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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

이태리> 피렌체에서 생각하는 르네상스...090331

 

밀라노 스케치 이후, 2년만이지?

그때 메모는 해놨는데 올리질 못했다.

그래서 조금 짜집기한 태가 나, 가볍지 못하네?

사진만 실컷 올린다 마음 먹었는데 역시 나는 그대로~~~다...ㅜㅜ

지금의 내가 썩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1.


늦은 오후에 도착한 피렌체...

 

 

 

프라다, 돌체&가바나... 쇼핑의 호사에 푹 빠진 일행에서 떨어지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을 듯싶다.

또 다른 매장을 찾아 더 많은 쇼핑 기회를 보장해주면서 내 시간을 만들든지,

한적한 카페를 찾아 지친 다리를 흔들면서 오늘의 후일담을 웃음으로 피로를 달래게 하든지...

아마도 우리 일행들은 또 다른 쇼핑의 꿈에 젖어, 편안하게 나의 일탈을 용인할지도 모른다.

 

 


따사로운 지중해 햇빛은 봄바람의 나른함을 호기심과 자유로운 기분으로 부추기며 시들지 않고 있다.

두가지 가능한 공간을 찾아 일행들을 맡기고(?) 지도 한 장만 달랑 들고서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몇 시간 후에 이쯤에서 만나자구~~~

길 잃으면 문자 보낼께~(국제 통화에서는 문자가 싸다.^^)

카메라 하나와 버틸만한 두다리, 그리고 호기심으로 설레이는 마음이 있다면, 천당/지옥이 귀찮겠어?

 

 


내가 피렌체를 고집한 이유가 뭐였지?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게 있었지.

피렌체를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거리에서 맡은 향기는 오랫동안 내 마음을 덥힐거라 굳게 믿었다.

나는 피렌체 대성당의 두오모를 보고 싶었고, 다비드 상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보다 먼거리에 위치한 피렌체를 오늘 일정의 마지막으로 결정했지.

 

 




2.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광장 뒷골목...

가죽옷의 대명사, 토스카나 州都답게 피렌체 어느 노점상들도 가죽가방과 벨트, 신발들을 팔고 있다.

나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위 명품 브랜드를 알고 있고 찾고 있다.

그걸 채근하는 어떤 욕망과 욕구도 디자인과 실용성이란 가장 합리적인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다.

우리는 그럴만한 명품 브랜드와 디자인 역량을 가지고 있을까?

 

<옛날 없어지기 전, 청계천의 노점상들처럼 그들도 노점상이 있고, 가죽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깔려 있다...>

 


로고와 이니셜이 대문짝만 하게, 혹은 잔잔하게 수놓인 제품들을 우리는 악세사리로 간직한다.

때로는 경제적 능력이 되고, 사회적 신분이 되고, 소통의 수준이 되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지.

명품 브랜드는 전통의 연륜과 생산자의 규모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 소비가치와 명성에 비례한다.

주문자의 요구와 소량 생산, 그리고 Hand made와 무관하게 이들 제품은 세계적 브랜드로 화답한다.

내 쇼핑 리스트에 오른 대부분이 나를 위한 기념이 아닌 선물로 채워졌음이 못내 아쉬운 것은

국산 제품들의 브랜드와 디자인이 저급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너무 높은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의 명성과 르네상스의 화려한 기억이 이들의 가치를 명품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세련됨, 우아함, 혁신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질기고 오래간다는 실용적 가치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우리는 디자인을 <모더니즘의 해독>쯤으로 다분히 기술적이고 회화적인 그림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의 디자인은 <제조업의 비판정신과 장인정신>의 탄탄한 실험에 근거한 걸로 보인다.

 

<어디에도 광장이 있고, 화려하거나 수수하거나, 깨끗하거나 지저분하거나, 그들은 시간을 즐기고 있고, 대화를 나누며, 편하게 앉아있다... 나는 서울에서,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에서도 이런 풍경을 보질 못한 것 같다...>

 


코뮨적 자치와 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독립욕구와 자유의지>가 깃들지 않은 창작은 모방일 뿐이다.

르네상스를 가능케 했던 인문적 토대 없이 추구하는 우리의 디자인 강국이란 꿈은

문화적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한 기형적 회화와 기술적 변형의 기계적 조합에 불과할지 모른다.

디자인에 필요한 것은 스케치/데생 잘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안목이 필요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최근 홍대가 미술 실기시험 폐지를 검토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중 하나 아닐까?


 

<좁은 도로와 작은 차, 그리고 줄지어 서있는 오토바이... 흔하게 볼 수 있는 피렌체의 뒷골목 풍경이다...> 




3.


