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라북도 - 돌을 다듬고, 돌로 만들어진 문화
2. 청동기 시대 - 전북지역의 고인돌 / 고인돌이라는 거석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3. 백제시대 - 전북지역의 탑 / 돌로 만든 최초의 국가적 사회적 상징물
4. 신라시대 - 전북지역의 석등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 완성된 지역
5. 고려시대 - 후백제 지역과 보관 입불상 / 고려시대의 불상들은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일까?
6. 신라말, 고려시대에 대한 몇가지 첨언
6-1) 백제의 DNA - 중국 동해연안의 신라방에는 어떤 역사적 토양이 있었을까?
6-2) 장보고와 선종 -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태동을 만든 장본인
6-3) 고려의 불교문화 - 인쇄술, 도자기, 고려불화 보다 탑이 더 좋은 이유...
7. 조선시대 - 전북지역의 석장승 / 돌로 만든 민초들의 꿈
8. 조선후기 - 전북지역의 민간신앙 / 보국안민, 구제창생, 후천개벽을 위한 몸부림
9. 마무리 하면서...
6. 신라말 고려시대에 대한 몇가지 첨언 - 백제 DNA, 장보고의 유산, 고려의 불교문화.
* 관촉사 은진미륵과 파주 용미리 석불 중, 누가 빨리 만들어졌을까?
고려시대, 후백제의 중심지였던 전북지역에
왜 변변한 유적 유물이 만들어지지 않는가를 이야기하면서 너무 많은 것을 건들였지?
고려의 역사와 대외관계, 충청지역에 조성된 관모석불입상, 신라계 경상지역의 보수화와 그 영향까지...
정리하면서 생각해보니 지난번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에 대해 소개하면서
고려시대 전반기의 시대상황과 법상종의 탄생, 그리고 천태종의 개창까지는 소개했던 것 같다.
그때(2008.04.25 - 벌써 1년 전이군...^^) 쓴 내용 중에서 하나는 수정해야 할 것 같다 ;
파주 용미리와 안동 이천동 제비원 석불이 논산 관촉사 관음보살과 조성된 시기가 비슷하다는 말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후가 바뀐 게 맞지 않을까?(<역사신문>등의 설명이 일반적인 정설이라고 봤는데...)
<파주 용미리 석불... 미륵불과 미륵보살이라는 설화와 전래 명칭에 이의가 없는 것으로 봐도, 관촉사 입불상이 훨씬 빠르다는데 한표 던지기로 했다...^^>
안동 석불은 용미리 석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건 맞는 말인 것 같고,
용미리 석불에는 선종(1080년경)과 원신궁주의 설화가 전해지는 걸로 보면 대략 100년의 시차가 있다.
광종 이전 선종의 영향으로 미륵불이 조성되었다고 보기에 그 당시 호족들의 상황이 녹녹치 않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던 왕실과 화엄종-법상종의 흐름을 봐도 관촉사 입불상이 선행된게 맞을듯...
6-1) 백제의 DNA - 중국 동해연안의 신라방에는 어떤 역사적 토양이 있었을까?
그리고 선종과 신라의 멸망에서 장보고의 영향에 대해 조금 더 첨언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앞, 본문에서 청해진 일대의 장보고와 김제로 이주한 장보고 잔당, 그리고 개성의 상업세력이
일정한 시차(대략 30년)를 두고, 일정한 해상루트를 통해 연결된 동질의 집단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문제를 조금 더 다각적으로(? 좌충우돌에 중구난방으로!!!) 살펴볼까?
내 이야기의 출발, 한 지역/지방에 각인된 문화의 DNA의 복원력과 질긴 생명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신라와 후백제가 멸망한 대략 300년후인 1202년 경주의 이비는 <신라의 부흥>을 주장하며 반역하였고,
1237년 전라도 초적 이연년은 몽고와 고려의 30년 전란 와중에서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였다.
