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글을 쪼개고, 나누고, 게다가 서문을 먼저(!) 썼으니 장황하게 시작됐다.
*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 그분의 친구(?)분들을 생각하다가 글이 섞이고...
* 색으로 물들인 문구는 선생의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서 인용한 언어들이다.
1.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기억한다는 게 가능할까?
정답? 가능할 수도 있지만, 불가능 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도 모를 수도 있고, 모두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분명한 한 가지는 온전한 기억이 가능한가를 되물어 본다면
애초에 이 물음에 대답을 혹은 정답을 찾는다는 게 우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삶이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관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게 남아 있는, 혹은 지금도 유지되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은
“그 사람”이 기억하는 “그 자신”과는 분명히 다를지 모른다.
우리가 더듬는 기억이란 항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지,
어느 일방의 편의로 조각되거나 재생, 혹은 삭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거 같다.
그래서 나는 관계에서 <계기와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충분히 받아들인 자세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만,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지속적으로 울림과 향기를 만들어낼 때만
기억의 유효기간은 나의 수명과 뇌의 용량을 거슬러 가슴에 깊이 침잠할 거 같다.
나의 기호와 관계의 깊이와 강도, 그리고 기억하려는 의지와 애정...
이 모든 게 적절히 어울릴 때 기억은 수많은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
<성북동 간송 미술관 근처의 최순우 옛집...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 기금으로 사들인 [시민문화유산 1호] 다...>
말이 길어졌다...(늘 그렇지만...^^)
한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나 의도와 무관하다.
그러나 내게 남아있는 혜곡 최순운 선생의 의미는 그 분의 의도와 무관하게 가볍지 않다.
또한 내가 사용하는 <우리의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많은 표현>들은 분명 선생의 언어이다.
그런 세례를 남겨주신 선생에게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영혼의 교감이 있었고,
그 간절하고 소중한 관계들은 우리 문화사에 크고도 짙은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그분의 올곧은 꿈과 관계가 내게 미친 영향...
내게 그 양반은 어떤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 가만 돌아본다.
아마도 길잡이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유홍준>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미를 생각하며, 심미안과 안목, 그리고 문화의 향기에 눈을 뜨면서
최순우 - 그 이름을 알게 되었고,
또 선생의 눈을 빌어 우리 것에 다가가는 방법을 안내 받았었지.
오늘 그분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기거했던 옛집에 들어서면서
한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개념은 어떤 의미인지를 되새겨 본다.
<본채 대청마루 양쪽 편액...>
2.
많은 사람들이 최순우 선생을 애도하지만,
어느 글에서도 고(故) 최순우 님이라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이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이름을 혜곡 최순우라 말하거나,
나처럼 최순우 선생이라 이름 한다.
대단한 영광이 아닐까?
영혼이 영원을 얻어가는 과정은 그만한 무게와 깊이에서 나오는 울림을 필요로 하리라.
이 집에서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하셨단다.
쉬이 잊을 수없는 귀한 한마디를 끄집어내자면 주저없이 이 문구를 추천하고 싶다.
“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선생은 역시 한국인의 바라보는 즐거움을 아름다움의 으뜸으로 삼았던 것 같다.
물러서서 바라보면 눈맛이 후련하고
다가서서 보면 성글고 대범하고 거친 맛을 감출 수 없는 건,
한국인의 시선은 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으며,
근시안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느긋이 물러서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에 있다고 말하셨다.
오늘, 그 글을 쓰셨을 공간에 머물며 선생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3.
참 작지?!
1920년대 경기도 지방의 ⎿⏋자 유형을 따른 <최순우 옛집>의 스케일은 참 작다.
예전에 기둥과 기둥 사이 - 한칸이 한평 남짓한 시절 지어진 정말 작은 집이다.
문간채가 도로에 면하여 담을 대신하고, ⌙자 문간채 사이에 대문이 놓이고,
가운데는 중정 같은 안마당이, ⎿⏋자 위쪽에는 정원 같은 뒷마당이 놓여있다.
본채의 ⏋자 가운데 마루가 놓여있고, 작은 툇마루가 안마당과 뒷마당을 향해 놓여있다.
