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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여행...

전북답사6> 8. 조선후기 - 동학농민운동과 민간신앙...090321

 

 

 



1. 전라북도 - 돌을 다듬고, 돌로 만들어진 문화

2. 청동기 시대 - 전북지역의 고인돌 / 고인돌이라는 거석문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3. 백제시대 - 전북지역의 탑 / 돌로 만든 최초의 국가적 사회적 상징물

4. 신라시대 - 전북지역의 석등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 완성된 지역

5. 고려시대 - 후백제 지역과 보관 입불상 / 고려시대의 불상들은 왜 그렇게 무섭게 보일까?

6. 신라말, 고려시대에 대한 몇가지 첨언

   6-1) 백제의 DNA - 중국 동해연안의 신라방에는 어떤 역사적 토양이 있었을까?

   6-2) 장보고와 선종 -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태동을 만든 장본인

   6-3) 고려의 불교문화 - 인쇄술, 도자기, 고려불화 보다 탑이 더 좋은 이유...

7. 조선시대 - 전북지역의 석장승 / 돌로 만든 민초들의 꿈

8. 조선후기 - 전북지역의 민간신앙 / 보국안민, 구제창생, 후천개벽을 위한 몸부림

9. 마무리 하면서...




8. 조선후기 - 전북지역의 민간신앙 / 보국안민, 구제창생, 후천개벽을 위한 몸부림



보이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만든 이와 바라보는 이를 되새겨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나의 완성에 녹아든 사람과 그 시대의 문물과 정신은,

향기로 대화로 선택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생각과 되살릴 수없는 과거의 삶을 재구성하는 건 쉽지 않다.

애초에 시작과 끝이 불분명하며,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경계도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추적하고자 하는 조선후기 전북지역의 민간신앙이 그렇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동학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은

사실 말하고자하는 목적에 따라 자의적으로 재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단지, 그 흐름을 살펴보며 여러 가지 단초만을 되새겨 보는 수밖에 내 정보의 양은 한계가 많다.

그리고 어차피 주제가 민간신앙이니 뜬구름 잡듯이 말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도 없는 것 같고...

 

 

<민속박물관... 돌 솟대... 뜬구름 잡듯이 시작해본다... 돌로 만든 새가 하늘을 난다? ㅎㅎ> 

 

 

고려시대에 대한 첨언에서 나는 탑/건축 등과 청자/불화 등에 대한 내 생각을 가볍게 피력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철학적 사유에 대해 근간을 드러냈다고도 볼 수 있다.

소위 사유와 공유, 개인적 사치와 소통적 문화, 차별적 선호와 대중적 감성... ...

어떤 말을 붙이든, 나는 분명 시비(是非)와 긍부정(肯不定)이 아닌 경중(輕重)과 好不好를 이야기했지만,

그 이면에는 소위 유가(특히 성리학)와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적 사유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사유의 체계를 너무 일방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거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고,

지금의 한국적 사유라는게 유교와 불교라는 협소한 틀로 축소시킬 수 있겠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철학>이란 용어를 일본인들을 통해 받아들여 보편화 시킨 이후

우리들이 말하는 한국적 사유에는 유교/불교 외에 기독교와 서양의 근대철학이 분리될 수 없다는 지적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며, 내면에는 도교와 무속신앙, 최치원의 선도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심으로 천리와 인욕/사욕/물욕을 구별한 <주희>를 벗어난 건 아니다.

 

<영광 법성포... 우리에게 익숙한 들판중 하나겠지...> 


어찌됐건, 한 지역에 태어나서, 자라고, 지금도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다.

말하지 않는 탑이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건축을 통해 사람과 역사와 사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지만,

사유와 사상, 혹은 정신세계를 추적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전북지역에서 시작을 했으니, 그곳을 매개로 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마무리를 시작해 본다.