물론 1300여년이 훨씬 지난 2000년대에도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도 무시할 수 없고...
(나는 시시비비와 긍부정, 또는 진실공방을 떠나서, 관심의 방향과 현재적 의미를 찾자는 것이다)
<역사부도에서...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이 확대되는데, 1200년대 초반, 경주와 담양, 그리고 평양에서는 나란히 신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난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지 600여년, 후백제와 신라가 멸망한지 300년이 지나서도 그 지역에 자리했던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민초들의 복원력, 혹은 회귀본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때가 많다... 한사람이 주장했다가 아니라, 그것을 동조하고 정치사회적 파급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일회성 해프닝으로 무시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 더 멀리가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후, 그 유민들과 소위 잔당들은 어떻게 됐을까?
왕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도 그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던 민초들의 꿈은 면면히 이어졌다.
이는 동서고금의 진리로(^^) 고구려의 멸망(668년)후(30여년후) 요동에 등장한 발해 외에도
안녹산의 난 이후 산둥반도에 고구려를 꿈꾼 이정기의 평로치정왕국도 존재한다(770년경~820년)
치정왕국 말기에 등장하는 게 바로 청해진의 장보고세력이며, 산둥반도 무역권을 다투게 된다.
그러면 백제의 유민들은 일본열도에 틀어박혀 국호를 일본으로 고친것 외에 아무것도 안했을까?
기왕 백제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북지역을 정리하는만큼 백제의 실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필요할듯...
<역사부도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다면, 이 내용은 제도권이나 재야 사학계에서 공감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내용이 되겠지?>
이미 4세기 중엽 근초고왕과 5세기말 동성왕대에 전성기를 맞은 백제는
양자강 하류 양주에서부터, 하북성, 북경에 이르기까지 태수와 왕의 형태로 지배체제를 갖췄는데
광양, 대방, 조선, 광릉, 청하, 성양, 낙랑태수와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가 그 이름이고,
당시 중원의 지배자 북위와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10년이 넘는 전쟁(490년)을 치뤘다는 사실은
삼국사기를 비롯 송서, 양서, 통전, 자치통감, 구당서 등등에서 만주원류고까지 기록이 남아있다.
<역사부도에서... 송,제 양대라는 말이나, 북위/후위(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위나라가 220년경이었음을 전제로 이때의 위를 후위라고 부른다)의 영역과 시기...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대해, 한족이 세운 것이라고 주장되는 송,제 양대를 합쳐서 최근 중국사학계에서는 남북조시대라고 부르고 있지? 북위는 유연의 침공을 받아 494년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근거로 작성된듯 싶은데, 490년에서 대략 3차에 걸쳐 북위의 기병10여만 대군은 백제군에 대패를 당하고, 요서, 진평, 대방 등지를 백제에 빼앗긴다... 그래서 그 패배의 여파로 낙양으로 천도했다는 재야 사학계의 주장도 있다... 심지어 남제 23년의 시기가 동성왕의 재위 기간관 일치(479~501년)하는 것을 근거로, 이 당시 남제는 실질적인 백제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주장까지도 있다...^^>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때부터 요서와 진평 두 군을 영유”<통전>
“서로는 월주에,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구당서>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북위)때는 중원을 차지했다”<통전>을 비롯해 수많은 중국사서 <백제전>에 그 영토가 표현되며,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나라)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는 삼국사기 <최치원전>기록을 봐도
백제의 존재가 중국영토에 얼마나 막강한 세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략 근초고왕(370년경)부터 위덕왕(570년경)까지 200여년... 여기에 대만지역으로 보이는 담모라국과
백제말 당나라 장수가 된 흑치상지 장군은 필리핀지역 출신이었음은 중국,한국 학계의 공인된 학설인듯)
문제는 오늘날 중국의 역사는 한(漢)과 당(唐)나라를 제외하면 원나라 대에 완전히 통일이 되고,
그 이전 격변기에는 워낙 많은 군소제국들이 명멸해왔기에 그 영역적 한계와 존립시기를
우리 구미에 맞게 재단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다는 특징- 거대한 영역을 가진 나라라는 점이다.
