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도 가끔 외국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아직도 책꽂이에 남아있는 중고등학생용 참고서들을 꺼내 보곤 한다.
처음 몇장을 넘기면 줄도 열심히 긋고 메모/낙서도 많이 되어 있어,
누가 이 부분만 본다면 정말 열심히 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각오와 열성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뒤로 넘어갈수록 책은 깨끗해지고, 믿음은 의구심으로, 혹시나는 역시나로 바뀌게 되지...^^
이런 해묵은 경험들이 누적되어 있어선지 지금도 책을 들 때면 늘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다 읽지 않았을 때 느껴야 하는 의무감과 피로감...
자연 끝내지 못할 것이면 시작도 안 하는 게 좋다는 묘한 경계심과 찜찜함이 있어 자꾸 호승심은 줄어든다.
물론 이런 감정은 비단 새로운 책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적용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인연이나 새로운 일이나, 그리고 새로운 모험 등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 같은 거 말이다.
오늘 내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책이나 인연에 대한 그 어떤 특별한 고민이 있어서가 아니다.
형들과의 한문공부 인연으로, 틈틈이 읽어 보겠다 마음먹었던 <맹자>라는 책을 열면서 갑자기
나와 같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한 예기와 선견, 혹은 상술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논어>나 <도덕경>처럼 선경지명이 있던 선인들은 가장 중요한 말을 맨 처음하지 않았을까 하는
발견(?), 혹은 의구심, 또는 감탄을 맹자를 보면서 하고 있다는 말이다.
2.
<맹자>라는 책을 열면 맨 처음 시작되는 것이 梁(양)惠王(혜왕)章(장)句(구) 上(상)편이다.
이익을 원하는 양나라의 혜왕에게 맹자는 어찌 仁義(인의)를 말하지 않고 利(리)를 탐하느냐고 반문한다. 왕이 이익만을 말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의리를 뒤로 미루면 뺏고 빼앗김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시작하는 양혜왕장구 상편은 어진(仁) 정치를 하려면 仁義(인의)의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 시작은 백성(民)들이 기아와 궁핍을 벗어나 부모형제를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제사지냄에 유감이 없이 안정된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지속적인 생산(恒産(항산), 制民之産(제민지산))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걸 위해 맹자는 농사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거나,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 우애는 교육으로 가르치고,
할 수 없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며,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가를 구별하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칼로 죽이는 것이나, 몽둥이로 죽이는 것이나,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은 모두가 똑같다며,
백성이 늘어나는 것이 정치를 잘하는 것이며, 전쟁은 뒷날 반드시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또한 왕의 호화스러운 삶은 백성들의 혐오감만 키울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모르면 왕도의 실현은 어렵고,
사람을 얻지 못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떠난 증거이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왕의 욕심을 버리라 경고한다.
결국 천하를 손에 넣으려면 易地思之(역지사지)와 惻隱(측은)지심으로 仁義(인의)실현이 王道(왕도)라 말한다.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요약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맹자의 첫장인 양혜왕장구 상하편을 보면
당대와 후대 유학에서의 왕도가 爲民(위민)과 왕과 백성을 父子관계로 대체한다는 한계를 전제해야 하지만,
춘추시대를 살았던 공자의 仁(인)을 중시한 사상이,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다양하게 분화되었으며,
전쟁을 통한 영토확장과 백성을 늘리려는 양나라의 혜왕뿐만아니라 당대를 주도했던 패권/패도 정치에 맞서
맹자는 백성을 무서워 할 줄 아는 인의의 정치로 새로운 왕도를 설파하려했음을 구구절절 느낄 수 있다.
정작 우리가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체, 緣木求魚(연목구어), 五十步 百步(오십보 백보), 仁者無敵(인자무적) 등
교훈적 경구와 性善說(성선설)과 仁義禮智(인의예지)의 四端(사단)론으로만 맹자를 기억하고 있지만 말이다.
3.
<맹자>라는 책을 열면서 의아했던 것은 왜 나는 지금까지 양혜왕장구가 첫 구절인지 몰랐는가 하는 것과,
도대체 맹자를 편찬하면서 왜 하필이면 이 장을 맨 첫부분에 구성해야만 했었는가라는 의구심이었다.
고리타분한 동양고전이라 생각했지만 사서삼경은 중고등학생때 교과서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익히 들었고,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과 신영복 선생의 <강의>나 도올 김용옥 등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내용을 접했지만, 막상 내 손으로 맹자를 열면서 한자 한자 읽을수록 나는 중고등학생 때 영어/수학 참고서가 떠 올랐다.
책을 떼기는 힘들어도 (자의든 타의든) 시작하기는 어렵지 않고, 나 같이 우매한 백성들을 수천년 동안 보아온 선인들은 사람들의 습성과 심리에도 정통했을테니 자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맨처음에 올려 놓치 않았을까 하는 생각...(분명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초라하게도 끝내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또 그런 선견과 상술이 곁들어져 요즘에도 신문이나 책이나 모든 선전선동은 머리말을 강조한다는 생각까지... 그렇다면 이 맹자를 편찬한 이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맹자사상의 핵심은 바로 양혜왕장구편이라고??
