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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여행...

전북답사3> 5. 고려시대 불상이 무서운 이유?...090313

 

 

 

 

1. 전라북도 - 돌을 다듬고, 돌로 만들어진 문화

2. 청동기 시대 - 전북지역의 고인돌 / 고인돌이라는 거석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3. 백제시대 - 전북지역의 탑 / 돌로 만든 최초의 국가적 사회적 상징물

4. 신라시대 - 전북지역의 석등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 완성된 지역

5. 고려시대 - 후백제 지역과 보관 입불상 / 고려시대의 불상들은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일까?

6. 신라말, 고려시대에 대한 몇가지 첨언

   6-1) 백제의 DNA - 중국 동해연안의 신라방에는 어떤 역사적 토양이 있었을까?

   6-2) 장보고와 선종 -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태동을 만든 장본인

   6-3) 고려의 불교문화 - 인쇄술, 도자기, 고려불화 보다 탑이 더 좋은 이유...

7. 조선시대 - 전북지역의 석장승 / 돌로 만든 민초들의 꿈

8. 조선후기 - 전북지역의 민간신앙 / 보국안민, 구제창생, 후천개벽을 위한 몸부림

9. 마무리 하면서...


 




5. 고려시대 - 후백제 지역과 보관 입불상 / 고려시대의 불상들은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일까?


후백제 멸망후 고려시대... 어쩌면 이 시기가 전북지역이 역사에서 가장 소외된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이유로 전북지역은 우리가 기억할만한 유적을 남기지 못하지만, 인근지역을 살펴보면,

견훤의 아들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고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개태사(936년)와

지방호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세운 논산의 관촉사(968~1006)만 있는데,

궁예나 신라보다 마지막까지 한반도의 쟁패를 걸고 다퉜던 견훤의 근거지가 완주였다는 이유때문인지,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금강(차령) 이남의 후백제인들을 정치적으로 등용하지 말 것을 지시한다.

(논산은 행정구역상으로 충청남도에 속하지만, 금강 이남의 익산, 완주와 경계를 접하는 지역이고,

완주는 견훤세력의 중심지, 그리고 익산은 백제 마지막 정치 군사적 요충지였으니 생활권은 밀접하다)

 

<논산 개태사 삼존불입상... 왕건이 견훤의 후백제 세력을 몰락시키고 제일 먼저 조성한 게 바로 이 불입상이다... 얼굴과 손발, 그리고 장식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손발은 우직하게 크고 두툼한데, 장식은 그럴 수 없이 세련되고 정성스럽다... 이에반해 얼굴은 온화한 미소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무심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꾸며질 수가 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고려의 광종이 세운 관촉사 은진미륵(엄밀히 관음보살상이지만)은

백제와 후백제가 멸망할 당시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던 황산벌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광종의 얼굴로 추정되는 은진미륵은, 어쩌면 입불상 역사에서 최초로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얼굴은 결코 인자하거나 너그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는게 아니라 괴기스러운 모습이다.

한마디로 확실하게 강권의 힘을 과시하는 권위와 군림의 상징이면서 왕처럼 보관까지 쓰고 있다.

 

<논산 관촉사의 관음보살입상...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이 불상은, 고려초기를 대표하는 광종의 얼굴로 추정해 볼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러한 보관을 쓴 권위의 상징으로 변화된 불상이 한동안 유행하는데,

지역적으로는 파주 용미리 석불과, 대구 팔공산의 관봉석조여래, 충주 미륵사지와 원평리를 빼면

안성 대농리, 국사암, 덕산, 삽교, 당진 안국사, 부여 정림사, 대조사, 익산 동고도리 등

금강과 충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5~6세기 백제의 영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부조에 보관을 쓴 경우도 순천 금둔사, 담양 오룡리, 홍성 신경리, 그리고 예산 수덕사 정도다)

관음보살, 석조여래 등 고유 명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는 사실이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통치의 은혜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관음보살이 반역의 상징 미륵이 된 것이다.

 

<장흥 금둔사의 석불입상... 쌍봉사에 남아있는 철감선사(부도)가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 금둔사에 보관과 비석형식을 섞은 입불상이 있다... 단순히 기능적 측면에서 이런 보관을 만들었을까? 9세기 신라말기...> 



보관을 쓴 입불상을 통해 나는 세가지 정도를 추론하는데,

하나는 왕권강화를 위한 상징으로 만들어진 보관입상이 어떻게 미륵불로 변질되었는가?

또 하나는 왜 보관입상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는 정착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후백제 지역에는 그런 미륵불 외에 변변한 유물과 유적을 남기지 못했는가를 생각한다.

물론 이 세가지의 의문은 고려의 정치적 구성과 세력분포, 대외정세를 반영하는 결과이기도 하다.

