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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공부

한문공부> 종심소욕 불유구 - 한계와 자유에 대한 소고...091127

 

 

 

1.


형들을 만난지는 한달쯤인데, <한문공부> 책을 펼친 건 달포가 더 된 거 같다.

모델 오픈 한답시고 내가 두어번 빵구 내고,

열이형은 년말결산에 따른 실적보고 때문에 바빴고,

빵형은 출판사 문제와 강의 때문에 바빴던 거 같고,

아무튼 일산쪽에서 하루가 연기된 <한문공부>가 다시 시작됐다.


간만에 만나, 엊그제 다녀온 장례식장 이야기에 아이들(?) 이야기,

예전 선후배들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두서없이 섞였지만,

역시 이 시간은 편하다.

어느 이야기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재미없는 게 없다.

지금 이 순간, 형들과의 이야기에만은 내 모든 걸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만에 만나 책을 건너뛰자니 내가 지난번 잔뜩 고민했던 <공자님 말씀>이 아쉬워

결국 식사를 끝내자마자 말을 꺼냈다.

딱 한마디 ;

“ 왜 칠십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에서 구(矩)자를 써야만 했을까?

납득되지 않는다 ”는 말로 이야기가 시작돼서 결국 끝났다.


결국 문제제기를 한 내가 파이터(?)가 되고,

어떤 문제에서든 무게중심을 벗어나지 않는 빵형은 기존 통설의 수호자(?)가 되고,

문제핵심을 끄집어내는데서 예리함으로 무장된 열이형이 관전자 겸 중재자가 되었다.

생각보다 문제는 복잡하고 길고, 그리고 넓었지만...




2.


나는 이미 나의 의견을 지난번 글에서 나름대로 피력했지만,

왜 법, 도, 덕, 예란 단어를 피하고 구란 단어 혹은 개념을 사용했을까?

거기에는 시대의 한계와 인간적 조응이라는 수동적 의미는 없었을까?

그리고 공자의 생애와 유학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태생적 한계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결국 나의 문제제기는 토론(?) 과정에서 크게 세 개로 분류될 수 있었다.

첫째는 문맥상 구(矩)가 맞는가? 맞다면 무슨 의미인가?

둘째는 그 말을 했던 공자의 자기반성 또는 회고의 의미는 成 혹은 聖일까? 탄(嘆)일까?

셋째는 유학의 전반적 체계와 흐름에서 공자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먼저, 빵형의 답변 ;

유구가 맞는 거 아니냐 ! (여기서부터는 세 명의 논의가 섞여있다)

불혹, 지천명, 이순, 불유구에는

그만큼 (공자의 40대에) 유혹에 약했거나, 유혹의 폐해를 알았기에 불혹이 강조되었고,

(50에 이르러서야) 이제야(미네르바 부엉이처럼) 지천명을 알게 되었고,

결국 이순의 경지에 오른 60까지도 유구, 즉 테두리를 넘나들었는데,

겨우 70에 와서야 유구(踰矩)를 그쳤다(불(不))는 의미로 봐야하지 않을까?가

먼저 이야기 되었다.


(만약, 례 등이 쓰여야 했다면 순(順) 같이 따르다는 순례(順禮)로 바뀌어야 하고,

도는 통도(通道) - 도에 이르다,

법은 준법(遵法) - 법을 지키다(그런데 이 말이 2,500년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덕은 적덕(積德) - 덕을 쌓다, 라고 할 수 있듯이

테두리는 넘고 안 넘고의 문제이기에 유(踰)자에 맞는 것은 구(矩)지, 도나 덕, 례, 법은 아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경지일지는 모르겠으나 공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도나 덕, 례, 법 같은 실체화 되고 학습 가능한 <그 어떤 문구나 지침, 규정된 성경>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거나 느끼고 있는 어떤 <틀>을 <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즉 공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완성태는 <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지 말아야 할 무엇>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모세가 가져온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이었고,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인 고조선의 8개조(법) 역시 했을 때의 인과응보가 기록된 것들이다.

이것은 내가 느꼈던 형들과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카테고리였다.)

그래서 첫 번째 문제 ; 문맥상 불유구는 다른 말로 대체될 이유가 없고, 틀리지 않은 개념이다.




3.


그렇다면, 혹은 그러기에 불유구(不踰矩)를 쓴 것은 <주관적 탄(歎)>이지

<객관적인 성(成)>은 아니지 않는가가 나의 두 번째 문제제기...

(여기서 탄(歎)은 단지 한탄이나 탄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자자전에서 탄(歎)은 칭찬하다, 노래하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여기서 파생되는 또 다른 논란은, 결국 구(矩)란 전적으로 주관적인 의미냐? 였다.