<집이 작다? 좁다? 문간채 한쪽 측면에서 집의 너비, 혹은 깊이가 느껴지는지... 한사람이 누워서 손을 들면 양쪽벽에 닿을만한 아주 좁고 작은 스케일이다... 조선후기까지 내려온 꼭 그만한 크기... 1900년대 이후 일본식 건축양식과 대량생산 기와집이 늘면서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한옥, 우리네 기와집은 온돌방과 마루, 그리고 부엌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99간 집이란 방의 갯수가 아니라 6자 간격의 4 기둥으로 구획된 공간의 수를 말하고,
초가삼(三)간(초가지붕의 세칸집)이란 부엌 1칸에 온돌방 2칸을 말한다.
그래서 한옥을 뜯어보는 재미는 스케일과 볼륨에 있지 않고, 공간적 배치에 있다.
방과 방을 이어주는 마루의 위치와 넓이, 온돌방과 부엌을 연결하는 부뚜막의 높이,
마루없이 연결되는 상하방의 깊이, 그리고 마당과 방의 점이공간 툇마루의 길이...
조선 후기에 정형화된 유교적 합리성이 강제한 한옥의 규격화와 검소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평면상에 나타나는 다목적성과 융통성(대청마루와 툇마루 기능, 상하방의 닫힘과 열림 등),
수직성 상승이 배제된 수평적 건축에서 나타나는 오밀한 집체미와 공간구획
(방과 마당의 비례와 구획, 누마루와 누다락의 변화와 차용, 그리고 그들이 어울어진 조화),
기둥과 창의 구획이 끌어안은 빛의 분절로 표현되는 음악적 화음
(창살과 문살이 나누는 빛의 화음, 창호지와 회벽에 비치거나 그려지는 그림자와 달빛 등),
그리고 바람과 빛, 비와 눈에 조응하는 택지의 묘와 환경에의 조응은 충분히 감상할만 하다.
물론 사랑채와 별당, 사당을 둔 상류 살림집의 담장과 굴뚝, 중문의 의장도 별미다.
(위의 다섯가지 특징 중 아래쪽 3가지 측면은 아름다운 건축들의 특징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과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 택지의 묘는 한국 건축의 주요한 특징들이다.
널따란 평지에 커다란 건물 한 채에, 서재, 침실, 주방, 복도, 계단 등의 구분이 분명한,
기능과 효율에 입각한 고딕양식 이후의 유럽건축이나 일본건축과 비교하면 차이가 확연하다)
<본채 뒷마당, 혹은 뒤뜰이나 정원쯤으로 이름할 수 있겠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돌확이 놓여있고, 흙과 돌이 이름모를 나무들과 뒤섞여 있다... 깊은 곳에는 아담한 장독대가 자리하고, 화단 가운데에 밑없는 달 항아리가 있다...>
물론, 최순우 옛집에서 이런 별미를 찾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누워서 손을 뻗으면 이쪽 벽과 저쪽 벽이 닿을만한 좁은 너비에,
안마당의 작은 우물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나무와
주변 양옥집으로 둘러쌓인 뒷마당의 정형화 되지 못한 조경은 어수선함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집에서 굳이 한옥의 아름다움을 논하거나 애써 찾을 필요까지는 없다.
선생은 그 작은 방에 머물며 중정에 반짝이는 별을 찾았을 것이고,
뒷마당 툇마루에 앉아서 달항아리에 비친 달빛의 그윽함을 노래했을 것이며,
작은 우물과 장독대 위의 옹기들을 바라보며 한국 미의 깊이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니까.
설혹 비오고 눈내리는 차가운 날씨에는 꼭 닫힌 유리창 너머로 자연을 끌어 당겼을 것이다.
어쩌면 선생의 큰 스케일과 웅장한 울림은 한옥에 있는게 아니라 작은 소품들에 숨겨졌을지 모른다.
