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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공부

한문공부>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시작하면서 - 진리란??? 1008

 

1. 신영복 선생의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시작하면서...

 

이이화의 <한문공부>가 끝나고 신영복의 <강의>로 한문공부를 재개했다.

간간이 한문공부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고전독해에 대한 틀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열이형과 나의 강력한 추천(? 두사람이면 2/3의 동의다...^^)으로 선택된 교재.

공자를 비롯해 노자/장자, 묵가나 법가, 그리고 주역과 시경까지 섭렵할 수 있다면

최상의 선택이 아닐까 내심 기대했는데, 첫날에 이어 <강의>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결론을 너무 단순하게 몰고 가거나 개론 수준을 넘지 않는 거 아니야?

아직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지는 않았지만, 감옥에서의 사색 - 꼭 그만한 수준인거 같은데?

음~~~ 빵형이 책에 대한 평가와 전반적인 내용을 들고 나오니 살짝 난감해진다.

전체적으로는 가볍고 평이하지만, 다시 보니까 튀거나 비약들이 부분부분 숨어있는데?

헉~~~ 열이형도 약간의 동조와 함께 어수선한 부분들을 지적하고 나섰다.

나는, 내가 보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들을 얻어서인지 편하고 좋았던 같은데?!

일단 방어 모드...

 

하긴 이책 구성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강의를 편집하면서 나타난 한계가 아닐까?

얼굴을 보면서 말로 강의했던 것과, 교재나 텍스트로서 완결성을 갖추는 건 다른 문제니까...

그리고 동양 고전을 접하는 과정에서 전반적인 시대배경과 각 학파들의 관점을 강조하다보니...

그렇지만 동서양의 극단적 대립과 현실적인 대중노선이란 명제로 너무 단순화 시켜버린 거 아니야?

구두 강의에 따르는 설명과 부언들이 편집과정에서 걸러지면서 충돌이 일어난 건 아닐까?

다양한 평가와 함께 편집과 준비과정에서의 한계에 대한 이런저런 모색들이 일어난다.

 

첫 구성이 시경과 주역인데다, 그 게 수백년동안 모아진 자료였고 다양한 관점을 내포했는데

여기에서 시대적 배경과 동양철학의 근본적 관점을 끌어내는 게 한계 아니었을까?

문구나 행간의 의미에서 서양문화와 대립되는 동양인의 심성을 부각시키려는 게 애초부터 무리였고,

시경은 문학적 수준에서, 그리고 주역은 현실을 접하는 태도와 선택을 정리했을 뿐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동양고전에 대한 개론일 뿐인 책에서 하나하나를 깊이 있게 따지기엔 한계가 많잖아.

 

근데, 한문공부 - 한문을 공부하기에는 너무 어렵더라~

(한문공부 텍스트로는 부적절하다는 빵형의 지적에 대략난감...^^)

하긴 앞뒤 문구 다 빠지고, 신영복씨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발췌된 부분을 보고

우리들이 한시나, 몇줄의 문장을 완전히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지?

그리고 잣구에 대한 직역과, 의역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잖아...

논어나 맹자로 넘어가면 조금 더 재미있어질라나?

휴우~~~ 그나마 텍스트를 바꾸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략의 평가가 끝난다.

 

 

 

2. 진리란 무엇인가? 존재 하는가? 그리고 필요한가?

 

서론, 시경에 대한 부분의 스터디가 끝난 지금, 지금까지 이야기들을 정리해본다.

먼저 서론,

신영복 선생은 서론에서 자신의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은 식민지 의식의 반성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변화를 모색해야할 시점에서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차이와 경쟁보다는 관계와 중용을 강조한다.

비종교적 인문주의에서 도덕적 구조와 현실주의적 참여, 그리고 자연주의에 기초한 인간주의를 표방하고.

 

여기서 토론 되었던 것이, 과연 동서양의 철학과 문화를 그렇게 대비시키거나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점.

너무 극단적이거나 단순한 구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적 미래상이 설정될 수 있는가?

또 하나는 동서양의 교류와 협력관계에서 이미 소화되고 이해된 가치들은 어디에 존재 하는가?

서양모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라는 것 자체가 동양적 관점의 확립에서 가능하거나 찾아진다면

이것은 근대와 탈근대 논의의 재판이 아닌가?