여기에 대한 빵형의 대응 논리 ;

이미 50에 <지천명>을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주관적이라고 끌어내리는 것은 비약 아닌가?

열이형의 중재와 정리 ;

그러면 50에 지천명하고, 70에 종심소욕 불유구했다면 두사람의 논지를

<객관적 법리의 내재화>와 <주관적 확신의 보편화>의 대립으로 봐야하는가?

나의 반대논리 ;

그렇다면 <공자의 객관적 법칙의 주관화>가 과연 당대에 사회적 영향력을 충분히 갖추었는가?

다시, 빵형의 대응논리 ;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와 마르크스 시대에 그들의 역할이 결(結)이어야 하는가? 시(始)인가?

(^^ 복잡하지?)


사실 객관적 천명의 내재화와 주관적 확신을 천명이라 단언하는 것의 비교는 미묘한 차이다.

그래서 진리와 객관적 법칙의 주관적 사유화는 엄연한 구별이 있고

그것의 시비와 경중은 당대의 영향력이나 파급력으로 재단 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공자의 문제제기 이후 최소 300여년이 지난 한 대에 이르러 통일된 시스템을 갖기에

엄밀히 말하면 결(結)과 종(終)이 아니라 시(始)이거나 초(初)일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은 ; 과연 공자는 천명을 분명히 알았는가?의 문제다.

빵형의 지적처럼 공자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

조문도(朝聞道)면 석사(夕死)라도 가의(可矣)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도를 듣는다 또는 깨닫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기쁘겠는가의 의미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까지도 도를 듣지 못했으며, 알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


공자는 분명히 그 당시의 상황에서

도, 덕, 례, 법에 대해 <물었지(問)> <답하지(解說)> 않았다 !

(이것 역시 첫 번째 문제와 연결되어 공자의 고백에서 우리가 캐취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초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결고리이며, 이 방식의 문제에서 우리 이야기는 한 없이 넓어져 버렸다)


우선 공자의 <논어>는

플라톤에 의해 정리된 소크라테스의 <대화론>처럼 물음을 통해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었지,

헤겔의 <논리학>처럼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의 자기완결적인 철학적 사유가 아니었다.

즉,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관계>에 대해서 묻고 사유를 강요 했을 뿐,

그 관계를 <국가와 사회, 인간과 개인>에 대해 <완결된 틀>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후대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나 맹자, 동중서 등에 의해 선별된 집적일 수 있다.


또한 당대의 공자에게 <주관화된 객관적 법리의 내재화>가 혁명적 폭발성을 지녔는가의 물음은,

예수에게 왜 <하느님의 말씀이 거한 세상을 지금 이순간 보여주지 못하는가>라는

유대교 제사장들이나, 로마의 통치자, 일반 민중들의 물음과 무엇이 다른가로 이어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에게 <당신이 말한 communism이 왜 아직 실현되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하긴 나는, 예수와 마르크스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물을만큼 현명하지 못하다)


그런 이유로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다음에 종심소욕 불유구가 나오는 말은,

주관적 한탄으로 격하될 이유가 없고, 최적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와 객관적 법리에 대해 묻고 사유를 강요한 공자에게

완성과 완결의 형태로서 시스템을 도안하고 설계하지 않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비약이 아닌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위안과 반추의 형식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공자의 위대함을 범인의 수준으로 격하시킬 근거는 아니어야 한다가 두 번째 정리...




4.


재작년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현 이대통령은 조어(造語) 즉 wording에서 성공했다.

잃어버린 십년, 선진화, 경제대통령 등등등...

공자도 분명 그 춘추전국시대에 혼란을 수습할 wording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정점은 <주나라의 이상화>였지 않았을까?


나의 문제제기에 대한 빵형의 지적처럼 ;

<주나라의 이상화>는 보편적으로(이건 객관적이란 의미와 다르다) 통용되던 가치관이었고,

공자의 고심은 형식(形式)만 남고 내용(內容)은 사라진 국가통치와 시스템, 그리고 인간적 가치를

어떻게 설득하고 깨닫게 할 것인가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그 당시에 통용되던 가치관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가장 빠르고 파워풀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즉, 공자의 <주나라 이상화>는 <과거지향적 보수>가 아니라 <미래지향적 개선>이었다.


(이것은 <원시적 공산제>의 이상형을 <과학적 사회주의>로 각색한 마르크스와 꼭 닮았다. 