 

 <선운사 마애불... 다른 좋은 사진들이 많겠지만, 저 배꼽을 땜방한 자국이 선명해서 이걸 택했다...^^ 갑오농민운동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때 저 배꼽에 숨겨졌을거라 여겨진 비기는 늘 민중들의 꿈이 되고, 전설이 될 수 있었겠지?>




조선후기 전북지역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왕성하게 민간신앙이 득세를 한다.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생각해볼수록 엄청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당시 대표적인 민간신앙으로는 갑오(1894년)농민전쟁의 시발점이 된 동학, 3.1운동 주체중 하나인 천도교,

그리고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대종교(1909년) 등이 있으며,

후천개벽사상을 주창했던 증산교(1901년)와 일원사상에 근거한 원불교(1916년)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이중, 증산교와 원불교는 이 지역에 성지를 두고 있으며, 이들 신앙의 주활동 무대는 전북지역을 토대로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것을 간략하게나마 메모해보자는 게 이 글의 주제다.

 

<민속박물관 돌장승... 하원주장군... 통통한 볼과 두툼한 코, 꼭다문 입술과 커다랗고 동그란 눈이면, 그 당시 민중들이 무엇을 염원했을지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유교 나라 조선시대에 이지역 민중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돌장승과 무덤의 호석뿐이었다고 말한바 있다.

유교가 과연 인간적인가의 질문에 앞서 유교는 세상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점을 벗어나지 않았고,

유가의 핵심이 삶을 영위하는 인간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의 유교/유가/유학은 예학과 사대, 그리고 심성논쟁이라는 공리공론으로 빠진다.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과 그 옆에 있는 비각... 사실 이 비각에 어떤 비석이 놓여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많은 분들이 탑이란 그런 거야하고 단정하시는 선입견이 있듯이, 나에게도 조선시대의 비각과 비석에 대해 별도의 관심을 갖지 않는 선입관이 있다...ㅉㅉ 아무튼, 그래서 이런 사진은 내게 거의~~~ 없다...^^ 아무튼 신라시대에는 탑을 만들었고, 조선시대에는 이런 곳에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세웠다...> 

 

<도산서원... 이 사진도 지난번 올린...^^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절을 짓지 않고, 서원을 지었다... 다만, 조선후기와 말기까지 경상도지역에서만 사찰의 수는 증가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서원과 함께 사찰이 공존하면서 늘어난 지역은 경상도 지방이 유일하다...>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에 건축공간으로 하나가 더 새롭게 추가된 것이 있다면 "제각(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물론 종묘만이 아니라 어느지역의 선산이나 종중땅에는 크건 작건 제각이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종교와 신앙을 통해 위안을 받던 구복의 대상에 "조상숭배"가 확고한 자리를 매김한 것이다... 주자(주희) 자신이 제사를 지내면서 정리한 제사의 규범이 조선시대에는 "가례"라는 이름으로 정리되고, 인쇄되고, 보급되고, 교화되어 조선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규정하게 되었다... 현대를 이룬 가장 중요한 인류의 창작물 "인쇄술"을 우리는 그 당시 우리를 지배했던 사상의 보급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유교의 중심은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는, 인간과 인간윤리, 인간적인 삶의 영위가 분리되고

사상과 종교/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어, 인간관계의 형식(체면)과 신분이 내용과 능력을 압도한 시대다.

이런 이유로 왕(궁궐과 성, 종묘 등)과 관료(감영과 병영 등 관건축)와 유학자(서원과 정자/원림 등),

그리고 개인의 조상(무덤)을 기념하기 위한 유적과 유물 외에는 다른 게 만들어질 여지가 없었다.

단지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민속놀이가 발달하고, 더 이상 참지 못하면 죽창을 들 수밖에 없었다. 

 

<역사부도에서... 아무래도 사상 등과 관련된 글이다보니 마땅한 자료 사진이 없다... 게다가 한 개인을 쫓거나, 집안을 살펴보고, 기록을 남긴 사진들은 거의 찍은 기억이 없다...ㅠㅠ 싫어했는지, 관심이 없었는지... 아무튼, 지도로 간다...^^> 




정도전이 마스터플랜을 짜고, 이이의 몸부림으로 현실정치가 정립되고, 이황의 정신세계가 지배한 조선...

고려가 북방민족과의 관계정립을 통해 왕조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면,

조선은 정도전이 마련한 마스터플랜이 어떻게 정착되고, 비판되고, 극복되는가에 따라 정체성이 움직였다.

그 중심에 정도전과 기화가 벌인 유불논쟁이 자리한다.