(근대가 전제되어야만 탈근대가 성립된다는 한계와, 이것을 벗어나려는 해체-무정부주의의 반복)

 

서양철학에 대비되는 동양철학과 그속에서 앞으로 나아가야할 가치로서 동양철학이 존재하나?

신영복 선생이 관계론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서양철학을 존재론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존재란 의미가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설정될 수 있는가? 오히려 그 반대는 아닌가?

현대에 와서 차이의 강조나 인문적 성찰을 중시한다고 도덕적 중용이 관계론으로 정리될 수 있는가?

등등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동서양 철학에 대한 논의는 철학 전반에 대한 논의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논의는 자연스럽게 <큰 이야기>에 대한 존재여부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그 큰 이야기를 법칙이나 사상, 관념으로 이름지은다면, 그것을 <진리>라 부를 것인가가 제기되었다.

여기서도 두가지의 문제가 파생된다. 하나는 과연 진리란 존재할 수 있는가?

또 하나는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진정성>의 문제와 진리의 상관관계다.

소위 진정성이란 수사가 진리에 의탁하고 있는가와, 진리는 진정성으로 포장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한문공부에서 강의로, 신영복의 동서양 철학에 대한 개괄에서 진리에 대한 문제까지 부각된 것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참과 거짓, 혹은 옳고 그름에 대한 시시비비가 현재의 사상적 공백,

또는 과거의 과잉된 사상이나 이성에서 올바른 좌표와 나침반을 찾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로 직결된다.

또한 신자유주의나 여타의 정치경제학적 논의들에서 조금 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지향해야할 미래를 지금의 자리에서 되짚어보고 방향을 감지하기 위한 현실적 고민의 반성이기도 했다.

 

 

 

3. 진리도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나는 여기에서 진리란 결국 영향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이야기했다.

일례로 자유, 평등, 박애, 평화, 사랑 등 어떤 가치도 역사적으로, 또는 개인과 국가의 테두리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구현될 수도 없고, 정의된 바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자의 주장이 그 시대를 포괄한다고 정의한 것은 후대의 우리들이지,

당대의 사람들과 지식인들, 혹은 정치/군사/문화 권력자를 관통했던 결정적인 사상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우리역사를 관통했던 사상적 모색을 종합해보면 개인적 심성과 사회시스템으로 나눌 수 있고,

개인적 심성의 관점에서는 기독교(유대교와 카톨릭, 기독교 포함), 이슬람, 불교, 힌두교 등이 있고,

사회 시스템의 관점에서는 공자의 유교와 맑스의 자본주의/사회주의로 구분해 생각할 수 있는데,

자유, 평등, 박애, 평화, 사랑 등의 가치와 관념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상호충돌하기도 한다.

그리고 충돌의 원인은 가치와 관념이 달라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실현방식이 배타적이었기 때문이다.

 

유일신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이슬람을 죄악시하며,

범신론적 관념론의 체계를 갖춘 힌두교도 종교분쟁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플라톤 - 칸트 - 헤겔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의 뿌리에서 파생된 자본-사회주의의 대립은

인류에 가장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형태로 자신들의 실현방식을 고집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이러한 모든 가치관은 흔히 가로축의 시대라는 기원전 2,500년전부터 현대까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가치들을 고집하면서 권력의 형태만 다를뿐, 그 배타성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우리들의 출발은 진리란 개념이 전제해야할 가치관과 입장은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진리란 개념과 가치관을 숙성시키고 있는가도 자문해 봐야한다.

왜냐하면 이식된 관념은 경직되기 마련이며, 폭압적 수단을 강제하기 때문에 우리다운 코드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찬찬히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식민지 경험과 위로부터의 근대화란 스펙트럼까지 가지고 있다.

때문에 역사적 관점과 한계가 관점마다 공유되지 못하고, 분단까지 겹쳐있어 다양성을 훼손당했다.

아직 공유되지 못한 진리에 대한 가치관을 논하지도 못한체 우리들은 진정성과 시비를 남발하고 있다.

 

아무튼 진리란 유일사상 혹은 유일신처럼 <유일>을 표방할 수 있는가? 너무 독패적 아닌가?가 문제다.

또한 진리란 가치, 혹은 원칙은 시대와 개인을 뛰어넘는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완결성이 있을까?