생각해보면 동양고전 중 가장 핵심이며 정수로 떠오르는 논어와 도덕경도 마찬가지다.
노자의 <도덕경>을 다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즉 도로 시작한다는 것과,
공자의 사상을 정리한 자사의 <논어>역시,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몰라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말은
그 내용이 논어의 첫 구절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이렇게 저렇게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즉 동양고전과 동양사상에 생각이 늘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첫구절이 그 내용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나는 지금까지 맹자의 사상에서 지속적인 생산(恒産(항산), 制民之産(제민지산))에 대해 깊이 있게 안내하고 논의한 텍스트를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맹자의 사상에 대해 <맹자>라는 책을 통해 깊이 있게 탐구 한 것이 아니라, 맹자를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심성론을 심화시킨 사상가나,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공자의 제자 맹자는, 인을 사회화된 개념인 의로 발전시켰다는 해석, 그리고 유학을 사회의 본질로서 인간관계의 지속성에 천착한 사상적 흐름으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설사 이것이 큰 흐름이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내용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게 맹자의 첫 페이지인 양혜왕장구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4.
요즘 MB정부의 집권 4년차를 돌아보는 뉴스가 횡행하고 있다.
돈봉투 사건, 선관위 디도스 공격, 내곡동 사저논란, 친인척 측근과 고위직 공무원들의 비리, 회전문 인사,
수출 대기업의 호황과 골목상권 몰락,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실업, 물가상승과 양극화 심화, 부자감세,
G20 정상회의, 무역 1조달러 시대와 FTA 찬반, UAE 원전 수주, 4대강 사업과 세종시 논란, 연평도 포격...
가만히 맹자의 양혜왕장구편을 생각해 본다.
MB가 대통령이 되면서 내걸었던 공약들을 다시 살펴본다.
747... 매년 7% 성장과 10년내 4만달러 국민소득과 7위의 경제강국, 코스피 지수 5000달성,
청년 실업률은 절반으로 줄이고, 연간 60만개 일자리를 늘리며, 여성 일자리도 30만개씩 늘리겠다...
한미동맹을 회복하고 북한이 말만 잘듣는다면 그들의 국민소득까지 올려놓겠다는 말까지...
다시 맹자의 양혜왕장구편을 생각해보면 전부 이익에 대한 문제들이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면 우리역시 경제를 잘 안다고 생각해서 뽑아준 대통령이 바로 이명박이다.
오렌지가 오뤤쥐로 바뀐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전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후를 걱정하기도 벅찬데, 당장 지금의 일자리가 언제까지 보장될지도 불분명해졌다.
수출도 잘 되고, 대기업은 현금을 주체하지 못한다는데, 우리는 물가상승에 늘어나는 가계빚에 쪼들리고 있다.
이쯤이면 이익, 利(이)를 밝힐수록, 그것도 최고 권력자와 위정자가 밝힐수록 현재 우리의 삶이 궁핍해지고, 미래의 불안함에 이어 모두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느껴야 하는 세태가 정착됨을 느끼고 있다.
역으로, 얼마전 서울시장 선거에서 신드룸을 일으켰던 안철수씨를 생각하면 상식이 주요한 이슈가 되었고,
한나라당인지 새누리당인지, 보수든 민주든 진보든 모두가 복지, 즉 공정함과 正義(정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MB정부 스스로 우리만큼 깨끗한 정권도 없었고,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 말했듯이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주요한 이슈는 의로움, 정의, 공정함, 상식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의 정부가 보수든 진보든, 그 성격보다 주요한 가치는 이가 아니라 의였어야함을 이제 느끼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맹자가 말하려했던 왕, 즉 지금의 위정자와 권력자가 利(이)만 추구했을 때의 폐단은 보았지만
아직까지 진짜 맹자가 말하려했던 産(산)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인구의 증가인지, 생산량의 증가인지, 요즘 말로 하면 지속성장이 가능한 경제시스템인지 말이다.
양혜왕장구에는 왕도의 기본으로서의 産(산)이 어떻게 사회구성원들에게 인지되는지만 나와 있으니까...
^^ 그렇게 되면 결국 이것도 마르크스가 말했던 베토벤 음악을 들으며 낚시질하는 노동자의 삶인가?
(맹자의 양혜왕장구 하편에는 與民樂(여민락), 음악을 좋아하고, 모두가 함께 즐겨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아무튼 맹자를 읽으면서 양나라의 혜왕과 우리의 이명박 대통령이 자꾸 오버랩 되는데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시간이 된다면 이제는 맹자를 인간의 본성이나 심성, 그리고 사단칠정이란 틀을 벗어나 읽어보고 싶다.
그 폐해에 대해서는 숱한 역사속에서 충분히 보고 있다 생각하니 그 해결책도 그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그래야 2천5백년 이상을 지속해온 유학의 근본적 생명력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맹자의 선견을 보면서, 그리고 그 편자가 양혜왕장구를 왜 맨 첫구절에 강조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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