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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공부

한문공부> 삼십이립, 사십불혹, 오십지천명...091007

 

 


4.


(1)

<한문공부>를 하다보면 재미있는 것들 중 하나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보는 것이다.

지금의 나이와, 현재까지의 경험을 잣대로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보고,

또 앞으로 다시 이 글귀를 대할 때 나는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 보는 재미...

그런 잡생각, 헛생각이 당장에 무슨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거울, 혹은 잣대를 가지는 것 같아 나쁘지 않다.


추석 연휴...

하루의 틈이 있어 책을 붙잡고서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내 나이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지...^^


오늘 말하려는 이 문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구절이다.

뭔가의 잣대처럼, 혹은 좌표처럼 이야기되던 그런 글귀...

오늘은 그걸 붙잡고 잠시 딴지를 한번 걸어보고 싶다.

지은이 이이화씨도 이 구절을 중시했는지, 벌써 세 번이나 인용한 문구다.




(2)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이이화의 해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틀이) 확립되었고,

마흔 살에는 헷갈리지 아니하였고,

쉰 살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았고,

예순 살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일흔 살이 되어서는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

라고 하셨다.




(3)

너무 유명한 말이지?

십오세에 지학(志學), 삼십에 이립(而立)하고, 사십에 불혹(不惑)하고,

오십에 지천명(知天命), 육십에 이순(耳順), 그리고 칠십에 종심(從心)... ...


여기에 논어를 비롯해 예기, 도연명의 시 등을 통해 나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데,

열살 충년(沖年), 이십세 약관(弱冠), 육십일세 환갑(還甲), 육십이세 진갑(進甲),

칠십을 고희(古稀), 77세를 희수(喜壽), 80세 산수(傘壽), 88세 미수(米壽),

90세 졸수(卒壽), 91세 망백(望百), 99세 백수(白壽), 100세 상수(上壽) 등이 없지 않지만,

우리, 혹은 나는 어려서부터 지학, 이립, 불혹 등등에 충분히 세뇌(?) 되어왔고,

그게 하나의 지표처럼, 잣대처럼 거론되던 너무나 익숙한 말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50, 60, 70이 되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근데, 지금 하는 일에 너무 집착하다 잠시의 틈이 벌어지면서 이 말들에 의심이 갔다.

나이 마흔이면 불혹(不惑)이라는데, 중반이 넘어서서 나는 유혹(有惑?)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과연 지금까지의 해석이 맞을까?

앞으로도 이 말들을 한번쯤, 혹은 가슴에 담을 지표로 삼을만큼 존중해야 될 말일까?


이 말을 들은지 최소 30년이 넘어서, <한문공부>란 책을 보면서,

나는 이제야 이 말을 달리 보게 되었다.

이이화씨의 해석에 동의하지 못하게 되었고,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내놓치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형들과 이 책을 들면서 <노력해보자>고 했던 원칙 중 하나가,

이이화씨 해설이나 인터넷 해석을 먼저 찾지 말고

스스로 해석해보고,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기에,

순전히 주관적으로 이 글귀를 다시 생각해 본 것이다.

 

물론, 대부분 이주일 분의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가 알고 있는 몇 구절을 가지고 매달리거나,

<좋은 생각>류의 격언 등에만 치중하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튼,

내 주관적 뒤집기(?)의 그 결론?

이제 조금씩 풀어본다.


 



(4)

하나씩 살펴볼까?

먼저 맨 처음 의문은 자왈 다음에 쓰인 오(吾)라는 말...

맹자가 공자왈 하고 시작하고 나서 쓴 첫마디는 오 - 즉 나(공자)에게서 출발한다.

왜 이 글짜를 붙였을까?


우리는 이 글을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경귀,

혹은 나이가 담아야할 일정한 수준, 혹은 경지의 잣대로 사십 불혹 등등을 인용해왔다.

어떤 경전처럼, 지침처럼, 훈시처럼...

그런데 나 오(吾)로 시작했다면, 이것은 제자들에게, 군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닐까?


아니, 이건 이이화씨의 해설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공자 자신에게 한 말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지금까지 공자 자신이 그랬다는 말을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인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혹은 그래야 할 것처럼 떠 받들고 그렇게 교육 시켜온 것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이 말이 공자가 죽기 얼마 전 70이 넘어 했던 말이라면

이건 교훈이나 훈시가 아니라 자기 고백이었음이 분명하다.