 

<역사부도에서... 임진왜란 이전, 조선전기에 사림이 성장하고 지역에 근거를 두며 정착한다... 그들이 정도전을 어떻게 평가했는가와 무관하게 정도전은 조선 성리학 계통론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가 만든 사상과 정치체계는 시스템이 되어 조선사회에 고착되었다...> 

 


<공자>가 집대성한 유학은 <주공>의 모범을 추앙하는 치세의 도이지, 철학적 사유나 포괄적 사상은 아니다.

난립한 유학이 유가로 세분화된 것을 현실정치로 집대성한 <동중서>에 이르러 통치이념으로 정립된다.

도교가 자연과 하나인 인간의 자기수양=현학으로 추락할 때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고 전성기를 맞는다.

불교 비판과 선종체계를 흡수한 <주희>에 의해 유학은 이제야 철학적 체계를 갖춘 사상으로 정립된다.

특히 화엄종의 리사무애설과 선종의 불성재심중(佛性在心中)론은 주자학(성리학)과 양명학의 근간이 된다.


이런 사상적 흐름을 담지한 고려말 조선초, 한반도에서는 <정도전>과 <기화>가 유불논쟁을 벌인다.

중국중심주의와 보편주의, 입세간과 출세간주의, 윤리주의와 종교주의, 유학독존주의와 유불조화주의로

정리할 수 있는 이 논쟁을 통해 정도전의 조선건국 마스터플랜은 짜여 지고,

중국중심적 사고에, 과거시험을 통한 입신, 유학독존을 위한 배타와 윤리주의는 조선의 모든걸 결정한다.

 

<역사부도에서...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지역적 분포... 명나라 멸망이후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고증학과 서학은 조선 성리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고증학은 정통 성리학자들에게 더 철저한 중화의 꿈으로 귀결되었고, 서학은 자연과학의 문물과 함께 조선성리학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되지 못했고,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지역으로 정착하지도 못했다... 당파를 싫어했기에 당파를 만들지 못한 "아마추어리즘"에서 그들은 벗어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일어난 사회적 충격과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조선의 유교는 강화되었고,

농업발달과 인구증가, 그리고 상업의 활성화를 통한 신분제 동요가 시작된 후기에도 유교는 건재했다.

1630년대 병자호란과 함께 유입된 서학은 조선유학에 우주관, 인간관, 자연관을 흔들게 되고,

중국을 통해 전래된 서양 자연과학의 영향은 성리학의 몰락을 재촉하면서 <실학>으로 지평을 넓히지만

1800년 정조개혁이 실패한 이후, 조선의 유학은 주도성을 상실하고, 조선은 몰락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조선의 최후를 장식한 위정척사파, 개화파, 그리고 애국계몽운동까지 성리학은 지도이념으로 군림했다.

 

<강진 녹우당... 고산 윤선도의 4대조 윤효정의 생가터이며, 해남 윤씨의 종가집이다... 역사를 찾는 답사여행에서 한 인물과 개인의 사상을 읽어간다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그 삶의 행적을 통해, 그리고 그가 남긴 삶의 공간을 통해 인생과 자연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그걸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런 방법으로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솔직한 고백이겠지... 물론, 이렇게 말하면 영웅사관을 싫어하는 어설픈 민중사관의 편협한 시각이라 놀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사실 정해진 시간, 확보된 여유시간을 그렇게 소비하기 싫어했다는 게 내게 맞을지도 모르겠다...ㅉㅉ 아무튼, 답사여행의 주요 소재중 하나인 고가(古家)에 대한 답사를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이런 사진도 거의 찍지 않았고...^^ 이 사진도 90년대 중반사진이니 참 귀하게(?) 찾았다...^^ 이 사진과 이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조선의 유학자/성리학자/정주리학을 추구했던 이들의 종가집과 그들의 탐구서와 시와 서는 남아있지만, 그들의 사상은 조선을 근대사회로 개혁하지 못했다...>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인성론과 명분론에 근거를 둔 삼강오륜으로 요약되어 상하, 존비, 귀천이 구별되고,

도덕을 갖춘 양반들의 교화대상 민중은 <가례>와 <소학>을 통해 충/효/열이 지고의 가치로 장려되고,

장례풍습은 화장(불교식)에서 매장으로, 혼례풍습은 남계중심의 가족제도와 상속제도, 종법체계로 바뀌고,

신분제와 안정을 위한 성리학적 향촌질서는 통치조직에 자치조직을 접합한 향약(지역공동체)으로 정착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유교와 불교는 더 이상 민중들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되지 못했다.

