다.
<현명한, 가능성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현재의 성적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험공화국에 살면서 <평가와 후회>를 저울질 하고 있다.
이미 시험에 드는 순간 음모와 유혹은 시작된 것이며
높고 낮음과 우열의 비교와 경쟁만이 모든 판단의 척도가 된다.
평가를 저당 잡히고 칼자루를 맡기며 우리는 보람과 기회의 자유를 즐긴다.
9.
먼 옛날 선지자께서 이미 선언하셨다.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이나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시험받고 있으며,
단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험인가, 성적이 필요 없는 시험인가만 구별될 뿐이다.
점수가 필요한 시험에서는 관문을 통과할만한 <적당한 수준>이 필요하고
성적이 필요 없는 시험에서는 <후회 없는 최선의 아름다울 선택>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은 짧았으나, 내 경험을 유추하고자 도입이 너무 길었다.
<시험은 진짜, 신이 만들었을까?>
<시험은, 진짜신이 만들었을까?>
'시사,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사> 2007 대선 2-1. 학습효과와 상식의 마비... 0712 (0) | 2007.12.05 |
---|---|
시사> 2007 대선 1 - 세계경제의 흐름과 인플레인션 071130 (0) | 2007.12.01 |
잡생각> 시험공화국에 살면서 1 - 중고등학교 시절... 0711 (0) | 2007.11.24 |
시사> 아프간 피랍... 이념의 광기와 가치의 부재...070802 (0) | 2007.08.02 |
경제> IMF 시대 - 외환위기... 980201 (0) | 200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