이렇게 말하면 공자는 <문답 형식>을 갖춘데서는 동시대의 소크라테스와 닮았고,

<경험적 DNA를 미래지향적 가치로 승화>시킨데서는 먼 후대의 마르크스와 닮았다???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는 방법>에서는 예수와 닮았다...^^)


조금 더 들어간다면 우리들이 묻고 답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자가 말한 완성태로서의 <주나라의 이상화은 정말 인간적인 것인가>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공자의 지천명이란 과연 인식의 개념으로 수사화 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이 문제들은 불유구에서 시작되었지만, 세사람의 주관적 이유로 무게중심이 변이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애초의 문제제기를 벗어나는 카테고리임이 분명하다.

단지, 이걸 정리하는 이유는 이런 말들이 그때, 그 당시 우리 머릿속에 잔존했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주나라 이후, 가장 이론화된 주나라와 비슷한 <형식>을 갖춘 나라를 <조선>이라고 꼽는다.

그러나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과 내용이 충분히 인간적인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있다.

또한 공자가 말한 <지천명이란 객관적 법칙>이 과연 <형식과 내용>의 통일로

인간사회에 구현된 적이 있는가를 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비단 유교적 통치체계를 수천년간 지속했던 동양사회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반석으로 발전한 서양사회를 포괄하여

<형식과 내용>이 일체된 사회가 과연 존재했었는가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과연 시대의 선구자들이란 사람들은 무엇을 채우고, 개선하고, 변화시켰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충분히 인간적이고 이상적이고 자기완결적으로 성장해왔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이점은 <로마인 이야기를 정리했던 시오노 나나미의 문제제기>와 일치하는 지점이다)


이상형, 혹은 이상향을 만들고 그 형식과 내용을 통일시키려 했던 수많은 이들이

실제 역할은 무엇이었고, 그들의 방식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하여 세상은 진정 <지속 가능한 발전태>를 갖추어 갔는가?

그런 연후에 그들은 그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면서 뭐라고 회고했을까?


내가 공자의 종심소욕 불유구에서 느낀 <주관적 한계>에 대해 빵형과의 토론 결과는 ;

오만한 자존감을 부정할 이유도 없지만, 그의 말을 화석화된 성역으로 단정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는 <물었을 뿐이지, 결코 답한 바가 없다. 다만 채워나갔을 뿐이다>

아마도 마르크스의 대답처럼, 공자는 스스로 공맹의 유학자임을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5.


나는 형들과 공자의 한평생을 정리한 몇 마디 말에서

<천명 혹은 객관적 법칙> <내용과 형식의 통일> 그리고 <초심과 반어법>을 끌어냈다.

여기에 <한계와 자유, 그리고 우리 혹은 내가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인식과 경험>에 대해 메모하고 있고...


이미 눈치를 첸 분들도 있겠지만 내용과 형식의 일체화는 모든 전선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모든 사상적 틀을 갖춘 논리에서 이론화된 형식이 강조되면 <교조주의>가 되고,

경험적 현실이 내용으로 이론화되면 <경험주의>가 되며,

이 중간에 서면 <수정주의 혹은 수정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합리적 유연성>을

객관적으로 포장하여 즐겨 쓰는 개념이 <혁명적 혹은 주체적 관점>이 된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고, 정당에서도 마찬가지고, 철학적 사유에서도 마찬가지며,

학문적 성찰의 어떤 논의도 이런 대립과 절충, 그리고 정반합을 벗어나지 않는다.


구약성서의 형식화에 반기를 든 예수의 행적, 즉 <신약>은 분명히 혁명적이고 주체적이다.

또한 <구약과 신약을 기초>로 하지만 이것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킨 게 <쿠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한 이상향>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초심>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는 점이다.


주나라의 법통이 깨지고, 그 형식을 다양하게 해석하던 시대의 공자는

그 시대를 이끌던 모든 통치자와 민초들에게 <주나라를 유지했던 내용>을 물었다.

도란 무엇인지, 예란 무엇인지, 덕이란 무엇인지, 법이란 무엇인지...

그 단초와 결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물었던 공자는 어쩌면 그 답을 못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공자처럼 성인의 반열에 이르지 못한 후대인들은 그것을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고)


공자가 물었던 유교적 통치는 <동중서>에 의해 현실 정치법도로 형식화 되고,

다시 <주희>에 의해 예법과 수양의 옷을 껴입고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그러면 과연 <동중서, 주희, 이황, 이이> 등은 지천명의 경지에서 불유구를 선언했을까?

공자에서 이황과 이이까지 건 2,00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묵언 이후 2,300여년이 지나 헤겔은 <주체>를 선언했지만,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지만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은 인간을 살육하고 정당화했다.