벌써 그늘이 드리워져 가는 피렌체의 거리...

공원도 지나고, 공사판도 지나고, 놀이터에 머무는 모심의 한가로움도 여유롭게 보이질 않는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이렇게 긴 해가 있음은 이들에게 축복일까 제약일까?

점심부터 3~4시간, 그들은 오수(시에스타)를 즐긴다.

이렇게 길면서 강렬한 햇살이 있어 그들은 하루를 두 번 사는지도 모르겠다.

 

<공사장 가설 울타리... 무어라고 쓰여있지는 묻지 마시오...^^> 

 

<한가로운 모심... 이 시간에 저녁은 먹었을까? ^^> 

 

<작은 골목 사이에 보이는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


 

넓지 않은 골목, 고만 고만한 건물들 사이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웅장한 대성당...

꽃의 성모교회라는 이름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다.

우리에게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소설, 혹은 영화로 잘 알려진 피렌체 두오모가 이 건물이다.

북쪽에 세례당이 자리하고, 정문 옆에는 인간의 창조와 예술과 산업을 상징하는 85m의 종탑이,

그리고 남쪽으로 르네상스 건축을 만든 <브르넬레스키>의 거대한 돔 구조물이 있으며,

중간에 신곡을 설명하고 있는 단테가 조각된 벽과 몇개의 예배당이 있지만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광장을 안고 있는 게 아니라, 몇 개의 건축물이 연결되어 워낙 커다랗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단테가 세례를 받은 세례당 건물이다...> 

 

<정문 파사드... 그냥 느끼지 뭐...^^>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내부를 볼 수 있는 여지도 없고, 두오모에 올라갈 여유도 없다.

건축에서 흔히 아라베스카토라 부르는 하얀색과 그린마블로 불리는 초록색 대리석으로 치장된 외관,

거대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온갖 장식으로 꽉차 있지만 가볍게 보이지 않는 건 색 배합 때문일까?

흰색의 정갈함과 녹색의 차분함에, 세련되고 화려한 조각들이 저마다 위치를 지키며 편하게 자리한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준공하는 건물에, 이 흰색과 녹색 조합을 열심히 차용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아라베스카토에 비해 무늬가 없는 하얀색 고운 대리석과 그린마블보다는 진한색의 녹색 대리석...> 

 

 


 

르네상스 건축의 시작은 1300여년동안 원형을 지켜왔던 로마 판테온의 재해석에서 시작했지?

모든 신들의 전당답게 판테온 돔구조는 건축가들의 고향이 되었고, 이것을 재구축한게 브르넬레스키다.

금속 세공사였고, 미술에 원근법을 도입한 그는 판테온만한 크기 구조물을 고딕건축물 위에 얹었지.

 

<로마의 판테온... 전면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며, 내부 돔에 뚫린 구멍이 9m로 기억된다...> 

 

 

<브르넬리스키가 만든 두오모... 완전한 원형을 만들지 못하고 리브가 노출된 팔각형 돔이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모든 르네상스 건축이 지향하는 규준이 되고, 기준이 되었다...> 

 

 

신에게 다가갈 가장 순수하고 완벽한 모형은 원(圓)이었고, 그래서 당시 건축가들은 돔을 만들었다.

(베드로 대성당도, 예루살렘 성지도, 타지마할도, 인도 스투파도, 우리네 무덤도 모두가 원이었지...)

기하학은 구조를 낳고, 구조는 비례에 순응하고, 그 비례는 인체와의 조화로 해석되었지.

수평 돌림띠가 강조되고, 아치는 창이 되고, 파샤드는 조각으로 채워진 르네상스 건축이 시작한거야.

 

 

 

 

 

 

 

그래서 르네상스 건축은 조각과 기하학이 선과 면으로 해석되고 구축된 거 아닐까?

그들 건축에는 자연과의 조화도 필요 없고, 인간적 스케일의 공간구획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외부의 바람이 교류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빛으로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창문이 필요했고,

인간이 교류하고 머무를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다다를 수없는 높이와 넓이가 필요했을 뿐이야.

우리에게는 건물의 배치와 평면, 그리고 절제된 감성의 조화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들에게는 건축의 설계와 구조, 그리고 벽면을 쪼개고 다시 채울 수 있는 이성과 장식이 필요했지.

 

 

 

 

 

 


 



4.


4월임에도 긴팔이 무색한 늦은 오후에 여전히 나의 발걸음은 빠르거나 뛰거나...^^

몇 발자국 옆에 그렇게 보고 싶던 다비드상이 세워진 <베키오> 궁전과 <시뇨리아> 광장이 있다.