 

<역사부도에서... 중국과 한국의 사서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교과서에 이렇게 적혀있으니 이건 분명한 기록이 될 수 있겠다... 중국사서와 우리나라 사서를 비교하면 76만호를 가지고 하나의 말이 만들어진다... 1519년 중종14년 조선의 인구 76만호(375만명 추정), 1491년 명나라 산둥성 77만호(675만명), 그리고 백제멸망 당시(660년) 백제의 인구 76만호... 삼국 멸망이후 한반도는 영토만 줄어든게 아니라 인구도 엄청나게 줄어든게 분명한 것 같다... 조선 태종때 경기, 충청, 전라도 인구가 5만6천호 등의 기록이 있는걸보면 한반도에 국한된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인구는 그만큼 적은게 분명하다...>   

 

<역사부도에서... 다시 위 인구와 각 지역의 비중을 살펴볼 수 있는 조선시대 사찰수의 변화 도표... 조선전기까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의 사찰수는 같거나 비슷했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특히 조선말기에 와서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사찰수가 급격히 줄어든 반면, 경상도는 오히려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지역경제의 활성화 문제도 있겠지만, 정치권력의 문제와 함께 각 지역의 사상적 변화에도 기인한게 아닐까? 오히려 후기에 조선인구는 1700년대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역사부도에서... 위 사찰 수와 조선전기의 경지면적이나 수공업 상업지표를 봐도 사찰의 수와 각 지역별 경제의 상황은 비슷한 비례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지면적중 평안도와 경상도가 전라 충청도보다 넓은 이유는 벼농사 경작지보다, 밭농사 경작지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어째든 지역별 인구의 분포는 이런 경제지표와 비례하지 않을까라는 게 내 추론이다... 굳이 각 지역별 인구비례 추측하는 이유는, 조선후기의 사상적 변화나 민중들의 삶과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몇가지만 지적한다면 ; 문화나 종교/신앙생활은 삶의 질의 문제이고, 이것은 개개인의 소비지출의 비중과 직결된다... 조선후기에 경상도에 비해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의 사찰이 급격하게 작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인구가 줄었거나, 경제적 궁핍으로 그런 신앙생활을 영위할 여유가 없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잉여가치의 축적으로 과시와 사치의 향유를 누릴 여유가 없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자연이 사찰은 문을 닫고, 새로운 공공건축이나 공공의 기념물들이 만들어질 경제적 여유가 없어졌겠지... 그런 사회경제적 변화가 정치적 사상적 선택을 달리할 수밖에 없는 근간이 되지 않았을까? 이것은 항일운동에 대한 지역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진다...> 

 

 

 

농업이 발달하고, 상품화폐-상업이 발달하고, 수취제도가 변하고, 신분제도가 변동하고, 민란이 시작된다.

그리고 늘 혼란은 각성과 성숙을 위한 선전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개혁과 파괴와 선동이 주도한다.

그 선동은 정치권력의 형태든, 사상과 이념의 형태든, 신앙의 형태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17세기 자연과학의 옷을 입고 들어온 서학이 1730년대 천주교란 이름으로 전북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선종의 영향과 미륵신앙, 그리고 풍수도참에 익숙한 이 지역은 서학의 충격까지 흡수하게 된다.

그리고 1870년대 외세의 침략까지 가세하자 <보국안민, 구제창생, 후천개벽>은 시대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그러면 이 시대의 패러다임에 조응했던 이 지역의 민중들에게 민간신앙은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먼저, 1894년을 전후한 이 시기 전북지방의 농민봉기에 대해 살펴본다.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어느 명칭도 주체가 농민임을 부인하는 이들은 없지만,

강조하는 것이 동학이냐, 반봉건 개혁이냐, 일본과의 전쟁이냐에 따라 관점과 입장이 달라진다.

내게 이름을 붙이라면 <갑오농민운동>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공식명칭인듯 싶다.