강단 있게 한평생을 살아온 노구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이제 물릴 수도 없고,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을 막바지에 이르러 자신을 회고하는???


나의 첫 번째 의심은,

이 문장은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을 압축한,

혹은 자신의 한 평생을 <일관성>을 가지고 외 길을 달려온,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변명하고, 자랑하고, 선언하고자 했던 그런 절절한 고백이었다는 점이다.


너희들이 인정하든 무관심하든, 나는 굳굿이 내 길을 이렇게 걸어왔노라고...

그래서 이제야 그 끝이 무엇인지 보이고 있다는 그런 말.

2500년이 지나 이 글을 읽은 나에게 ;

네 나이 사십에는 불혹의 경지에, 오십에는 지천명의 경지에 이르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았었음을 기억해 주라는 그런 말...

(그랬으니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하고 자족했겠지!)


근데 왜 내 어릴적 선생님들은 이 말을 무슨 좌표처럼, 교훈처럼 훈시하셨을까?

왜 그렇게 교육하고, 교육받고 나는 자라야만 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받아들였지?

여기에는 어떤 암묵적인 묵계나 혹은 <음모>는 없었을까?

후후~~~

기획자도 없는데, 잠시의 휴식속에 나의 엉뚱한 상상은 <유학>의 <공자>의 음모를 거론하고 있다.




(5)

내가 정말 엉뚱하게 음모 운운하는 이유는 그의 마지막 말 ;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때문이다.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풀어보면 ; 마음을 쫓는 것이 하고자 하는 것에 이르고, 법을 넘지 않았다...

이 말 때문이다.


하고자 하는 것이 곧 마음먹은 곳에 이르니 그야말로 천지불통이요 무위자연이다.

그런데 그 다음 댓구가 <불유구> - 법을 넘지 않는다?

그러면 공자는 평생에 학문을 깨우치고(불과 십오세에?),

뜻을 세워(늦게 철든 삼십이 되어), 흔들림없이(사십이 되어서야?), 천리까지 깨달아(오십 넘어서는),

세상의 온갖 잡소리로부터 통달하고 횡횡하는 정보에 거리낌이 없어졌는데(육십에 이르러서야)

기껏 그 경지에 올라서 <법을 넘지 않았다?>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이 전체 문구를 교훈이나 유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

지학 - 립 - 불혹 - 지천명 - 이순의 끝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 않아야 한다>라면

그는 둘 중 하나를 말하려 했을 거라고 추론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이 완성한 틀 안에서 자족했거나,

사회의 도도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었거나 벗어날 수 없음의 시인.


이건 한마디로 자위일 뿐이거나, 사회의 도도한 흐름에 체념했다는 의미다.

내가 음모 운운한 이유는 이게 싫은 거다.

자신만의 완성과 자유에 자족하거나,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인간상...

변화와 발전, 가능성과 진취가 없다면, 또한 개인의 의지에 불과하다면

이런 학문과 철학이 만들 수 있는 건 ; 가장 수동적이거나 이기적인 인격에 불과하다.


만약 유학과 유교의 궁극적 완성이 공자의 <종심소욕 불유구>이거나 였다면,

아마도 나는 가차없이 내게 남은 유학과 유교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철저히 자족적이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인간관계론이라면 나는 그걸 지워버리고 싶다.

그걸 궁극적 목적으로 체제순응적이고 제도동화적인 인격형성을 위한 포석이라면 불쾌할 것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지독히 자기만족적인 인간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면 이건 전체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한 우물을 파서 일정한 경지에 오르고, 그것으로 귀감이 되고, 하나의 잣대가 되는 거...

절대적으로 칭송받아 마땅하고, 충분히 인정하고 존중해야 함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가능성과 변화, 그리고 열림... 그 한계를 너무 명확하게 그읏다는게 나의 불만인 거다.

유학, 유교가 노장사상과 대립되는 접점이 아마 그 지점일 것이다.

진정한 자유의지와 가능성을 전제한 열린 사고...