때문에 먼 옛날, 일정 기간 중국의 일부지역을 지배했다고 우리땅이었다는 것은 비약임이 분명하다.
<Daum이미지에서 스크랩한 백제의 22담로... 솔직히 인도네시아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는 모르겠고...^^ 필리핀이나 대만에 대한 부분은 약간이나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 내용을 주장한다고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는 게 분명하지만, 한반도내로 우리들의 활동영역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폐쇄적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단지, 근거가 미약한 형태에서 모든 걸 추론하고 추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는 없을거고...^^>
<역사부도에서... 명대 일본인들의 동남아 진출지와 예전 백제의 활동무대가 비슷하다? ㅎㅎ 사실 이 지도는 해류와 상업교통로의 일체성에 근거했겠지만, 분명한건 당나라에 신라방이 있었듯이, 이처럼 수백년이 흐른 뒤에도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도시와 어떤 이유에서건 지역적 근거지들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인듯 하다... 하긴, 한반도의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천황을 중심으로 막부가 등장하기 이전 350여년을 확실하게 장악했던 <이제 탄생한 일본>은 예전의 해외 근거들을 모두 포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Daum이미지에서 스크랩... 꽤 오래전 KBS로 기억하는데, 광서자치구에 백제라는 지역에 대한 취재가 있었다... 수백년전 산둥성 "백마강"에서 선조들이 이주해왔다고 믿는 이 오지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백제인이라고 믿는다는 인터뷰도 했던 것으로 기억나고...(물론 그들은 백제의 실체에 대해 몰랐다) 이 지역 주민들의 민속과 생활풍습(놀이문화, 디딜방아 등)은 6~70년대 전라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속과 완벽하게 일치했었다... 뭐, 이런 근거들이 있어서 다양한 해석과 추측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겠지만...>
(문제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는 충분히 아는 것은 부족하더라도 정서적 공감이 있지만,
가끔 발견되는 고고학 유물에만 의지하는 백제의 존재는 정신사와 체계를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데다
북한은 고구려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백제를 무시하고, 남한도 한반도 유적에만 의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중국과 일본의 동북,서북공정과 역사왜곡 등은 끈질김을 넘어 광적인 집착에 가깝다.
결국 역사란 그 문화와 전통과 정신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주인행세를 할 수 있고,
과거의 영화는, 살아남은 자와 미래를 선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만 뿌리와 정체성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후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4~6세기 백제가 활동했던 지역에 <신라방>이 들어선다는 점이다(경덕왕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백제 전성기, 중국에도 백제의 영역이 이렇게 넓었다가 아니라,
백제의 고토였기에 신라인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는 점을 말하고자 이렇게 중언부언 하는 것이다.
당나라에 정복되기 이전 백제유민들은 중국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도 포로들이 넘어갔다.
그런 연고들이 있어 광서장족자치구 옥령현에 백제(향)이란 지명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고,
룽먼석굴 877번 불상에 부여씨라는 명문도 새겨지는 것이고, 신라인들의 정착에도 거부감이 없지 않았을까?
<역사부도에서... 장보고의 활동영역과 신라방의 위치... 뭐, 견강부회라 해도 좋지만, 요서지방을 제외한 산둥반도와 양자강 하류의 중국동해안 일대에는 광범위하게 신라방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듯 싶다... 그리고 그 지역들은 북위와 송/제 양대, 소위 4세기에서 6세기초까지 기록된 백제의 영역과 일치한다...>
<Daum이미지 스크랩... 몇년전 확인된 룽먼석굴의 "부여씨"명 877번 석불... 7세기, 백제 멸망을 전후해 룽먼석굴에도 백제인들은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의자왕과 함께 포로로 압송된 일부 귀족들의 자제는 당나라 황제의 황비가 되기도 했다는 묘지석들도 최근에 발견이 되어, 포로로 압송된 유민들의 흔적인지 그 이전 백제인들의 흔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지역적 토대들이 있어서 장보고의 중국내 거주지는 백제나 고구려 유민들의 근거지를 토대로 삼기에 충분한 정서적 공감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양자강에서 산둥반도에 이르는 영역을 국가와 사상이 아닌 상업으로 장악한 이가 바로 <장보고>다.