 

 <역사부도에서... 동학의 성립과 전파... 경주에서 시작하여 2대교주 최시형대에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영역을 확대하는데, 1890년대 동학 포교지역은 현재 분단된 남한의 영역과 비슷하다??? ^^> 

 


일단, 경주출신 최제우로부터 개창된 <동학의 포교>와 1894년 남접이 주도하는 갑오농민운동은 다르다.

이미 교주신원운동에 중심을 둔 충청도 일대 북접과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은 운동의 목표도 달랐다.

남접의 붕괴와 함께 포교에 집중한 <북접>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지원을 자처했고,

한일 합방과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천도교 일파는 적극적인 친일정책에 앞장서며 일진회까지 구성한다.

물론 종교 체계를 갖춘 하나의 신앙으로서 동학과 천도교를 친일로 몰아세울 의도는 없지만,

조선왕조를 개혁하려다,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전봉준의 농민군들을 동학혁명군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역사부도에서... 갑오농민운동의 현황... 주요 접전지를 경계로 남접과 북접은 나뉜다... 황토현 전투에서의 승리는 남접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금치 전투에서는 북접도 가세하여 20만 군세로 확장된다... 그리고 전봉준이 내걸었던 요구는 동학의 사상과 신앙이 아닌, 보국안민/구제창생을 위한 사회개혁을 위한 강령이었다... 전봉준의 목을 친 것은 조선왕조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생포해서, 일본군이 재판하고, 일본군이 목을 베었고,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효수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이란 용어도 유용한 것이고... 1900년대 전국 각지의 항일의병이 봉기했을때 일본군은 전라남도에 직접적으로 토벌군을 투입하여 이 지역 의병활동을 몰살 시키기까지 한다...>


 

그러면 <갑오농민운동>에 대해 당시의 유학자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관계를 형성했을까?

이시기 대표적인 유학자 매천<황현>이나 대표적인 실학자 해학<이기>는 극단적으로 이 운동에 반대했다.

동학을 서학의 변형이라 바라본 황현은 1만명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 말했고

전봉준까지 만난 이기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농민군에 대항하기까지 한다.

결국 전통 성리학자들이 선택한 것은 자결이었고, 실학자들은 애국계몽운동으로 나서는 게 최선이었다.

 

 

<역사부도에서... 경제 자주권 수호운동... 결국 이 운동은 민중들이 일으켰던 갑오농민운동이나 의병활동의 결실이 아니라, 조선유학자들이 주도하고 추진했던 그들의 운동방식이었다... 공과와 긍부정을 떠나 그들이 지켜온 사상에서 추동할 수 있었던 전략과 전술은, 그것이 합리적이었는가, 현실적이었는가를 떠나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앞서, 조선시대 각 지역별 사찰 비교도표에서도 확인되지만, 이 당시 전봉준이 주도했던 동학 남접과 이후 증산교/원불교가 활동했던 지역에서는 이 운동에 그렇게 적극적인 호응을 하지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의 생활은 더 피폐해졌는지도 모르고...>


 

인내천/하늘이 곧 사람이라며 봉건적 윤리를 버리고,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국제정세에 뛰어든 전봉준은

보편주의와 조화주의를 내세우며 구제창생, 후천개벽을 바랬던 당시의 전북지역 민중들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중국중심주의와 유학독존주의, 성리학적 윤리를 버리지 않았던 조선 유학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조선의 성리학과 전봉준의 행동은 이렇게 틀렸고 정도전의 기본 인식은 조선말기까지 개혁되지 못했다.

 



1800년대 중반에서 말에 이르는 민중들의 봉기는 김옥균의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운동으로 전환기를 맞는다.

정통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은 약간의 사회개선에 반일을 내세우며 의병으로 재조직되고,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은 실학의 북학파는 변법/시무개화파로 조직되어 친일적 정치개혁에 몰두하고,

정약용의 영향을 받은 박은식 등 양명학 계열은 유교구신론을 내세우며 계몽사상에 치중한다.

결국 성리학이든 실학이든 양명학이든 유학자들의 선택은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으로 귀결되지만,

실패한 전봉준의 농민운동은 활빈당을 통해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로 이어져 민간신앙의 근간이 된다.