물확에 떠다니는 작은 수초에서 생명의 고귀함이 연장되었을 것이고,
촉촉이 젖은 석단과 침묵하는 돌의 의지에 선생의 사색이 숨쉬었을 것이고,
선량하고 또 솔직하며, 때로는 무심하고 공허한 맛은 달항아리에 서려있고,
금강안, 혹리수의 안목으로 한치의 허점도 용서않는 준엄한 가치판단을 서각에 담았을테니...
<선생이 직접 새겼다는 서각...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 문을 닫고 선생은 더 넓은 세상으로 마음을 열었겠지...>
4.
아마도 나는 선생을 통해 <안목>이란 개념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선생은 ; 안목이란 각자가 지닌 <시각미에 대한 감성의 세련도>를 뜻한다고 말하셨다.
인간이 만들어 낸 조형의 아름다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그 서로간의 조화를 얼마나 깊고 넓게 느끼며
또 그것을 스스로 얼마만치 가꾸고 다듬고 가누어 낼 수 있느냐에 따라
각자가 지닌 안목의 높이는 그 차원이 지어진다고 말했고.
선생은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에서 아름다움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자연이나 조형의 아름다움은 늘 사랑보다는 외로움이고, 젊음보다는 호젓한 것이기에
그 아름다움은 공감 앞에서 비로소 빛나며,
뛰어난 안목들은 서로 그 공감하는 반려를 아쉬워한다고 말하셨다.
공감하는 사람끼리 더불어 차한잔을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상대가 인생의 소중한 재산이라는 말도...
그런 안목을 찾았던 분이니 선생은 그만큼 외로웠을 것이고, 그만큼 사랑받았겠지?!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너무나 친숙한, 또는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선생의 친구였던 것 같다.
수화 김환기부터 천정 이상범, 운보 김기창, 간송 전형필, 박수근, 천경자 님등
서로를 의지하고 독려하며 함께 스스로 삭막하다 생각한 세상을 이겨낸 관계...
그분들에게 선생은 어떤 의미였고, 선생에게 그분들은 또 어떤 의미였을까?
<이 장독대를 바라보며 선생은 우리네 전통의 장 맛과 초 맛을 그리워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선생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한다.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깊이를 담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게 남은 선생의 文史哲 향기다.
그리고 그 향기는 선생과 함께 꿈을 나누고 아픔을 동행했던 관계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세속의 굴레와 나약한 인간의 의지를 자극하고 깨뜨릴 수 있는 자유로운 관계가 필요한거 아닐까?
교감하는 영혼, 몸과 마음을 열 수 있는 동반자를 찾는 게 내게 재구성되는 그분의 인격일 것 같다.
관계...
조그마한 연하장과 전각, 그림, 메모, 엽서, 편지 조각들, 그리고 그 사람들...
어쩌면 나는 선생의 글과 행적만이 아닌 그분이 나누었던 관계에서 풍부함을 느낀다.
안목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기억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 거울이 될 수 있는 부러운 관계...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니, 그리운 정분은 넘치고 바라보는 정경은 한없이 흐뭇하다.
그런 관계가 있어 이 작은 <옛집>이 넉넉하고 더더욱 차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5.
추사의 글씨, 김홍도의 글씨, 그리고 선생의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서각.
이 작은 공간에서 선생은 깊은 산을 만들었다.
햇빛을 끌어 들이고, 바람을 끌어 들이고, 물과 꽃과 돌을 끌어 들이고...
좁고 작은 평면 같은 어수선함에 가식없는 소박함을 담았고,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탐탁스러운 힘을 그렸고,
시작된 곳도 끝간데도 모르는 어리숙한 선을 노래했고,
익살스러우면서도 때로는 눈물겨운 모습을 바라보셨다.
넘치지 않으나 부족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누추하지 않는 곳...
어쩌면 선생의 옛집은 딱 그만큼의 공간으로 한국의 미를 노래했다.
선생은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미를, 정말 아름답게 노래하게 만드셨다.
작은 집에 머물던 큰 마음...
그게 부석사의 일망무제, 그 장엄한 스케일을 그리워하게 만든 배경이었을까?
작은 공간에 머물지 않을 길고 긴 시간...
근시안적인 거드름이나 신경질 없는 의젓하고 너그러우며 느긋한 안목의 소유자.
최순우 옛집에서 선생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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