그리고 치정왕국이 몰락한 이후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중국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백제 동성왕대 이후 마지막으로 서해를 內海로 만들고 격변의 시기에 각국 문물교류를 촉진시킨다.
(이때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로 강성해서, 발해만은 그들이 통제했다고 보는 게 옳다)
6-2) 장보고와 선종 -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태동을 만든 장본인
그 당시 장보고가 촉진시킨 사상적 문물이 바로 중국 남쪽의 선종이며, 선종은 신라뿐만이 아니라
이미 당나라를 약화시키고 중국제국들을 격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한반도는 선종에 배타적이었던 신라의 화엄종/법상종이 고려로 이어져 불교왕국을 지속했으나,
중국은 통치이념으로서의 불교를 배척/비판하고, 유학을 중심으로 지배논리와 사상체계를 바꾼다.
(대략 600여년의 시차를 두고 불교를 비판한 대표적 유학자가 당나라 한유와 고려말 정도전인데,
한유는 통치이념과 결합한 불교의 폐해를, 정도전은 사상과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했다)
<석굴암... Daum이미지 스크랩... 내가 찍은 사진들이 있다면 굳이 스크랩하지 않을텐데, 석굴암 내부는 들어가보질 못해서...^^ 불교미술사에서 석굴암의 존재는 기원전 6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기원후 8세기, 교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대승불교가 완성되고 정착되었음을 증명하는 유적으로 자랑되고 있다... 대승불교가 국가적으로 꽃피운 마지막 유적이 아닐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여기에서까지 선종의 역사와 의미, 그리고 그 정치적 파급력에 대해 논할 일은 아니겠지만,
북위가 받아들여 삼국시대를 풍미한 <왕즉불(王卽佛)>로 변질된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가
탈논리로 논리의 허상을 깨고 <해탈과 자비/평등>을 실천하는 오리지널 신앙으로 깨어나고자 했던
선종은, 유럽의 카톨릭을 비판한 개신교처럼 대중적이며 선진적인 <종교개혁의 결실>이었다.
<김천 수도암 비로자나불... 석굴암 조성 대략 50년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불교가 만들어내는 마지막 불상 형태로서 비로자나불이 어떻게 한반도에 만들어지고 파급되는가를 시사하고 있다... 실체가 없는 법신으로서 빛이 넘치는 광명의 세계를 이 불상처럼 손가락을 덮음으로써 추상화, 상징화시켰다면 얼마나 많은 이해하고 공감할지 모르나, 불상의 역사를 추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닌듯 싶다...>
자연히 왕권강화를 위해 봉사하던 사원불교와 종파불교의 폐단이 비판되고 대중적으로 하강하는데,
그 근본에는 현체제의 당위성과 진골귀족의 대물림에 인과설을 뒷받침한 교종과 치열히 대립한다.