그리고 진리란 비판, 혹은 동기인가? 과정인가? 아니면 결과, 혹은 이상인가 하는 점을 답해야만 한다.

하나 더 나간다면 진리란 소통, 희망, 충만을 보장하는 구체성과 현실적인 경로를 가질 수 있는가 등등...

 

이런 질문과 회의를 충족시키지 못한 제반 논의들 속에서 진정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현재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진리란 결국 파급되는 영향력과 개인의 선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즉 시대를 읽는 권력자들의 필요에 의해서 포장된 가치들이 영향력을 갖추는가 못하는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4. 진리의 허상과 진실...

 

현대를 주도하는 미국적 가치나 영미 금융자본의 자유, 그리고 유럽식 민주라는 것도 패권적이고,

MB정권의 자유나, DJ의 분배, 그리고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도 결국 조건과 한계를 갖는 선택 아닌가?

시시비비의 문제나, 호불호의 문제로 기획자나 비판자의 의도와 진정성을 논한다는 게 힘이 있을까?

단지 삶의 질은 향상되는가, 지속가능한 발전인가, 안정된 공존은 가능한가로 판가름되지 않을까?

장기적인 안목,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아름다운 선택이란 것도 결국은 취향과 한계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진리에 접근하다보면, 백과사전파처럼 지식의 나열에 그치거나 양비론에 빠지기 쉽고,

계몽주의자처럼 과학이란 이름으로 논리와 증명에 목숨을 걸어 비판적 목적론에 빠지기도 쉽고,

포스트 모더니즘, 해체주의처럼 다양성과 차이의 늪에 빠져 무정부주의적인 회의론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입장들은 진리는 있다는 전제와 당신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의 질문에서 시작하며,

인간의 주체성과 과학적 합리성이란 명백한 목적의식과 객관적 보편성 획득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직까지 진리란 개념을 완성하거나 그 개념의 권위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고 있다.

단지 지식에 유용한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가만을 물어볼 뿐, 진리란 잣대는 통일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양의 경우를 보더라도 백수십년의 중세에 대한 반성과 진리에 대한 과학적 모색이 있었음에도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수백만명의 인명이 학살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기력하게 파괴되었다.

또한 우리를 비롯해 동양의 경우나, 역사적 범위를 넓히고 좁히더라도 진리가 진리로 작용한 적은 없다.

 

자연과학의 가설-실험-검증이란 훌륭한 체계에 대한 통일된 인식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진과 후진, 문명과 야만이란 어떤 카테고리로 인간사회를 구분하더라도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차별화된 문명과, 홀로코스트 인종청소를 변명하는 인종-민족-지역주의와

중동 등에서 자행되는 조직화된 테러와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비대칭적 테러에서 선악의 저울은 무의미하다.

결국 정치적 사상과 종교적 신념, 경제적 이해에서 집단과 개인은 철저히 개체화된 진리를 강조할 뿐이다.

 

또한 진리에 대한 국가나 개개인의 모색을 주체성과 합리성이란 전제로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소극적인 범위인, 허위에 반대해야 한다는 자세와 평가의 방법에 대해서만 인정하고 있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은 평가와 대중적 합의로 변질되었고, 그것은 권력과 서열만 추구하고 있다.

한나라가 잘 되는가 못되는가는 신용평가기관의 신용도에 의해 좌우되며, 개인도 서열을 벗어나지 못한다.

옳고 그름은 투표와 다수결의 합의로 왜곡되었고, 서열은 경쟁만 부추기며 부와 권위로 대체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진리는 존재하는가? 진리란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은 왜 필요할까?

우리들이 합의했다고 생각하는 평가의 방법과 잣대는 시대의 변화와 경험을 통해 계속 수정되고 있으며,

그 평가의 기준마저 객관적 권위보다는 정치적/외교적/군사적/문화적/경제적 권력에 의해 좌우 되는데...

그것이 국가의 문제나 조직, 그리고 개인의 문제라 할지라도 이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게 현실인데,

진리가 현실적이지 못하고, 조직적 파급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공허한 이념이나 가치로 전락할 뿐인데...

 

복잡하게 꼬리에 꼬리를 문 논의와 토론을 내가 풀어놓은 이유는 분명하다.