 

<담양 오룡리 석불입상... 가까운 곳은 아니지만, 보관과 비석형태라는 비슷한 유형의 입상이 하나 더 있어서 첨부해 본다...> 


국가의 정치가 안정되고, 살아갈 만큼 넉넉한 세상에서는 아미타 신앙이 주도를 한다.

즉, 지금도 큰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으니, 내세에도 이 행복이 그대로 지속되기를 염원하게 되겠지.

그러나 정국이 불안정하고, 지금 세상에 불만이 클수록 현세의 극락을 지향하는 미륵신앙이 득세한다.

지금 당장 뒤집어엎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든 고통 속에서, 내세의 극락은 너무 사치스럽기 때문이다.

그만큼 후백제 지역은 호족과 왕권강화 과정에서 수탈당하고 소외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고려는 개경, 서경(평양), 남경(한양)외에 동경(경주)을 따로 설치하여 옛 신라지역을 우대했지만,

조세를 운반하기 위한 12조창 중 절반이상을 후백제 지역(곡창지대)에 집중적으로 설치했을 뿐이다)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미륵불과 미륵보살로 알려진 고려시대 석불입상을 대표하는 불상이다... 관촉사가 먼저 조성된 게 아닐지...> 


그러한 불만이 세력화되기 전까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미륵불의 재림이었을 것이고,

왕권강화를 위한 보관입상은 하나의 불상조성 양식이 되어 인근지역에 한정되어 파급되지만,

훨씬 소박한 형태로, 본래의 의도는 무시되고 민중들의 염원을 담은 미륵불로 불리게 되지 않았을까?

그나마 왕건 발흥 초기에 고려에 귀순한 충청 지역 호족은, 전북지역 호족에 비해 나은 조건이 아니었을까?

 

<팔공산 관봉석조여래... 권위와 위엄에서는 이 불상을 따라올 이는 아무도 없지 않을지...>  


일부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개성의 왕건은, 장보고 세력의 후예로 보는 경향이 있다.

청해진을 근거한 장보고, 김제 일대로 이주한 장보고 잔당의 후예 견훤, 그리고 개성의 왕건...

대략 30년의 시차를 두고 등장하는 이들은 해상무역의 전초기지로 연결된 상업집단이란 공통점이 있고,

실제 왕건과 후백제의 군사적 균형은 청해진에서 나주로 연결되는 호족들의 이반으로 깨지게 되고,

충청지역 일대 호족들을 편입한 이후, 고창지역에서의 전투승리로 결정적 승기를 잡는다.

결국 예성강과 영산강 유역의 상업집단이 합세하여 금강일대의 신흥세력을 몰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충주 미륵사지 석불입상... 이 시기, 그리고 고려시대를 통털어 가장 부드럽고 소박한 미소를 갖춘 미륵불이 아닐지...> 



또 하나,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신라의 항복과 후백제의 궤멸을 통해 완성된다.

즉,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지역은 물리적 군사적으로 고려에 의해 궤멸된 것이 아니라

정치력과 경제적 부를 그대로 보장 받은 채 고려에 투항하여 인적 네트워크를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점은 한지역과 국가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이후 당나라에 의해 시행된

포로압송과 강제 분산정책에 의해 완전히 네트워크가 붕괴되고 역사마저 소실된 것과 큰 차이다.

 

<충주 원평리 석불... 신라시대를 생각하면 두상 뒤에 광배를 갖춘 입불상들이 있는데, 남산 배리불은 묘한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

<충주 원평리 석불입상... 석등과 비슷한 보관이 온전하게 보존된 경우다...> 


(백제의 경우 포로만 1만3천명 정도인데 반해, 고구려는 연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의 규모만 10만호다.

- 멸망당시 백제가 76만호, 고구려가 69만호였는데, 일부에서는 69만명이라 말하지만 이해가 안된다-

645년에 6만호, 669년에 3만8천호를 더하면 멸망당시 69만호였던 고구려는 완전히 공중분해된 수준.

이렇게 당나라 서쪽으로 강제 이주된 20만호에 비해, 신라로 귀순한 규모는 669년 4천호에 불과하다.

물론 중국-한반도-일본으로 나뉘어 있던 백제는 본국의 멸망과 함께 원형자체가 남아있지 않다.

<신당서><책부원구><삼국사기><당회요><자치통감><대당고특진천군묘지-연남생 묘지석> 참조)

 

<부여 정림사지 석불입상... 고려시대 조성된 걸로 보이는 이 불상도 보관을 쓰고 있다...> 


1000년 정치의 부침을 경험한 신라의 귀족들이 하루아침에 거세되거나 역사속으로 사라질 일은 없다.