분명, 공자와 유학은 그것이 가능한 역동성을 주체의 카테고리에서 차단할 수도 있다.





(6)

너무 흥분했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유학과 유교가 체화되고 생활화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보면서

나는 공자의 이런 류의 시스템과 분위기에서 교육받아왔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가?)


그러면 공자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면서 나의 우려를 변명해 볼까?

그는 주나라 주공의 법도를 이어받은 유일한 정통의 반열로 자신을 올려놓고,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뼈저리게 느낀 이후, 제자들을 벗삼아 자족한 사람이다(?!)

그만큼 당시 세상과 소위 군주들을 비웃었으며, 자신의 말만이 올바른 법도임을 내세웠다.


그는 완성태를 갖춘 국가의 군주가 가져야할 책무와

그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존재해야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천착한 사람이다.

문제는 당시의 사회는 일통되지 않은 혼란기였고,

그가 바라는 인간관계가 형성될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에 살았던 사람이다.

결국 모범과 후덕함에 순리와 시비로 춘추제후들이 흡수통합 될 여지가 없었던 시대 사람이다.


그는 철기의 정착과 상인의 등장으로 사회적 부가 확대재생산 되는 시대의 논리를 이끌지 못했고,

유일하게 내세웠던 주나라 시대의 영광은 당시 사람들에게 과거지향적 이상향에 불과했다.

그런 시대에 살았고,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은 사람이다.

결국 그가 발전시킨 건,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 사람들의 근본 도리에 대한 연구와

인간관계의 인간적일 수 있는 자세와 심성에 대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그가 내세웠던 보편적 가치에 의한 합리적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가 바라던 평화와 안정은 300년이 지나서야 그의 의도와 무관한 진시황의 형태로 시작된다.

결국 그는 말년에 자신의 무기력함을 느꼈던지, 아니면 자기 아집에 빠졌는지 모른다.

그 회의와 무기력, 그리고 아집에 섞여진 학(學), 립(立), 불혹(不惑), 지천명, 이순(耳順)이라면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공자 자신의 진취적이고 혁명적인 태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로 귀결된다.

꼭 가상역사 대결을 기획한 드라마 <선덕여왕>의 덕만과 미실의 논쟁처럼...


그는 혁명적 변화를 주창했지만, 절대 체제와 국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궁극적 변혁을 주장했지만, 사회의 시스템과 제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충분히 주체적이지 못했고, 충분히 물리적이지 않았고, 객관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할 수 있는 변화의 실체는 철저히 과거지향적 복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신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신화를 포장하는데 생애를 받쳤다.


결국 그는 권력지향적이었지만, 유명 강사에 불과했고,

그는 이상을 부르짖었지만, 철저히 과거지향적이었다.

그는 도와 덕을 외쳤지만, 절대군주에 대한 환상과 통치에 집착했고,

그는 학과 습을 중시했지만, 물(物)과 리(利)를 소외시켰다.

그는 보편적 가치에 의한 합리적 통치는, 불가능하기에 지향해야할 패러독스임을 도외시 했다.


선각의 예지와

긍정적 낙관,

그리고 혁명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던진 그의 고백과 독백이 유독 회의적이고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이유들이다.




(7)

몇마디 느낌을 너무 길게 풀었다.

그에 대한 딴지 걸기는 결국, 내가 받아들였던 과거 교육에 대한 회의일 뿐이니

공자의 한계나, 유학의 포석, 도덕과 바른생활 교육의 음모는 사실 무의미하다.

나의 되새김이고 반성이고, 뒤집어 보기일 뿐이니...


다시 본문으로 넘어가 70 언저리에 그가 말했던 이 말을 다시 뜯어본다.

조금은 진지하고, 공부답게...

단, 철저히 주관적으로...^^


먼저, 십유오이지우학 ;

십유오라는 말은 십오세라는 의미보다는, 십오년 동안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십오세라는 나이를 지칭하려했다면, 十五而로 이어져야 한다.(三十而, 四十而, 五十而 처럼)

그가 유(有)를 써야만 했던 이유는 ;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십년하고도 오년을 더>라고 말하려니 그렇게 길게 운을 빼지 않았을까? ^^


그리고 지와 학 사이에 우(于)라는 어조사를 쓴 것은

학문에 뜻을 두고라는 단순한 의미보다는 학에 대한 이중의 의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가 학문에 뜻을 둔다는 의미만 사용했다면 습(習)을 댓구로 써야할지도 모른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처럼, 志于學 → 習學)

또한 학(學)은 학문, 배우다의 뜻이지만, 가르치다는 말에서 연연했음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즉, 그는 학을 학문이라는 의미와 가르치다는 이중의 의미를 다 쓰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지(志)는 마음과 뜻이란 개념도 있지만, 적다 기록하다는 훈도 있다.