유교의 인륜대강을 줄기로, 선교의 청정자수를 방법으로, 불교의 보제중생을 목적으로 만든 동학사상은

보국안민과 구제창생, 포덕천하를 내세우며 후천개벽의 중심이 되는데, 여기에 전봉준과 김개남이 있다.

관념에 치우친 교조적 예학논쟁으로 치닫는 공백을 민중들은 민간신앙인 동학, 증산교, 원불교로 메웠다.

하늘도, 땅도 뜯어고쳐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후천개벽을 내세운 증산교는 모악산에서 시작하고,

불법을 주체로 종교-인간-사회개혁을 주창한 원불교는 영광, 부안에서 시작해 익산에 성지를 두고 있다.

 

<원불교 영산성지... 동학, 원불교, 증산교를 포함해 아마도 내가 찍은 거의 유일한 사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처음에 그랬었다로만 기억했지만...ㅉㅉ 원불교나 증산교등은 전봉준이나 대종교와 달랐다... 그들은 후천개벽과 내세의 극락을 염원했지만, 그것을 추진했던 방법은 계몽운동과 농촌삶의 향상에 주력하였다... 비밀결사와 전쟁을 준비한 게 아니라, 천도교를 포함하여 그들은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영산성지 전경... 바다를 메워 논밭을 만들었다... 전봉준은 투쟁으로 토지 분작을 요구했고, 원불교는 불모지를 토지로 개간했다...> 


 

내가 유교와 불교의 흐름을 중국에서부터, 그리고 초기단계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룬 이유는 단순하다.

때로는 통치체제의 구축을 위해, 때로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의 형성을 위해,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변혁과 재구축의 동력으로 사상과 신앙과 이념이 존재하지만,

그 철학과 사유를 자신들의 정신세계로 받아들여 변화에 조응학고 문화를 만들고 시대를 선도하려면

민중들의 선택과 공감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걸 놓치는 건 비극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1400년대 불교를 흡수한 성리학은 조선을 개국시켰지만, 1800년대 이후 그들은 변화하지 않았고,

민중들은 새로운 선택을, 그들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개벽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금산사 미륵전... 이 뒤편, 금산사 주산이 모악산이다... 신라시대 진표는 이곳에서 법상종을 개창하면서 미륵신앙을 뿌리내리게 했고, 후백제시대 견훤은 이곳을 근거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새로운 세상을 약속했고, 다시 강증산은 이곳에서 증산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나 법주사에 콘크리트로 미륵불을 만들었던 김복진은 이 미륵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큰 소조입상 미륵불을 만든다... 그렇게 그렇게 1300여년은 미륵이란 신앙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잘했다 잘못했다의 평가나 이랬으면 됐을텐데란 가정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랬으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을테니까...^^)

또한 아쉬움과 안타까움, 영광과 배신의 반면교사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 영향과 흐름을 조금 더 넓고 깊고 멀리 봐야하지 않겠느냐가 나의 역사 접근 방법론이다.

대원군에 휘둘리지 않고, 김개남의 방침이 채택되었다면이란 가정은 그래서 무의미할지 모른다.


정조개혁의 실패가 조선 성리학을 해체하고 조선 사회를 몰락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었듯이

갑오농민운동의 실패는 일본제국주의의 본격적인 등장과 조선봉건사회의 본격적인 해체로 귀결된다.

성리학자들의 주도권은 1920대 일본을 통해 유입된 신사상으로 무장한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대체된다.

 

 

<일본 동경대 정문... 이 붉은 문이 상징이지? 도쿄에 동경대가 만들어지듯이 서울에는 경성제국대학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신사상과 신문물은 우리의 유교적 도교적 불교적 사고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1920년대 이후, 사회변혁의 사상은 그렇게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다...> 

 

한반도에 유입된 신문물이 서쪽에서 불어오면 기존의 체제를 강화시키고 내부의 개혁을 촉진시키지만,

가끔씩 동남쪽에서 불어온 역풍은 기존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 사회변혁으로 치닫는 급진성으로 귀결됐다.

그 시작일지 끝일지 모르는 곳으로 전라북도가 위치하며 격변의 한가운데 그 지역사람들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