그 반대급부로 생겨나는 게 지방호족들의 발호이며, 현체제를 뒤엎는 새로운 왕조의 갈망인데,
미륵보살-아미타불-석가불-비로자나불-관음보살을 대체하여 <미륵불>이 대중적 추앙을 받게 되고,
왕족, 즉 인간의 씨로 대물림되는 정당성을 부정하고, 명당에서 큰 인물이 생긴다는 인과설을 내세운게
바로 신라말, 고려초의 <풍수지리설>이었다. 여기에 <선종>이라는 토양의 가세는 가치 폭발적이었고
그 정치적 금전적 후원자이며, 지역적 방패막이가 되어준 게 바로 장보고 등장의 의미이다.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 그리고 다시 50여년이 지난 860년대, 보림사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런 이유로 화엄종이 최후로 꽃피운 마지막 단계의 불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추후 조성된 비로자나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만한 크기와 면모를 갖춘 비로자나불은 만들어지지 못한다...>
실제로 장흥 보림사 가지산문 체징, 창원 봉림사 봉림산문 현욱, 곡성 태안사 동리산문 혜철, 보령 성주사
성주산문 무염, 화순 쌍봉사 사자산문 도윤, 강릉 굴산사 사굴산문 범일이 장보고세력의 후원을 받았고,
남원 실상사 실상산문(홍척)까지를 포함하면 신라9산선문 대부분은 그의 세력권에 존재한다.
(그외 문경 봉암사 희양산문 도헌과 해주 광조사 수미산문 이엄이 있고, 선종1조 도의선사는 가지산문이다)
<역사부도에서... 다시한번 인용한다... 9산선문에 대한 표기에서 사자산문의 위치에 약간의 이론이 있는 듯 싶다... 여기에서는 영월 법흥사로 추정되는 곳을 흥녕사라 말하고, 다른 자료에서는 화순 쌍봉사를 주장하는데, 나의 입장은 후자다... 이유는 밑에...>
그러나 진정한 종교로서의 불교는 새로운 왕조의 흥망에 초연해야 정상이며, 개인적 신앙에 불과하다.
장보고의 관심은 권력구조의 재편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850년대에 정치 희생양으로 몰락하고, 그 잔당들은 전북 벽골제(김제)로 강제 분산된다.
30여년, 한 시대를 주도하고, 서해를 내해로 삼아 활동하던 상업집단에게 농사꾼은 어울리지 않는 일...
영국과 유럽에서 쫓겨난 프로테스탄티들이 미국에서 신세계를 개척하듯이 그들은 신세계를 갈망했겠지?
대략 1세대(30여년)가 지나 견훤은 전주에서 봉기하고 무진주를 점령한다.
후백제 견훤의 등장과 장보고 잔당들의 강제이주는 아무 관련이 없을수도 있으나 결정적 계기일수도 있다.
단지 신라의 해체가 정점에 이르고, 선종이란 무기가 지배이데올로기가 될수 없다는 한계를 견훤은 간파했고,
그는 미륵신앙에 의지하여 정치적인 세력을 확보하는데, 이는 궁예의 등장과도 매우 흡사하다.
문제는 불교와 미륵신앙이 새로운 왕조를 세워가기에는 이미 그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사상은 시대를 선도하고 이끌 신선한 사상적 배경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고려시대의 불교는 왕이 곧 부처임을 증명하는 대대적인 사원건축과 탑을 세우지 않았고,
대중과 함께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불교문화에 집중하는데, 그것이 바로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같은 해상 상업집단인 개성 송도 왕건의 등장에 장보고의 영향은 없었을까?
왕건의 탄생설화에는, 무사집단과 결합(6조), 해상세력으로 진출, 풍수지리의 영향(부친)이 확인되는데,
그 조부와 4대조, 5대조가 장보고로 보이는 선단의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설화를 강조하고 있다.
아무튼 장보고이후 2세대, 김제로 이전 1세대가 지나 왕건은 한반도의 실력자로 등장한다.
내가 왕건의 등장에 장보고의 영향을 결부시키는 것은 근거는 빈약할지 모르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미륵불을 자처하던 견훤과 궁예와의 차이점으로 <선종의 한계와 풍수지리설>을 끼워 넣는 이유가 있다.