결국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들,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듣고자 하는

<동양적 내용의 도와 서양적 형식의 법>은 <완성되지 않았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나 동중서처럼 끊임없이 정립시키려 노력하고

주희나 루터처럼 끊임없이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선언을 반복했을 뿐이다.

그리고 정약용이나 레닌처럼 그 완결과 초심의 중간태를 <인식론>으로 재편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불가지론>이나 <경험론> 또는 <빅뱅론>이나 <복잡계론>을 들먹일 필요까진 없지만,

어쩌면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지천명>이나 서양철학사를 관통하는 <객관적 법칙 혹은 진리>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말로 설명되지 않은 <경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은 글자로 개념화된 어떤 정의와 법도가 아닌 순간적인 <fill>일 수도 있다?


사실 형들과의 이야기는 너무 많은 개념들이 난무하였고, 끊어짐과 이어짐이 불분명한 면도 있지만

그때 불거졌던 문제인식의 단초들은 분명 어느 한방향과 일관성을 벗어나진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생각의 정리와 논의의 집적은 별개인데다 상호간섭과 충돌 교류가 뒤섞였지만 분명한 것은,

지천명을 비롯하여 이립, 이순, 불혹, 불유구 등은 <인식과 문자로 전달 가능한 그 무엇>이 아니라

<계량화 되고 통계화 되어 절대수치로 환산 가능한 성적표>가 아니라 <fill>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6.


이제 논의를 정리해야 되지?

물론 형들과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합의나 명징한 결론을 도출해낸 것은 아니다.

빵형은 예수와 소크라테스, 정약용을 동원했고, 나는 철학사와 동중서, 주희, 조선 등을 끄집어냈다.

이제는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 불유구에서 느끼는 <한계와 자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것은 신영복선생이 어느 글에선가에서 말하신 ;

우리들이 가르치고 배우고 깨닫는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확인 혹은 객관화란 말처럼,

나는 종심소욕 불유구에서 내가 늘 생각하고 있는 <한계와 자유>의 상관관계를 결부 짓는다.

먼저 한계에 대해 말하려면 진리 혹은 천명의 실체가 무엇인가? 인지 가능한 절대가치인가?

그렇다면 진리와 천명을 안다면 우리들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답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면, 진리와 천명은 ;

fill을 끌어낼 수 있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반어법과 핵심을 쫓는 방법 속에 존재하지

어떤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실체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진리는 무엇, 천명은 무엇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닐까?


또는 그 시대에 하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일지도 모르고,

노자의 물(상선약수(上善若水)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처럼 실체가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유토피아, 이상향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지향되는 것이지,

그것이 이미 실존하거나 완성되었다면 인간들은 그것을 유토피아라 부르지 않는다.


결국, 내가 알고자 하는 진리나 천명의 실체가 그러하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한계 속에서의 자유>는 <경험적으로 축적된 인식의 완결>이 아닐까?

종심소욕 불유구를 한계속의 자유란 개념으로 해석하는 나에게

시대와 인식, 혹은 경험의 한계는 해탈, 체념, 관조의 문제가 아니라

passion으로 무장한 조화와 승화 = 자유의 문제인 듯 싶다.


(이렇게 말하면 학교 다닐 때 무심코 지나쳤던 돌맹이에 새겨진 문구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의 재판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델포이 신전 앞 기둥에 새겨진 하나의 문장에 불과한 금석문(金石文)이기도 했다)


공자의 종심소욕 불유구에서 구(矩)는

객관적인 법리의 내재화일 수도 있고, 주관적으로 해석된 보편적 가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느끼고 말하고 싶었던 천명을 반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시대를 밝힐 불빛을 찾았고, 키워드를 찾았으며, 그것을 채워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칠십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주관적인 무기력한 자기고백으로 격하될 이유가 없다 !



그렇게 짧지 않은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서,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나의 오래된 <한계와 자유>에 대한 고민도 문자로 정리가 되는 거 같다.

게다가 진리와 천명의 실체(?)까지...^^

비약과 전이, 그리고 은유의 재단과 침소봉대의 우가 난무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유쾌한 메모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형들과 대화에서는 많이 배운다...^^


아무튼 여전히 나 같은 범인들은 오늘처럼 fill에서 깨달음을 찾고,

공자 같은 천재들은 초심을 노래한다.

나는 다듬어진 칼을 찾고 있고, 공자는 다듬는 방법을 물어온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하나를 더 첨부한다 ; 자유를 위해서는 passion이 더 많이많이 필요하다는.

마침, 아침에 일어나면서 신의 영역을 잊고 있는 나를 생각했는데,

내가 무시하고 있었던 <신의 영역>이란, 이런 건가 싶기도 하다...^^