결국 공자가 스스로 十五而習學이 아니라 十有五而志于學라고 쓴 이유는 ;

나는 <장장 십년 하고도 오년간을 연구하고 배웠다>는 뜻이 아닐까?

 

삼십이립 ;

삼십에 이르러 스스로 섰다.

뭐가?

십오년 동안의 연구결과가...

(이런 면에서 삼십을 이립(而立)이라 부른 건 틀렸다고 생각된다. 그냥 립(立)이 맞지?)


공자는 삼십에 이르러서야 지금의 혹세무민한 나라를 과거 주나라의 이상적 형태로 되돌릴

지배자의 통치철학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정리할 수 있었다~는 말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때쯤 보따리를 싸매고, 돌아다니기 시작하지?



(8)

사십불혹 ;

그리고 사십이 되어서야 흔들림이 없다, 유혹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다.

뭘?

부국강병과 호시탐탐 전쟁과 무력으로 통치하려는 시대에,

주나라의 예법과 통치시스템을 굳건히 세우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삼십에 세운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


오십에 지천명 ;

하늘의 뜻, 혹은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별 탈 없을 거 같은데,

세우고(삼십) 의심하지 않았는데(사십), 그게 자신의 운명임을 알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더 큰 세상의 천리와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았다는 소리일까?

 

이 나이의 공자는 작은 고을에서 벼슬을 했지만, 결국 버림을 받고 스스로 귀향하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의 사상을 의심한 게 아니라, 현실에서의 무기력을 더 뼈저리게 느꼈을지 모른다.

내가, 오십 지천명을 천리에 통달했다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고 받아들이는 이유다.

우리들은 공자의 말이라면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육십에 이순 ;

귀가 순해진다... 이건 음미해볼만 하다.

거친 말을 들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천하의 온갖 잡소리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흘린다? 이렇게 말하면 불혹과 비슷하고,

아무튼 불혹+지천명의 경지라면 뭔가 부드러워지고 스스로에게 순해졌다는 의미임은 분명한데,

이렇게 말하면 뒤에서 말하는 하고자 하는 욕(欲)이 아직 배제되지 않았고...


혹, 자신의 뜻이 너무 완고하여 더 이상 들을 게 없다는 말은 아닐까?

이건 오만인데?

달관, 용서, 관용, 포용, 순리, 합리... 분명한 건 어떤 개념을 떠올리더라도,

그 자신이 부드러워졌거나, 너무나 완고해졌다는 말임이 분명하다.

 

 

이미 명성을 쌓고 수많은 제자와 어울려 덕과 예를 논하고 군자의 도를 논하던 시기...

더 이상 열정과 체념을 뒤로하고, 스스로 자족하고 자신만만했을 그가 그려진다.





(9)

다시 칠십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

이건 앞에서 이미 살펴봤는데

(이이화)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

(나) 마음을 쫓는 것이 하고자 하는 것에 이르고, 법을 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주요하게 생각했던 문제는 구(矩)라는 단어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 이 말은 ①법 ②곱자, 곡척 즉 잣대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직사각형을 구형(矩形), 방형(方形)이라 한다)

그러면 구라는 개념이 법,도,덕, 심지어 인의예지를 포괄하는 상위의 개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흔적은 논어 - 맹자 어디에도 없다(내가 무식해서 그런가?).

게다가 그는 왜 그 당시에 횡횡했을, 또는 자신이 숱하게 말하던

법(法)과 도(道)와 덕(德),  그리고 예(禮) 라는 단어를 내팽게치고 구(矩)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음~~~

이 구(矩)자는 충분히 생각해봐야 될 거 같은데,

그는 자신이 바라보는 틀에서 거슬림이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앞서 말한 오만, 혹은 자족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보편적인 개념의  법(法), 도(道), 덕(德) 예(禮)가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구(矩)를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법도와 법리,

혹은 자신이 자신 잣대에서 매우 자유로웠다는 말이다 - 욕구와 마음이 일체된 상태이니까 !