1945년 해방후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쥐고 지금까지도 건재한 친일파와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의 질긴 생명력은 고려건국 대략 150년이 지나면 정권의 핵심과 실세로 재등장하게 된다.

이미 980년대 시무28조를 건의한 최승로가 경주출신이고(최치원은 신라말 시무 10조를 건의했지?),

칭제건원, 서경천도와 금나라 정벌을 주장한 서경파 묘청을 제압한 개경파 김부식이 바로 신라계다.

삼국사기로 익숙한 김부식이 개경파의 수장이었다는 의미는 이미 고려의 실세를 장악했다는 이야기.

 

<부여 대조사 석불입상... 보관이 결코 우산은 아니지 않을까? ^^> 


나라의 이름이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었을뿐, 경주와 신라계 귀족들에게 변한 것은 별로 없었다.

경제적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지혜로운 그들의 후손은 전통도 크게 바꾸지 않았다.

선종의 적극적 세례를 받은 화려한 부도 하나도 경상도 지방에 새로 만들 필요가 없었고(단속사 부도),

굳이 새로운 석등을 만들거나, 관모를 쓴 미륵불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탑양식을 바꿀 이유도 없었다.

경상도 지방에 신라와 대(통일)신라의 유적을 제외하면 고려시대의 문화를 대변하는 유물은 없다.

 

<서산 안국사 석불입상... 몸은 극도로 단순화 되고, 인체비례를 포기한 얼굴에 온화함은 사라지고, 보관은 그대로 남고...> 


또한 고려창건과 함께 득세한 풍수지리와 풍수비보 사찰과 유적도 신라계 경상도 지방에는 거의 없다.

신라계 지도층과 귀족들은 과거의 영화를 지키는데 급급했거나, 발전과 변화에 인색했는데,

새로운 사상조류를 통해 정치문화적 선도세력으로 나서기에 그들은 찍힐 걸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생존을 위해 그들은 진취적 기상을 스스로 거세하고 가장 보수적으로 전통에 집착하게 된다.

오히려 불교왕국 고려에 새로운 통치이념으로서 유교를 수용하게 만들고, 보수적 외교노선을 견지했다.

 

<안성 미륵사 기솔리 쌍미륵... 이제는 보관도 작아지고, 미륵이라는 이름과 형식만 남아간다... 여기에서 보관을 벗기면 조선시대의 민불이 되는게 아닐까?> 



세 번째,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내부의 혁명적 변화 외에도 외부의 충격과 변화를 추종한다.

물론 선후의 문제가 있지만, 고려의 등장에는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혼란과 몰락이라는 근본적인 계기를 상수로 하고 있다.

당나라의 쇠퇴는 곧바로 요서에서 만주에 이르는 거란, 여진 등 고구려 후예들의 준동과 직결된다.

 

<안성 국사암 궁예미륵... 기솔리 미륵사 바라위 국사봉에 있다... 보관의 기원이 황제를 지칭했던 고려의 광종 스타일일지도 모르지만,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이 불상을 보면, 미륵불을 자처했던 궁예나 견훤은 항상 보관을 쓰고 다니지 않았을까? 미륵불이라고 보관을 썼으니,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미륵불에 보관을 씌웠다??? 이상한가? ^^> 


이시기는 당나라-발해-신라로 이어지던 국제관계의 균형이 깨지고 이합집산이 시작된 시점인데,

복식까지 당나라 풍으로 바꾸었던 신라에게는 가장 주요한 동맹의 축이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당나라와 발해의 눈치만 보던 거란족에게는 부족통합과 과거 고구려의 영광을 되살릴 계기가 되었다.

이런 시기였기에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중국을 포함한 북방부족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는

고려라는 나라의 정체성 확립과 대외관계에 가장 주요한 정치적 입장과 이슈를 결정했다.

(충분히 알려졌지만, 거란(요)과 여진(금)의 태동 초기에는 자신들이 고구려의 후손임을 분명히 밝혔다.

또 마지막으로 중국을 통일한 청(만주족-여진)나라는 고구려에 신라의 후손까지 자처했다<만주원류고>)

 

<안성 대농리 미륵불... 미륵동네로 불리는 안성은 궁예와 견훤세력의 접경쯤에 위치하는 곳... 비슷한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다...> 


때문에 916년과 918년에 각각 건국된 요나라(거란)과 고려는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치적 역량은 군사적 요인으로 재편되었고, 북방 방위선 구축 및 전쟁준비로 귀결된다.

결국 거란 침입후 천리장성이 축조되고(1044년) 100년후 일어난 묘청의 난도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때 고려가 택한 것은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고토회복이 아니라 유교를 통한 안정이었고,

이것을 주도한 이들이 김부식을 위시한 신라계 정치 주도층의 자기완결적인 보수적 노선이었다.