한 시대를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가는 영웅이나 천재의 탄생은 우연임이 분명하지만,
그가 지도자로 군림하고 인정받기 위해 갖추어야할 조건들은 분명한 인과의 필연일 수밖에 없고,
그 토양은 오랜 세월의 공력, 그걸 키우고자 하는 충분한 지역적 공감, 한발 앞선 선택과 조직이다.
<화순 운주사 와불... 고려시대 대표적인 풍수비보 사찰이 바로 운주사다... 그리고 999번째, 마지막 일으켜 세우지 못한 이 와불을 또다시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다... 새로운 개혁을 주창하는 그런 선동의 의미는 그렇게 설화가 되고, 전설이 된다...>
(오랜 세월이란 구체적인 목적이 설정된 이후 대략 3대 90년 정도의 지속적인 정성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 공감이란 철저히 반대급부적이든, 친화적이든 확고한 체계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고,
어느 선도적인 사상도 한발만(!) 앞서야 되는데, 반발은 대중추수로, 두발은 폭력적인 한계를 노정한다)
아무튼, 신라의 해체, 후백제와 궁예의 등장, 그리고 왕건의 고려는 선종이란 사상적 세례를 받았고
여기에 장보고의 등장과 지역적 정치세력화는 새로운 시대 변혁의 출발점에 위치한다.
신라9산선문을 연 조사들의 대부분이 장보고의 후원을 받았고, 가장 북쪽 송도옆 해주까지 근거를 둔다.
그리고 선종의 흐름과 고려불교의 변화에서도 지역적 정서와 토양은 무시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흥 가지산 보림사... 보림사의 의미는 생각보다 크다... 신라가 만든 마지막 화엄종의 표징인 비로자나철불이 조성(850년대)된 곳이 이곳이고, 또한 그 화엄종과 대승불교를 궤멸시키는데 앞장선 동국선문(한반도의 선종)이 뿌리를 내린(보조선사 체징의 입적이 880년대) 곳이 바로 이곳 보림사다(대략 30년의 시차)... 교종인 화엄종이 완성된 시기, 곧바로 선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트렌드가 최고전성기를 완성한 시점에서 그것을 개혁하는 새로운 흐름이 잉태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종이 세력을 넓혀가는 시점에 비로자나불(화엄종의 상징)과 부도(선종의 상징)의 건립은 동시기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내가 사자산문을 쌍봉사라 말하는 이유는, 중국 선종의 총본산이 소주(항주옆) 쌍봉산 조계 보림사이기 때문이다... 그 지명이 그대로 한반도에 유입되어, 화순에 쌍봉사가 있고, 순천에는 조계산이 있고, 장흥에는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에서 한반도의 선종은 뿌리를 내리고, 조계산 송광사에서 지눌의 조계종이 탄생하고, 우리나라 부도예술의 꽃이라 불리는 철감선사 부도는 쌍봉사에 있다...>
고려불교는 대각국사 의천(1100년경)에 의해 화엄종,법상종과 선종을 교종중심으로 통합한 천태종에서
1200년대 황해도 출신 보조국사 지눌이 개창한 선종중심의 조계종으로 통합하여 현대로 이어진다.
지눌은 사굴산파 문하로 출가,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를 반포하고, 조계산 송광사에서 입적하는데,
700년대 초 남북종선을 받아들인 신행(단속사지)과 820년대 도의(진전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적 추존과 설득력을 갖춘 선종은 장보고가 정착했던 순천에서 조계종이라는 이름으로 완결된다.
뿌리와 원형만이 가질 수 있는 회귀성은 흡입력을 갖추고 미래를 여는 토양이 되는 게 아닐까?
6-3) 고려의 불교문화 - 인쇄술, 도자기, 고려불화 보다 탑이 더 좋은 이유...
그리고 진짜 마지막, 고려의 불교미술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 유물들에 대해 짧게 살펴본다.
고려의 문화를 대표하는 유산들은 어떤 게 있을까?
도자기, 인쇄술, 그리고 고려불화가 아닐까 싶다.