심지어 그는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내세우는 오만함까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마음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세상의 법과 규준틀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말이 되니까 ! ^^


아무튼 이 구(矩)자 하나 때문에 이런 저런 고민이 시작됐는데, 결론은 여전히 마찬가지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지독한 고집,

꺾기기는 싫으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는,

스스로를 포용할 수 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와 넉넉함까지 느껴지는 단어...

자신만의 법, 혹은 틀, 혹은 잣대.

말년의 공자는 그래서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10)

이제 정리해 볼까?

 

 

예전의,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게 받아들여졌던 이 문구에 대한 기억은 이렇다 ;

십오세의 나이에 해야할 것은 공부밖에 없다.

공자님이 말했듯이, 여러분도 공자처럼 살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배움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좋은 대학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무기는 오로지 공부뿐이다!

아마도 한문선생님, 국어 선생님, 또는 도덕 선생님은 이렇게 나를 세뇌시켰다...^^


그리고 삼십이 되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홀러 서야하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질 충분한 준비를 이루어야 한다.

군대 갔다 와서 취직할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만하게 들린다.


사십...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하는 사십의 나이(이건 링컨의 말인데???)가 되면,

어떤 유혹이나 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불혹의 경지(이건 분명 경지다!)에 이르고,

최소 오십이 되면 지천명 - 즉 세상사 돌아가는 법리와 시스템에 통달해야만 한다.

사십과 오십이 되어서 가져야만 할 주체적 조건에 대해 나는 충분히 동감했고 세뇌되었다.


그리고 육십... 이건 잘 모르겠고, 칠십... 이건 도대체 기억에 없다.

너무 멀었거나, 사십까지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초조감에 그 이후를 고민할 여지가 없었겠지.

아무튼 중고등학교 다니던 십대때를 제외하면 이 말에 대해 그누구도 친절하게 설명한 이가 없었다.

충분히 체화되었거나, 모두가 인정하는 걸 의심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 말은 나이를 먹어가는 단계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제 사십이 넘어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해 본다 ;

공자왈,

나는 십오년 동안 배우고 연구하였고,

삼십에 섰고,

사십에 의심하지 않았으며,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에 순해졌고,

칠십에 마음을 쫓는 것이 하고자 하는 것에 이르고, 법을 넘지 않았다.


이걸 공자의 생애에 맞추어 살짝 바꾸면?

나는 장장 십년하고도 오년을 더 투자하여, 배우고 연구했다.

삼십에 이르러서야 내 스스로 마차를 끌고 세상으로 나아갔고,

사십이 넘어 숱한 굴욕에도 내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오십이 되어서 나는 내 운명, 내 한계를 알았다.

육십이 되어 들려오는 온갖 비난과 아쉬움에도 나와 남들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칠십이 되어서야 내 자신에 만족하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나이를 먹어갈까?

그리고 그때 나 자신을 어떻게 돌아다볼까?

자만, 회의, 무기력, 자족, 관용, 관조, 포용, 달관, 열정, 변화...


분명하게 느끼는 건,

공자의 이 말에는 그 모든 게 너그럽게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여유롭게...

자신의 한 평생을, 십년을 한 단어로 표현할만큼 굵직하고 간결하며 담백하게 말 할 정도로...

 

 

나는 공자라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일관성 있게 정립하고,

흐트러짐이 없이 사상을 채워갔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랬으니, 이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칠십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편하고 여유롭고 만족스럽게, 한마디로 후회없이 살았음을 자랑할 만 하다고 받아들인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좁은 안목과 짧은 생각으로

주체에 매몰되고, 주관에 집착하여, 자족적이고 자기완결성만 강조하여,

가능성과 변화, 그리고 열린사고를 배제시킬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나에게 국한된 말일 수 있으나, 한번쯤 곰곰이 되새겨 봐야할 대목이다.

그런 연후에 나는 나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경로를 어떻게 안배하는지 검토해보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