(다시 200년이 지나 위화도 회군까지, 이 노선투쟁은 고려의 창업과 멸망을 관통하는 핵심고리였다) 

 

 

<안동 이천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석불과 함께 고려시대 불상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뚜렷한 윤곽에 두툼한 선, 그리고 다부지고 자신만만한 표정... 그래도 어느 다른 지역의 불상들과 달리 우직스럽지 않은 편안한 표정이다...> 

 

 


이런 과정에서는 한 사회가 개방과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해 진취적인 기운으로 무장되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시기 사상과 종교는 기득권층의 부의 세습과 과시의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이어서

사회통합을 위한 정신적 지주란 긍정적 역할을 방기하게 되고, 경제적 문화적 가치마저 사유화된다.

결국 이 시기에 부흥한 고려시대의 대표적 유물 수월관음도나 청자의 유행은 귀족들의 소유로 한정된다.

이미 고려의 불교는 민중과 함께 불국토를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통치의 수단으로 변질됐다.

 

<익산 동고도리 석불... 보관을 쓰고, 솟대처럼, 장승처럼 그렇게 형식만 갖췄다... 이 시기, 전북지역이 만든 유일한 불상이자, 비슷한 유형이라고 말한다면 심한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이 하나의 유물로 " 보관입불상 "의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게...ㅜ 그렇지만, 고려시대 전북지역에서 마음으로 염원한 것을 지역의 경제와 정치적 조건이 뒷받침 될 여건은 없지 않았을까? 석탑과 석등을 만들고 완성했던 지역의 침체치고는 너무 암울하다... > 

 


이제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함께 촉발된 부의 편중에서 농민들과 노비들이 선택할 것은 민란뿐이었다.

그리고 백성들과 괴리된 문벌귀족의 사치와 멸시에 반기를 든 무인세력이 정치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처음 후백제 지역 공주의 망이/망소이난으로 시작된 민란은 이천, 전주관노들의 봉기로 이어지고,

1182년 경주와 운문사의 효심/김사미난과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의 봉기까지 삼남지방을 휩쓴다.

아무튼 이 시기 이 지방에서 한 것이라고는 농업생산력이 증대된 만큼 많은 곡물이 조세로 바쳐졌고,

열심히 청자를 구워냈으며, 입석불상을 모시면서 미륵의 재림을 기원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똑 같은 미륵보살, 혹은 미륵불이다... 하나는 백제시대에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안성 미륵당의 태평미륵이다... 보관을 쓴 같은 이름의 불상... 태평미륵을 보면 손가락까지 턱을 향하고 있다?(억지군...ㅎㅎ) 두 얼굴의 표정을 보라... 백제와 고려의 미감일까? 수준의 차이일까? 태평성대를 갈망하는 미륵의 눈이,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같이 느껴진다면 고려시대의 이 지역은 결코 태평하지만은 않았을 듯 싶다...> 


 

결국, 몽고의 침입이전 고려사회에서 이 지역에 어떤 것이 만들어질 사회적 토양은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 무기력과 관료들의 부패에서 새로운 유적이 만들어지는 걸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농기구와 호족들의 무기를 녹여 철불을 만들고, 관모를 쓴 거대한 미륵불들이 만들어지지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불상의 얼굴은 그 어디에도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인자한 상이 없다.

자비로운 느낌으로 해탈을 표현하는 신비롭고 이상적인 얼굴이 아니라 욕심많은 인간의 모습이다.

 

<다시 한번, 보관을 쓴 석불입상을 대표하는 관촉사의 얼굴을 뜯어 본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왕이 만들었다면 지방호족을 제압할만한 도발할 수 없는 권위와 강력한 힘이 필요했을거고,

지방호족이 만들었다면 숱한 전란에서 살아남았다는 자신감과 노비를 장악할 우악스러움이 필요했을거고,

민초들이 만들었다면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날 소박하면서도 부드러운 희망이 필요했을거고...

고려시대 초중반기 200여년 사이에 만들어진 거대한 크기의 괴불과 갓을 쓴 작은 미륵불 등은,

지방호족들이 만들어서 투박하고, 괴기하고, 무서운게 아니라 사회가 어지럽고 불안정했던 결과다.

시대는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며, 그 흐름은 지역적 토양과 원형을 추종한다.

 

 

<강릉 신복사지 석불보상... 언젠가도 이야기했던 뒷태가 가장 어여쁜(?) 불상이다... 월정사와 거의 흡사한 형태의 불보살... 보관을 쓰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그 뒷모습을 보면서 " 머리에 쓴 보관 "을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