근데 왜 나는 이런 유산들에 정이 안 갈까?
결코 만만치 않음 비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떨어진(?) 탑이나 석불을 쫓아다닐까?
<역사부도에서...>
인류의 식생활을 개선하여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도자기의 등장,
고려는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갖추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문화국가였다.
또한 인류의 정신역량을 보존하고, 문자와 기록을 대중적으로 파급시킨 결정적 무기인 활자...
고려의 팔만대장경으로 확인되는 인쇄술과 금속활자는 그 자체만으로 세계적 문화유산임이 분명하다.
물론 앞의 여러 글에서 이 문제들은 다루었으므로 중언을 자제하겠지만, 그 유산들의 근본적 한계는
그들이 보급하고 파급시킨 내용과 보존하고자 했던 가치가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고려불화까지를 포함하면 이 유산들은 내게, 가장 자랑스러운 유물로서 지고의 위치에 있지 않다.
<해인사 장경각... 나는 아래의 이유때문이었는지, 팔만대장경을 자료사진으로 찍은 적이 없다...ㅠㅠ 1995년까지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이것을 보관한 건물 - 즉 장판경전만 지정되었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인쇄술을 인정하면서 2007년에 동시에 공인을 받았다... 아마도 문화사적 의미가 가미된 정치적 판단이었겠지만, 처음에는 조선시대의 건축기술만 인정해주고, 10여년이 지나서 고려시대의 인쇄술을 인정했다면 그건 무슨 의미???>
왜냐하면 그 유산들은 개방적이지 못하고, 진취적이지 못하고, 보편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문화적 매개도 아니었고, 일부의 특정한 계층을 위한 소비재에 불과했다.
시대를 선도하고자 하는 기폭제가 아니라, 그 시대를 반영하는 퇴화의 결과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다고 인정되는 활자와 인쇄술, 그리고 도자기가
우리에게는 충분한 파급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지만,
결국은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만들었는가가 이 모든 한계와 영향력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위봉사 석탑부재... 이 석탑을 내가 청자나 팔만대장경, 고려불화와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
높이 3m 정도의 화강석 삼층탑을 조성하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
대략 1,200~1,500만원 정도한다. 물론 땅도 있어야 하고, 기술자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만드는 이유가 분명해야하고, 남들도 만드는 이유를 공감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란 보편성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상징적 의의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기만족을 위한 사유물에 불과하고, 장식을 위한 사치일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내가 백제나 신라 등의 불교유적과 유물들을 인정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교화의 수단이든, 권위의 상징이든, 수탈의 결과이든 사유물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탑, 석등, 당간지주, 불상, 가람건축, 사원, 서원 등은 조성의도와 무관하게 공유할 수 있는 유적이다.
그러나 청자/백자 등 도자기, 그림, 글씨, 관모, 노리개 등은 부를 상징하는 개인의 사치품에 불과하다.
장롱 속에 처박히고, 술자리를 장식하며,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소장품, 사치품, 부장품은
아무나 쓸 수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오로지 만들고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의미 있는 기념품일 뿐이다.
또한 궁궐, 성 등은 통치와 전쟁의 수단일 뿐이며, 개인 집도 정신은 읽을 수 있지만 공유자산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예술적 가치의 귀천(?)과 호불호는 구분하겠지만, 문화적 가치의 경중은 바꿀 의사가 없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려청자중 하나... 이런 걸 기호품이라 부르면 너무 심한가? ^^>
내가 쫓고 싶고, 닮고 싶고, 인정하고,
우러러 보면서 자랑하고 싶은 유적과 유산들은 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야 하고,
역사적(정치/경제)으로 예술적(심미향)으로 인문적(사상/교양)으로 나를 자극하는 것들이어야 한다.
소유, 사치, 기념품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고 공감하고 모두에게 열려있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탑이나 건축공간 등을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 무거워서 내 주머니에 안 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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