결국 현재의 권력은 <진리란 권위를 필요로 하며, 권위를 세우기 위해 역사를 인용한다는 점>

그리고 <역사속에의 권위는 객관적 실체보다는 현재적으로 재해석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역사를 개인적 혹은 집단적 경험이나 논리적 완결성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개인이나 집단,

개개인의 사랑이나 행복, 집단 혹은 가정이나 국가의 안정과 평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잣대라 생각한다.

 

공자의 유교는 당대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거나 덕과 인의 왕도정치를 실현시키지 못했다.

예수의 기독교도 당대의 노예제를 해방시킨 것도 아니고 로마를 타락에서 구원한 것도 아니었다.

어수선한 중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공자의 의도는 300여년후 진시황에 의해 체계만 완성되었고,

예수의 사랑과 구원이 보편적 가치라는 주장은 300여년후 니케아공회에서 계보만 공인 받았을 뿐이다.

즉, 심하게 말하면 그들의 사상과 활동은 당대에 찻잔 속의 돌풍에 불과했을지도 모르며, 완성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진리란 권위는 권력의 옷을 입고, 후대에 의해 보완 재창조 과정을 거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5. 우리들에게 진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오히려 현재의 우리가 진리를 말하려면 고조선에서부터 조선까지 내려온 한국철학의 연속성과

근대에서 해방-분단, 그리고 경제성장과 민주화과정에서의 드러난 역사인식과 평가에 대한 합의와 공유,

그리고 금융독점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설명되는 현대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진리란 자유, 평등, 박애, 평화, 사랑 등의 개인적, 집단적 가치와 신념을 포괄하는 것이고,

합의된 진리란 권위는 불필요한 소모와 불안정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길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경쟁과 차별에 의한 황폐화를 막기 위해 우리는 진리를 찾는게 아닌가?

 

이러면서 대학 다닐때의 커리큘럼과 정서의 차이(나와 형들이 다닌 대학은 다르다)도 이야기 됐고,

그리고 MB정권의 미국적 가치의 우위성 강조와 영미식 신자유주의도 신념과 정책선택의 문제지,

진리란 관점에서 그들에게 시시비비와 진정성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문일 수 있다는 점과

결국 정치적 영향력과 조직에 의한 신념의 대결을 통해 해소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도 지적되었다.

또한 신영복의 <강의>라는 책에서, 동양적 가치와 인문학적 깊이를 진리추구로 대체시키는 것도 비약이며,

동양고전을 대하는 <독법>을 진리추구를 위한 <모색>으로 전환시키는데 따르는 오해도 지적 되었다.

 

우리들의 한문공부라는 것이, 텍스트의 이해와 해석을 전제로 하지만

하나의 매개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입장과 자세를 가다듬자는 것이니 폭이 넓을 수밖에 없고,

진리를 논하고, 진리를 따지는 것도 결국은 <관점과 입장>의 문제이니만큼 이야기 틀은 한정적이다.

물론 빵형은 문법을 통한 해석을 강조하고, 열이형은 저자의 의도를, 나는 텍스트의 이해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반성과 현재의 분석, 미래의 분석이란 틀은 모든 대화를 관통하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진리>에 대한 우리들의 논의는 사실 명백한 결론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논의과정을 내식으로 정리한다면 진리란 존재하는가? 그것은 시대적 조건/한계에 따라 변화한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허위에 반대되는 개념이나 사실의 총합이란 소극적인 개념을 떠나

자유, 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질 향상 등의 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진리는 시시비비를 통해 공유될 수 있는가? 신념의 선택/대결이며 결국 영향력의 문제이다.

결국 진리는 역사적 권위를 필요로 하며, 그 출발점은 관점과 입장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내가 안은 과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텍스트를 선별하는 것이었다.

한문공부, 신영복의 강의에서 진리를 이야기하고, 다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학습이 필요할까? ^^

시론에 대한 토론과정에서 사실 위의 이야기는 다시 재론되고 심화되었다.

특히 신영복의 허위의식과 진정성, 진실과 사실, 과거와 미래, 낭만과 자유에서 더 심해졌지.

특히 굴원과 어부의 문답시에서는 현실을 살아가는 자세와 태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고...

반복되는 이야기가 많겠지만, 다음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