물론 바다의 신 넵툰 분수도 있고, 메두사도 있고, 사비나 여인의 겁탈을 형상화한 조각도 있고,

지금도 시청사로 쓰이고 있는 <오래된> 궁전 옆에는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해 <단테> 생가도 있다.

그리고 광장을 채운 많은 관광객들과 느긋하게 앉아서 봄바람을 즐기는 인간들도 구경할만 하고.

 

<베키오 궁전과 광장... 시간만 충분했다면 우피치 미술관에 들어갔을텐데 이미 문을 닫은 이후였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라 불러도 되겠지?> 

 

<겁탈당하는 사비나 여인... 크리스트를 벗어난 로마가 재해석되고 전설이 조각이 되었다... 나는 작품을 보는데, 유럽 관광객과 이탈리아인들은 작품에 의지하여 작품이 바라보는 곳을 보고 있다... 함께 공유하고 이해하고 본다는 게 무엇인지를 찬찬히 생각해 봤다...^^> 


 

내가 보는 다비드상은 미켈란젤로의 원작이 아니야.

훼손을 우려해 진품은 옮기고 다시세운 모조품이지.

그렇다고 뭐 달라질 건 없다.

본래 서 있던 곳에 똑 같은 크기로 서 있는 모습이면 사실 충분했거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모조품...>

 


골리앗을 쓰러뜨린 작은 미소년 다윗...(조각의 본래 크기는 5.45m의 거상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모두가 체념했던 싸움을 돌팔매질 한번으로 끝낸 전사...

누가 있어 그 긴장된 순간을 이렇게 자신만만한 눈빛에 담을 수 있으며,

세상의 어느 누가 승리의 영광을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정적인 형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다비드상의 명성은 조각된 형상이 아니라, 다윗이란 이름과 미켈란젤로의 파격이 전부일지 모른다.

승리의 화신은 골리앗의 목을 치켜든 환희의 표상도 아니고,

쓰러진 골리앗을 밟고 포효하는 분노의 응징도 아니며,

냉혹한 승부사의 치열함도 없고, 새롭게 유대인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전능한 권위도 없다.

작은 돌맹이를 어깨에 걸치고, 절제된 긴장으로 무장한 우아한 몸매에

오른발에 무게중심을 두고 상대를 노려보는 단호한 의지의 얼굴표정과 자신만만한 눈빛이 전부다.

 

 


돌에 생명을 조각하고,

순간의 긴장을 기다림으로 대체하며,

아름다운 근육에 단단한 의지를 심어 넣은 미켈란젤로가 시작했지만,

그 나머지 많은 것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로 채워진 다윗이란 존재의 향기가 바로 이 조각 아닐까?

그렇게 조각은 창작한 사람과 그것을 바라보고 음미하는 이들에 의해 비로서 완성되는 게 아닐까?

우리들에게 회자되는 아름다운 예술이란 생산자와 소비자의 소통의 결과이며 창작의 시작이다.

 

 


프랑스 침공으로 몰락한 메디치가를 이어 피렌체를 종교마녀사냥으로 몰아넣은 <사비올라>에 대한

(이탈리아인은 전쟁을 모른다고 프랑스인들이 말했고, 마키아벨리는 그들이 정치를 모른다고 말했지)

응징의 표상으로 다비드상은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다시 꾸며졌고, 베키오 궁전의 수호신이 되었다.

가장 침착한 자세, 가장 단호한 표정, 가장 단순한 형상으로 다비드상은 진정한 승리의 화신이 되어,

이곳과 미켈란젤로 공원에 자신의 복제품을 자랑하며 피렌체와 르네상스의 상징중 하나가 된 것이다.

 

 




5.


이미 8시가 넘은 시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일행들의 항의 전화가 문자가 쏟아진다.

나도 가장 짧게 피렌체를 걸었다구~

지금 가고 있어~ 달려서...^^

 

<달려간다고? ^^ 신발 꺽어 신고서 발가락 까닥거리는 아가씨 뒷굼치까지 보면서 갔지...ㅎㅎ>

 


어둡지 않은 오후 8시가 내게는 너무 생소하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천문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호기심을 르네상스에 묶어두고 있다.

로마에서 르네상스는 꽃을 피우지만, 그 <르네상스>를 시작한 곳이 바로 피렌체다.

만족할 줄 모르는 탐구심으로, 보고 싶고,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분출된 르네상스는

로마교황청 재정업무를 도급받아 도시국가 형태로 경제발전 토대를 갖췄던 피렌체에서 시작했지.

그리고 우리가 아는 르네상스 거장들은 거의 대부분 피렌체 사람들임도 부정할 수 없다.

 

 


신을 통해 보고, 신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성서의 언어로 말하고 쓴 시대에 인간의 발견이었고,

피(혈통)가 귀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고귀함이 노빌레를 결정하는 시대로 바뀌었고,

오스만과 교역에서 파생된 이교도에 대한 열린 생각이 고대 로마를 다시금 바라보게 한 시대이고,

종교적 한계가 분명한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 이익을 위한 자유와 독립이 견지됐고,

사물을 분간하는 예리한 마음의 작용이 호기심과 비판정신으로 재무장되었음을 의미하는 시대가

바로 르네상스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린 메두사... 아테네 여신의 신전에서 정을 통한 메두사는 아테네 여신의 저주로 괴물이 되고, 결국 그녀의 얼굴은 아테네 여신의 갑옷에 장식으로 붙고... 신의 한계를 벗어난 르네상스인들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전설을 재해석했고, 근대에 다시 이들은 정신분석학, 문화심리학이란 이름으로 또다시 재탄생한다... 그들에게는 함께 돌아갈 고향이 있었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만한 정신을 갖춘 사람과 사회적 토양을 무시할 수 없으니,

인문학의 <단테>에서, 건축의 <브루넬레스키>, 정치학의 <마키아벨리>를 비롯해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모두 피렌체 출신이지만,

그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연출자는 시대의 고귀한 정신을 읽어낸 <메디치가>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과연 메디치가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문혁명의 꽃>이라는 르네상스가 가능했을까?

그 모든 천재들만으로 과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라는, 피렌체란 이유만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정답은 그곳에 <메디치가의 코시모>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베키오 궁전 정문... 이 궁전을 만든 메디치가의 코시모 같은 군주가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가능했을까?>

 


생각해보면, 경제적 번영은 문화적 융성보다 항상 먼저였다.

르네상스를 시작하고 꽃 피웠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경제적 수혜를 받았고,

교황청 자금운영을 도맡으며 금융업이 발달했고, 직물업(공방)과 주민자치의 도시국가를 구축한다.

여기에 활판인쇄 발달과 언론자유 보장, 고대 로마 발굴과 수학/기하학 발달은 르네상스를 촉진한다.

결국 예술분야에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성과를 거둔 르네상스의 비옥한 토양과 햇빛은

프랑스, 영국, 독일(신성로마제국), 터키(오스만) 보다 40배나 큰 경제적 규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교황청 재정업무 한계에도 불구하고 <금융업이란 가장 구체적이고 집요한 현실성>이 있었고,

비록 사치품을 조달했다지만 <장인정신과 창의력으로 무장된 제조업의 비판정신>이 있었고,

분열된 이탈리아와 세속화되고 관념화된 신의 한계를 인정한 <자유/독립의지와 과학>이 있었고,

개방된 환경과 문화적 충격을 융합시킬 수 있는 고귀한 정신을 가진 <메디치가>사람들이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그 생각을 입이나 펜이나 붓이나 끌로 표현해야 비로서 시엔차가 된다는 단테의 말처럼,

르네상스인들은 토론을 하고,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건축을 남겼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할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현명한 계몽군주가 있었지.

남보다 뛰어났던 메디치가 사람들은, 남보다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르네상스를 꽃 피운 숱한 천재들을 발굴하고 후원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지배하는 힘보다 더 큰 지배력도 더 작은 지배력도 가질 수없는 존재”라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르네상스에 대한 극기(克己) 선언이 이제야 완성되었지.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치열한 비판정신과 강렬한 호기심으로 모든 것을 재구축했어.

내가 짧은 시간에 피렌체를 다 둘러볼 수 없었지만, 그때를 기억하며 채우고 싶은 것이 이것이야.

과거 로마의 영광과 그리스의 인문학을 계승하면서 <법고창신과 온고이지신>을 실천한 르네상스는

그런 의미에서 중세의 가을이라기보다 근대의 봄이 아니었을까?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꽃의 축제가 벌어지는 <플로렌티아>는 시저가 붙여준 피렌체의 옛이름이야.

보지 못하고, 채우지 못한 많은 것들이 꽃처럼 아른거리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어.

모두가 잠든 시간, 못내 아쉬운 여정임에도 12시가 넘어서야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지.

뭐, 특별히 말할 것은 없더라도 가볍게 산보나 해보자는 게 나의 의도였는데 너무 무거워졌군...^^

 

 

 


 

다시 피렌체에 간다면 나는 꽃만 볼지도 몰라...

말로는 강렬한 호기심과 차가운 비판정신으로,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자기통제와 극기를 주문하고 싶겠지만,

정작 내 마음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만 찾을 것 같다.

아무튼 지금은 봄꽃의 향기를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